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2화
652. 밸런타인데이 선물 3
찰랑거리는 글라스에 담긴 짙은 석류 빛의 액체는 블랙베리 향과 계피 그리고 미세한 바닐라 향을 갖고 있다.
묵직하지만 싫지 않은 탄닌이 입안을 가득 채워 고급스러운 맛의 여운을 남긴다.
완벽하게 디캔팅을 하진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최고급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와인은 바로 샤토 무통 로쉴드 빈티지 2000년이었다.
한 병에 500만 원을 호가하지만 구하기가 힘들어 보통은 웃돈을 내고 사야만 하는 그 와인을 하조은 CP는 마동팔 본부장과 함께 나눠마시고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한정 수량이라서 구하기 힘들 텐데 잘도 구하셨네요?”
와인의 이름과 빈티지를 정확히 지적하자 마동팔 본부장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인다.
김영란법에 따르면 접대를 받은 사람이나 한 사람도 처벌받기 때문이다.
순간 마동팔 본부장은 우기기로 작정하고 외친다.
“너 말이야······ 인터넷에서 비싼 와인 하나 이름 검색해 왔나 본데 말이면 단 줄 알아? 네가 소믈리에도 아니고 와인을 알긴 뭘 알아?”
와인을 뭘 아냐고?
아주 잘 알지.
바로 김동수 때문에.
회귀 전 김동수와 함께 만났던 고위 인사들은 주로 와인을 즐겼었다.
그런데 그 고위 인사라는 사람들은 와인에 대한 지식으로 품위나 수준 차이를 논했었다.
학력과 출신에 콤플렉스가 있던 난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하여 와인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빈티지까지 달달 외워야만 했다.
그리고 결국엔 고위 인사들에게 인정받았다.
소믈리에보다 낫다면서 말이다.
당시에는 그 공부를 하느라고 이를 빠드득 갈았지만 이렇게 유용하게 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난 와인을 뭘 아냐는 마동팔 본부장의 말에 유유자적하게 그 지식의 한 자락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마브루디는 찬달리 가문에서 만든 그리스 와인입니다. 그리고 지금 마시는 샤토 무통 로쉴드보다는 조금 더 산미가 높고요. 더군다나 마브루디라면 과일 향도 더 나야 하고 색깔도 루비색에 가까워야 하는데 이 와인은 둘 다 아니네요.”
와인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마동팔 본부장의 입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고작 20대 후반의 매니저가 그것도 고아로 자란 내가 이토록 와인에 대해서 잘 알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까닭이었다.
난 그렇게 마동팔 본부장의 입을 막은 뒤 덤덤한 표정으로 오한국 대표에게 눈빛을 보냈다.
오한국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하 CP. PD가 고가의 와인을 선물 받는 건 위법이라는 거 잘 알고 있지?”
그런데 그때 하조은 CP가 빠르게 고개를 젓기 시작한다.
“대 대표님. 전 분명 싼 와인을 시켰어요. 그리고······ 저 사실 와인 맛 잘 몰라요. 그냥 허세로 아는 척한 것뿐이에요.”
어쭈?
이렇게 나오시겠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녀는 와인 애호가가 아니라 와인 문외한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자 맞은 편에 앉은 마동팔 본부장도 따라 외친다.
“시 실은 저도 와인을 잘은 모릅니다! 그냥 제일 싼 걸 시켰을 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저 같은 일개 매니저가 와인을 마셔봤자 얼마나 마셨겠습니까?”
결국 두 사람은 와인바 W의 주인 하선주 대표에게 책임을 떠넘겨 버렸다.
오한국 대표가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을 짓던 그 순간 하선주 대표가 빠르게 다가왔다.
테이블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보고 온 것이다.
“높으신 분들이 오셨네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그녀는 오한국 대표와 한유식 대표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오한국 대표가 대답하려는 순간 하조은 CP가 선수를 치며 말한다.
“사장님! 우리가 마브루디 글라스 와인을 시켰는데 아무래도 다른 와인이 나온 거 같아요.”
하조은 CP는 하선주 대표와 사촌 관계지만 모르는 사이인 척 높임말을 쓴다.
오한국 대표가 이미 두 사람이 사촌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서 말이다.
심상치 않은 상황을 눈치챈 하선주 대표가 표정을 관리하며 웃음짓는다.
“저희가 와인을 실수해서 내어드렸을 수도 있어요. 제가 소믈리에이기도 하니까 잠시 확인 좀 해도 될까요?”
“예. 부탁드려요.”
하선주 대표가 눈웃음을 지으며 글라스의 목 부위를 붙잡았다.
그때 오한국 대표가 손으로 글라스의 윗부분을 가린다.
“한 모금만입니다. 만약 다 마셔버린다면 내가 아니라 우리 KBC 법무팀과 대화하게 될 겁니다.”
“호호. 걱정하지 마세요. 시음을 하는 데는 한 모금만 마시면 되니까요.”
오한국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글라스에서 손을 뗀다.
하선주 대표가 글라스를 들고 잔에다 입을 댄다.
호록.
와인 한 모금 입에 문 그녀가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한다.
혀를 입안에서 돌돌 굴리고 호흡을 길게 가져간다.
그러다 천천히 눈을 뜨고 웃음짓는다.
“맞아요. 저희가 실수했어요. 이거 마브루디는 아니네요.”
“그렇다면 정 실장 말대로 샤토 무통 로쉴드를 내왔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까?”
“아뇨. 이건 마브루디도 아니지만 샤토 무통 로쉴드도 아닌데요?”
오한국 대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뭐라고요?”
그녀가 잡고 있던 글라스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활짝 웃는다.
“샤토 무통 로쉴드처럼 초고가 와인은 이렇게 글라스로는 안 나가요. 그리고 이 잔에 든 와인은 무통 카데라는 제품인데 샤또 무통 로쉴드의 세컨드 와인으로 맛과 향이 비슷하죠. 그래서 착각하신 것 같네요.”
세컨드 와인이라는 건 같은 양조장에서 만든 품질이 떨어지는 와인을 말한다.
다만 태생이 같기에 비슷한 맛을 내는 편이다.
하지만 하선주 대표가 굳이 세컨드 와인이라고 말하는 건 바로 무통 카데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보르도 와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구하기가 쉬워서 가격이 싸다는 뜻과도 같다.
1병당 4만 원 정도로 말이다.
즉 그녀는 1병당 500만 원인 와인을 다른 와인으로 속이고 있었다.
날 아마추어로 몰면서 말이다.
“소믈리에 아니면 일반인은 맛을 잘 구별 못 하곤 하죠. 특히나 와인 좀 안다는 아마추어들이 흔히 하는 실수고요. 하여간 지금 이 무통 카데는 한 병당 4만 원대라서 잔당 1만 원에 팔고 있어요.”
하선주 대표의 설명이 끝나자 하조은 CP와 마동팔 본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우스웠다.
내가 그 정도도 몰라볼 줄 알고?
게다가 무통 카데는 현재 독립된 브랜드가 되었기에 더 이상은 샤토 무통 로쉴드의 세컨드 와인이 아니다.
현재는 ‘르 쁘띠 무똥 드 무똥 로쉴드’가 세컨드 와인이었다.
난 내 지식과 내 혀를 확신했기에 딱 잘라 말했다.
“대표님. 그냥 경찰 부르시죠.”
그 순간 마동팔 본부장이 소리를 지른다.
“야 인마! 지금 못 들었어? 사장님이 직접 시음해 보고 싼 와인이라고 확인해 주셨잖아!”
“아뇨. 이분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겁니다. 아니면 혀가 엄청나게 둔하시거나요.”
하선주 대표가 얼굴이 붉히며 큰소리를 친다.
“이봐욧! 뭐라고욧? 이거 보자 보자 하니까······ 당신! 좋게 말할 때 그 말 취소하세요. 영업방해로 고소하기 전에!”
하선주 대표가 날 겁먹게 하려고 승부수를 던져온다.
하지만 난 더 자신 있게 오한국 대표에게 말했다.
“대표님. 경찰 부르시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빈티지 확인해 줄 연구소도 잘 알고요.”
오한국 대표가 잠깐 고민한다.
날 믿었는데 잘못되면 문제가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우리 테이블에서 두 테이블 정도 떨어져 있던 커플 중 정장을 입은 덩치 큰 남자가 일어나며 말한다.
“제가 소믈리에 자격증이 있습니다. 제가 확인해 드리죠.”
누군가 했더니 내가 아는 사람이다.
그는 올해 38살의 나이로 이수찬이 늘 이용하고 오늘 감시 업무를 맡긴 ‘최고다 흥신소’의 최고윤 소장이었다.
경찰 출신인 그는 현장에 잘 나오진 않았는데 이곳이 워낙 비싼 와인바다 보니 부하 직원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들어온 모양이다.
밖에서 흥신소 직원이 말한 동료가 바로 이 사람이었을 줄이야.
그나저나 그가 소믈리에 자격증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 하선주 대표는 근육질의 최고윤 소장을 보고 불신에 찬 눈빛을 보인다.
“당신이 소믈리에라고요?”
“왜요? 근육이 크면 혀가 무디기라도 하답니까?”
최고윤 소장이 무례하다는 표정으로 지갑을 꺼낸다.
지갑에는 하얀 소믈리에 자격증이 있었다.
“됐습니까?”
하선주 대표가 이를 악물고 최고윤 소장을 노려보더니 내게 한 것처럼 협박을 가한다.
“손님. 괜한 일에 끼어들어서 휘말리지 마세요. 같이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요.”
심리적인 압박으로 입을 다물게 하려는 속셈이지만 최고윤 소장은 피식하고 웃으며 답한다.
“마셔봐도 될까요?”
오한국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부탁드립니다.”
최고윤 소장이 일단 향부터 확인한 뒤 와인을 한 모금 마신다.
호로록.
잠시 눈을 감고 혀를 굴리던 최고윤 소장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맞네요. 샤토 무통 로쉴드 빈티지 2000. 딱 한 번 마셔 본 건데 이 귀한 걸 이런 자리에서 다시 맛볼 줄은 몰랐습니다.”
하선주 대표의 얼굴이 빨개진다.
“거 거짓말하지 말아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그때 최고윤 소장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한다.
“소믈리에의 혀도 못 믿는다라······ 그러면 그냥 여기 모이신 손님분들께 시음을 부탁드려 보죠. 여기도 소믈리에처럼 보이시는 능력자들이 많아 보이시는데요? 여기 샤토 무통 로쉴드 빈티지 2000이 있습니다. 한 모금 드셔보시고 확인해 주실 분 있습니까?”
그 순간 몇몇 이들이 손을 든다.
“나도 한 모금 해도 되겠소? 소믈리에 자격증은 있소만.”
“아 난 자격증은 없지만 예전에 마셔 본 적 있어요. 마셔보고 확인해 드릴게요.”
다들 최고급 와인을 마셔보고 싶다며 경쟁하듯 손을 들어 올린다.
그러자 오한국 대표도 자신을 얻고선 하조은 CP를 향해 말한다.
“하 CP. 이쯤 하지. 다 끝난 거 모르겠나? 그리고 여기 사장님과도 사촌 사이라는 거 다 아니까 더 이상의 쇼는 필요 없네!”
하선주 대표를 비롯해 하조은 CP와 마동팔 본부장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자기들 신세가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까불던 손오공과 다름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때였다.
경찰 출신인 최고윤 소장이 조언해 준다.
“청담 경찰서로 연락하시죠. 거기 서장님이 와인을 즐기십니다. 저랑도 친분이 있고 여기서 100m 거리니까 금방 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왕이면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좋겠습니다.”
“예. 그럼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그 순간 하선주 대표가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어디로 전화를 하는가 봤더니 다름 아닌 변호사에게 전화하는 것이었다.
“최 변호사님. 지금 가게로 좀 와주시겠어요? 예. 빨리요!”
하선주 대표가 GG를 외치고 있었다.
완벽한 나의 승리였다.
* * *
워낙 가까운 거리다 보니 청담 경찰서에서 2분 만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하조은 CP와 마동팔 본부장이 마시던 와인은 증거 물품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가게 안에 있는 와인 디스펜서에 꽂힌 ‘샤토 무통 로쉴드 2000년’ 역시 증거 물품으로 압수되었다.
김영란법 위반 증거가 너무도 분명했기에 경찰들은 하조은 CP와 마동팔 본부장을 체포하고 있었다.
그때 하조은 CP가 다급히 마동팔 본부장을 가리키며 외친다.
“아니에요! 전 진짜 몰랐어요! 접대한 건 저 사람이니까 저 사람만 잡아가세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배신감을 느낀 마동팔 본부장이 외친다.
“난 이름도 모르는 비싼 와인 콕 집어서 사 달라고 한 게 누군데! 형사님! 오늘 우리 은빈이 팍팍 밀어준다고 하면서 먼저 제의한 건 저쪽입니다! 이건 뭐랄까 위력에 의한 강요? 협박? 뭐 그런 거니까 전 억울하다 이 말입니다! 봐요! 까톡에 증거도 다 남아 있으니 확인해 보세요!”
하조은 CP의 눈이 돌아간다.
“그 그딴 걸 남겨뒀다고? 내가 지우라고 했잖아!”
“내가 왜? 에이~ 씨X. 끈 떨어진 줄인 걸 모르고 잡았더니. 재수 없으려니까······.”
“야! 너? 지금 말 다 했어?”
하조은 CP가 두 손으로 마동팔 본부장의 머리털을 쥐어뜯는다.
짧은 스포츠머리를 야무지게 쥐어 잡힌 마동팔 본부장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놔! 이거 안 놔?”
여자를 때릴 수 없어 주춤거리던 마동팔 본부장은 똑같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꺄아악!”
“놔! 놓으라고! 아! 내 머리!”
“못 놔! 악!”
양측에서 고성과 비명이 울려 퍼지며 현장은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잠시 후.
결국 두 사람은 경찰들에 의해 떼어졌다.
그러고는 허공에 발길질해대며 끌려 나가 버렸다.
TK 엔터의 힘으로 세리를 1위에서 끌어내리려던 두 사람이 그렇게 체포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오한국 대표가 혀를 쯧쯧 차다가 고개를 돌린다.
“같이 경찰서 갔다가 식사하지. 내 오늘 자네에게 크게 한턱 쏴야겠네.”
“예. 좋습니다. 대표님.”
오한국 대표는 먼저 나가겠다며 한유식 대표와 함께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난 현장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준 최고윤 소장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넸다.
“소장님. 하 대표가 소송을 한다고 협박까지 했는데도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에 정 실장님이 저희 직원들 경비와 용돈을 따로 챙겨주셨다면서요? 그렇게 저희 직원들을 늘 챙겨주시는 분 일인데 제가 어떻게 가만히 보고 있습니까?”
내가 부탁하는 모든 일은 이수찬을 통해 이뤄진다.
직접적으로 내가 의뢰를 맡겼다가는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난 이수찬에게 좋은 배우와 작품을 소개해주는 것으로 빚을 갚는다.
그래도 늘 현장에서 고생한 사람에게는 웃돈을 얹어준다.
이런 일은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희 같은 일을 하는 밑의 애들을 인간적으로 배려해주시는 건 정 실장님밖에 없습니다. 언젠간 저도 직원들을 대신해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저 예전의 내가 떠올라서 신경을 조금 썼을 뿐인데 그는 너무도 감사해하고 있었다.
평상시에 조금 더 배려한 일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하하하. 그리 보실 것 없습니다. 그저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자 그러면 저희도 경찰서에 가죠. 저도 증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서장님을 알기도 하고요.”
그때 맞은 편에 있던 파트너 여성이 다가온다.
“저기 그런데 동행하신 여성분은 누구신가요? 직원이신가요?”
“아 제 마누라입니다.”
졸지에 밸런타인데이에 부부의 데이트를 방해한 셈이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최고윤 소장의 아내가 다가와 미소를 짓는다.
“사모님이셨군요. 이거 죄송해서 어떻게 하죠?”
“아니에요. 오래간만에 데이트도 하고 와인도 한잔해서 좋았어요. 그리고 뭐 오늘 용돈도 벌어서 좋았어요. 호호호. 앞으로 이런 일 있음 자주 불러주세요.”
밖에서 용돈을 나눠 쓰라고 했더니 그 이야기를 들었나 보다.
“그래야겠는데요?”
“약속하신 거예요?”
그렇게 우린 웃으며 다 같이 청담 경찰서로 향했다.
* * *
경찰서에 들러 몇 가지 조사에 응한 뒤 KBC 오한국 대표와 미리내 한유식 대표와 함께 한정식집에서 식사를 이어갔다.
그리고 앞으로 나태환 이사에 맞서 함께 잘 싸워보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생각보다 비즈니스 대화가 길어진 터라 밤 11시가 되어서야 헤어질 수 있었다.
이후 집에 돌아오니 밤 11시 30분이다.
끼익.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인지 아주머니가 있는 1층 유진이와 미소가 사는 2층도 불이 꺼져 있어 깜깜했다.
세리와 유진이와 미소가 밸런타인데이 선물을 준다고 일찍 오라고 했는데 시간이 늦은 탓에 다들 돌아가고 잠이 든 모양이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친 몸을 뉘는 게 우선이었기에 난 털레털레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자동 센서 등이 켜지며 어두워진 계단이 밝아진다.
3층에 도착해서 문을 열려던 순간 현관문 앞에 붙은 포스트잇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미소의 글씨였다.
[♥유노 삼촌♥]
[너무 늦게 와서 전 엄마랑 자러 갈 거예요. 언니들도 다 집에 갔고요. 하지만 대땅 큰 초콜릿이랑 선물을 두고 가요. 아 초코를 먹은 후에는 이빨 꼭 닦으세요! 그럼 바이~]
내 나이가 몇인데 이빨을 닦으란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귀여운 미소의 글씨를 본 순간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 삶의 비타민인 미소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눈앞에는 상상치도 못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