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화
69. 현장에서 1
<파란 하늘>이 크랭크인 한 지 3일이 지났다.
오늘은 유진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2화의 촬영을 시작하는 날이다.
난 코디와 함께 화장을 고치는 유진이를 기다리며 연예 뉴스 면을 채우고 있는 기사를 확인했다.
[<파란 하늘> 촬영 시작!]
[<파란 하늘>의 무서운 신예 김솔잎 작가. 스승 이지연 작가를 넘어서겠다 포부 밝혀.]
[휴먼스토리의 히로인 정유진. <파란 하늘>에서도 히로인?]
[아픔을 잊고 밝은 표정을 되찾은 정유진. 시청자들이 보내주신 과분한 애정 좋은 연기로 보답을 다짐.]
대부분이 <파란 하늘>과 유진이에 대해 호의적인 내용의 기사들이다.
그런데 장문기 기자만큼은 역시나 스타일이 달랐다.
[충격! 정유진. “미소야. 사실은······.”]
[단독. 정유진. 사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충격 보도. 정유진. 그녀의 은밀한 곳에 숨겨진 점의 위치는······]
[교복이 한국에서 제일 잘 어울리는 여배우 1위!!]
장문기는 어그로가 가득한 제목으로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덕분에 유진이는 현재 실검 1위를 달성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사 댓글은 유진이가 아닌 장문기를 욕하는 내용이 태반이라는 거다.
(댓글)
-와 장문기 기자. 넌 진짜 기억했다. 어그로의 장인이다.
-사람 낚는 어부네;;;
-당연히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미소라는 게 기삿거리야? 제목에 낚였네;; -미소야 사실은······ 엄마는 배우란다? 장난해? 장난하냐고!
-교복이 제일 잘 어울리는 건 인정.
-발바닥의 점이 은밀해? 은밀하냐고!
-월척이야. 오늘도 낚시가 대박이구나. 파닥파닥.
-ㅋㅋㅋ 무슨 생각으로 이딴 제목을 지은 거야?
“장문기. 역시 제목 낚시는 당신이 최고라니까.”
난 장문기의 어그로에 감탄하며 촬영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까지 현장을 채웠던 아역들이 다 빠진 상태.
이제부터 나가는 방송의 시청률은 아역 핑계를 댈 수도 없게 되었다.
“영인 씨. 잘 부탁해.”
강수훈 PD가 긴장한 듯 바싹 마른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예. 감독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강수훈 PD가 제작 스태프들의 준비 상태를 점검한 뒤 확성기를 잡았다.
“자. 그럼 씬 13. 레디~ 액션!”
주영인이 교복에 가방을 멘 모습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하늘 돼지갈비’의 첫째 딸 ‘김하늘’은 고기를 절대 못 먹는 독특한 입맛의 소유자.
약간은 이기적이지만 공부를 잘해 주변에서 인정받는 똑똑한 첫째 딸이다.
주영인은 슛이 돌자마자 고3 특유의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짓는 ‘김하늘’로 변했다.
주영인이 연기를 이어갈수록 스태프들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사랑이 그 연기를 받아주기 시작한 순간 스태프들의 놀라움은 감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명품 배우 이사랑.
그녀는 최근 엄마 역 시어머니 역으로 익숙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주영인 이상으로 당대의 청춘스타였다.
게다가 젊은 시절부터 과감한 애드립을 펼치면서도 결코 시나리오의 큰 틀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연기로 천재라는 평을 받은 대배우였고.
그런 이사랑이 아역부터 쌓아온 탄탄한 연기 내공으로 엄마 역할을 연기하자 현장 이곳저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강수훈 PD가 들뜬 표정으로 확성기를 잡았다.
“커트! 영인 씨 이사랑 선생님. 두 분 수고하셨어요.”
성인 배우들만 나오는 첫 씬의 촬영이 끝나자 스태프들 사이에서 요란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영인의 성격과 별개로 연기력만큼은 크게 흠잡을 데가 없으니까.
대기 의자에 앉아 대본에 심취해 있던 유진이를 일깨웠다.
“유진아. 곧 네 차례야. 준비하자.”
교복 옷을 입은 유진이는 대본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만요. 좀 불안해서요.”
“하던 대로만 해. 그리고 망해도 됨. 내가 더 좋은 역에 꽂아주면 되지 뭐.”
실없는 농담에 유진이가 장난스레 말했다.
“아 진짜. 나 망하면 오빠 탓이에요?”
“그래. 그래.”
하지만 유진이가 망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주먹을 맞대고 파이팅을 외쳤다.
그런데 유진이가 다시금 묻는다.
“근데 오빠. 저 너무 믿는 거 아녜요?”
“매니저는 당연히 배우를 믿어야지.”
“이번 건 진짜 감동이다. 알았어요. 지켜보세요. 제대로 해 볼 테니까.”
그때였다.
“정유진 씨. 준비하세요!”
조연출 양순호의 외침에 유진이가 일어섰다.
“잘하고 와. 화이팅!”
유진이의 연기는 결코 주영인에게 뒤지지 않았다.
유진이가 맡은 둘째 역인 노을이는 허술하고 빈틈 많은 성격이지만 웃음도 많고 집안일을 잘 돕기에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사랑받는 역할.
다만 두 분 부모님의 관심이 언니 하늘이만을 향해 있는 게 인생의 유일한 불만이다.
울고 웃는 유진이의 연기가 이어질수록 스태프들의 표정은 더욱 환하게 변했다.
한눈에도 주영인에게 떨어지지 않는 연기력이었으니까.
“커트~. 오케이! 유진 씨. 앞으로도 이대로만 좀 부탁할 게. 응?”
“감사합니다!”
특히 촬영감독 이성환이 카메라에 잡힌 모습이 좋다며 칭찬을 해댔다.
“확실히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여고생 연기가 거부감이 없네. 표정이 다른 배우들과는 달라. 올해 졸업한 지 몇 년이라고 했지?”
“4년요.”
촬영감독 이성환이 깜짝 놀란다.
“뭐? 그렇게나 많이 지났어?”
“호호. 어리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촬영감독은 유진이가 마치 자기 딸 같았다며 키득대고 웃었다.
“따님이 애를 좀 많이 먹이시나 봐요? 저처럼?”
유진이가 장난스레 말하자 촬영감독이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애는······ 착해.”
촬영감독의 너스레에 모든 스태프가 폭소를 터트렸다.
유진이는 촬영을 마치고도 스태프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주영인이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과 달리 주변과 잘 어울리는 유진이의 모습에 질투가 났겠지.
‘남 탓하지 마. 네 성격이 문제니까.’
대기 의자로 돌아온 유진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역시나. 아직 감이 잘 안 오는 거 같아요.”
감이 안 오는 게 그 정도 연기력이면 앞으로 얼마나 하려고?
“내가 볼 땐 잘하던데?”
“그거야 오빠가 내 편이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죠. 실제는 좀 다르다니까요?”
이미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
필모 관리만큼이나 중요한 멘탈 관리.
“잘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다음 씬은 이사랑 선생님과 호흡을 맞추니까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다녀오면 돼. 어깨에 힘 빼고.”
그때 조연출 정미선이 급히 뛰어 왔다.
“유진 씨. 어서 의상부터 갈아입고 다음 씬 준비해 주세요.”
“예! 가요!”
나는 덮는 담요를 들고 유진이의 뒤를 따랐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유진이는 하늘 돼지갈비의 알바 생으로 변했다.
연탄을 이용해 돼지갈비를 굽는 장면을 찍는 탓에 자욱한 연기가 세트장에 피어올랐다.
“범규 형님. 불 갈 때 조심해 주세요. 연탄 깨지면 화상 입을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라니까. 어릴 때부터 연탄 갈이는 제 담당이었거든. 이것도 오래간만이라 반갑네.”
아빠 역을 맡은 정범규가 손에 화상 방지 연고를 바른 후 연탄집게를 들었다.
짤칵짤칵.
새카만 집게가 짝짝대고 움직일 때마다 잿가루가 떨어졌다.
유진이는 아르바이트 복장으로 집게와 불판을 들고 있고 엄마 역의 이사랑은 넓은 쟁반에 반찬을 담은 채 서 있었다.
“자 씬 22입니다. 다들 불조심하시고 보조 출연자분들은 편하게 수다 떠시면 됩니다. 레디!”
콜사인이 떨어지자 연탄집게를 든 장범규가 손님상의 연탄을 성공적으로 교체했다.
『하이고~. 하늘이 엄마! 이번에도 하늘이 전교 1등 했다면서? 내가 부러워서 잠을 못 잔다니까?』
보조 출연자의 너스레에 테이블에 반찬을 깔던 이사랑이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벌써 소문났어? 오호호.』
『그래 우리 딸이 그러더라고. 에휴 우리 딸은 또 꼴찌야. 내가 동네 챙피해서 얼굴을 못 들겠어.』
『하여튼 부러워 죽겠다니까. 우리 큰아들이 하늘이 반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 하여간 첫째 딸은 꼭 서울대 보내라고』
단골손님의 덕담에 이사랑이 주방을 보며 외쳤다.
『여보! 여기 2번 테이블에 서비스 팍팍 넣어주세요!』
환히 웃던 단골손님이 불판을 들고 있던 유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근데 저기 둘째 딸은 성적이 어떻게 되나?』
손님의 돌발적인 질문에 이사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원래는 유진이가 말을 돌리며 다른 화제로 전환한다.
그런데 그 순간 이사랑이 애드립을 시작해 버렸다.
『얘는 첫째랑 달리 뒤에서 1등! 언니랑 달리 공부 머리가 없어.』
갑작스러운 대본 변경에 제작진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하는 유진이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연기를 이어갔다.
마치 노을이 그 자체가 된 것처럼.
『엄마!!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
불판을 들고 있던 유진이가 불같이 화를 내었다.
강수훈 PD가 말없이 손을 들어 스태프들의 동요를 진정시켰다.
컷이 아닌 촬영 속행.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며 두 사람의 연기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요게 어디서 엄마한테 소리를 질러?』
테이블에 반찬 세팅을 끝낸 이사랑이 쟁반을 한 손에 들고선 유진이의 등을 짝하고 때렸다.
찰싹.
양손에 불판과 집게를 들고 있는 유진이는 몸을 비비적 꼬며 아파했다.
『악! 왜 때려? 아 아아. 아프잖아!』
낙지처럼 꾸물대는 모습에도 불판과 집게를 놓지 않는 프로 알바의 모습.
유진이의 움직임이 마치 흐느적대는 춤 같아 스태프들이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써야 했다.
『얘가 왤케 방정맞아. 빨리 불판부터 놓아드리지 않고!』
『진짜 내 엄마 맞아? 딸이 아프다는데! 그리고 내 성적 말하면 어떻게 해! 쪽팔려서 내일부터 어떻게 하라고!』
『그럼 내가 니 엄마지? 계모냐? 그리고 쪽팔린 줄 알면 언니처럼 공부나 잘해 이것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거냐고 유진이가 빽빽거리자 이사랑이 더욱더 핀잔을 준다.
『맨날 그렇게 언니랑 비교할 거면 가게 일은 언니보고 하라고 그러지 왜!』
이사랑이 발끈해 쟁반을 들어 올린다.
유진이가 화들짝 놀라 불판을 맞서 들어 올렸다.
한 발을 뒤로 뺀 완벽한 방어 자세로 불판을 방패처럼 내밀었다.
오른손에 붙들고 있는 집게를 휘적대고 있었고.
『또 때리려고?』
이사랑이 손을 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휴. 얘는 누굴 닮아 이런지······』
순간 유진이가 울컥하고 올라오는지 큰소리를 친다.
『닮긴 누굴 닮아? 엄마 닮아서 그렇지!』
바락바락 대드는 유진이의 말에 손님들이 킥킥대며 웃음을 지었다.
『푸하하하.』
보조 출연자들이 웃음을 못 참고 터트려버렸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반응에 감독은 여전히 컷을 외치지 않고 있다.
『으이구! 속 터져!』
이사랑이 주먹을 휘두르며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엄마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서야 유진이는 연탄불 위에 불판을 놓았다.
조금 전 소란 떨던 둘째 딸은 온데간데없이 활짝 핀 영업 미소를 띤 유진이의 모습에 단골손님 1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맛있게 드세요. 손님.』
한참을 웃던 남자 1이 정신을 차리고 원래 대본의 대사로 돌아왔다.
『그래. 그래. 공부 못하면 어떠냐? 이렇게 참한데. 아 그리고 이거 용돈이다.』
남자의 손에서 1999년에 쓰던 천 원짜리가 나온다.
6천 원.
유진이도 대본으로 돌아와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우와! 감사합니다!』
꾸벅하고 절하는 유진이에게 손님이 마지막 말을 한다.
『언니 3천 원 주고 너 2천 원 그리고 동생에게 1천 원 줘라.』
『예? 언니한테도 주라고요?』
유진이가 자기만의 용돈이 아닌 걸 알고 울상을 지었다.
『형제자매끼리는 사이좋게 지내야지. 내 들어보니 너희 언니가 동생들을 그렇게 아낀다던데.』
『우리 언니가요? 헹! 말도 안 돼.』
입술을 삐쭉 내민 유진이가 손을 들어 엑스자를 만들자 현장에는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커~트!”
강수훈 PD가 흡족한 표정으로 말한다.
“으하하하. 아주 좋아!”
“이야! 유진 씨가 불판을 아주 잘 다루네?”
“왜 고깃집에서 알바 했다잖아? 몰랐어?”
“어쩐지 노련해 보이더라니.”
첫 촬영에서 이 정도면 대성공이다.
유진이가 연신 꾸벅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치고 우리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뒤로 이사랑 선생님이 따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