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화
7. 첫날 5
현장으로 돌아오니 유진이의 촬영이 막 끝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12일]
-PM 05:3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강동경희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미소가 죽었다.)
미소가 죽는다는 일정이 드디어 다이어리에서 사라졌다.
“휴우.”
이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사이 촬영을 끝낸 유진이가 손을 흔들면서 주차장으로 뛰어왔다.
“윤호 오빠~! 미소야~!”
폰을 주머니에 넣고서 미소와 함께 차에서 내려 유진이를 맞았다.
“촬영에는 문제없었지?”
“넵! 당연하죠.”
유진이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렸다.
본 촬영에 들어가서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촬영을 끝냈단다.
잘했다 내 배우.
“커피는?”
“예. 김솔잎 작가님께 보온병째로 드렸어요. 진짜 좋아하시던데요? 오빠 커피 완전 예술!”
“겨우 그 정도로 뭘. 내가 다음에 진짜 맛있는 커피가 뭔지 보여줄게.”
“오올. 기대되는데요?”
활짝 웃던 유진이가 내 등 뒤에 숨은 미소를 발견했다.
“미소야. 왜 삼촌 뒤에 숨어있어?”
“그 그게요. 유치원에 있으라고 했는데 말 안 들었잖아요. 잘못했어요.”
미소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울상을 짓는다.
막상 유진이 얼굴을 보니 자기가 잘못한 게 떠올랐나 보다.
착한 녀석 같으니.
“음. 그러면 우리 미소. 혼나야겠네?”
“으······ 응.”
유진이가 짐짓 화난 척 인상을 찌푸리자 미소는 몸을 움츠리고 혼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순간.
유진이가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오늘은 이모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용서할게. 대신 담부터는 말 잘 들어야 해~?”
순간 미소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진짜?”
“대신 앞으론 진짜로 그러면 안 돼?”
“응. 미안해 이모. 안 그럴게요!”
“이제 안 그러기로 약속!”
“약속!”
“엄지 도장도 찍고!”
“도장! 꾹!”
올해 23살인 유진이와 6살인 미소는 호적상으로 엄마와 딸이었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늘 이렇게 이모와 조카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행복한 표정을 보자 절로 흐뭇한 웃음이 나온다.
수고했어 윤호야.
죽느라 힘들었고 구하느라 애썼다.
그리고 이번처럼 운명의 신이 간섭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지금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는 한 못 할 일은 없으니까.
이제 남은 일정은 하나뿐.
오늘 일이 끝나면 원룸으로 돌아가서 간만에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두 다리를 뻗고 잘 생각이다.
회귀한 기념에다 두 사람을 구한 보상으로 말이다.
“자 그러면 방송국 구경하러 갈까?”
“네~.”
난 마지막 스케줄을 위해 두 사람을 태우고 MBS 방송국으로 향했다.
* * *
<아침이 간다>의 촬영을 잘 끝냈다는 자신감이 붙어서인지 마지막 일정인 MBS <퀴즈 퀴즈>의 녹화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유진이의 역할은 꽃병풍.
마이크도 없는 단순한 게스트지만 방실방실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보기 좋게 나왔다.
덕분에 PD로부터 다음 주 한 번 더 나오라는 제안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린 MBS 방송국 앞에 있는 ‘원조 할매 감자탕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미소가 워낙 한식을 좋아한 터라 피자헛이 아닌 이곳으로 급히 예약을 바꿔야 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감자탕을 앞접시에 덜어 유진이와 미소의 앞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유노 삼촌.”
“오빠. 오빠건 제가 떠드릴게요.”
아직 연예인으로 자각이 없는 유진이가 내게 감자탕을 떠주려 한다.
“됐네요. 연예인은 그런 거 하는 거 아닙니다. 매니저한테 맡겨 두세요.”
떠받들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탑 엔터테인먼트의 연예인들에 비하면 유진이는 천사나 다름없다.
감자탕을 앞접시에 덜면서 조심스레 가스 유출 사고가 날뻔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우 우리 집에서 가스가 누출됐었다고요?”
“응. 그러니까 오늘은 모텔에서 자야 할 것 같아. 어차피 내일 스케줄도 없잖아.”
“난 그것도 모르고······”
“아냐. 조금. 아주 조금 유출된 거라서 금방 막았어. 소방관 아저씨가 말하는데 그 정도로는 불도 안 난다더라.”
TV에서는 일부러 부풀려 말할 거니까 믿지 말라고 내 말만 들으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유진이가 미소를 쳐다본다.
“우리 미소는 괜찮아?”
“응! 나 괜찮아. 근데 여기 감자탕 진짜 맛있어!”
어느새 접시에 담긴 건더기를 다 먹은 미소는 국물까지 싹 다 마신 상태였다.
“삼촌. 나 한 그릇만 더 주면 안 돼요?”
미소가 양손으로 잡은 앞접시를 내민다.
“안 되긴? 얼마든지 줄게.”
미소의 앞접시에 감자탕을 잔뜩 덜기 시작했다.
산처럼 쌓여가는 감자탕 건더기를 본 미소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우와! 유노 삼촌 짱!”
이 와중에도 유진이는 미소를 이리저리 살폈다.
유진이는 미소가 티끌만큼도 상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조금씩 표정이 풀렸다.
“오빠. 고마워요 진짜. 미소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저 진짜 어떻게 됐을지도 몰라요.”
감자탕을 앞에 놓고 유진이가 눈물을 글썽댄다.
가게에 사람들이 많았기에 급히 말을 돌렸다.
“됐어. 별일 아니었대도? 그나저나 주인아줌마한테 전화 안 해도 돼?”
“아 맞다. 전화해야죠.”
주인아줌마와 통화를 마친 유진이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유진이가 내 오른손을 꼭 부여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도 우리 미소 아프지 않게 해 주시고 저도 잘 나가게 해 주세요~.”
잠깐.
너 지금 고사 지내냐?
순간 미소까지 내 왼손을 잡고서 엄마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유노 삼촌. 삼촌도 아프지 말고 우리 이모도 아프지 말고 미소도 안 아프게 해 주세요.”
그 순간 감자탕집에 와 있던 다른 손님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야. 사람들이 쳐다본다. 그만해.”
두 사람이 내게 매달려 빌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손님 중 한 명이 슬그머니 폰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렇게 속으로 외치며 두 사람에게 다급히 외쳤다.
“유진아. 오늘 촬영 무사히 마친 기념으로 사진이나 찍을까? 미소도 같이!”
“네~!”
유진이와 미소가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셋이서 웃으면서 셀카를 찍자 그제야 사람들이 오해를 풀고 다시 감자탕을 먹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찰칵!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찍은 셀카를 확인했다.
그런데 사진을 본 순간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눈물 자국이 남은 채 웃는 유진이와 오른손에 등뼈를 들고 함박웃음을 짓는 미소 그리고 26살로 돌아온 내가 다 같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오늘만. 오늘만큼은 이렇게 좀 행복 하자.’
그때였다.
부르르르.
요란하게 진동하는 폰이 내 상념을 깨웠다.
[부재중 전화 12통]
[발신자 : 김동수 3실장]
‘왜 전화했지?’
그런데 잔뜩 쌓여 있는 까톡 메시지를 본 순간 김동수가 전화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김동수 실장 : 야 어디야?]
[김동수 실장 : 야! 너 아까 천호동에 있었지?]
[김동수 실장 : 이게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해?]
[김동수 실장 : 진짜로 잘리기 싫으면 당장 회사로 튀어 들어와!]
아무래도 버라이어티한 오늘이 아직 끝나지 않았나 보다.
* * *
유진이와 미소를 데리고 잠실에 있는 내 원룸으로 향했다.
두 사람을 모텔에 재울까 싶었지만 아까 그 난리를 겪고 난 이후 두 사람을 낯선 곳에 재운다는 게 내키지가 않았다.
뒷좌석에 있던 유진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오빠. 괜찮아요? 김동수 실장님이 화 많이 나신 것 같던데?”
“별거 아냐. 신경 쓰지 마.”
태연스럽게 대답했지만 상황이 조금 꼬여버린 건 사실이다.
조금 전 동기인 이영진이 보내준 KBC 9시 뉴스 영상에는 내 모습이 나와 있었으니까.
[KBC 9시 오늘의 뉴스 – (특종) 천호동 가스 폭발 통제]
(앵커) 오늘 오후 천호동에서 대형 가스 폭발이 발생할 뻔했습니다. 한 용감한 시민의 제보로 가스 누출을 조기에······
눈만 가린 얇은 모자이크를 했지만 나라는 건 우리 회사 사람들이라면 다 알 정도였다.
설마 장문기가 자기 신문사가 아닌 방송국에 사진을 넘길 줄이야.
팥빙수를 원샷 한 것도 아닌데 뒤통수가 다 얼얼하다.
두고 보자 장문기.
그때 내 눈치를 보던 유진이가 조심스레 말했다.
“오빠. 오빠 집은 제가 아니까 열쇠만 주시고 이쯤에서 저희 내려주고 얼른 회사로 가 보세요. 이러다가 짤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유진이의 착한 마음 씀씀이에 코끝이 찡해진다.
하지만 만렙 매니저로 회귀한 내겐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 그보다 유진이 너 아무리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라고 해도 너도 이제 연예인이야. 오늘 ‘아침이 간다’ 촬영분이 TV에 나가면 네 얼굴 알아볼 사람 길거리에 널렸다고. 미리미리 관리해야지. 조금 전에 보니까 볶음밥을 너무 먹더라. 탄수화물 줄여야지.”
감자탕 국물에 볶음밥을 삼 인분이나 볶아 먹은 걸 탓하자 유진이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으으으. 안 들린다~ 안 들려~.”
“들리는 거 다 알거든?”
“체. 잔소리쟁이. 맨날 살 빼래. 그리고 TV에 얼굴 한번 비춘다고 스타 되면 대한민국 사람들 전부 다 스타 되게요? 그거 말도 안 되는 거 알죠?”
냉정하게 말하면 어지간해서는 못 뜨지.
하지만 유진이 너라면 누구보다 잘할 거라는 거 내가 알고 있거든.
넌 되기 싫어도 강제 스타 행이야.
그런데 곁에서 눈치를 보던 미소가 뭔가를 주섬주섬 내밀었다.
500원짜리 동전 2개를 합친 크기의 스티커가 분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유노 삼촌. 이거 내가 아끼는 건데 이거 붙이고 가세요.”
미소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야광 스티커를 내밀었다.
파워터프걸이라는 유명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다.
“고마워. 그런데 우리 미소가 직접 붙여주면 삼촌이 힘이 더 날 거 같은데?”
미소가 조막만 한 손으로 내가 내민 오른손등에 파워터프걸 스티커를 붙여 준다.
“응! 여기요!”
탁탁.
“와~. 힘이 불끈불끈 솟는데?”
야광으로 빛나는 분홍색이 너무도 선명했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힘이 솟는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내게 스티커를 붙여 준 미소는 오른손을 머리 위로 쭉 뻗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파워터프! 삼촌한테 힘을 줘!”
이거 구호인가 본데?
난 잠깐 차가 정차한 틈을 타 미소를 따라 했다.
“파워터프!”
유진이도 그에 질세라 오른손을 머리 위로 쭉 뻗었다.
“파워터프!”
난 두 사람을 집 앞에다 내려준 준 뒤 곧장 회사로 향했다.
* * *
[굴렁쇠 엔터테인먼트]
설립 10년 차인 굴렁쇠 엔터는 전설적인 매니저인 강감찬 대표와 서울예술종합대학교 출신 매니저인 이기철 이사가 공동으로 설립한 업계 7위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다.
실질적인 업무는 총괄 본부장인 강감찬 대표의 딸인 강지영이 맡고 있고.
처음엔 강지영이 낙하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K-NET이란 엔터 회사에서 근무하며 회사 순위를 10계단이나 올려놓고 온 능력자였다.
실무도 빠삭한 데다 33살의 젊은 나이로 방송 3사 사장들과 술친구를 하는 인맥도 자랑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녀 밑으로 배우 1 2 3실과 가수 1 2실이 있다.
배우 1실은 주연급 배우들을 관리하는 주력인 데 비해 내가 속한 배우 2실은 주로 신예나 조연들을 관리하고 있어 가장 빈약한 실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배우 3실은 입사 때부터 에이스 소리를 듣던 김동수가 실장으로 승진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곳이었고.
배우 3실에서 관리하는 배우는 10명.
모두가 스타들이지만 하나같이 성격 개차반에 구설수가 있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앞으로 대략 3년 뒤.
김동수는 이 3실에 속한 스타들의 네임 밸류를 이용해 외부 투자를 받아낸 뒤 굴렁쇠의 주요 기반을 흡수하고 탑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다.
지금도 한창 배우와 소속 직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 중일 거고.
하지만 그 일은 이제부터 내가 막을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압구정에 있는 회사에 도착했다.
두둥~ 두둥~ 두두두두~ 두.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선 배경음으로 고전 영화 <죠스>의 배경음이 흘러나오고 있다.
띠링.
6층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회의실 앞에는 2실과 3실 매니저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3실 나규철 팀장이 가장 먼저 날 발견하고 비웃듯 말했다.
“정 스타 왔네.”
정 스타?
뭔가 했더니 담당 연예인보다 먼저 방송 탔다고 비꼬는 소리였다.
“현장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어서 상사 지시도 못 따른다더니 천호동은 왜 가? 간이 부은 건지 미친 건지.”
“야. 정 스타. 화면빨 잘 받던데? 누가 보면 연예인인 줄 알겠더라고.”
“1년 차 주제에 빠져 가지고.”
배우 3실의 직원들이 일치단결하여 비꼬자 내 직속 상사인 2실 오덕구 팀장이 내 편을 든다.
“야. 그만들 해라. 너희들도 전부 그보다 더한 대형 사고 몇 번씩은 쳤으면서······”
2실의 주영훈 팀장도 눈을 부라리며 누가 누굴 욕하냐며 대들고 있었다.
그런데 정 스타란 별명.
나쁘지 않았다.
회귀하니 속이 좋아졌나?
“들어가 보겠습니다. 선배님들.”
넉살 좋게 선배들에게 꾸벅하고 인사하고선 고성이 터져 나오는 회의실로 향했다.
이제 김동수를 만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