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화
62. 잘 가세요
강감찬 대표가 <파란 하늘>에 10억을 투자한다는 말에 김갑수 SBC 대표와 블루드래곤 대표가 반색했다.
오늘 방영된 다큐로 유진이의 호감도가 좋아졌다고 해도 <파란 하늘>의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으니까.
‘현금 10억이라니. 우리 강 대표님 배포도 크네.’
비록 작품이 흥행하면 수익 배분을 나눠 가질 테지만 제작 리스크를 함께 짊어져 줄 파트너만큼 반가운 게 또 있을까.
기분이 좋아진 김갑수 대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번에 저희가 민폐를 끼쳤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요.”
“커어. 우리 SBC가 오늘 계 타는 날이네.”
하지만 이 모든 걸 듣는 나로서는 웃음이 날 지경이다.
<파란 하늘>은 무조건 올해 최고의 시청률을 달성할 테니까.
아마도 드라마가 중반을 넘어가면 SBC나 블루드래곤이나 우리 회사의 투자를 받지 말 걸 하고 후회하게 될 거다.
둘이 나눠 먹을 걸 셋이서 나눠 먹게 된 셈이니까.
그뿐이 아니었다.
굴렁쇠 엔터가 이번 기회에 메인 투자자 중 하나가 된다면?
드라마 내에서 스태프들이 우리 배우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는 건 덤이었고.
“감사합니다. 강 대표님.”
조응구 대표가 일어나 강감찬 대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꽈악.
굳게 손을 맞잡은 두 남자의 입가로 묵직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하하하. 이게 어디 감사할 일입니까? 드라마가 잘되면 우리도 크게 한몫 잡을 텐데요. 저도 좋은 투자 기회를 잡은 게 기쁠 뿐입니다.”
“어?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하하하. 그럼 그때는 제가 생색을 좀 내야겠습니다그려.”
그 뒤부턴 <파란 하늘>의 성공을 기원하며 다들 주강용 기자를 욕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유진이의 상승속도가 가팔랐다.
단역에서 조연으로.
그것도 단번에 SBC 방송국의 대표까지 관심을 가질 정도로 위상이 올라 버렸다.
* * *
SBC 방송국을 나온 뒤.
난 강감찬 대표의 옆 좌석에 앉았다.
“유진이는 호텔에서 어떻게 지내냐? 불편해하지는 않고?”
“괜찮습니다. 호텔에서 나오기 전에 미니바 다 먹어도 된다고 했거든요. 좋아서 팔짝 뛰던데요.”
강감찬 대표가 투덜거렸다.
“인석아. 미니바 그게 얼마나 비싼데. 차라리 편의점을 통째로 털어다 주지 그랬냐!”
강감찬 대표의 가벼운 질책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방금 10억 지르신 대표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습니다만?”
강감찬 대표가 피식하고 웃는다.
미니바가 아무리 비싸도 10억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니까.
강감찬 대표가 날 가만히 보다 잔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윤호야.”
“예?”
“이번 드라마 성공하겠지?”
“예. 이렇게 화제를 모은 데다 주영인의 스타성 유진이의 연기력이 합쳐졌잖습니까. 무엇보다 대본이 끝내주게 좋습니다.”
그런데 내 말이 이어지는 동안 강감찬 대표는 지긋이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꽤 논리적으로 말하려고 애쓴다만 왠지 확신을 넘어선 뭔가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내 오해가 아니라면 말이지······”
순간 심장이 덜컥하고 멎는 것 같았다.
확신을 넘어선 뭔가?
너무 미래를 아는 티를 많이 냈나 싶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단 말이지. 이지연 작가를 놓아두고 신인 작가의 작품을 고르는 것부터 오늘에 있는 일까지. 모든 것이 네가 뜻하는 대로 착착 돌아가는 게.”
찔끔.
날 바라보는 강감찬 대표의 눈길이 꽤 매서웠다.
“아 아닙니다.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그래?”
날 쳐다보는 눈빛에 수많은 생각이 오가는 게 보였다.
“하긴 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냐. 쥐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고 결과가 좋으면 그만인 것을. 아 그리고 선물을 줘야 하는데······ 어디 놔뒀더라.”
짙은 웃음을 띤 강감찬 대표는 팔걸이 수납함을 뒤적거리더니 네모난 곽을 하나 꺼냈다.
“열어 봐라.”
“예. 대표님.”
나무곽을 열자 5천 장은 될 것 같은 명함이 보였다.
내가 쓰던 것보다 훨씬 좋은 재질로 된 명함에 음각으로 내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굴렁쇠 엔터테인먼트]
[정윤호 대리]
“비싸게 맞춘 명함이다. 떨어지면 기획실에다 따로 이야기해라. 네 건 특별히 파라고 해뒀으니까.”
빳빳한 명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코팅된 명함에 닿는 손가락 끝의 촉감이 꽤 좋았다.
이젠 대리다.
아니 벌써 대리다.
회귀한 지 고작 2개월이 되었을 뿐인데.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라. 널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널 시기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내일 정식 공고가 나갈 테니 그리 알고.”
“감사합니다. 대표님!”
강감찬 대표가 환히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강감찬 대표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 * *
출근하자마자 늘 하던 대로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채 다이어리를 살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2월 7일]
-AM 10: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연예가 빅뉴스 주강용. 유진이 관련 일진 낙태 찌라시 유포. 대책 회의.)
이제는 주강용에 대해 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다이어리의 일정도 사라졌고 주강용 기자에 관한 기사도 연신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주강용 기자. 연예인과 소속사에 협박 및 갈취로 수억을 강탈! 경찰 긴급 체포 고려.]
[<파란 하늘>의 정유진. 주강용이 그녀를 노린 이유는?]
[휴먼스토리 정유진 편. 시청률 15.5%! – 안방 시청자들을 울리다!]
(댓글)
-주강용 기자 피해 사례 접수 (링크 : 주강용 피해자 카페) -강용아. 콩밥 먹으러 가즈아!(손짓 이모티콘) -정유진 응원합니다.
-파란 하늘 보기 운동 국민통합본부 (링크 : 얼짱 버거 소녀 정유진 팬 카페.) -미소야! 힘내! 유진씨 화이팅!
-미소는 저 나이에 벌써 완성형 미모네. 근데 내 얼굴은 언제쯤 완성되려나. T.T
“잘 가라 주강용.”
시동을 끄고 보온병을 챙겼다.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올라가려는데 누군가의 고성이 들려왔다.
“주강용. 너 이 새X. 감히 날 물고 늘어져?”
김동수의 목소리다.
워낙 열이 받은 상태라 그런지 김동수는 주차장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순간 난 반사적으로 승합차 운전대 아래로 몸을 숨겼다.
자신의 차로 향하던 김동수가 콧김을 연신 들이켜며 씩씩거렸다.
“뭐? 최성애의 녹취록을 터트리겠다고? 너 죽고 싶어?”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고소를 막냐고!”
“좋아! 같이 죽고 싶으면 어디 한번 해 봐! 거기에 얽힌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김동수의 말에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1년 전.
내가 막 굴렁쇠에 입사하던 무렵의 일이 언급된 까닭이다.
당시 드라마 한 편으로 핫하게 떠오른 배우 최성애가 은퇴 선언을 하며 사회가 시끄러워졌던 일이 있었다.
아름다운 배우가 젊은 나이에 이유 없는 은퇴 선언을 한 탓에 온갖 소문에 휩싸였었다.
하지만 그녀의 은퇴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매니저까지도.
그러나 앞으로 10년 후.
최성애는 ‘잊혀진 사람들’이라는 인기 시사 프로에 출연하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발언을 한다.
-여배우들에겐 입에 담지 못할 일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 피해자이고요.
그녀는 그 시절을 떠올리기 싫다고 말하며 쓸쓸히 웃음을 지었었다.
그 뒤로 수많은 인터뷰 요청에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버티는 걸 보고 협박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떠돌았다.
‘설마 그 최성애가 김동수와 연관이 있었나?’
김동수는 더는 이야기하기 싫은지 주강용 기자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전화를 끊었다.
“주강용 이 새X! 어디서 감히······.”
씩씩대던 김동수가 차 문을 열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운전석 아래로 몸을 완전히 숨겼다.
끼이익- 부우우웅.
김동수가 차를 몰고 급하게 주차장을 벗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김동수에 관해서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성애.
그녀와 김동수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고 싶긴 했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최성애는 1년 전 그날 이후로 미국으로 간 뒤 오랫동안이나 잠적해서 살았으니까.
“나중에 보자 김동수.”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뒤로 미룬 채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넘쳐 났으니까.
* * *
주강용은 패닉에 싸였다.
굴렁쇠가 신인 여배우를 지키기 위해 기자를 상대로 총력전을 펼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뭐지? 내가 뭘 놓친 거지? 뭐가 잘못된 거냐고!”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회사 측에서는 주강용에게 모든 책임을 지고 혐의를 인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싫다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섬뜩한 협박을 남겼고.
공포에 젖어 집으로 돌아온 주강용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동수에게도 전화를 걸었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차가운 냉대뿐.
울컥한 나머지 여러 사람이 엮인 최성애 건을 물고 늘어졌지만 힘만 빼고 아무 성과는 없었다.
결국 주강용이 선택한 건 도주였다.
모든 혐의를 인정할 경우 최소 10년은 감옥에서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오늘 튀자.’
주강용은 급히 주택 지하실로 내려가 숨겨둔 현금을 더플백에 담았다.
돈을 가지고 중국으로 가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 숨어 있을 생각으로.
“아이C! 왜 이런 때 화장실이 급해서는.”
소변이 마려웠지만 도망치는 게 우선이었다.
주강용은 몰려드는 요의를 참고 더플백에 돈을 챙겼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대문을 열고 나섰다.
그때였다.
위용위용-.
자신의 주택가 골목길로 들어오는 경찰차의 경광음이 들리고 있다.
주강용은 주변을 살폈지만 골목의 양쪽으로 경찰차가 보이자 냅다 옆집 담벼락을 향해 달렸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가라 담 몇 개만 넘으면 도망갈 수 있으니까.
“미친! 이렇게 빨리?”
휙!
가방을 둘러멘 주강용은 경찰차의 반대 방향을 향해 죽도록 달렸다.
“멈춰라! 주강용!”
“씨X놈이! 너 같으면 멈추란다고 멈추겠냐?”
주강용은 더플백을 등에 메고 힘겹게 담을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담을 넘기 직전.
달려온 경찰이 쏜 테이저건이 주광용의 엉덩이에 박혔다.
파지지직!
“끄어어어어.”
주강용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넘으려던 담벼락에 걸려 버렸다.
메고 있던 더플백이 떨어지며 열린 지퍼로 만 원짜리 지폐가 촤라락 흩날렸다.
동시에 그의 회색 트레이닝복 바지가 짙은 색으로 젖어 들고 있었다.
거품을 물고 있는 경련을 일으키는 주강용을 보며 경찰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렸네. 지렸어.”
“하아. 이건 또 무슨 신종 민폐냐.”
“아 진짜. 오늘 세차했는데! 재수 더럽게 없네!”
경찰의 거친 욕설을 들으며 주강용은 게거품과 눈물을 함께 삼켜야 했다.
* * *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공지 사항]을 보여주는 벽면 LCD에 내 이름이 나타나 있었다.
[배우 매니지먼트 2실 정윤호 대리 발령]
나도 모르게 LCD에 손을 가져다 댔다.
뽀드득.
LCD의 미끄러운 막이 상당한 저항감을 준다.
“꿈은 아니네.”
회귀 후 이런 소소한 감각으로 내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곤 한다.
그때 까톡으로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이번 일에 많은 도움을 주던 홍보팀 김미혜 대리다.
[홍보팀 김미혜 대리 : 정 대리. 승진 축하! 그리고 주 기자 잡혔단다. (기사 링크)]
[(속보) 주강용 기자 긴급 체포]
-담을 넘어 도망치려던 주강용은 테이저건에 맞은 뒤 담벼락에 걸려 오줌을 지려······.
볼썽사납게 담벼락에 걸린 채 오줌을 지린 사진이 기사 사진으로 사용되었다.
진짜로 모든 게 끝이 났다.
유진이와 유진이의 딸 미소의 이야기는 더는 숨기지 않아도 되는 미담이 되었다.
순간 엘리베이터가 배우 2실이 있는 4층에 도착했다.
띠링!
[상어가 다 잡아먹었다!]
복도에 있던 선배들이 일제히 박수갈채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야! 정 스타. 아니 이제 정 대리지. 축하한다!”
“주강용 그놈 잘 밟았다. 그딴 쓰레기 같은 놈은 진즉에 쓴맛을 봐야 했는데.”
“이번에 큰일 했더라? 하여튼 난 놈이라니까.”
“야. 오늘 승진 턱 쏴야지?”
허리를 굽히며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예. 알겠습니다. 선배님들. 감사합니다.”
선배들과의 인사를 마치고 구성철 실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흐흐흐.”
구성철 실장은 날 보자마자 웃음을 실실 흘렸다.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보기만 해도 좋아서 그런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 웃었다.
그런데 구성철 실장이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휴먼스토리’를 본 시청자들이 유진이 앞으로 온갖 걸 다 보내더라. 이걸 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쌀 김치 그리고 미소 색연필까지.
어떤 건 소소하고 어떤 건 수십만 원이나 하는 선물을 보내왔다.
심지어 어떤 아주머니는 유진이네 밥솥이 오래된 것 같다며 새 밥솥을 보내기까지 했다.
“웬만하면 거절하고는 있는데 반송 주소도 없이 회사로 온 건 어쩔 도리가 없어. 나중에 받아 가서 유진이와 상의해 봐라. 쓰고 싶은 건 쓰고 아니면 기부하고.”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윤호야.”
“예?”
“이동민 실장이 널 찾던데. 혹시 연락 안 하든?”
“아. 예. 안 그래도 곧 가보려던 참입니다.”
유진이의 급한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젠 체리블라썸을 위해 뛸 차례다.
그런데 구성철 실장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실장님. 왜 그러십니까? 체리블라썸한테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구성철 실장이 한숨을 푹하고 내쉰다.
“체리블라썸 애들. 아직 신곡을 못 받았단다.”
“예? 아직도요?”
체리블라썸의 컴백에 문제가 생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