제 708화
708. 일취월장 2
3왕후를 연기하는 윤주연이 거칠게 덕배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윤주연의 눈빛에는 살기가 어려 있고 그녀의 말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어도 피부가 따끔따끔하고 위축될 정도로 적의가 리얼하게 전해진다.
하지만 덕배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윤주연의 대사가 끝날 때까지 일절 흔들리지 않던 덕배는 자기 차례가 되어서야 찬찬히 자신만의 연기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덕배는 진짜 ‘김법민’이 된 것처럼 얼굴에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윤주연을 바라보는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했고 넓은 어깨는 당당하게 쫙 펴져 있었다.
상대가 어떤 악담을 하고 협박을 하더라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듯 말이다.
현재 덕배가 연기하는 김법민 역은 탐라국으로 가는 사신단의 총책임자.
그리고 신라 최고 귀족 가문의 수장 김춘추의 장자였다.
즉 아무리 상대가 왕족이라고 한들 그리 겁을 먹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다.
대본이 닳을 정도로 캐릭터를 분석하고 또 분석한 덕배는 ‘김법민’이란 캐릭터를 누구보다 완벽히 파악하여 윤주연의 연기에 맞서기 시작했다.
『왕후께서는 제가 두려우십니까?』
묵직한 저음인 덕배의 목소리가 현장을 울린다.
순간 방금까지 현장을 지배했던 윤주연이 펼친 격정적인 연기의 여운이 단숨에 사라져 버린다.
덕배는 대사 한마디로 현장의 분위기를 단번에 바꾼 것이다.
그동안 덕배는 스태프들에게 키 크고 액션 잘하는 액션 배우로 평가받았지만 이 순간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의 눈빛이 변하는 게 보인다.
액션에 이어 연기력까지 갖춘 배우로.
생각지도 못한 덕배의 연기력에 윤주연은 더욱 격정적인 연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고함을 치고 몸을 들썩이며 죽일 듯이 대사를 쏟아 내면서.
그러나 덕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된 듯.
그러자 윤주연은 조급한 마음에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대사가 많은 이 씬에서 덕배를 무너뜨리려고 말이다.
『왕후인 내 앞에서 그런 오만한 태도라니! 네놈이 정녕 죽고 싶어 실성이라도 한 것이더냐?』
윤주연의 압박이 갈수록 거세진다.
하지만 이미 배역에 깊이 몰입한 덕배는 점점 더 안정적으로 연기를 이어 갔다.
『제가 죽을 자리는 여기가 아닌 듯합니다만?』
『뭐라?』
『이 사신단의 행렬을 이끄는 총책임자가 저라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거기다 호위를 위해 데려온 화랑들 대부분이 심한 부상을 당한 상황. 현재로서는 왕후 마마를 계림으로 무사히 모실 사람은 이 몸뿐입니다. 그러니 무사히 계림으로 돌아가 도화 공주를 다시 만나시려면······ 성질 좀 죽이는 게 어떠하신지요?』
덕배와 윤주연의 눈동자가 공중에서 파바박 하고 불꽃이 튄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연기 대결에 모두가 숨을 죽인다.
그런데 서로 마주 보던 중 윤주연이 눈길을 피해 버렸다.
덕배가 처음으로 살의(殺意)를 뿜어낸 탓이었다.
윤주연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한 게 부끄러웠는지 다시 이를 꽉 깨물며 외친다.
『건방진 놈! 감히 누굴 내려 보는 것이냐!』
그런데 그때였다.
윤주연이 옆에 놓인 책자를 집어 들곤 덕배의 얼굴로 집어 던져 버렸다.
원래는 덕배의 앞에다가 집어 던져야 했지만 흥분한 탓에 힘이 잔뜩 들어간 거다.
나와 몇몇 스태프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덕배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책자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팍!
덕배의 얼굴을 친 책자의 묶음 줄이 터지며 수십 장의 책장이 허공에 흩날린다.
팔락팔락.
당장 NG를 불러도 무방하지만 덕배는 여전히 웃으며 연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자 드디어 윤주연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덕배의 멘탈을 흔들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린 거다.
『너 넌······.』
윤주연의 멘탈이 흔들렸는지 딕션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덕배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선 자기 대사를 흔들림 없이 이어갔다.
『다음번엔 책이 아닌 칼을 쓰시지요. 제가 알기로 3왕후께서는 비도술(飛刀術)이 전문이신 걸로 압니다만?』
『네 네가 그걸 어떻게······.』
3왕후가 누군가를 암살할 정도의 비도술을 갖고 있다는 건 왕궁에서도 극소수 사람만 아는 비밀 중의 비밀.
그러나 덕배는 ‘김법민’이 되어 3왕후의 비밀을 지적하며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완전히 기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윤주연은 어떻게든 덕배를 흔들어 보려고 중간중간 격렬한 말투와 돌발 애드리브를 시도했다.
그러나 덕배는 단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연기를 이어 나갔다.
나의 배우.
나의 덕배.
많이 컸다.
이젠 윤주연도 쉽게 밟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 * *
“컷~~!”
우렁찬 오복희 PD의 목소리가 세트장을 울린다.
그 순간 윤주연과 덕배가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두 사람 중 진땀을 흘리는 건 다름 아닌 윤주연이었다.
윤주연은 덕배를 몰아붙이기 위해 목청이 나가라 소리 질렀고 온몸을 쥐어짜서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리얼한 두 사람의 연기에 스태프들이 잔뜩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아직은 아무도 소리를 내진 못하고 있다.
오복희 PD가 헤드폰을 끼고선 조금 전 촬영한 긴 템포의 씬을 다시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대사량이 많던 씬이다 보니 검토에도 시간이 걸린다.
잠시 후.
오복희 PD가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두 손을 모아 동그라미를 그린다.
“오케이~”
그때였다.
“와~~”
스태프들이 참았던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이어서 윤주연과 덕배를 향해 환호성을 보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역시 주연 씨.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하더니 실력 어디 안 가시네요~”
“윤주연 배우님 연기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덕배도 잘했어. 그치?”
“당연하지. 솔직히 이 장면은 윤주현 씨를 살리는 장면이었는데 어떻게 된 게 신인이 조금도 안 밀리냐? 와~ 진짜 덕배. 장난 아닌데?”
“나 같으면 주연 씨 눈빛만 봐도 바로 지렸을 텐데······ 괜히 덕배~ 덕배 하는 게 아니라니까?”
윤주연의 열연으로 시작된 칭찬들이 결국 덕배의 연기를 칭찬하며 마무리가 되고 있다.
그러자 덕배는 스태프들을 향해 연신 고개 숙이며 감사를 표하기 시작했다.
다만 내 곁에 선 유진이가 덕배를 가리키며 오두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오빠. 우리 덕배! 짱이지 않아요? 쟤가 언제 저렇게 컸지?”
최지영 배우와 함께 덕배의 연기 선생님이기도 한 유진이는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팔짝 뛰기 시작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덕배와는 달리 윤주연의 표정이 굳어 있다.
쏟아지는 칭찬에 감사하다고는 말하지만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신인 배우의 뚝심에 평정심을 잃고 상당히 애를 써서 연기했기 때문이다.
결국 윤주연은 잠깐 쉬고 오겠다며 양성택 실장의 부축을 받아 사라져 버린다.
오복희 PD는 덕배에게 사과도 하지 않고 사라진 윤주연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덕배를 불러 칭찬을 늘어놓았다.
“우리 덕배 연기는 갈수록 단단해지네. 아~주 보기 좋아.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부탁하자?”
“예. PD님!”
“그래. 오늘 진짜 고생 많았어.”
그렇게 윤주연이 덕배를 짓밟으려고 한 행동은 덕배의 가치만 더욱 올려줘 버렸다.
* * *
다행히 덕배는 책이 펼쳐지면서 얼굴에 닿아 다치지 않았다.
작게 안도한 순간 연출팀 안지윤이 찾아와서 말한다.
“덕배 씨. 이따가 8시 촬영 4시로 바뀌었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앞 타임으로 바뀔 거예요. 또 내일부터는 큐시트가 나오는 대로 바로 드릴게요.”
“아 예.”
“아 그리고 대기 의자도 감독님 근처 쪽에 놓아두세요. 언제든 감독님이 부르실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따가 유진 씨랑 투 샷 찍어야 하니까 준비해 주시고요.”
원래 7시간이나 뒤에 다음 씬을 촬영할 예정이었는데 그보다 촬영 시간이 훌쩍 앞당겨져 버렸다.
덕배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형. 오늘이야 그렇다고 쳐도 왜 갑자기 앞으로도 촬영 순서를 앞당겨주죠?”
“이제 널 주요 배역으로 대해 주는 거네.”
최근 덕배의 인기도 늘고 있고 연기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그러자 제작팀이 덕배를 중요한 배우로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근데 촬영 시간이 달라지면 좋은 거라도 있어요?”
“아무래도 좋은 타임에 촬영 시간을 잡아야 배우 컨디션뿐 아니라 촬영팀 컨디션도 쌩쌩하잖아. 그럴 때 촬영해야 좋은 장면이 잘 나와. 아무튼 스태프들이 배려해 주는 거니까 고맙게 받아들여.”
촬영 현장 돌아가는 걸 보면 새벽부터 밤까지 비는 시간이 없다.
그만큼 매주 2화 분량의 드라마 제작 현장은 살벌한 일정으로 돌아간다.
시즌제나 사전 제작제를 도입한 다른 작품들은 조금 여유가 생기지만 <화란전>처럼 50부작이 넘어가고 방송국이 직접 제작하는 이런 대형 드라마는 여전히 옛날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제작진들은 주연 배우나 주요 배역 주요 씬들은 최대한 편한 시간을 배정해 준다.
<화란전>을 이끌어가는 주요 배역들이 가장 컨디션이 좋은 상태에서 촬영을 할 수 있도록.
그러자 덕배가 조심스레 묻는다.
“그러면 저 때문에 다른 배우가 더 많이 기다리는 거 아니에요?”
“그건 맞아.”
덕배가 당황한다.
“형. 그러면 가서 시간 바꿔 줄 필요 없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덕배의 마음 씀씀이가 기특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
“다들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이러는 거야. 내가 말했지? 배역은 목숨을 걸고 따는 거고 드라마 한 편의 성공에는 많은 사람의 생계가 걸려 있다고. 최고의 결과물을 뽑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방법이니까 넌 최고의 연기를 하는 것만 생각해.”
잠시 망설이던 덕배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 네가 걱정하는 건 매니저인 내가 대신 처리할 문제니까.”
덕배 때문에 촬영 시간이 변경되어서 피해받는 배우를 달래는 건 매니저인 내 일이다.
덕배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밝아진다.
“그러면 대본 보고 있어. 난 좀 다녀올게.”
“예~”
“아 그리고 이따가 <전지적 관찰 시점> 촬영도 해야 하니까 염두에 두고 있어.”
“예. 아까 박 PD님 오셔서 인사했어요.”
이미 <전지적 관찰 시점>의 박은찬 PD가 현장에 오자마자 덕배를 찾아왔단다.
“그래. 알았어. 그럼 대본 연습하고 있어. 스태프들 좀 만나고 올게.”
“예.”
난 덕배를 두고 촬영 시간이 밀린 배우를 확인하기 위해 스태프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스태프에게 물어보니 촬영 시간이 바뀐 배우가 나와도 인연이 있는 배우였다.
TK 엔터 소속의 오성연.
그녀는 <신의 이름으로> 촬영 때 유진이의 이름을 실검 1위로 만들어준 여배우였다.
당시 그녀는 단역 알바였는데 HK 그룹의 차녀 홍현주가 뿌린 커피를 뒤집어쓰고도 침착하게 연기를 이어 갔던 배우였다.
유진이는 그때 오성연에게 L.M.L 브랜드의 스커트를 선물했고 감격한 오성연은 자신의 스타그램에 유진이의 선행을 알렸었다.
덕분에 유진이는 화제의 중심에 놓였었고.
난 그녀에 대한 고마움뿐 아니라 그녀가 차후 ‘눈물의 여왕’이란 평가를 들으며 드라마를 연이어 성공시키는 인기 배우로 성장한다는 걸 알았기에 스카우트 제의를 했었다.
하지만 학생 신분이던 그녀는 부모님께 물어보고 오겠다고 답했었다.
그런데 그녀의 부모님이 TK 엔터 쪽에 아는 사람이 있었기에 굴렁쇠 엔터가 아닌 TK 엔터 소속이 된 것이었다.
어쨌건 그런 인연의 오성연이 지금 이곳 <화란전> 현장에서 촬영을 앞두고 있다.
유진이를 따르는 주요 배역인 시종 ‘아소’ 역할로서 캐스팅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현재 월 화요일에 방송되고 있는 채미현 주연의 MBS <무한 취업 시대>에서 ‘숙자’란 이름을 가지고 서울에 홀로 올라와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을 꿈꾸는 옥탑방 억척 아가씨로 인기리에 출연 중이다.
그래서 이번 주 <전지적 관찰 시점>에 덕배 다음으로 나오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겸사겸사 인사를 할 겸 오성연의 대기 장소로 향했다.
그런데 오성연은 대기 의자도 없이 백사장에 쪼그리고 앉아 대본을 보고 있었다.
촬영이 연기된다는 걸 들었는지 기가 꺾인 표정이다.
새벽 일찍 와서 기다렸을 텐데 또 기다리는 말을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렇다고 신인 배우는 자기 촬영을 마치기 전 현장을 떠나서 안 된다.
언제든 AD나 PD가 부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사라졌다가는 배역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성연이 약간은 풀이 죽은 터라 난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성연 씨~~”
오성연이 대본에서 눈을 뜨고 고개를 든다.
“어? 정 실장님! 안녕하세요!”
오성연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인다.
“이야기 들었어요. 오늘부터 유진이랑 호흡 맞추기로 했다면서요?”
‘아소’ 역할은 노출도가 높은 주요 조연 배역이다.
“예. 회사에서 배역을 잡아 주셨어요.”
“잘 부탁드려요. 그때처럼 우리 유진이랑 잘 지내주면 더 좋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아직 유진 언니 팬이에요!”
그녀는 배우가 된 지금도 유진이를 덕질한다고 한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촬영이 미뤄진 건 죄송해요. 우리 덕배 촬영 일정이 앞당겨져서······ 그렇게 됐네요.”
“아~ 그래서 그랬구나. AD 님이 아무런 이유를 말씀 안 해주셔서요. 뭐······ 그럴 수도 있죠. 아까 보니까 덕배 씨 연기가 장난 아니던데요 뭘. 저 같은 신인이랑은 차원이 다르니 이해해요.”
미안하지만 덕배는 이제 막 2개월 차다.
그리고 오성연은 TK 엔터에서 연기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되었고.
하지만 그걸 말하면 더 실망할 게 틀림없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전지적 관찰 시점> 촬영은 했어요?”
“아뇨. 아직이요. 최대기 매니저님이 일정이 연기되었으니까 조금 일찍 앞당길 수 있을까 하고 이야기해 보겠다며 가셨어요. 그리고 말씀 좀 편하게 해주세요. 네?”
그녀와의 인연도 있었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알았어. 근데 담당이 최대기 매니저라고?”
“예.”
현재 나와 동갑인 최대기는 탑 엔터테인먼트 시절 내가 데리고 있던 부하 직원이었다.
그는 착실하고 인성 좋은 매니저였는데 그러다 보니 돈만 밝히는 탑 엔터테인먼트에선 오히려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는 배우를 진심으로 아끼는 매니저였다.
그런데 그가 지금 TK 엔터에서 막 로드 매니저를 떼고 1년 차가 되어 있었다.
“덕배 때문에 생긴 일인데 내가 도와줄게. 최대기 매니저 전화번호가 몇 번이지?”
“아~ 저기 오시는데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박은찬 PD와 1년 차 최대기가 걸어오고 있다.
최대기는 키가 173cm 정도에 배짝 마른 체형인데 얇은 허리가 반으로 부러질 정도로 연신 허리를 구부리며 굽신대고 있다.
그래도 덕분에 박은찬 PD의 표정은 뚱한 정도로 그치고 있었다.
보통 매니저가 촬영 스케줄을 바꿔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하면 PD들은 어디서 감히 이래라저래라하냐면서 노발대발 화부터 내는데 지금 상황만 봐도 최대기가 얼마나 애를 쓰는 지 알 수가 있었다.
지금이 내가 나설 순간이다.
난 먼저 박은찬 PD를 향해 밝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박 PD님.”
“어? 정 실장이 여긴 무슨 일이야?”
“아 저희 때문에 성연 씨 촬영에 좀 딜레이가 생겼다고 해서 도와주려고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성연 씨 촬영분에 우리 덕배가 찬조 출연할까 하는 데 어떠십니까?”
박은찬 PD의 얼굴에 남아 있던 짜증이 단숨에 사라져 버린다.
“하하하. 그럼 나야 좋지. 혹시 지금 바로 찍을 수 있어?”
그럴 수야 있나.
먼저 오성연부터 단독 샷 좀 받게 해준 다음 덕배를 부르는 게 매너지.
“일단 성연 씨부터 먼저 촬영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에 덕배를 불러서 찬조 출연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덕배 분량도 찍고요.”
“오케이. 그렇게 하지.”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폰이 진동을 울리며 알람을 알려 온다.
[알림 : 2021년 3월 5일. ‘최덕배’의 새로운 일정이 떴습니다.]
덕배의 일정이라고?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난 무슨 일정이 떴나 싶어 양해를 구하고 에브리데이를 확인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덕배가 사고를 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