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2화
702. <연무(煙霧)> 오디션 4
사람 좋은 한유식 대표라지만 황진서가 배역 내정설을 언급하자 더는 참지 못했다.
“황 배우! 거 말이 좀 심하잖아! 배역을 내정하다니? 아직 오디션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뭔 개소리야?”
한유식 대표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황진서는 코웃음을 친다
“허 참 그럼 내가 틀린 말을 했어? 원래 정해진 순서를 바꾼 것부터가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그리고 막말로 내 연기가 박상규만 못하다고? 한 대표. 보는 눈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냐? 어?”
황진서 본인도 오늘 오디션에 갑자기 들어오면서 개인 스케줄 문제로 오디션 순서를 앞당겼다.
그런데 그건 입을 싹 다물고 박상규가 내정되었다 우기며 거칠게 저항하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현장에 있는 그 누가 봐도 박상규의 연기가 나았는데 말이다.
그 순간 연예계 기자들만 신이 나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주먹다짐까지 하길 바라는지 작게 중얼거리고들 있었다.
-한 대표랑 원로 배우가 싸우면 완전 대박인데······ 안 싸우나?
하여간 하이에나 같은 인간들이다.
그러나 한유식 대표가 황진서 배우와 싸우게 되면 드라마가 시작도 전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난 즉시 황진서와 한유식 대표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황 배우님. 보는 눈이 없는 게 누군지 몰라서 물으십니까?”
황진서가 내 쪽으로 고개를 홱 하고 돌린다.
“뭐라고?”
“황 배우님이야말로 캐릭터 분석을 엉망으로 하셔서 월영신 연기를 하면서 윽박만 지르셨잖습니까? 그리고 상대 배우와 합은 아예 버려두고 혼자만 연기하셨고요. 그 정도 연기로는 지금 한 대표님께 따지실 정도는 아닌 듯합니다만?”
박상규 역시 짧은 시간에 준비하고 왔지만 모든 것이 준비된 채 연기하던 황진서와는 달랐다.
박상규는 극단에선 수많은 배역을 짧은 시간에 연기한 경험이 많았기에 비록 벼락치기였지만 좋은 결과를 내어놓았다.
애당초 오디션 보는 씬이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황진서는 자신의 경력과 기본기만 믿고 대본을 대충 훑어보고 온 게 틀림없다.
최근 연기력이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 건 이런 나태한 태도도 한몫하고 있었고.
황진서는 자신의 아픈 곳을 찌르는 내 말이 기분 나빴는지 이를 드러내고 덤벼든다.
“어디서 매니저 나부랭이가 캐릭터 분석이니 연기의 합이니 떠들어? 야! 네가 나보다 연기를 잘 알아?”
황진서가 60년 경력으로 찍어 누르려고 했지만 난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대답했다.
“그걸 꼭 해봐야 압니까?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데.”
“와~~ 이 새X 보게? 야. 정윤호. 두 사람 친분 때문에 지금 저 새파란 중고 신인을 월영신(月影神) 배역에 꽂아 주려고 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박상규가 월영신을 딸 수 있도록 애를 쓴 건 사실이지만 그가 무조건 될 거라고 확신한 건 아니다.
최종 배역을 선정하는 건 ‘미리내’의 제작진들이니까.
그리고 황진서가 말한 ‘내정설’에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월영신(月影神) 역은 주연 역이 아니라는 거다.
월영신(月影神) 역은 조연 그중에서도 악역이다.
그렇기에 이 판의 상식으론 월영신(月影神) 배역 정도는 감독이 내정해도 눈곱만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제작사가 원한다면 오디션까지 열어가며 들러리를 세울 필요가 전혀 없는 배역이라는 거다.
미소가 일영신(日影神)에 오디션도 안 보고 사전에 캐스팅된 것처럼.
“황 배우님. 지금 주연 뽑습니까?”
“뭐······?”
“조연 하나 뽑는데 그렇게까지 귀찮은 짓을 할 필요가 있냐는 말입니다. 진짜 대표님이 배역을 내정했다면 오디션도 안 열었겠죠.”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내 말이 틀린 게 없으니까.
“그 그건······.”
황진서가 흠칫하는 사이 난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코앞에서 황진서만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낮춰 말했다.
-황 배우님. 계속 이러시면 내일 아침 기사로 레드아이즈 마담과의 불륜 기사와 사설 카지노 도박 기사를 확 터트려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현재 40년간 부부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황진서는 자신과 20살 차이가 나는 강남 고급 클럽 레드아이즈 마담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다 앞으로 1년 뒤.
오랫동안 가족들을 속이고 어린 여자와 반쯤 동거해 왔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그는 막대한 금액의 위자료를 내고 이혼을 하게 된다.
그 일이 내 입에서 튀어나온 순간 황진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한다.
-그 그걸 정 실장이 어떻게?
-그것까지는 아실 필요 없고요.
황진서의 무례하던 표정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제가 도박 이야기를 할 때 설마 해외 원정 도박만 알고 있는 줄 아셨습니까? 적당히 물러나셨으면 체면 세워 드렸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미소 나이가 고작 여덟 살입니다. 그런 아이를 짓밟으려고 하시는 건 좀 너무하지 않으십니까? 예? 쪽팔리지도 않으십니까?
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황진서를 쳐다보며 귓속말을 이어 갔다.
마음 같아서는 알고 있는 사실을 기자들 앞에서 확 폭로해 버릴까 싶었다.
하지만 현재 난 워낙 많은 적과 상대하고 있었기에 한 번 정도는 기회를 줄까 싶었다.
그때였다.
황진서가 내 팔을 덥석 잡는다.
-정 실장. 잠깐 잠깐만. 진정하게 진정.
기세 좋게 굴던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와서 왜 이러십니까?
-내 비밀을 터트리지만 않는다면 나도 해줄 이야기가 있어. 나 오늘 이 자리에······ 누가 시켜서 온 거야. 내가 뭐가 좋다고 고작 조연 자리에서 이 난리를 피웠겠어?
그래 그게 이상했다.
아무리 한물갔다고 해도 잃을 게 많은 황진서급 배우가 사고를 친 게 말이다.
-누가 시켰습니까?
-일단 기자들 좀 달래놓고 이야기하자. 대신 조금 전에 말한 건 말하지 않는 걸로 약속하고.
-알겠습니다. 일단 기자들한테 오해라고 이야기부터 하십시오.
-아 그래야지.
황진서는 급히 나와의 귓속말을 끝내고 굳은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선 날 보며 웃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거 미안하게 됐군. 아무래도 내가 오해를 한 것 같네. 정식으로 사과하지.”
황진서가 갑작스레 내게 사과하자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황 배우님. 무슨 말씀을 들으셨는데 그러십니까?”
황진서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기자들을 향해 말한다.
“아냐. 내가 정 실장의 해명을 들어보니까······ 내가 좀 과했던 거 같아. 오해도 있었고.”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하자 황진서가 조금 풀어 설명한다.
“내가 괜한 자격지심에 소란을 떨었어. 솔직히 신인한테 밀렸다고 생각하니까 쪽팔려서 그런 건데······ 그런데 오늘 이거 기사 좀 안 쓸 수 없나? 그렇게만 해주면 오늘 여기 모이신 기자분들에게 내가 화끈하게 한번 쏘도록 하지.”
기자들이 고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한턱 제대로 얻어먹고 오늘 일은 입 다물기로 결론을 내린다.
“뭐 알겠습니다. 저희도 드라마 오디션 첫날부터 초를 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요.”
이곳저곳에서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황진서가 고맙다고 답한 뒤 한유식 대표에게 고개까지 숙여가며 사과한다.
“미안해 한 대표. 내가······ 좀 오버했어.”
한유식 대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크흠······ 알았어.”
황진서는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뒤 내게 슬쩍 귓속말로 뒷배를 말해준다.
-박형문 대표 알지? 굴렁쇠 엔터 주주.
-예.
-박 대표가 오늘 오디션에 나가서 똥을 뿌리고 오라고 하더라고. 대신 자기가 투자한 대형 사극 영화의 단독 주연 자리를 나한테 준다고. 나야 사실 이런 일이 내키지는 않았는데 내 나이에 주연 할 기회가 쉽게 오는 게 아니라서······.
이것 봐라?
박형문을 비롯한 주주들 즉 최만식 편에 붙은 주주들이 굴렁쇠 엔터의 주식 상장을 방해하려는 수작을 부린다고?
당장이라도 기사를 내버릴까 했지만 박형문 대표가 증거를 남겼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우선 황진서에게 한가지 지시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비밀은 지킬 테니까 박형문한테는 그냥 실패했다고만 말씀하십시오.
-어 어. 그래. 그럴게.
황진서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함께 온 TK 엔터 매니저와 부리나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난 혹시나 하고 에브리데이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3]
[날짜 : 2022년 7월 3일]
-PM 10:00 <연예계 방방곡곡> 왕년의 탑스타 황진서. 두 집 살림 발각으로 전격 이혼. 거액의 위자료 발생.
역시나 그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하긴 사람 행동과 운명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가 없지.
* * *
황진서가 스케줄이 있다며 도망치듯 현장을 떠난 후.
뒤를 이어 기다리던 배우들도 월영신 역 오디션을 시작했다.
그런데 60이 된 중견 배우들도 배역을 소화하면서 미소와의 호흡을 잘 맞추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박형문 대표가 오늘 일을 망치려고 했다는 걸 듣고 해결책을 찾고 있을 무렵 <연무(煙霧)>의 여주인공 주영인이 나타났다.
원래는 3시에 섬사람들과 낚싯배에 탄 낚시꾼 관광객들 오디션에 참관할 예정이었는데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오디션이 계속 진행 중이었기에 주영인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뒤쪽으로 다가왔다.
주영인이 내 곁에 선 박상규와 간단히 묵례를 나눈 뒤 내게 조심스레 묻는다.
-오빠. 옆에 있는 분이 오늘 황진서 씨보다 연기 더 잘했다던 박상규 씨죠?
-어.
-대박이다. 이런 배우들은 대체 어디서 구해 오시는 거예요?
미래에서?
하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기에 적당히 말을 돌렸다.
-좋은 배우들은 찾아보면 다 있어. 다들 기회를 못 가져서 그럴 뿐이지.
순간 주영인이 흐뭇하게 웃는다.
-오빠 덕분에 우리 <연무(煙霧)>에 좋은 배우가 합류했으니까 이번에도 드라마 잘되겠죠?
이젠 뭐 그러려니 하기에 피식하고 웃음으로 상대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미소의 연기가 이어진다.
주영인은 미소의 오디션으로 관심을 돌리더니 혀를 내두르기 시작했다.
-미소 쟤는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데 중견 배우들이 상대가 안 되네. 대체 어디까지 올라오려는 거지?
미소는 점점 더 표정이 살아나며 일영신(日影神) 캐릭터를 완성해 가고 있었다.
주영인은 그런 미소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끼는지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반면 난 미소에게 열렬한 응원만을 보냈다.
‘우리 미소 파이팅~!!’
매번 미소의 연기가 끝날 때마다 환호했더니 주영인이 못 말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대고 있었다.
그렇게 2시간의 오디션이 끝난 순간 누가 월영신(月影神) 배역에 합격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한유식 대표가 다가와 작게 속삭인다.
-상규 씨. 다음 주 대본 리딩 준비하세요.
박상규가 씨익 웃으며 작게 속삭이며 답했다.
-예. 대표님.
작게 안도한 난 미소와 박상규를 오디션장에 놓아둔 채 멀지 않은 굴렁쇠 엔터로 향했다.
박형문이 황진서를 사주한 이상 대책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 * *
굴렁쇠의 대표이사실.
강감찬 대표에게 박형문이 사람을 사주해 오디션에 개입했다는 것을 알렸다.
강감찬 대표가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회장님한테 보고하고 그놈들이 어디까지 손을 써놨는지 확인해 보마.”
“그보다 대표님. 이번 일. 단순하게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주식 상장을 방해하려 드는 수작일 거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상장 전 악재가 터져 나오면 회사의 상장이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으니까.
시장에 주식을 내놓아도 사람들은 불안한 소문이 도는 회사의 주식을 사지 않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라.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잖냐.”
강감찬 대표의 말대로 우린 어느 정도 이런 일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방어해야겠습니다.”
“어떻게?”
“상대의 힘을 빼놔야죠.”
박형문이 대표로 있는 트루엔젤스는 엔터테인먼트 쪽을 주로 투자하는 투자사였다.
그러니 그가 투자하려는 회사의 리스트만 알 수 있다면 큰 훼방을 놓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혹시 투자사 명단 좀 받아 볼 수 있을까요?”
“명동 회장님께서 아실 거다.”
난 알겠다고 한 뒤 곧장 최은태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우리 정 실장. 무슨 일인가?
강은기와 얼굴을 한번 마주한 것만으로도 최은태 회장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넘치고 있다.
“회장님. 오늘······.”
난 우선 간단히 오늘 일어난 일들을 말했다.
최은태 회장의 목소리에 날이 선다.
-형문이 그놈이 감히······ 걱정하지 말게.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아뇨. 회장님. 제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트루엔젤스에서 투자한 회사들 목록을 알면 박형문 대표를 곤경에 빠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난 연예인들에 관한 정보를 사고파는 증권가 유료 찌라시 업체를 몇 군데 알고 있다.
그곳을 통한다면 박형문 대표의 투자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가 있다.
다만 그러려면 트루엔젤스가 어떤 회사에 투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흠~ 내가 조사해 보라고 한 뒤에 연락해 주지.
“최대한 빨리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저녁때까지 구해 주지.
날 건드려서 인생이 망하는 사람 리스트에 박형문 대표의 이름표가 올라가고 있었다.
‘박 대표님. 이번 기회에 정윤호의 매운맛 한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 * *
오후 5시.
구로 희망병원 앞 ‘하누하누 다하누’ 고깃집.
난 <연무(煙霧)> 오디션장에 있던 미소와 박상규 그리고 연소희 팀장을 데리고 이곳으로 찾아왔다.
명동에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미소의 초등학교 입학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굳이 압구정에서 여기로 온 건 식사가 끝나면 희망병원 VIP실에 입원해 있는 이사연을 보러 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룸에 자리를 잡고 앉자 기분 좋은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천재 아역 정미소가 선택한 차기작 KBC 특별 드라마 <연무(煙霧)>로 밝혀져!]
[<연무(煙霧)>의 악역으로 깜짝 신인 발탁. 월영신 역에 신인 ‘박상규’ 전격 발탁.]
[원로 배우 황진서가 인정한 연기의 달인 ‘박상규’.]
[나태양 감독의 <도플갱어> 3월 7일 제작발표회! 주연은 신인 박상규.]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는 순간 숯불이 들어온다.
덜컥.
뜨거운 숯불이 테이블에 놓인 순간 다시 그 위에 석쇠 불판이 깔린다.
그리고 그 위로 주문한 생갈비가 올라간다.
치이익~
1++ 생갈비에서 흘러나온 육즙이 숯불에 떨어지자 맞닿은 숯불에서 하얀 김이 위로 올라온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꼬기~ 꼬기~”
미소가 집게를 들고선 어깨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오른손에 들고 있는 폰에서도 유진이가 미소처럼 외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꼬기~ 꼬기~
유진이가 영상 통화를 하자고 해서 했더니 2분째 끊지도 않고 꼬기를 외친다.
그러다 그때 유진이가 다급히 외친다.
-오빠. 오빠! 뒤집어요! 지금 당장! 롸잇나우!
고깃집 알바 경력도 있는 유진이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한 말투였다.
“어 어. 알았어.”
내가 고기를 뒤집자 미소도 집게로 하나둘 고기를 뒤집는다.
치이익~
마블링이 가득한 생갈비를 뒤집자 한쪽 면이 익어 석쇠의 + 모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유진이의 말대로 완벽한 색깔을 가진 채로 익어 있다.
다만······.
“여보세요. 유진 씨~ 촬영하셔야지 이걸 계속 보고 있으면 어떻게 해? 우리가 먹방 찍니? 내가 먹방 BJ야?”
화면 속 유진이가 군침을 흘리면서 답한다.
-아 몰라요. 오늘 저녁 촬영 때문에 굶어서 그래요. 다른 스태프들은 오늘 은갈치 정식 먹는다던데 전 못 먹으니까 이걸로 대리만족할래요.
현재 유진이는 <화란전>의 촬영 때문에 경주가 아닌 제주도 세트장에 내려가 있다.
“제주도 가면 같이 먹자. 은갈치 세트. 사줄게.”
-진짜요? 약속?
“어.”
그때였다.
-유진 씨 촬영이요~
유진이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쳇. 오라고 하네요. 오빠. 저 들어가 볼게요~ 영상 녹화해서 보내 주세요~
유진이가 터무니없는 부탁을 하고서야 전화를 끊는다.
난 그제야 젓가락을 붙잡았다.
이제 막 익힌 고기를 한 점 먹으려던 순간 또다시 전화가 걸려 온다.
탑스타 매니저의 삶이란 이렇게 밥 한 끼 먹기도 어려운 삶이다.
“누구지?”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전화다.
[발신자 : EBC 양태지 PD]
미소가 즐겨보는 그림 코너가 있는 교육 방송 EBC <동글동글 친구들!>의 양태지 PD다.
무슨 일인가 하고 전화를 받는 순간 양태지 PD가 섬뜩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정 실장. 결원이 생겨서 그런데 혹시 미소를 그림 그리기 코너에 출연시킬 생각 없어?
미소가 방송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그 순간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