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4화
644. 서울 지역 예선 3
“은서 어머님.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건 은서를 붙여달라는 외압을 넣으시는 겁니다.”
난 대기실에 들어온 한소예를 국회의원 사모님도 아니고 여배우 한소예도 아니고 고은서의 엄마로 불렀다.
그래야 이곳에서 쫓아낼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순간 한소예는 몸을 돌리더니 나에게 곧장 하대하기 시작했다.
“외압? 지금 외압이라고 그랬어?”
“예. 정확히 들으셨습니다.”
“하~ 정윤호 너 요즘 잘 나간다 잘 나간다고 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너. 그리고 어디서 버릇없이 어른들 대화에 끼어들어?”
그녀가 날 향해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고 있지만 난 눈도 끔뻑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건 은서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만약 은서 어머님이 제작진을 대기실에서 따로 만나는 장면이 전파를 타거나 혹은 스태프들의 입소문을 타고 밖으로 퍼지면 오히려 은서에게 악영향일 겁니다.”
“허~ 참. 기가 막혀서. 이게 어디서 사람을 가르치려 들어? 야! 방송물을 먹었어도 너보다 내가 몇 배는 더 먹었어!”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은서 어머님.”
내가 강하나를 빼냈던 프로그램인 <글로벌 프로듀서 47>만 하더라도 회귀 전에 결국 순위 조작 사실이 세상에 드러났었다.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도 조금이라도 조작된 것들은 결국에 밝혀지고.
그리고 그 결과 그에 연관된 사람이나 팀들은 치명적인 피해를 받게 된다.
그런 일이 <프로젝트 I.O.A>에서 일어나게 둘 순 없었다.
하지만 한소예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그로 인해 대기실에 싸늘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결국 박한종 국장이 헛기침하며 강대웅 CP를 쳐다본다.
빨리 상황을 수습하라고 말이다.
강대웅 CP가 고개를 끄덕이곤 우리 둘의 대화에 끼어든다.
“한 여사님. 일단은 여기까지 하시죠. 정 실장 말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자칫하면 오해의 여지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한소예가 도끼눈을 하고 강대웅 CP를 노려본다.
“강 CP. 지금 뭐라고 했어? 오해의 여지?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 맞지?”
“아뇨.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다. 그리고 아까 보니까 은서는 이렇게 안 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아이던데 굳이 이러실 필요 없으시잖습니까?”
“이봐 강 CP. 푸시를 팍팍 해준다고 해서 우리 은서한테 여기 오디션 보라고 한 거야. 단번에 데뷔할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런데 이제 와서 뭐라고?”
아무래도 박한종 국장이 오디션을 보라고 제안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푸시를 해준다는 건 방송국뿐 아니라 매니저들도 일상적으로 하는 이야기다.
단 가능한 내에서.
하지만 지금 이건 그 범위를 넘어버렸다.
국장이 제안했다는 걸 눈치챈 강대웅 CP가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머뭇댄다.
국장 역시도 설마 한소예가 그 일을 입 밖으로 낼 줄은 몰랐는지 곤란한 기색이다.
결국 난 내 선에서 이 일을 확실히 정리해야겠다 싶었다.
“푸시를 해준다는 건 합격하고 나서겠죠. 그러니 이쯤 하시고 돌아가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저도 그냥은 안 있을 겁니다.”
그녀가 쌍심지를 켜고 날 바라본다.
“하~ 기가 차네. 네가 무슨 방송국 PD라도 돼? 안 있으면 어쩔 건데? 엉?”
힘에는 힘.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은서 어머니께서 이렇게 계속 소란을 피우신다면 공정성을 위해서라도 은서는 지금 당장 오디션 후보에서 제외하겠습니다.”
그 순간 한소예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한다.
“야! 네가 뭔데 우리 애를 후보에서 제외해? 이거 미친 거 아냐?”
그녀는 당장이라도 내 뺨을 후려칠 듯 흥분해서 손을 들어 올린다.
동시에 곁에 있던 보좌관 두 사람이 빠르게 달라붙는다.
내게 당장이라도 주먹질을 할 것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내 몸에 조금이라도 손이 닿는다면 고은서나 한소예를 쫓아낼 좋은 명분이 된다.
그때 강대웅 CP가 한소예를 말린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경찰 불러드려요?”
한소예가 마지못해 들었던 손을 내린다.
“어 언제부터 방송국이 이런 매니저한테 휘둘리게 된 거예요. 그쪽은 쫀심도 없어요? 예?”
“이 친구는 그래도 됩니다.”
“응? 뭐라고 했어요?”
“이 친구는 그래도 된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좀 알아듣게 이야기 해봐욧!”
“제발 생각을 좀 해보십쇼 이 프로그램에서 선발된 아이들은 차후 굴렁쇠 엔터 소속의 I.O.A가 됩니다. 제작비도 저쪽이 다 댔고요. 다시 말해 굴렁쇠 엔터 제작진들이 모든 결정권을 갖고 있다고요!”
강대웅 CP의 말에도 한소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이봐요 강 CP. 그 정도는 나도 알아요. 일단 우리 은서가 붙기만 하면 뒤는 내가 강감찬 대표랑 알아서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아니 방송국 사람들의 간이 왜 이렇게 작아진 거예요?”
순간 강대웅 CP가 더는 참지 못하고 화를 내었다.
“아 진짜! 그게 아니라고요! 정윤호 이 친구가 프로그램의 최초 기획자이자 메인 스폰서라고요!”
오만하던 한소예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메인 스폰서라고요? 매니저가 어떻게······?”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 아십니까? 중국에 그 거대 미디어 기업.”
“다. 당연히 알죠. 이번 오디션이 중국 쪽 그 회사랑 같이하는 거잖아요.”
“예! 바로 거기에 사업 총괄본부장이 여기 정 실장의 절친입니다. 거기다 그 친구가 저희 제작비 통으로 대고 추가 홍보비도 100억을 약속하면서 저희 방송국에 딱 한 가지만 이야기하더군요. 이 프로젝트에 관해서 자신은 정 실장의 말만 믿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정 실장이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 전체의 대변인이나 다를 바 없단 말입니다.”
왕룽은 혹시나 내가 이런 일을 당할까 봐서인지 강대웅 CP에게도 별도로 이야기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리게 되었다.
놀란 한소예가 다시금 묻는다.
“정말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에서 그렇게까지 말했다고요?”
강대웅 CP가 폰을 내민다.
“자요. 전화번호 있는데 확인 한번 해보시겠어요?”
당황한 한소예가 박한종 국장을 쳐다본다.
“박 국장님. 저 말 사실이에요?”
박한종 국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한다.
“맞아. 그러니까 한 여사. 이쯤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한소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날 쳐다본다.
일개 매니저가 갑자기 대형 오디션 프로그램의 메인 스폰서라고 하자 믿어지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머릿속이 혼란스러운지 한소예가 가만히 서서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날 쳐다보며 말을 높여 묻기 시작한다.
“정 실장. 그 그러면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우리 딸한테 불이익이 없는 거 확실해······요?”
그녀는 이 상황을 인정하기 싫은지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한다.
하지만 메인 스폰서의 권한으로 고은서를 자른다고 하니 더는 아까처럼 막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은서 어머님이 지금 이대로 돌아가시면 제가 불이익을 줄 까닭이 뭐가 있겠습니까? 단 본인이 실수해서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죠.”
한소예가 낼 도끼눈으로 쳐다본다.
“그렇게 말해놓고서 내가 나가면 떨어뜨리려는 건 아니고······요?”
“그럴 거라면 애당초 제가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죠. 그리고 전 선발권에 대해서는 모두 이동민 실장님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에게 넘겼습니다. 지금은 은서 어머님이 외압을 행사하신 거라 막으려고 한 것뿐입니다.”
한소예가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던 이동민 실장을 쳐다본다.
“이 실장. 진짜죠?”
이동민 실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애초에 정 실장은 저한테 다 맡기곤 1차 2차 서류 면접이나 오디션 영상조차 안 봤습니다.”
지영식 PD와 강대웅 CP뿐 아니라 박한종 국장까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설마 내가 그렇게까지 프로그램과 거리를 뒀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이동민 실장이 이어서 한소예에게 말한다.
“그리고 은서가 I.O.A에 어울리는 인재라면 우린 정 실장이 반대해도 뽑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대로 대기실을 나선 다음 다시는 찾아오지 마십시오. 그러면 오늘 일 없던 일로 해드리겠습니다.”
“믿어도 돼요?”
그때였다.
이동민 실장이 더는 참기 힘든지 그녀를 노려보며 강경하게 나가기 시작했다.
“안 믿으면 어쩌실 겁니까?”
“뭐라고요?”
“막말로 안 믿으셔도 어찌 못 하시잖습니까?”
한소예는 바뀐 이동민 실장의 태도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내 화를 눌러 담으며 말한다.
“알았어요. 그럼 지금 나갈게요. 하지만 우리 은서한테 되지도 않은 짓거리 하면······ 나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알았어요?”
“치사하게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장 여기서 나가세요!”
이동민 실장의 언성이 높아지자 결국 한소예는 몸을 홱하고 돌려 대기실에서 나간다.
하지만 어지간히 분한지 있는 힘을 다해 하이힐로 바닥을 쿵쿵 울려댄다.
그 순간 옆을 지키던 보좌관들 역시 재빨리 한소예의 뒤를 따랐다.
‘다신 보지 맙시다 한소예씨.’
그렇게 한소예와의 첫 번째 힘 싸움은 내 승리로 끝이 났다.
그렇다면 이젠 방송국 쪽 식구들을 달랠 차례였다.
난 그 즉시 박한종 국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비록 그가 한소예를 데리고 왔지만 국장을 적으로 돌리면 앞으로가 피곤하기 때문이다.
“국장님. 죄송합니다. 국장님 체면도 있는데 제가 오버를 좀 했습니다.”
박한종 국장이 가만히 날 쳐다보다 한숨을 내쉰다.
“아냐.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수고해.”
박한종 국장은 한소예의 남편으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을 게 걱정인지 한숨을 푹푹 쉬며 나가버렸다.
난 이어서 강대웅 CP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적에게는 강하게 아군에는 부드럽게 굴어야 하니까.
강대웅 CP가 피식 웃으며 나를 일으켰다.
“아닙니다. 고개 드세요. 덕분에 외압에서 벗어나게 됐네요. 하하하. 제가 감사를 드려야죠.”
국회의원 와이프도 쳐냈으니 어떤 집안 자식이 오더라도 할 말이 생겼다면서 웃고 있었다.
연출을 맡은 지영식 PD도 그 말에 공감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CP님이 우리 정 실장님한테 밥 한번 사셔야겠는데요?”
그러자 강대웅 CP가 피식 웃는다.
“정 실장이 나보다 연봉 몇십 배는 더 많이 벌어 인마. 그나저나 지 PD.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당연히 좋죠. 위에서 조금만 압력이 들어와도 그저 굽신거리는 CP님을 보다가 정 실장님이 당당하게 거절하는 걸 보니 캬~ 사이다잖습니까?”
“엄마? 얘 말하는 것 좀 봐? 아주 그냥 대놓고 먹이네? 너 인마 내가 KBC 출신이 아니라서 선배 대접 안 하는 거지? 그치?”
지영식 PD는 <프로젝트 I.O.A> 때문에 SBC로 왔다.
강대웅 CP는 직속 선배가 아니라서 그렇냐며 장난스레 지영식 PD의 목에 헤드록을 건다.
“농담! 농담임다!”
“웃기지 마. 농담? 난 뼈 제대로 맞았어. 아파 죽겠다고.”
“켁케켁!! 시간! 시간 다 됐어요! 빨리 나가서 101번부터 보셔야죠.”
강대웅 CP는 그제야 헤드록을 풀어준다.
“그러면 저희는 먼저 가겠습니다. 이따가 뵙죠.”
강대웅 CP는 그렇게 지영식 PD와 함께 대기실을 나섰다.
두 사람마저 나가고 난 직후 난 이동민 실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간섭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떻게든 간섭을 한 꼴이니까 말이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제가 오버를 좀 했습니다.”
이동민 실장이 고개를 젓는다.
“아냐. 오죽하면 그랬겠냐 싶더라. 차라리 내가 처음부터 당차게 나갔다면 이럴 일 없었을 건데. 괜히 너한테 짐을 떠넘긴 것 같아서 내가 더 미안하다. 미안하다 정 실장.”
맞는 말이지만 난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동민 실장이 단단한 모습을 보였다면 내가 나설 필요가 없었던 게 사실이니까.
“그나저나 나도 너무 오래 을로 살았나 보다. 괜히 방송국에만 오면 반사적으로 주눅이 드네. 아~ 우리 굴렁쇠 엔터도 예전의 굴렁쇠 엔터가 아닌데 말이지.”
이동민 실장의 말대로 굴렁쇠 엔터는 더 이상 과거의 굴렁쇠 엔터가 아니었다.
현재 업계 3위.
그리고 1위를 노리고 있는 회사인데 말이다.
그렇기에 구성원들 또한 그에 걸맞게 성장해야 했다.
내가 이번 <프로젝트 I.O.A>의 관리를 그에게 넘긴 것도 그것 때문이다.
내가 없을 때도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이 회사의 위상에 맞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말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과는 달리 이동민 실장은 이미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아까만 하더라도 한소예를 정면으로 들이받아 버렸으니 말이다.
“에이~ 마지막에 한소예 씨한테 호통치는 거 보니까 우리 강 대표님같이 박렸있던데요?”
이동민 실장이 피식 웃는다.
“우리 대표님 따라가려면 멀었지. 하여간 다시는 너한테 이런 부끄러운 모습 안 보이도록 하마. 아까 있던 일은 잊어 주라.”
“예!”
내가 씩 웃자 이동민 실장이 따라 웃으며 묻는다.
“왜 웃어?”
“아뇨. 좋아서요.”
“짜식······ 실없긴.”
“그보다 실장님도 슬슬 나가 보셔야죠.”
“그래. 직접 보러 가보자. 고은서인지 고금서인지 걔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러!”
이동민 실장의 눈빛과 말에 각오와 함께 자신감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한소예가 와서 난리를 피운 것이 좋은 예방접종을 한 셈이 되어버렸다.
* * *
휴식 시간이 끝나고 101번 후보가 긴장된 표정으로 무대로 올라왔다.
후보들은 체리블라썸의 곡들로 준비를 많이 해왔다.
가끔은 튀어보겠다고 1집 때의 흑역사 곡을 가지고 와서 우연희를 부끄럽게 한 후보도 있었고.
그러나 대부분은 합격 인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I.O.A의 선발 기준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110번 고생하셨는데······ 아쉽지만 탈락입니다.”
재능이 없어도 꿈이 있고 도전한다는 게 충분히 의미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뽑는 건 바로 투입할 수준에 오른 후보였다.
감상에 빠지더라도 판단만큼은 명확히 해야 했다.
그때였다.
“111번 고은서. 나와주세요.”
드디어 고은서의 차례다.
이동민 실장의 지시에 대기실과 오디션장을 나누는 문이 열린다.
그리고 그 문으로 111번 고은서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심사위원 모두의 시선은 태블릿에서 떠나 일제히 고은서에게 꽂히기 시작했다.
조금 전 그 난리도 잊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