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4화
664. 일본 출장 2
“스즈키 대표님은 지금 최만식 대표를 만나고 계셔. 그래서 날 대신 마중 좀 가달라고 부탁해서 온 거야. 암튼 따라와. 숙소로 안내해 줄 테니까.”
굴렁쇠 엔터 자회사 A1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스즈키 모에카는 원래 날 마중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난 그녀를 만나 최은태 회장의 일본 쪽 비자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날 만나는 것을 뒤로 미루고 최만식 대표를 만나고 있다고 한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최만식 대표는 최은태 회장의 비자금이 A1부터 A10까지 중 어떤 자회사에 숨겨져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지금 상황은 도둑이 금고지기를 만나는 거나 다름없다.
순간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설마 그녀가 배신한 건가?’
최은태 회장은 스즈키 대표를 누구보다 신뢰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회귀 전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 그런 신뢰는 생각보다 쉽게 깨어지곤 했다.
막대한 돈이 눈앞에 있고 정당하고 젊은 후계자가 손을 내밀면 중간 관리자들이 말을 갈아타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의심이 맞는지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다만 차상진 실장이 보고 있는 앞에서 최은태 회장에게 전화를 걸 순 없었다.
그래서 난 스즈키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코자 했다.
뚜뚜-.
몇 번의 벨 소리가 울리는 동안에도 스즈키 대표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차상진 실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다.
“누구한테 전화해?”
“스즈키 대표님한테 전화하는 중입니다.”
“스즈키 대표는 지금 최만식 대표님이랑 회원제 클럽에 갔어. 거기 안에서는 전화 못 받아.”
몇몇 회원제 클럽들은 보안을 위해 폰을 반납한 뒤에야 입장할 수가 있었다.
진작 좀 말해주지.
“거기가 어딥니까?”
“SIBUYA55라고······ 근데 말하면 알긴 하냐?”
너무도 잘 안다.
SIBUYA55는 A1 엔터테인먼트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클럽으로 연간 회원권만 100만 엔 하는 고급 회원제 클럽이다.
입구에는 야쿠자 출신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고 입장과 동시에 폰이나 전자기기들을 반납하고 들어가야 했고.
“거기에 가봐야겠군요.”
“야. 네가 거기 가서 뭐 하려고?”
“스즈키 대표님을 뵈려고요.”
차상진 실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며 말한다.
“꿈 깨 인마. 거긴 회원제 클럽이라서 아무나 못 들어가는 곳이야.”
‘그건 당신 이야기고.’
난 들어갈 방법이 있다.
게다가 최만식 대표와 스즈키 대표가 만나고 있는 이상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만에 하나 스즈키 모에카 대표가 최은태 회장을 배신하고 최만식 측에 붙었다면 무엇보다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일본으로 와서 협력사인 아리스 프로덕션과의 협업 관계를 종료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순간 차상진 실장이 짜증을 버럭 내며 말한다.
“하여간 난 널 회사까지 픽업해두라는 지시를 받고 왔으니까 거기서부터는 네가 가든 말든 알아서 해!”
차상진 실장은 그 말을 한 뒤 주차장으로 몸을 돌린다.
난 캐리어를 끌고 그 뒤를 뒤따라가며 급히 최은태 회장에게 문자를 남겼다.
[정윤호 : 스즈키 대표가 공항에 배웅을 안 나왔습니다. 최만식 대표를 만나고 있다는 데 지금 당장 만나러 갈 예정입니다. 문자 보시면 바로 연락 좀 해 주십시오.]
난 그렇게 문자를 보내놓은 뒤 차상진 실장이 몰고 온 차 트렁크에다가 짐을 실었다.
* * *
도쿄 시부야에 있는 굴렁쇠 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 A1 엔터테인먼트로 가는 동안 차상진 실장은 끝없이 투덜거렸다.
사실상 나로 인해 골든로드와 함께 일본으로 유배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현재 골든로드와 함께 복귀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골든로드 멤버들은 처음 한국에서 사고를 치고 일본에 쫓겨났을 당시까지만 해도 개념을 상실하고 휴가를 받았다며 쇼핑을 즐겼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한 굴렁쇠 엔터에서 체리블라썸이 대박 나고 강하나와 서연우 세리의 솔로곡마저 크게 성공하자 큰 위기감을 느낀 게 확실했다.
근처에 있는 아리스 프로덕션에 출퇴근하며 보컬과 댄스 트레이닝을 시작하고 재기를 노리고 있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굴렁쇠 엔터와 아리스 프로덕션과의 협업을 끝내면 골든로드의 부활 프로젝트도 중단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는 차상진 실장은 운전해 가는 동안 일본 쪽에 간섭할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며 윽박을 내질렀다.
“야! 넌 내일부터 하는 ‘프로젝트 I.O.A’만 신경 쓰고 우리 골든로드 애들은 쳐다도 보지 마. 알았어?”
“예~ 예~”
난 창밖으로 지고 있는 도쿄 하늘의 노을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대체 왜 최은태 회장에게 충성한다는 스즈키 대표가 나와 만나자는 약속을 어겼을지만을 생각하며 말이다.
* * *
끼익.
도쿄 시부야에 있는 A1 엔터테인먼트의 5층짜리 소형 빌딩 주차장에 도착했다.
A1 엔터테인먼트는 직원이 5명밖에 없는 관리회사다 보니 2층의 사무실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다 임대준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인 PR 활동이나 홍보 같은 연예계 업무는 이곳에서 200m 떨어진 협력사 아리스 프로덕션이 담당한다.
차에서 내리자 차상진 실장이 위를 가리킨다.
“이 회사 사람들은 수익 정산 관리랑 법무 대리만 해줘서 연예계 쪽은 아예 몰라. 잠깐 인사하고선 근처에 잡아둔 비즈니스호텔에 짐 풀어.”
그러나 난 차상진 실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부터 난 자회사인 A1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면서 천문학적인 자금을 관리하는 스즈키 대표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전 스즈키 대표님부터 먼저 만나봐야겠습니다.”
난 차 트렁크에 짐을 그대로 실어둔 뒤 몸을 돌렸다.
최은태 회장에게선 여전히 전화도 문자도 답이 없었고 오는 동안 문자를 보낸 최영호 은행장에게도 연락이 없다.
하지만 무턱대고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다.
순간 빌딩 안으로 들어가려던 차상진 실장이 발을 멈춘다.
“야. 진짜 SIBUYA55에 가게?”
“예.”
“미치겠네. 네가 뭔데 대표님을 보니 마니 해?”
“일본에 왔으니 일본 쪽 대표님한테 제일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게 상식 아닙니까?”
난 그렇게 말한 뒤 몸을 돌렸다.
“저 미친. 야! 거기 안 서? 거기가 어디라고 가는 거야? 어?”
차상진 실장이 내 뒤를 따라온다.
길 안내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왜 따라오나 생각했는데 한 가지 의심이 머리를 스친다.
‘설마 날 감시하라고 지시를 받은 건가?’
A1 엔터테인먼트에 다른 부하 직원이 있는데도 날 직접 공항까지 마중 나온 걸 보면 그게 가장 현실성 있는 가정이다.
아무래도 기회를 봐서 자연스레 떨쳐내야겠다 싶었다.
* * *
고급 회원제 클럽 SIBUYA55.
건물 벽에 붙어 있는 글자 간판에 금색으로 SIBUYA55라는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창도 없는 입구 앞에는 180cm 정도의 키에 140kg이 넘어 보이는 스모 선수 체형의 남자 둘이 지키고 있었고.
둘 다 정장을 입고 있는데 목덜미에 야쿠자라는 걸 알리는 문신이 언뜻 보였다.
회귀 전에는 멋모르고 다가갔다가 출입도 못하고 쫓겨났지만 이번에는 그럴 일이 없다.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우선 이런 회원제 클럽에 오는 사람들 그리고 손님들은 야쿠자를 겁내지 않을 정도로 힘 있고 빽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렇기에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그리고 또 하나 더 보여줘야 하는 모습이 있었다.
‘그럼 들어가 볼까?’
그런데 그때였다.
차상진 실장이 멀찍이 서서 내 등에다 대고 말한다.
“얀마. 그냥 돌아가자니까? 저 인간들이 보통 놈들인 줄 알아?”
“누가 따라오라고 했습니까? 괜한 걱정하지 말고 가 계십시오.”
“XX. 누가 네 걱정해서 그래? 네가 사고 치면 나랑 일본 회사가 다 같이 피해를 입잖아!”
“그럴 일 없습니다.”
잔뜩 겁먹은 상태인데도 날 떠나지 않는 걸 보니 감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난 차상진 실장 말을 무시하곤 클럽 앞으로 향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전방을 응시하던 야쿠자 경호원들 두 사람이 천천히 내게 시선을 돌린다.
“넌 뭐야?”
난 두 사람의 적의 가득한 시선을 흘리며 일본어로 덤덤히 대답했다.
“손님.”
“여긴 회원제 클럽이다. 돌아가라.”
“손님이라는 말을 몰라?”
두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두 사람이 움직이려는 순간 난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순간 야쿠자 경호원 두 사람이 움찔하며 방어 자세를 취한다.
혹시라도 주머니에서 칼이나 총을 꺼낼지 몰라 경계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갑이 빠져나오자 두 사람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후우~ 이 자식이······.”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흥분해서 다가온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이 내 앞에 오기 전 지갑에서 1만 엔짜리 20장을 꺼냈다.
“잠깐!”
20만 엔을 손에 들고 외치자 야쿠자 경호원 둘이 발걸음을 멈춘다.
“각각 10만엔 씩. 날 들여보내달라는 게 아냐. 안에 있는 내 일행에게 내가 왔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소개비다.”
일본 쪽 회원제 클럽은 한국보다 훨씬 더 폐쇄적이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은 받지 않고 반드시 소개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소식을 전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이렇게 재력을 과시함으로써 말이다.
그러자 두 야쿠자 경호원이 날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본다.
최고급 정장에 슈트를 입고 20만 엔을 흔쾌히 내지르는 내 재력과 자기들을 보고도 겁을 먹지 않자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선 태도를 바꾼다.
“누굴 만나러 오셨수?”
순간 왼쪽 야쿠자 경호원이 걸쭉한 오사카 사투리로 묻는다.
“A1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스즈키 모에카를 만나러 왔다. 그분한테 한국에서 정 실장이 왔다고 해.”
두 야쿠자 경호원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덥석 내 돈을 가로채듯 가져간다.
그러고는 왼쪽 경호원이 몸을 돌린다.
“여기서 기다리슈.”
역시나 통했다.
난 안으로 들어간 경호원이 나오길 기다리며 즉시 폰을 꺼내 들었다.
최은태 회장이나 최영호 은행장은 아직 연락이 없다.
직접 전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차상진 실장이 보고 있어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이틀 전 일본에 온 강지영 이사에게 전화할 생각이다.
클럽 안에선 폰으로 연락할 수 없기에 안전을 위해 위치를 알려두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차상진 실장이 빠르게 다가와 한국말로 작게 속삭인다.
“너······ 미쳤어? 20만 엔을 내? 제정신이냐?”
“20만 엔이 아니라 필요하면 200만 엔도 내야죠.”
“넌 돈이 썩어나냐?”
이쪽 세상의 룰을 알지도 못한 채 떠들어대는 차상진 실장을 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쓸 땐 써야죠.”
어차피 난 작년 한 해만 10억이 넘는 돈을 벌었다.
그뿐 아니라 현재 한국에서 ‘THE 베스트’가 연일 매출 4억을 달성하고 있다.
그중 1.2%가 내 순수입이다 보니 난 하루에 480만 원 정도를 벌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내게 이 정도 돈을 쓰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
난 황당해하는 차상진을 둔 채 곧장 강지영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이사님. 혹시 일본에 도착했습니까?”
강지영 이사는 현재 AMOSE의 히로시 대표를 만나는 중이다.
아리스 프로덕션과의 관계를 끊기 전 협력관계 의사에 대해 다시 한번 타진하기 위해서다.
-옆에 혹시 누구 있어요?
“예.”
강지영 이사는 그때부터 속삭이며 말을 하기 시작한다.
곁에 있는 차상진 실장이 듣지 못하도록.
-오늘 오후에 도착해서 히로시 대표랑 회의하고 있었어요. 회의는 잘 되어가고 있으니까 끝나는 대로 연락할게요.
“알겠습니다. 저기 전 지금 SIBUYA55라는 회원제 클럽에 스즈키 대표님을 만나 뵈러 가야 해서 전화가 안 될 겁니다. 한 시간 뒤에 반.드.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내가 가는 장소와 다음 전화를 걸 시간을 정했다.
순간 그녀는 대번에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회원제 클럽이라······ 혹시 위험한 곳이에요?
“조금은요.”
-알았어요. 1시간 뒤에 전화 없으면 제가 직접 거기로 갈게요.
“감사합니다.”
-예. 아 그리고 이따가 아빠가 일본에 오면 다 같이 모여서 AMOSE 쪽에서 제안한 조건을 검토해야 할 거 같아서요. 정 실장 덕분에 이쪽에서 꽤 호의적으로 나오는데요?
내 덕분이라고?
대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소식이라니 다행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심하세요.
달칵.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난 뒤 혹시나 하고 아리스 프로덕션에 관한 일정을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2.2]
[날짜 : 2021년 3월 5일]
-PM 10:00 실장급 이상 긴급회의 (회의 내용: 일본 아리스 엔터테인먼트 다나카 대표. 굴렁쇠 엔터 가수와 배우의 일본 내 초상권을 무단 사용. 파칭코 업체 미르한과 계약 체결.)
스즈키 대표와 최만식 대표가 만나고 있다고 하자 이 일정이 사라지지 않는 것 또한 다르게 보인다.
만에 하나 일본 자회사의 대표인 스즈키와 최만식이 손을 잡았다면 다나카 대표가 초상권을 넘기는 건 식은 죽 먹기가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섣부르게 판단은 내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회귀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해결할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회귀자다.’
난 그렇게 되뇌며 가슴 속에 떠오른 불안과 의심을 단번에 지웠다.
그때 조금 전 들어갔던 야쿠자 경호원이 클럽에서 나온다.
조금 전과는 달리 정중한 태도다.
“안쪽은 보안상 폰을 제출하셔야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난 그의 말에 따라 폰을 건넸다.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난 곧장 야쿠자 경호원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차상진 실장이 날 따라붙는다.
“나도 같이 가자.”
그때였다.
안내하던 야쿠자 경호원 옆에 있던 한 명이 손을 뻗어 차상진의 앞을 가로막는다.
“넌 뭐야?”
차상진 실장이 목청을 가다듬고 말한다.
“난 이 친구의 직장상사야.”
야쿠자 경호원이 차상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피식하고 웃는다.
“넌 안 돼.”
“왜 왜?”
“넌 이런 곳에 들어올 놈이 못 되어 보이는데?”
야쿠자 경호원들은 차상진의 행색과 태도를 보고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가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한 마디로 입구 컷이었다.
“이이······익······.”
차상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자연스레 그를 떨쳐 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난 안타까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차상진 실장을 향해서 말했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여기 계시죠. 직.장.상.사.님.”
얼굴이 빨개진 차상진 실장은 대답도 못 한 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 * *
고급 클럽 라운지 안으로 들어간 순간 지하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자 밖에서는 볼 수 없었던 넓은 공간이 나온다.
그리고 그 앞에 정장을 입은 지배인이 서 있었다.
그는 경호원에게 돌아가라 말한 뒤 말없이 몸을 돌린다.
알아서 따라오라는 뜻인데 여기서 말을 걸거나 하면 바로 쫓겨난다.
술집이면서도 ‘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회원제 클럽이다 보니 별게 다 제약 조건이다.
지배인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넓은 현대식 라운지에 기모노를 입은 여종업원들과 정장을 입은 남종업원들이 술과 안주를 나르고 있다.
각각의 공간은 벽이 세워져 있다 보니 안쪽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금 더 뒤를 따라가자 진짜 VIP들만 들어갈 수 있는 룸들이 즐비한 통로가 나왔다.
통로의 벽면 전체가 히노키 나무로 덧대어진 터라 은은한 향이 가득 풍긴다.
3번 방 앞.
지배인이 문을 노크한다.
-들어와.
드르륵.
문을 연 지배인이 손으로 안쪽을 가리킨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3번 방으로 들어갔다.
3번 방은 넓은 테이블 양쪽으로 붉은 벨벳 소재의 소파가 놓인 장소였다.
테이블 위에는 술잔이 펼쳐져 있었는데 사케와 맥주 그리고 풍성한 회가 놓여 있다.
그리고 내가 만나러 온 스즈키 모에카 대표는 분홍색 정장을 입은 채 왼쪽에 앉아 있었다.
158cm 정도의 작은 키에 동글동글한 얼굴형을 가진 귀여운 외모여서 그런지 올해 32살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는 최만식 대표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최만식 대표의 곁에는 협력 관계를 끊으려고 하는 다나카 대표까지 동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최은태 회장은 스즈키 모에카 대표와 만나 단둘이서 ‘비자금’ 이야기를 나누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적이나 다름없는 최만식 대표 그리고 관계를 끊어야 하는 다나카 대표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심지어 최만식 대표에게는 마치 친오빠를 대하듯 다정한 표정과 말투였다.
그런데 스즈키 대표는 한국어를 잘못해서인지 일본어로 최만식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만식 오빠. 그래서 요즘 연애 사업은 잘돼가? 상대가 박상아라고 했나? 박상곤 의원 딸?”
“연애 사업은 무슨~ 그냥 똑같은 결혼이야.”
“아 왜~ 박상곤이랑 사돈이 되면 그것도 사업이지~ 킥.”
스즈키 모에카 대표는 최만식 대표와 상당한 친밀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