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화
70. 현장에서 2
이사랑이 유진이의 손을 맞잡고 연신 칭찬을 해댔다.
“우리 딸이 이렇게 연기를 잘할지 몰랐는데? 이 엄마는 감동이야.”
명품 배우 이사랑이 후배를 찾아와서 칭찬을 해주다니.
기자들이 보면 좋은 기삿감인데.
‘아깝다.’
유진이는 까마득한 선배의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쑥스럽게 웃었다.
“아니에요. 감이 잘 안 와서 막 지른 것뿐인데요 뭘. 그리고 지금도 제가 뭘 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이사랑이 피식 웃는다.
“강 감독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모르지? 그런데 지금 저 표정 좀 봐.”
이사랑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강수훈 PD와 조감독이 낄낄거리며 농담을 하고 있었다.
“봤지? 잘했어. 아주.”
유진이는 이사랑의 손을 꼭 붙들고 정답게 애정을 표시했다.
“고마워요. 이게 다 엄마가 잘 끌어주신 덕분이에요.”
“연기라는 게 합이 맞으면 참 재미있어. 그치?”
“네. 저도 재미있었어요.”
“어쨌건 나도 오래간만에 제대로 연기해서 기분 좋았어. 앞으로도 잘 해 보자?”
유진이의 귓불이 발개졌다.
이토록 극찬을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나 보다.
“근데 우리 딸은 연기할 때 무슨 생각 해?”
“그냥······ 노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그 생각만 해요.”
“그래? 혼자 생각한 거야? 아니면 누가 알려준 거야?”
유진이가 내 쪽을 힐끔 바라본다.
난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한 거라고는 그저 배역에 몰입하라는 조언뿐이니까.
레슨을 안 받은 지 벌써 4달이 넘게 흘렀으니 오늘 보인 모습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진이 스스로의 판단과 캐릭터 해석이었다.
“우리 정 대리가 유진이한테 큰 도움을 주네요.”
“아닙니다. 이사랑 배우님.”
이사랑이 씨익 하고 웃는다.
“그러고 보니 요즘 정 대리 소문이 많이 돌던데. 혹시 신기 같은 거라도 있어요? 아니라고 할 생각하지 말아요. 김 작가가 작품도 시작하기 전에 로비했다고 다 이야기해줬으니까.”
연예계 판에서 신기가 있다는 말이 그리 낯선 말이 아니다.
촉이 좋다.
뜰 거 같다.
뭐 이런 것도 다 포함되는 말이니까.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난 촉이 좋은 게 아닌 회귀의 기억으로 모든 걸 알고 있는 거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김솔잎 작가랑 친한 것 같다.
그런 이야기까지 하다니.
“그 그런 거 없습니다. 아 참. 그런데 선생님. 커피 한잔하시겠습니까?”
말을 돌리자 이사랑의 웃음이 짙어졌다.
“아직 날이 쌀쌀하니까 커피도 좋죠. 혹시 그 용한 신기로 나도 차기작 하나 추천해 줄 수 없어요? 내가 대가는 톡톡히 치를 테니까.”
난 입을 꾹 다물며 컵에다 커피를 따랐다.
“어머? 같은 회사 아니라고 비싸게 구는 거예요?”
이사랑이 내 커피를 받아들며 투덜거렸다.
“만약에 이번 드라마가 크게 성공하면 정 대리네로 옮기는 것도 생각해 볼 거니까 미리 잘해요.”
그렇게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사랑이 성공했던 배역과 실패했던 배역을 줄줄이 꿰고 있으니까.
나한테 와 주기만 하면 최소 10년은 백전백승으로 전적 관리를 해줄 수도 있다.
그런데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켠 순간 이사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뭐야? 이거. 진짜 맛있잖아. 정 대리. 지금이라도 나랑 같이 일할래요? 내가 정 대리가 원하는 조건은 최대한 맞춰줄게요. 어때요?”
순간 유진이가 황급히 내 앞을 막아섰다.
“안 돼요! 오빠 딴 곳으로 가면 저 큰일 나요!”
이사랑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농담이야 농담! 얘는~.”
“아 그 그게 아니라······”
이사랑이 새초롬하게 노려보자 유진이가 다시 한번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 * *
배우 2실의 아침 회의가 시작됐다.
오늘은 유달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회의가 진행되는 중이다.
이사랑 선생님이 여러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유진이를 극찬해 놓았으니까.
[<파란 하늘>의 베테랑 이사랑. “정유진은 날 뛰어넘을 인재.”]
[명품 조연 이사랑. 신인 정유진의 연기를 극찬!]
[버거퀸 얼짱 알바? 이젠 연기자 정유진이라 불러야 해.]
“으하하! 이거 이사랑 배우님한테 인삼 세트라도 하나 해드려야겠는데?”
구성철 실장의 말에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벌써 홍삼 세트 하나 샀습니다. 오늘 촬영장에 가서 매니저 편으로 건네려고요.”
“잘했다. 이젠 알아서 척척이구나.”
난 현장에서도 이사랑 선생님이 얼마나 유진이를 아끼는지를 전했다.
“연예계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이런 인연은 소중하게 여겨야지. 대중들의 관심을 먹고 사는 게 연예인이지만 배우들 간에 관계도 절대 무시하면 안 되거든.”
구성철 실장의 조언이 백번 옳았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수증 올려. 왜 홍삼을 사비로 사냐? 회사 경비로 사면 되지.”
“그럼 오늘 바로 올려도 됩니까?”
“그렇게 하라니까?”
무려 이십만 원짜리 선물인데 돈 굳었다.
내가 히죽 웃자 다들 내 마음을 안다며 키득거렸다.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홍보팀 성민석 팀장이 뛰어 들어왔다.
“실장님! 어 정 대리도 있었네?”
“왜?”
“유진 씨한테 광고 들어왔습니다.”
“광고 문의야 많이 들어오잖아? 웬 호들갑이야?”
“이번엔 좀 큰 거라서요.”
“어딘데?”
“HK 의류의 신규 브랜드 런칭 광곱니다.”
“뭐? HK 의류?”
순간 배우 2실이 술렁거렸다.
HK 의류는 연 매출 1조가 넘는 의류업계 1위다.
게다가 재계 서열 12위인 HK 그룹의 계열사였고.
매니저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 광고 문의지만 대기업 광고는 그중에서도 각별하다.
구성철 실장이 입이 바싹바싹 탄다는 표정으로 광고비를 물었다.
“1년에 2억입니다.”
“뭐? 2억?”
구성철 실장이 벌떡 일어났다.
아직 드라마가 방송도 안 되었는데 신인에게는 과도할 정도로 큰 금액이다.
버거퀸에서 큰돈을 받은 전례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례적인 경우고 상대가 워낙에 애가 닳은 상황이라서 가능했던 일이다.
그와는 달리 의류광고는 주류 음료 휴대폰 자동차와 함께 급이 되지 않는 연예인은 꿈도 꾸지 못하는 알짜배기다.
쟁쟁한 기존 모델을 대체하고 유진이가 그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위상이 올라갔다는 증거로 이만한 게 또 있을까.
“하하하. 이거 아침부터 기분 좋은 소식이구만!”
배우 2실에서는 왁자지껄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난 웃을 수가 없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때쯤 HK 의류의 전무로 홍성범이라는 놈이 발령되었을 거다.
홍성범은 HK 그룹의 창업주 홍문규의 4남이자 신인 여배우 사냥이 취미인 금수저였고.
모두가 웃는 가운데 나 혼자만 인상을 찌푸리자 성민석 팀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넌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성 팀장님. 그 광고 HK 의류 홍보실에서 연락 온 겁니까? 아니면 비서실에서 연락 온 겁니까?”
“그게 무슨 차이가 있길래?”
웃던 배우 2실 선배들이 입을 다물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HK 의류면 한국 1위 의류회사라서 접대 같은 것도 안 받잖아?”
“그렇지. 거기 구왕수 대표가 면도칼 같은 성격이지. 사회적 물의가 생길 만한 일은 절대 못 하게 하고.”
오덕구 팀장과 주영훈 팀장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성민석 팀장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비서실에서 직접 연락해 왔더라. 자기 회사 전무님이 유진이 이미지가 신상 브랜드와 잘 어울릴 거 같다고 딱 찍으셨다더라고. ”
HK 의류는 그룹의 창업주인 홍문규 회장의 측근 구왕수 대표가 무려 20년 동안이나 공을 들여 업계 1위로 키워 낸 회사다.
하지만 앞으로 1년 뒤.
구왕수 대표가 모종의 이유로 사표를 제출하고 현 전무인 홍성범이 대표로 승진하면서 HK 의류는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4남으로 그룹 승계권에서 벗어난 홍성범은 경영보다는 연예인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와 측근들이 모아둔 재산을 까먹는 재미로 살아가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리고 현재의 비서실의 직원들은 이미 차기 대표가 될 홍성범에게 줄을 대고 있을 거고.
즉 구왕수가 아닌 홍성범의 제안인 셈이었다.
구성철 실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불러 물었다.
“윤호야. 문제가 뭐냐?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얼른 설명해.”
“예. 거기 전무가 홍성범입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처음 듣는데? 발령된 지 얼마 안 됐나?”
“예. 홍성범 전무는 창업주 홍문규 회장의 4남입니다. 홍보실을 통한 연락이라면 회사의 정식 제안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하지만 비서실에서 연락이 온 건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닌 거 같은데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자 다들 상황을 이해했는지 혀를 찼다.
구성철 실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다들 재벌 3세에 실세라는 것들이 직접 연락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회의실에 찬물이 싸악 끼얹어졌다.
연예인이 첫 번째로 피해야 할 게 스캔들이라면 두 번째는 스폰 제의다.
과거에는 스폰서 없이 광고를 따는 게 힘든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방송 권력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연예인의 힘이 생긴 지금은 다르다.
물론 여전히 꽤 많은 배우와 아이돌들은 편하고 쉽게 가기 위해 스폰을 받아들이지만.
“성 팀장. 앞으론 잘 알아보고 하자. 이 판 뻔하잖아? 잘나가다가도 한 번 삐끗하면 끝장나는 거.”
성민석 팀장은 마음이 급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게······. 죄송합니다.”
“그게 내가 너 갈구는 게 아니라 어휴 됐다. 사람이 실수할 때도 있지. 길게 말하지 말자.”
성민석 팀장은 재차 사과하고 유진이의 담당인 내게도 미안하다고 사과해왔다.
“근데 정 대리. 정 대리는 HK 의류의 내부 사정을 어떻게 그리 잘 알아?”
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친구가 거기서 일하고 있거든요. 개차반 같은 전무가 하나 와서 회사 분위기 망친다고 다들 난리랍니다.”
“아 그래서······. 여튼 늦게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바로 거절할게.”
잘 둘러대자 성민석 팀장이 다시 홍보팀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회의가 끝날 무렵.
홍보팀으로 돌아갔던 성민석 팀장이 기사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홍보팀 성민석 팀장 : 이거 참고해. 유진이 맞상대 좀 까다롭겠는데? (기사 링크)]
[(속보) 까메오 페이지에서 밀리언 페이지를 달성한 대작 <밤하늘의 달빛내림> 전격 드라마화!]
-MBS의 <밤하늘의 달빛내림> SBC의 <파란 하늘>. 4월 드라마 대전의 승자는?
‘벌써?’
원래라면 7월에 런칭했어야 하는 드라마 <밤하늘의 달빛내림>이 <파란 하늘>의 경쟁자로 편성되다니.
‘이건 만만치 않은데.’
<밤하늘의 달빛내림>은 최고 시청률 20.5%를 달성한 히트작이니까.
* * *
배우 3실 김동수 실장은 여배우 이사랑이 정유진을 칭찬하는 기사를 읽고 있었다.
“왜 여주인 영인이가 아니라 정유진이만 언급되는 거냐고!”
김동수의 화가 폭발하자 주영인을 전담하는 강명길 팀장이 황급히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 그게 배우 2실에서 수작을 부린 거 같습니다. 현장에서 정윤호 그놈이 이사랑 선생님과 같이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이더라고요.”
“야! 넌 그걸 이제 말해!”
“죄 죄송합니다.”
“하여튼 쓸 만한 놈이 하나도 없어! 정윤호 그놈 반만이라도 하란 말이야!”
김동수가 이렇게 과잉반응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영인과의 계약이 6개월도 남지 않았으니까.
거친 숨을 몰아쉬던 김동수가 급히 전화를 들었다.
-예. 홍보팀 이춘식입니다.
서울예술종합대학교 라인인 이춘식이 전화를 받았다.
“나다.”
-아 김 실장님.
“지금 당장 영인이 관련 기사로 연예면을 쫘악 깔아. 총알은 바로 쏴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실장님.
“왜?”
홍보팀 이춘식 대리는 정유진에게 온 HK 의류 2억짜리 광고를 2실에서 퇴짜를 놓았다는 걸 알렸다.
“뭐? 2억짜리를?”
-근데 왜 퇴짜를 놓은 건지 성 팀장님이 아무 말씀을 안 해주십니다.
순간 김동수의 눈빛이 번뜩였다.
‘금액을 올려 받으려는 건가?’
“알았어. 혹시나 HK에서 또 연락 오면 나한테도 바로 연락 줘.”
전화를 끊으려는데 이춘식이 말했다.
-그리고 그 광고. 홍보실이 아니라 비서실에서 직접 컨택해 온 겁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고요.
“비서실? 오케이. 알았어.”
전화를 끊은 김동수는 급히 운영 이사실로 연락을 넣었다.
HK 의류의 비서실장이 운영 이사 이기철의 고등학교 동문이었으니까.
김동수의 머릿속은 운영 이사 이기철의 인맥을 이용해 HK 의류의 새 모델로 주영인을 꽂아 넣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윤호 니가 배가 불렀나 본데 그렇다면 이번 건은 내가 먹으마.”
정윤호가 광고 퇴짜를 놓은 게 광고비 인상을 위해서라 생각한 김동수의 얼굴에 짙은 웃음이 깃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