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7화
707. 일취월장 1
미소와의 장난을 멈춘 뒤 정중히 전화기 속 상대에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미소도 조용히 내 옆에 바로 앉는다.
순간 폰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나 이상필이야. 지난번에 봤는데 내 목소리도 기억 못 하나?
이상필이라면 올해 66살인 굴렁쇠 엔터 주주 중의 한 명인 LSP 그룹 회장이다.
그는 박형문 대표와 같은 서예종 출신이지만 그와 비교되지 않는 재력을 갖고 있다.
LSP 그룹은 의류와 화장품 등을 수입하고 판매하는 회사로 재계 100위 정도에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그때 별말씀이 없으셔서 기억이 안 났습니다. 그나저나 박형문 대표랑 통화해 보셨으면 굳이 묻지 않으셔도 잘 알 것 아닙니까?”
-형문이랑 통화를 하긴 했지. 그런데 네가 그랬다는 게 하도 믿기지 않아서 전화해 봤다.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잠깐의 침묵 후 이상필 회장이 묻는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짓을 저지른 거냐?
“박형문 대표님이 먼저 절 건드셨습니다. 황진서 배우를 이용해 우리 미소를 건드셨거든요.”
-하아~ 그렇다고 회사를 폭삭 망하게 해? 그깟 연예인 나부랭이들이 뭐라고······.
뭐라고?
감히 연예인 나부랭이?
내게는 가족이자 목숨만큼 소중한 내 연예인들을?
“그 말씀 당장 취소하십시오.”
-안 하면 어쩔 건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회장님과는 끝장을 볼 겁니다.”
안 그래도 굴렁쇠 엔터를 손에 쥐기 위한 지분 전쟁 중이다.
규모가 엄청난 LSP 그룹은 트루엔젤스 때처럼 흔드는 건 힘들겠지만 차근차근 피해를 입힌다면 언젠가는 무너뜨릴 수도 있을 거다.
그런데 내 말이 가소로운지 상대편에서는 큰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으하하하. 날 어찌한다고? 이 친구가 진짜로 제정신이 아니구먼. 이봐 정 실장.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이상필이야! LSP 그룹 회장!
그는 자신의 재력을 내세우며 위세를 뽐내고 있다.
그래봤자 최은태 회장에게는 찍소리도 못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싸우려고 전화했다기에는 생각보다 목소리에 적의가 없다.
난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기 위해 화를 억누르며 전화한 진짜 목적을 물었다.
“최은태 회장님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재산 가지고 자랑하지 마시고요 왜 전화했는지나 말씀해 보십시오. 이유 없이 전화한 건 아닐 거잖습니까?”
그때였다.
이상필 회장이 심호흡한 뒤 찬찬히 입을 열기 시작한다.
-후우~ 내가 좀 흥분한 것 같군. 본론만 말하자면······ 네가 달라는 대로 다 줄 테니 나한테 와라.
이런 대화 와중에 스카우트 제안이라고?
그럴 거면 처음부터 공손하기라도 하지.
“지금 제정신입니까?”
-그래. 어차피 그 영감은 네가 충성을 바쳐도 뒤를 봐주지 않을 거다.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는데. 하지만 난 달라. 난 능력 있는 사람에게는 확실하게 보상하는 사람이거든.
최은태 회장이 피도 눈물도 없다고?
최은태 회장은 오늘 내가 1억을 썼다는 걸 알고 어떻게든 보너스 2억을 넣어 주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다.
정을 쉽게 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정을 주면 깊고 오래가는 타입이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제안인 터라 딱 잘라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그쪽 손을 잡을 일은 없으니까. 그러지 말고 가지고 있는 주식을 제게 파십시오. 값은 잘 쳐 드리겠습니다.”
이상필 회장이 혀를 차며 말한다.
-쯧쯧쯧. 정윤호 넌 인마 편을 골라도 잘못 골랐어. 최만식 대표와 이쪽의 진짜 힘을 넌 몰라도 너무 몰라. 하지만 내가 딱 한 번만 더 이야기하지. 내 손을 잡아. 그러면 모든 걸 없던 일로 해줄 수 있어.
최만식 대표의 장인이 될 박상곤 의원의 힘을 말하는가 보다.
하지만 정작 힘을 모르는 건 이상필 회장이다.
이쪽에는 회귀자이자 에브리데이를 가지고 있는 능력자인 내가 있는데 말이다.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그 힘 별로 세 보이지도 않고요.”
-고집부릴 때가 따로 있지. 야 정윤호! 내 손을 안 잡으면 최만식 대표가 한국으로 왔을 때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거다! 그래도 좋아? 어?
순간 이상필 회장은 최만식 대표가 저지른 짓을 아직 모른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서로 싸워라!
“최만식 대표한테 살인 청부 혐의가 씌워진 거 모릅니까? 그 인간 한국 들어오면 즉각 구속입니다.”
이상필 회장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뭐~~?
역시나 몰랐던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도 이젠 용서해 드릴 생각은 없으니까요.”
-아 아니 자세히 좀 말해 줘봐. 최만식 대표가 진짜 살인 청부를······.
난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궁금해 죽으라지.
그때였다.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미소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한다.
“유노 삼촌! 파이팅!!”
뭔진 몰라도 내가 싸웠다는 걸 아는 거다.
난 미소를 따라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파이팅! 그리고 엄마한테 제이미 선생님이랑 누가 더 좋냐고 하니까 고민도 없이 엄마라고 했다고 말해 줄게?”
미소가 배시시 웃는다.
“에헤헤. 삼촌 최고~”
그러는 사이 <화란전>의 15화가 끝이 났다.
<화란전> 15화의 시청률은 무려 30.9%를 달성하고 있었다.
덕배와 유진이의 활약 덕분이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내게 목숨보다 소중한 연예인들을 지킬 것이라고.
그리고 반드시 이상필 회장과 최만식 대표의 일행들에게서 굴렁쇠 엔터도 지켜 내겠다고.
그것이 바로 내 두 번째 삶의 목표이니까 말이다.
* * *
다음 날.
아름다운 제주도 월정리 해변 한쪽에 마련된 화란전 해상 전투 세트장에 찾아왔다.
해상 전투 세트장에는 신라 함선과 일본 함선이 각각 한 대씩 정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선실을 구현한 세트장도 놓여 있었다.
<화란전>의 극 중 해상전도 제법 일어나는 터라 아예 함선을 통째로 건조했다.
철썩~ 철썩~
밀려드는 잔잔한 파도가 목조함의 이물에 부딪히며 바스러지는 소리를 낸다.
오늘 이곳에 온 건 <화란전> 23화 촬영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촬영장에서 이번 주 <전지적 관찰 시점>도 촬영하기 때문이다.
지분 전쟁을 위해선 내 연예인들도 관리해야 하는 터라 강감찬 대표와 최은태 회장에게 뒤를 맡기고 난 제주도로 내려왔다.
그리고 현재 덕배는 조금 전 배 위에서의 전투씬 촬영을 끝내고 대기 의자에 앉아 협찬으로 받은 ‘THE 베스트’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런데 커피를 마시는 덕배의 얼굴이 그 어떤 때보다 맑아 보인다.
“덕배야. 좋냐?”
배와 바닷가를 쳐다보던 덕배가 빙긋이 웃는다.
“예. 평생 꿈꾸지 못했던 일상이잖아요.”
“꿈을 못 꾸다니?”
“전 솔직히 택배 물류센터에서만 일하다가 죽을 운명인 줄 알았거든요.”
아니.
내가 없었어도 넌 배우가 되었을 운명이야.
단 하나의 차이라면 한울이가 곁에 없었다는 것뿐.
“넌 내가 없었어도 배우가 됐을걸?”
덕배가 피식 웃는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형 아니었다면 이런 대접도 못 받고 이런 광경은 더더욱 못 봤겠죠. 고마워요 형.”
그래.
그건 인정.
“그것도 다 네가 열심히 연기하니까 잘 풀리는 거지. 대충대충 연기했다면 누가 널 인정하겠니?”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요.”
“그래. 그리고 다음 씬은 윤주연 씨랑 호흡을 맞출 차례 맞지?”
“예.”
“윤주연 씨. <전지적 관찰 시점>에서 잘린 후에 잔뜩 독이 올라 있을 거야. 조심해.”
“알겠어요.”
그때였다.
“여기서 뭐 해?”
윤주연과 윤주연의 매니저 양성택 실장이 나타났다.
양반은 못 되겠다.
그 순간 덕배와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 선배를 무시했다가는 우리가 더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나와 덕배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윤주연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한다.
“그래. 그리고 양 실장 나 먼저 가 있을게.”
말을 마친 윤주연이 몸을 홱 하고 돌리며 배로 향한다.
윤주연에게 인사를 마친 양성택 실장이 날 바라본다.
그런데 그 순간 양성택 실장이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정 실장 너 혹시 우리 회사 박서혜 건드렸냐?”
“그게 뭔 소리입니까?”
“5959치킨 삼키려고 거기 대표랑 박서혜 불륜 사건을 터트린 거 너 아냐? 이번에 인수하기로 한 리버스 엔터 대표가 네 친구고 그리고 이태풍이 5959치킨 광고 모델 한다면서? 조각조각 흩어진 퍼즐을 모으니까 그림이 딱 나오더라고. 맞지?”
이야~ 제법인데?
하지만 난 그날 공식적으로 내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찌라시를 돌린 BM 리포트 역시도 몸을 사리느라 잠적 중이고.
그저 끼워 맞추기식으로 찔러보는 말에 낚일 생각은 없다.
“박서혜가 사고 친 걸 왜 저한테 뒤집어씌우십니까? 욕할 거면 박서혜한테 하세요.”
그러나 양성택 실장은 내가 했다고 확신한 뒤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야! 막말로 그 나이 때 실수 한번 안 하는 애들이 어디 있냐? 그런데 꼭 그렇게 죽여야 속이 시원하냐? 엉? 넌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난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제가 한 것도 아니지만 죽이다뇨? 박서혜가 한 일은 진짜 사람을 죽인 일입니다. 하지만 걘 고작 연예인을 관둔 것뿐이잖습니까? 아직 젊으니까 과거나 반성하고 봉사하면서 살라고 전해 주세요.”
“이 새X. 야 넌 아직 경력이 짧아서 연예인 관둔 애들 삶이 어떤지 모르지? 지옥이나 마찬가지라고!”
모르긴 왜 몰라.
회귀 전에도 수도 없이 겪었던 일인데.
하지만 그녀가 겪을 괴로움은 죽은 여고생의 가족들이 겪었을 아픔과 고통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저한테 이런 걸 따지기 전에 죽은 그 아이의 집에 한 번이라도 찾아가 봤습니까?”
“뭐?”
“지금이라도 가서 사과할 생각은 해봤냐고요. 박서혜 SNS 보니까 잠시 멈춤이라고만 되어 있던데. 설마 다시 컴백시키려고 하는 겁니까?”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건 내게도 상당히 큰 부담이지만 박서혜의 스타그램을 봐도 크게 반성하는 티는 없었다.
[@SH_park]
(슬픈 인형 아이.jpeg)
-잠시 멈춤.
-거짓은 진실 앞에 결코 힘을 쓰지 못한다.
스타그램에는 목각 인형이 고개를 숙인 채 ‘잠시만 안녕’이라고 적힌 글귀를 손에 들고 있다.
양성택 실장이 날 가만히 노려보다 경고를 한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그리고 너 인마. 우리 대표가 말하라더라. 밤길 조심하라고!”
끝까지 악담을 퍼붓고 양성택 실장이 고개를 홱 하고 돌린다.
난 배로 향한 윤주연과 양성택 실장을 보며 덕배에게 말했다.
“덕배야 우리도 준비 철저히 하자.”
“무슨 준비요?”
“저 인간들 성격상 틀림없이 보복하려 들 거야. 그러니까 대본 리딩부터 다시 한번 해보자. 꼬투리 잡힐 일 없게.”
“알겠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다음 씬을 확인해 보니 덕배와 윤주연의 언쟁 씬이었다.
‘이거 쉽지 않겠는데?’
* * *
지금부터 찍을 장면은 해적들과의 전쟁이 끝난 후 3왕후가 도화 공주가 있는 선실로 김법민을 불러 치하하는 장면이다.
김법민은 김춘추의 아들로 여왕이 될 공주들과 정적이지만 3왕후의 딸인 도화 공주는 그런 김법민에게 반해 버렸다.
그래서 3왕후는 김법민을 불러 둘을 엮어 보려 하고 있었다.
둘이 연결되면 자연스레 정적도 제거하고 신라 최고 귀족 가문의 힘도 얻게 되는 셈이니까.
그런데 이 한 장면에서 외워야 하는 대사량이 상당했다.
이 씬에 배정된 대사가 A4 용지로 4장 정도 되는데 대략 글자 수로만 1000자 정도 되는 분량이다.
하지만 한 씬에 이 정도 분량의 대사는 신인들에게는 너무도 부담스러운 분량이었다.
일단 대사도 모조리 다 외우는 것도 힘든데 지문도 머릿속에 넣어서 상황을 이해해야 하고 그 와중에 상대 배우와의 호흡도 맞춰야 했다.
더군다나 NG가 났을 때 다시 찍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밀려오는 터라 신인들은 이런 대사량이 많은 씬에서는 연이은 실수로 멘탈이 갈려 나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반면 윤주연 정도 되는 배우들은 오랜 경험으로 유연하게 상황을 넘긴다.
그래서 이런 대사 많은 씬은 보통 경험 많은 선배들이 연륜으로 신인 배우들을 이끌어 준다.
하지만 지금처럼 윤주연이 덕배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윤주연이 대본을 이용해 덕배를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난 내 경험에 비춰 윤주연이 혹시라도 공격했을 때 가장 실수하기 쉬운 한 지점을 가리켰다.
대략 A4 용지 첫 번째 장의 1/3 지점이다.
“김법민에게 호의적으로 대했지만 거절당하는 부분. 여기서부터 3왕후가 화를 내는데 그때 네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하게 몰아붙일 거야.”
“그럼 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야.”
“뭔데요?”
“윤주연이 무엇을 하든 무시하고 너만의 속도로 연기를 해. 너만큼 ‘김법민’다운 연기를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덕배는 애드립에 능하고 감정을 잘 표현하는 윤주연과는 달리 대본을 읽고 또 반복해서 읽어서 캐릭터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타입이다.
그러니 그런 덕배가 윤주연에게 맞서려면 방법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대본대로만 연기하는 것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덕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거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 네가 해석한 김법민 역할에 조금만 더 몰입하면 돼. 그러면 모든 건 알아서 자연스레 풀릴 거야.”
“알겠어요 형.”
“그래. 우리 덕배 파이팅!”
주먹을 불끈 쥐어 주자 덕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따라서 주먹을 꼭 쥔다.
이후 덕배가 세트장으로 향한다.
약간은 움츠러들었던 덕배의 넓은 어깨가 활짝 펴지고 있었다.
* * *
해상에 지어 놓은 배 안 공간은 협소했기에 배 옆에다가 선실 세트장을 별도로 지어 놓았다.
세트장에는 가장 먼저 3왕후 역의 윤주연이 자리를 잡았다.
현재 촬영하는 건 탐라국에 사신으로 가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터라 다들 고운 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 그때 다음 씬 촬영을 앞둔 유진이가 내 곁으로 다가온다.
“오빠 덕배 표정이 왜 저렇게 심각해요?”
“조금 전 촬영 마치고 쉬는 중에 윤주연 씨 매니저랑 한바탕했거든. 거기다 지난주에 예능 프로그램 출연 취소 건도 있다 보니 아무래도 덕배를 괴롭히려 들 것 같아.”
한복을 입은 유진이가 팔을 걷어 올리더니 눈을 부라린다.
“왜요? 덕배가 뭘 잘못했다고요?”
“굳이 잘못했다면 인기가 높아졌다는 거?”
“와~ 너무하다 진짜.”
유진이가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뿜는다.
얘가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참으세요 우리 주연 배우님~ 예?”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유진이가 오래간만에 진상 손님을 대할 때의 모드로 변했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일단 덕배를 믿어 보자. 덕배도 나름대로 준비하고 나갔어.”
“그래요? 흐음······ 알았어요 그럼.”
하지만 유진이는 알겠다는 말과 달리 눈을 부라리며 윤주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덕배가 당하면 자신이 복수해 주겠다는 듯 말이다.
그때였다.
오복희 PD가 주변을 조용히 시킨 뒤 확성기를 잡았다.
“다들 조용히 하고~ 갑니다. 레디~ 액션!”
* * *
모든 스태프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세트장 안에서 윤주연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윤주연이 연기를 이어 갔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 대로 윤주연은 덕배를 거칠게 다루기 시작했다.
『법민! 나의 제안을 뿌리치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선실 세트장을 가득 채운다.
덕배의 코앞에서 내뱉은 사자후에 덕배의 머리카락이 날릴 정도였다.
어지간한 신인이라면 놀라서 대사를 다 잊을 정도로 엄청난 기세였다.
하지만 덕배는 보통의 신인 배우가 아니었다.
최지영 배우와 유진이에게 훈련받고 지금도 나날이 연기에 목숨을 거는 나의 배우다.
덕배는 잠깐 숨을 가다듬더니 나의 조언대로 연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덕배가 내 생각 이상의 연기력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