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화
68. 크랭크인
“뭐라고?”
“쉿!”
미소가 유진이의 방안을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입을 막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조심하란다.
유진이가 화가 난 이유.
어제 온다고 해놓고서 안 와서 그렇단다.
같이 먹으려고 야식도 잔뜩 시켜놓았었다나?
그런데 안 와서 유진이가 투덜거렸다고 한다.
맨날 바쁘다면서.
그래서 미소도 덩달아 화가 났다고 한다.
나 때문에 엄마가 삐졌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유진이는 분명 미소가 날 보고 싶어서 삐졌다고 했는데?
하지만 미소의 말에 따르면 정반대였다.
유진이가 먼저 삐지고 그 뒤로 미소가 삐졌다고?
하지만 꼬치꼬치 캐물어 물어볼 수는 없었다.
어제는 너무 피곤했기에 내가 착각한 걸 수도 있으니까.
하여튼 어떻게 유진이의 화를 풀어줄까 하다 일단은 미소부터 공략하기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우리 미소는 아직도 삼촌이 미워? 삼촌이 인형도 사줬는데?”
미소가 방안을 쳐다봤다가 날 다시 쳐다본다.
그리고 손가락을 꼼지락대면서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건 아닌데요······ 그래도 엄마가 화 풀릴 때까지는 좋아할 수 없어요.”
입술을 앙다물고 제법 각오를 다진 모습이다.
품에 들고 있는 파워터프걸 인형을 살짝 곁에다 내려놓고서.
화는 풀렸지만 좋아할 수 없다고?
미소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가슴을 저릿하게 한다.
“미안 미소야. 그래도 용서해 주면 안 돼? 삼촌 엄청 힘들었거든. 엄마랑 미소 아프게 한 사람도 혼내주고 막 죽을 뻔한 사람도 구하고 그랬어. 응?”
두 손을 모으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미소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지란 눈빛으로 방안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그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이내 미소가 결심했는지 내 귀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그러면 내가 삼촌 용서한 거는 비밀. 알았죠?”
“응. 비밀.”
그제야 미소가 다시금 파워터프걸 인형을 품에 안았다.
닫혔던 문이 열리더니 유진이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
“피곤할 텐데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천천히 와도 되는데······”
거짓말.
입은 웃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잖아.
난 유진이를 보며 미소에게 말한 것처럼 똑같이 굴었다.
미안하다고.
어제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몇 시까지 바쁘게 움직였는지를.
내 말을 듣는 유진이의 얼굴이 흥미진진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들뜬 표정으로 추임새를 넣으면서.
“와 진짜요? 선우 씨 대단하다.”
특히나 유진이는 방선우에 관한 이야기를 놀라워했다.
자기는 살면서 ‘천재’를 본 적이 없다면서.
웃기시네.
거울 보면 그 안에 천재가 있을 텐데.
“오빠. 나도 꼭 한 번만 만나게 해주시면 안 돼요?”
“안 되긴.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칫······ 맨날 말만. 먹는 건 마음대로 먹지 말라면서.”
유진이가 샐쭉하게 째려본다.
“어. 그건······ 안돼. 먹는 것만 빼고.”
“이거 봐. 왜 말이 달라져요? 오빠도 못 믿겠어.”
유진이가 삐진 척 군다.
마치 미소처럼.
미소가 가끔 삐진 척하고 어리광을 부리는 게 누굴 닮은 건가 했더니 유진이를 닮은 거였다.
“알았어. 오늘 점심때까지만은 그럼 마음껏 먹자.”
“두말하기 없기?”
“응.”
그제야 유진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생각해보니 어제 치킨도 먹었다던데.
아니다.
그냥 넘어가 줘야겠다.
“이제 슬슬 집에 가자. 기자들도 철수했다더라.”
회사에선 이사하지 않겠다는 유진이를 위해 보안장치까지 설치했다.
유진이는 고개를 끄덕이곤 미소의 옷을 만지작거렸다.
“미소야. 이제 우리 집에 가자. 옷 갈아입고!”
“응. 엄마!”
“그리고 이제 밖에서도 엄마한테 꼭 엄마라 불러야 해?”
유진이의 목소리가 어떤 때보다 커졌다.
“알았어 엄마!”
미소가 활짝 웃으며 큰 소리로 대꾸했다.
인사를 마친 유진이는 미소를 안아 든 채 말했다.
“오빠. 고마워요. 오빠 덕분에 이제야 미소가 진짜 제 딸이 된 거 같아요.”
“삼촌 짱짱!”
가슴이 뭉클했다.
“별말을 다 한다.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자 어서 돌아가자. 아줌마 기다리시겠다.”
짐은 다 싸놓았기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컨시어지들과 인사를 나눴다.
강감찬 대표가 준 보너스 봉투를 내밀었더니 다들 환한 미소로 마중해 줬다.
역시 수고한 만큼 보람이 있어야지.
나 역시도 그 보람을 느끼는 중이다.
[정성아 대리 : 대표님 지시사항으로 보너스 5백만 원 입금되었습니다. 정 대리님. 승진 축하드려요!]
입꼬리가 절로 실룩거렸다.
역시 굴렁쇠 엔터는 다닐 만한 회사였다.
* * *
며칠 간의 소란이 끝나 드디어 2월 7일.
한 주 연기된 <파란 하늘>의 크랭크인 날이다.
촬영 장소로 예정된 경기도 남양주의 젊음의 거리에 도착했다.
이름과 달리 상권이 죽은 터라 비어 있는 건물들이 많았다.
덕분에 붙어 있는 2층짜리 건물 2개를 통으로 6개월간 빌린 상태였다.
소품팀들이 두 건물에 ‘파란 횟집’과 ‘하늘 돼지갈비’란 간판을 붙여 놓았고 우린 두 가게가 사용하게 될 바로 앞 공용주차장에다 차를 대곤 고사를 시작했다.
2월이라 아직 쌀쌀한 바람이 주차장에 몰아쳤다.
“자자. 상은 여기로 놓고 배우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기자분들은 좀 떨어져서 찍어주시고요. 예. 예.”
SBC 휴먼스토리 팀뿐 아니라 메이킹팀 그리고 기자들까지 한데 모여 시끌벅적거렸다.
그런데 다들 유진이를 언급하고 있다.
“저기 출연진들 인터뷰 좀 합시다.”
“잠시만요! 고사 치르고 나서 인터뷰 자리 마련할게요!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리세요!”
“약속하신 겁니다? 오늘 정유진 씨 인터뷰 못 따가면 저 회사에서 잘려요.”
현장 총 관리를 맡은 블루드래곤의 차수연 제작 실장이 기자들을 만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잠시 후.
고사가 시작되었다.
“우리 파란 하늘 잘~ 되게 해주시고~.”
가장 먼저 정삼룡 CP가 돼지머리에 절을 하고 입에서 삼십만 원을 쾌척했다.
“이야. 통 크시다 우리 정 CP님.”
“흠흠. 더 넣고 싶은데 박봉이라 이게 끝이다. 자 이제 강 PD랑 김 작가도 같이 절해야지.”
강수훈 PD와 김솔잎 작가 그리고 차수연 PD가 절을 한 뒤 스태프들의 절이 이어졌다.
그리곤 이어서 배우들이 나서서 절을 하고 돈을 꽂았다.
유진이는 ‘하늘’ 역의 주영인과 ‘가을’ 역의 박진희와 함께 돼지머리 앞에 서서 절을 마쳤다.
그런데 유진이가 꺼내든 건 색깔이 달랐다.
유진이에 손에 들린 돈을 본 차수연 제작 PD의 표정이 뜨악하고 변했다.
“백만 원? 유진 씨! 이렇게 안 내도 돼요!”
현재 유진이의 한 회 출연료가 백만 원이다.
그 한 회 비용을 통째로 내자 현장에 술렁대는 소리가 일어났다.
“뭐 뭐야?”
“고사에 백만 원? 유진 씨 갑부야?”
“우리 드라마 대박 나겠는데?”
돼지머리에 꽂힌 돈은 오후에 있을 전체 회식에 쓰인다.
그 탓에 스태프들의 표정이 밝아지며 환호를 질렀다.
“이번에 저 때문에 시끄러웠던 데다 크랭크인도 늦춰지고······ 여러모로 죄송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회식도 좀 잘하자 싶어서요.”
유진이가 꾸벅하고 허리를 굽히자 스태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야. 정유진 멋지다! 화통하다!”
“유진 씨 덕에 오늘 거창하게 먹겠네. 갈비로 갑시다! 갈비로!”
명분 있는 돈이었기에 큰돈을 투척해도 버릇없다는 욕도 안 먹을 수 있었다.
배우들도 환히 웃으며 유진이의 행동을 이쁘게 보고 있었다.
난 올라가는 입꼬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현장을 지켜보던 기자들의 플래시가 연신 터지고 있었으니까.
순간 오늘 올라올 기사 타이틀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유진. <파란 하늘> 고사에 100만 원 쾌척!]
[정유진. “파란 하늘이 꼭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유진이의 행동 하나하나는 스타가 가진 자질 중 하나인 ‘화제의 중심에 서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배우들을 보던 중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불안요소 1호였던 주성진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유진이를 피했다.
반대로 연상 킬러인 최종혁은 유진이를 보는 눈이 토끼를 본 늑대처럼 음흉하게 변했고.
* * *
“자 이쪽 좀 봐주세요. 네네. 좋습니다.”
“강 PD님. 감독으로서 이번 드라마에 출연 중인 배우들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시청률 몇 프로가 목표입니까?”
<파란 하늘>의 제작진과 배우들은 촬영장 한편에서 단체 사진을 찍으며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이어갔다.
펑크 난 일정에 맞춰 급히 편성된 드라마였기에 제대로 된 제작 발표회를 가질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시대 배경이 1980년과 1999년인 탓에 배우들은 오래전에 유행하던 스타일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배우들의 의상을 구경하고 있자니 마치 타임슬립이라도 한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정작 난 회귀까지 했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는 동안 인터뷰가 끝났다.
강수훈 PD가 기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희 파란 하늘. 그때 그 시절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성공을 제대로 그려보겠습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강수훈 PD의 출사표에 기자들이 박수로 성공을 기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다음에 다시 기자분들을 모시는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제작 실장 차수연이 인터뷰 종료를 알렸다.
그런데 그때 스타 특종의 장문기가 다급히 손을 들었다.
“차 실장! 정유진 씨는 따로 시간 좀 빼 주시기로 했잖아!”
스타 특종의 장문기는 주변 배우들의 표정이 불쾌하게 변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유진의 이름을 거론했다.
솔직히 현재로는 <파란 하늘>보다 정유진이라는 배우가 화제의 중심이었으니까.
몇몇 주연급 배우들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주영인이 죽을 맛일 거다.
명색이 주인공인데 조연에게 포커스를 뺏긴 셈이니까.
“물론이죠. 유진 씨. 이쪽으로 좀 와 주실래요?”
차수연 제작 PD는 장문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조그마한 화젯거리라도 기사로 만들어지는 게 좋으니까.
유진이가 차수연 PD를 따라 촬영장 구석으로 향하자 기자들의 80% 이상이 유진이를 따라 우르르 움직였다.
나 역시 유진이의 곁에 서서 인터뷰를 도왔다.
“정유진 씨.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조카를 입양할 생각을 다 하셨습니까?”
“소속사에서는 처음부터 미소가 딸이라는 걸 알고 있었나요?”
“주강용 기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마디 해주시죠!”
찰칵찰칵!
유진이를 향해 연신 스포트라이트가 터졌다.
마치 주인공이 된 듯 드라마 시작도 전 제대로 카메라 마사지를 받은 셈이다.
“자 인터뷰는 여기까지!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차수연 제작 실장이 기자들을 몰고 나가려는 가운데 날 물끄러미 쳐다보던 장문기 기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쪽 매니저님은 나 아시죠? 우리 천호동에서 본 것 같은데요?”
장문기 때문에 난 정 스타란 별명을 얻으며 곤혹스러운 처지도 겪었지만 최준우 사건을 처리할 때는 큰 도움을 받기도 했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주변의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장 기자. 설마 혼자 단독 기사 내려는 건가?”
“야. 혼자 먹지 말고 같이 좀 먹자.”
장문기는 주변 기자들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고 나를 보며 연신 윙크를 날려댔다.
독점 기사를 달라는 의미다.
별수 없지.
은혜도 갚아야 하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그의 도움을 받을 일들이 있으니까.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타이밍에 기삿거리를 주면 장문기는 유진이의 기사를 ‘좋게’ 적어줄 게 분명하다.
자신의 ‘특기’로 유진이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게 해줄 거고.
난 장문기에게 따로 보자는 말을 남기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 * *
남자 주연을 맡은 주성진이 임시 컨테이너로 만든 분장실 뒤편에서 몰래 담배를 물었다.
크랭크인이 일주일이 미뤄져 스케줄 몇 개가 날아간 탓에 기분이 별로였다.
“후우~.”
길게 담배 연기를 뿜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부스럭.
화들짝 놀라 급히 담배를 끄려다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번 드라마에서 형제지간으로 호흡을 맞추는 최종혁이다.
“뭐야? 형은 담배 안 피운다더니. 구라였어?”
“새꺄. 기잔 줄 알았잖아.”
“기자들이야 전부 정유진 찍으러 갔잖아. 어떻게 된 게 주연보다 카메라를 더 몰고 다니네.”
“기레기 새X들. 하여간 이슈만 생기만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달라붙어서는······”
연예인들의 인기에 대한 질투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나도 한 대만 줘.”
주성진이 건넨 담배를 최종혁이 입에 물었다.
“불도.”
“내가 니 매니저냐?”
하지만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순순히 불을 붙여 주는 주성진이었다.
휘우우.
잠시 말없이 담배만 태우던 주성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유진이에게 딸 있다는데 그래도 접근할 거야?”
“형은?”
“난 손절. 딸 있다는 소리만 들어도 관심이 뚝 떨어졌어. 아무리 입양이라고 해도 부담스러워서.”
최종혁은 피식 웃으며 다시 한 번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런 최종혁의 입가로 진득한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너? 혹시?”
“혹시 뭐?”
“진짜로······ 접근하는 거 아니지?”
최종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 진짜로 접근할 건데?”
“너 연상만 노리는 거 아니었어?”
“딸이 있다니까 또 느낌이 다르더라고. 모성애가 강한 여자라 좋잖아? 오래간만에 진심이야. 나.”
주성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넌 나보다 미친 새X야.”
말을 마친 주성진이 촬영을 향해 사라져 버렸다.
최종혁은 사라지는 주성진을 보고 씨익 웃음을 지었다.
예전에는 마동팔 본부장이 시켜서 억지로 하는 일이었다면 지금은 아니었다.
“인지도가 급상승한 정유진의 남자라. 타이틀로 괜찮은데?”
정유진과 얽히는 것만으로도 최종혁이란 이름이 더욱 알려질 터.
정유진의 끝내주는 몸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자. 그럼 나도 가 볼까?”
담배를 끈 최종혁이 웃으며 촬영 현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