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7화
637. 오퍼 2
“죄송하지만 힘들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나온 순간 정적이 흐른다.
이 자리를 만든 신종기 대표도
이태풍의 출연료로 무려 300만 달러나 제안한 리처드 케인 아시아 총괄이사도 이태풍을 캐스팅하려고 들떠있던 제임스 킹 감독도
그리고 옆에서 이태풍이 할리우드에 진출하는지 호기심 있게 보던 진성준 대표도 다들 놀란 표정을 금치 못했다.
블록버스터 한국 영화의 주연도 출연료 10억을 넘기기 힘든데 조연 역할에 무려 300만 달러를 준다는 제안을 단칼에 뿌리쳤기 때문이다.
21세기 울프사 아시아 총괄이사 리처드 케인이 눈을 끔뻑거리다 다시 묻는다.
“젊은 친구가 귀를 먹었나? 똑똑히 듣게! 30만 달러가 아니라 300만 달러야. 홍콩 달러가 아닌 미국 달러로!”
리처드 케인은 자신이 주로 있는 사무소가 홍콩이다 보니 내가 설마 착각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한다.
홍콩 달러의 환율은 1달러당 대한민국 원화로 대략 140원 정도다.
즉 홍콩 달러로 300만 달러면 한국 돈으로는 4억 2천만 원 정도였다.
미국 달러에 비해 0이 한 자리 빠지는 터라 그는 미국 달러라며 명확하게 말해준다.
그러나 난 다시 고개를 저었다.
“돈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닙니다. 태풍이는 현재 한국 최고의 영화제인 황룡영화제 대상을 받은 배웁니다. 할리우드 진출을 위해서 태풍이의 급을 낮출 생각은 일절 없습니다.”
정상급 배우 중에서는 할리우드 진출이 꿈인 배우들도 꽤 많다.
그래서 그들은 푼돈에 불과한 출연료와 조연 역할을 받고선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곤 했다.
물론 그들의 선택도 존중하지만 적어도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3년 뒤.
글로벌 콘텐츠 스트리밍 서비스인 N.FLIX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 먹히는 한국 콘텐츠의 파워를 깨닫고선 한국 배우들을 주연으로 한 초대형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대성공을 거두자 그로부터 다시 2년 뒤 할리우드 영화사들도 한국인을 주연으로 한 초대형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회귀 전 유진이가 그 붐을 타고 할리우드 영화의 주연이 되었기에 난 그때를 기다리며 이태풍과 내가 데리고 있는 주연급 배우들을 최고 대우를 받으며 해외로 내보낼 생각이었다.
그때가 되면 한국의 탑스타가 곧 세계의 탑스타가 되기 때문이다.
다만 영어는 좀 해야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미래를 알지 못하는 리처드 케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급을 낮추지 않겠다니? 설마 주연 자리를 달라는 건가?”
“예. 태풍이는 주연 아니면 맡을 생각이 없습니다.”
“허~ 이봐 미스터 정. 자네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닌가? 할리우드에서 동양인에게 그처럼 쉽게 주연 자리를 내줄 줄 아나? 홍콩계 쿵푸 무비스타 이외에는 동양인에게 돌아갈 주연 자리는 없어! 제작자가 흥행을 포기하면 또 모를까.”
“저도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설마 작품이 문제라서 걱정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 이번 작품은 나 리처드 케인이 보증하지.”
아르바이트생으로 입사한 리처드 케인이 21세기 울프사에서 성공의 전설을 쓴 건 그 누구보다 작품을 보는 눈이 뛰어나서였다.
우스갯소리로 그의 눈에는 성공 판별기가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난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할리우드 주연 작품을 제안받는 게 힘들긴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N.FLIX와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아시아 진출이 아니라도 내가 이태풍의 출연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의 잘 만들어진 한국인 캐릭터 ‘최일선 소위’ 역을 제작자인 리처드 케인이 동양계 스테레오 타입으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이 갑인 한국과는 달리 엄청난 자본이 투자되는 미국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에선 감독이란 그저 스튜디오에 고용되는 스태프일 뿐이다.
그래서 제작자가 시나리오에 줄을 쭉쭉 긋고 자기 맘대로 대본을 첨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곤 한다.
그래서 미국 메이저 영화의 제작 현장 서열은 영화사의 경영진이 1순위 제작자와 프로듀서가 2순위 그리고 스타 배우가 3순위 그리고 연출 감독은 고작 4순위에 불과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그렇기에 난 이태풍이 절대로 그런 역할을 맡도록 할 수가 없었다.
내 배우는 소중하니까.
어쨌건 내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리처드 케인은 날 빤히 쳐다보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신종기 대표를 쳐다본다.
“미스터 신. 이게 혹시 한국식 ‘밀당’이라는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리처드 케인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언성을 높인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온 김에 이태풍 본인과 이야기해야겠군요. 그 친구도 여기 왔다고 들었는데요?”
신종기 대표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날 돌아본다.
매니저가 아닌 배우에게 직접 만나자고 연락을 요구하는 건 완전히 날 무시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괜찮다며 오히려 먼저 이태풍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일은 확실하게 거절해야 더 질척거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예. 형 지금 갈게요.
잠시 후.
경호원들로 둘러싸인 이태풍이 현장에 모인 팬들에게 인사를 하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곁에는 이은주 본부장과 고재수 역시 함께였다.
이태풍은 리처드 케인과 제임스 킹 감독과 인사를 하고선 내 옆에 선다.
리처드 케인이 그런 이태풍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자 이태풍이 대답은커녕 날 쳐다본다.
“형. 이거 거절하셨죠?”
“어.”
“근데 왜 저는 불렀대요? 이분들 제가 형 의견이라면 무조건 오케이하는 거 모르신대요?”
무려 300만 달러라는 거액을 출연료로 준다고 해도 이태풍은 눈도 끔뻑하지 않았다.
“말했지. 그런데 못 믿겠대.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으시단다.”
이태풍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리처드 케인에게 딱 잘라 말한다.
“노우!”
강렬하고 짧은 대답을 듣자 리처드 케인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와이?”
“히즈 오피니언 이즈 마이 오피니언! 쌤쌤. 오케이?”
쌤쌤이라니.
영어 못하는 녀석치곤 제법 적절한 단어 선택이다.
그러자 리처드 케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할리우드에 진출할 생각이 없다면 할 수 없지. 알겠네.”
그는 마치 후회할 때가 올 거라는 표정을 짓고선 몸을 홱 하고 돌려 버렸다.
“멍청한 것들······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리처드 케인이 혼잣말로 중얼대며 몸을 돌린다.
“가르시아! 바로 돌아간다.”
“예썰!”
멀찍이 떨어져 있던 가르시아라는 라틴계 여자 비서가 엘리베이터를 누른다.
리처드 케인이 씩씩대며 움직이자 신종기 대표가 다급히 그 뒤를 따른다.
“리처드! 리처드!”
세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렸다.
그러자 홀로 남은 제임스 킹 감독이 이태풍을 향해 사과한다.
“기분을 상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태풍 씨.”
이태풍이 내 통역을 듣고 고개를 젓는다.
“아뇨. 괜찮습니다.”
이태풍에게 연신 사과한 뒤 제임스 킹 감독은 내게 조심스레 묻는다.
“실장님. 지난주 ‘지리산’ 시사회에 참석했는데 그때 캐스팅 디렉터로 정 실장님의 이름이 있더군요. 혹시 정 실장님이 그 일을 하신 게 맞습니까?”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제임스 킹 감독이 얼굴을 밝히며 말한다.
“저기 방금 태풍 씨를 거절당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죄송스럽긴 한데······ 혹시 제가 쓴 ‘Forgotten War’의 한국인 조연 최일선 소위에 어울릴 만한 배우가 있을까요? 30대 정도에 제법 남자다운 외모면 더 좋겠습니다. 제가 한국 배우들은 잘 몰라서요.”
제임스 킹 감독이 원래 쓴 대본대로라면 모르겠지만 리처드 케인이 제작자로 있는 이상은 추천해줄 사람이 없었다.
리처드 케인이 캐릭터를 바꿀 테니 말이다.
“글쎄요~ 당장은 떠오르는 사람이 없군요.”
그러자 제임스 킹 감독이 자기 명함을 내민다.
“그럼 혹시라도 생각이 나시면 전화 좀 부탁드립니다.”
나 역시 명함을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대본은 명함에 있는 이메일로 보내두겠습니다. 확인하시고 꼭 좀 연락해주십시오.”
제임스 킹 감독은 그렇게 두 번 세 번 인사를 한 뒤 리처드 케인의 뒤를 따랐다.
* * *
잠시 후.
리처드 케인을 뒤쫓아갔던 신종기 대표가 돌아왔다.
“미안하네 정 실장. 혹시라도 이태풍이 할리우드에 진출할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봐서 제안한 건데 실수했군.”
“괜찮습니다. 태풍이를 돕자고 하신 일이잖습니까?”
“알아주니 고맙군. 그런데 진짜 할리우드에 진출하지 않을 셈인가? 조연이라고 해도 300만 달러면 엄청난 금액이잖아.”
난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돈이야 지금도 많이 벌잖습니까? 그러니 급할 게 없습니다.”
신종기 대표가 고개를 갸웃한다.
“근데 말이지······ 진짜로 동양인도 주연 자리를 차지하는 날이 오긴 올까? 할리우드의 그 콧대 높은 인간들이 아시아인을 주인공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 솔직히 예전이랑 달리 많이 없어졌다고 해도 인종차별이 여전한 것도 사실이고 말이야.”
아니다.
그건 신종기 대표가 틀렸다.
회귀 전 난 유진이가 할리우드 영화의 주연이 되고 대접받는 걸 직접 보고 왔다.
게다가 회귀하기 전 내가 보고 온 세상에서는 아시아 쪽이 훨씬 더 큰 문화시장으로 성장하기도 하고.
그래서 난 당당히 대답할 수가 있었다.
“옵니다! 그리고 태풍이는 그때가 되면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으로 글로벌 톱스타가 될 겁니다.”
당당하게 말한 순간 곁에 있던 고재수가 이태풍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태풍아 너 고생 좀 해야겠다. 정 실장님이 저렇게 널 믿는데 보답해야지.
-어 그래야지. 지금의 날 만든 건 윤호 형이니까.
-그럼 나도 분발해야겠는데?
-걱정하지 마. 형도 금방 나처럼 할리우드 쪽에서 제안이 올 거야. 이번에 지리산 진짜 잘 나왔잖아.
-에이~ 난 아직 부족하지. 그리고 난 우리 정 실장 케어 좀 팍팍 받고서 천천히 가련다.
귀가 밝다 보니 속삭이는 소리가 다 들린다.
할리우드 진출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도 날 전적으로 믿어 주다니!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가슴이 뿌듯해 가벼운 전율이 일어난다.
두 번째 삶에서 배우의 인성을 우선시한 건 너무도 옳은 선택이었다.
그때 상영관 쪽에서 직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영화 시작 10분 전입니다. 입장하시면 되겠습니다.”
“자자. 다들 같이 가지.”
신종기 대표의 말에 우린 모두 상영관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시사회 때와 달리 상영관에서 보는 게 아니라 맨 앞 좌석을 잡아 놓았기에 나도 오늘은 좀 편하게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다 같이 상영관으로 걸어가던 그때 신종기 대표가 조심스레 묻는다.
“정 실장. 근데 아까 오면서 보니까 제임스 감독이랑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거 같던데. 내가 알면 안 되는 비밀 이야긴가?”
“아 그런 건 아니고 다른 배우를 소개해 줄 순 없냐고 부탁하더군요. 대본도 받았고요.”
“다른 배우?”
“예.”
“이태풍이 아니더라도 조연 할 사람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지 않나?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작품이라고 하면 어지간한 배우들도 줄을 설 텐데.”
“거절했습니다.”
“왜?”
“리처드 케인 부사장이 제작 현장에 간섭을 심하게 하는 걸로 악명이 높지 않습니까? 대본을 함부로 뜯어고치는 것도 유명하고요.”
“그거야 뭐. 미국의 메이저 스튜디오 경영진들은 다들 그러잖아?”
“압니다. 그래도 저분이 특히 심해서요.”
“음······ 그러면 말 나온 김에 묻는 건데 혹시 대본은 확인해 봤나? 아 아니지 지금 막 받았다고 했지?”
신종기 대표가 뭔가 딴생각이 있는 듯해 대본을 이미 확인했다고 답했다.
“지금 막 받긴 했는데 지난주에 업계에서 도는 버전을 구해서 읽긴 했습니다.”
신종기 대표가 반색하며 말한다.
“오~ 그래? 그러면 자네 생각은 어때? 대본이 잘 나왔나?”
“대본은 나무랄 데가 없이 잘 나왔습니다. 캐스팅만 제대로 하면 크게 성공할 것 같고요.”
그때였다.
신종기 대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한다.
“그렇다면 만약에 말일세······ 만약에 리처드 케인을 프로젝트에서 배제해버리면 어떨 것 같나?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제임스 킹 감독한테 직접 투자한다면 어떨 거 같나?”
제임스 킹 감독은 작년에 <부델리>라는 단편 영화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부델리>는 이탈리아 마피아 카르텔 양측이 마약 운반을 하다가 ‘부델리’라는 무인도에 도착한 이후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로서 단편 영화치고는 상당한 돈을 벌어들였었다.
신종기 대표도 그 사실을 알고서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는 할리우드의 메이저 제작사인 21세기 울프사가 투자를 하고 배급을 할 예정인데 왜 이걸 묻는지 모르겠다.
“위약금 좀 내고 계약 해지를 하면야 영화를 만드는 것은 문제가 아니겠죠. 하지만 그보다는 미국 배급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배급이 안 되는 영화를 만들자고 하면 제임스 감독이 거래에 응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할리우드는 메이저 6개 영화사가 배급을 꽉 쥐고 카르텔처럼 뭉쳐있기에 그중 한 개사의 부사장인 리처드 케인과 척을 지면 아예 배급이 어려울 수 있었다.
“만약 북미 배급 문제를 해결할 카드가 내 손에 있다면?”
그 순간 신종기 대표가 하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앞으로 3년 뒤.
LT 엔터테인먼트는 할리우드의 6대 메이저 영화사 중 한 곳인 유니버스 픽처스와 손을 잡고서 미국 시장에 진출한다.
그런데 그 일을 앞당기려는 모양이다.
“설마 이번 기회에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을 하시려는 겁니까?”
“허허 이 친구 눈치 하나는. 그래 이참에 북미 진출을 시도해 볼 생각이야. 미리 손은 써놨지만 첫 작품을 촬영할 감독이 없어서 전전긍긍했는데 때마침 기회가 온 것 같아서.”
“그러시군요.”
“아 그리고 좀 전에 리처드를 배웅하는데 세상에 그놈이 나한테 쌍욕을 하지 뭔가? 자신에게 헛걸음시켰다고 말이네. 허허허.”
“그런 미친······.”
“아무튼 그런 일도 있고 하니 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겠나? 한 방은 먹여줘야지. 이왕 미국에 진출할 거였는데 겸사겸사 이참에 진행해 볼까 싶네.”
“미국 배급을 해결하실 수 있다면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제임스 킹 감독에게 최대한의 자율권을 보장해 주시면 더 좋을 거고요.”
“오케이!”
신종기 대표는 즉시 앞서가던 이은주 본부장에게 지시를 내린다.
“본부장. 내일 콘퍼런스에서 미팅 셋업해. 가능한 제임스 감독과 별도 테이블에 앉을 수 있도록 말이야.”
“예. 대표님.”
그때 신종기 대표가 내게 말한다.
“정 실장도 내일 미팅 때 좀 참석해 줄 수 없을까? 제임스 감독이 자네한테 호감을 보이는 거 같은데 같이 만나 보자고. 내 보상은 톡톡히 하겠네.”
“그러면 태풍이에게 제안해왔던 그 역. 저희 재수 씨한테 주실 수 있겠습니까?”
고재수는 <지리산>에서 맡은 사이코패스 살인마 역 때문에 한국에서 주연이 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그러나 미국을 거쳤다가 돌아오면 아예 배우의 급과 이미지를 완벽히 탈바꿈할 수 있었다.
즉 이태풍과는 달리 해외 진출을 일찍 하는 게 좋은 상황이다.
“그런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 솔직히 요즘 배우 중에서 재수 씨 연기력을 따라올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제 일이라 생각하고 돕도록 하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상영회 끝나고 나면 같이 대본 한번 보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자고.”
“예.”
그렇게 계획을 잡은 우린 상영관 1관으로 들어갔다.
이태풍과 고재수를 비롯해 스태프들과 감독이 무대 앞에 선다.
그리고 난 신종기 대표의 옆자리에 앉으려고 향했다.
그런데 신종기 대표가 웃으며 앞을 가리킨다.
“뭘 보고만 있나? 캐스팅 디렉터도 무대 앞에 가서 서야지. 응?”
그러고 보니 무대 인사를 위해 서 있던 감독과 배우들 모두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윤호 형. 빨리 와요~”
“빨리 오세요~”
이태풍과 고재수는 날 향해 재촉까지 하고 있었다.
“아······.”
그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도 되는지 잠시 고민했지만 모두의 시선이 날 향하고 있었기에 결국엔 무대 앞으로 나섰다.
그 이후 관객들의 손뼉을 받으며 인생 처음으로 무대 인사에 참석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지리산>이 탄생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게 나라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감사도 한껏 들으면서 말이다.
오늘 하루는 내 인생에 절대로 잊지 못할 하루였다.
* * *
밤 12시 30분.
관객들의 열띤 호응 속에서 무대 인사가 끝났다.
가슴 벅찬 기분을 느끼며 영화가 상영되기 전 배우들과 신종기 대표와 함께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대기실로 돌아온 난 즉시 고재수에게 의 대본이 펼쳐진 태블릿을 건넸다.
“이게 뭡니까 실장님?”
“조금 전 제임스 감독님이 쓰신 ‘Forgotten War’의 대본입니다. 그중 ‘최일선 소위’ 역에 재수 씨를 추천해 볼까 합니다.”
“저보고 그 배역을 하라고요?”
“아직 확정된 건 아니고 내일 배역 제안을 해볼까 합니다. 지금 재수 씨의 상황에서는 그 배역을 맡는 게 커리어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실 생각이 있습니까?”
좋은 기회였지만 고재수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이태풍의 눈치를 본다.
이태풍이 거절한 배역인데도 오히려 자신이 더 미안해하면서.
그러자 이태풍이 괘념치 말라며 더 부추긴다.
“올~ 잘됐네. 재수 형. 무조건 해! 그리고 캐스팅되면 나 대신 인앤아웃 버거나 좀 먹고 나서 소감 좀 말해줘.”
이태풍의 넉살에 고재수가 피식 웃는다.
“알았어. 내가 먹어 보고 자세히 이야기해 줄게.”
고재수는 그제야 내 제안을 수락한다.
“지금 바로 대본 읽고 오디션 영상 녹화 준비를 하겠습니다.”
고재수는 감독에게 보여줄 오디션 영상을 찍겠다며 대기실에 온 양소리 대리에게 메이크업을 부탁한다.
“양 대리님. 저 메이크업 좀요.”
“예~”
양소리 대리가 메이크업 통을 들고 다가온다.
그때 신종기 대표가 다시 날 부른다.
“그러면 이제 내일 제임스 감독만 설득하면 되겠군.”
“그보다 리처드 부사장 쪽은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십니까? 자기가 찍어둔 감독을 빼돌리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요?”
“걱정 안 해도 되네. 우리 회사 비서실에서 그 인간 비리 한 건을 확보했거든.”
신종기 대표가 자신만만하게 태블릿을 내민다.
[정보 : 리처드 케인. 개인 회사 LK.WOLF 비자금 착복]
아시아의 배급권을 총괄하는 리처드 케인 부사장이 LK.WOLF라는 개인 회사를 세워 자금을 착복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그러나 이건 쓸 수 없는 정보다.
LK.WOLF 사는 리처드 케인이 개인 회사이긴 하지만 그곳의 실체는 리처드 케인이 다른 5명의 부사장과 대표이사의 비자금을 운용해서 수익을 올려주는 회사다.
그곳을 건들게 되면 오히려 21세기 울프사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가 있었다.
회귀 전 그 사실을 몰랐던 임원 한 명이 고발했지만 오히려 고발한 임직원이 회사를 관뒀기에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일이다.
난 그 즉시 고개를 저었다.
“LK.WOLF 사는 고위 임원들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회사입니다.”
신종기 대표가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그게 정말인가?”
그는 내가 어떻게 알았냐는 걸 궁금해하는 표정보단 이제 어떻게 리처드를 막을지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순간 난 즉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리처드 케인 부사장이 할리우드의 거물이라지만 회귀자인 내게는 그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 카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