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7화
607. VVIP 패션쇼 3
[에브리데이 V12.2]
[날짜 : 2021년 1월 31일]
-PM 11:00 [NEW. 정유진] L.M.L 패션쇼 2부 현장에서 노현희 여사의 갑질 폭행. (긴급회의 : 고소 논의.)
L.M.L 블랙라벨 패션쇼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모델들이 준비된 옷을 입고 나와 초청된 VVIP 앞에서 옷을 선보인다.
그리고 2부에서는 VVIP들이 천천히 시간을 들이며 구매를 한다.
그런데 바로 그 2부에서 HK 그룹의 안주인인 노현희가 갑질을 한다는 일정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보통 이런 쇼에서는 그런 짓을 하면 함께 온 VVIP들의 눈총을 사게 된다.
VVIP들이 성격이 좋고 예의가 발라서가 아니라 그런 행위가 품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현희는 아마도 나에 대한 악감정으로 유진이에게 화풀이를 하려는 것 같았다.
노현희를 쳐다보자 팔짱을 꼰 채 의자 사이로 걸어 나오는 유진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에 대한 악의가 유진이에게 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러려고 패션쇼에 참석했다니 그 저열한 생각이 놀라울 정도다.
일단은 1부 쇼가 끝나면 김애련 부회장을 만나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그때 유진이가 드레스를 입고 VVIP들이 앉아 있는 의자 앞으로 걸어 나온다.
자신감 있는 워킹을 보여주는 유진이는 마치 <화란전>에 출연하는 유화 공주처럼 고귀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덕분에 유진이가 입고 있는 드레스 또한 빛나고 있었다.
현재 유진이가 입고 있는 순백의 드레스는 ‘영광’ 영어명으로는 ‘글로리아’인데 작은 천연 진주가 반월 모양으로 장식된 흰색 드레스로 연말 시상식에서 입고 나왔던 것이었다.
대략 차 한 대 값 정도로 판매가 될 초고가 드레스였는데도 VVIP들은 가격을 신경 쓰지 않고 구매 의사를 결정짓고 있었다.
게다가 약혼식이나 결혼식에 적합한 디자인이다 보니 재벌가 사모님과 영애들의 눈에 탐욕의 빛이 어리기도 하고 있다.
반면 재벌가 남자들은 유진이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 드레스가 아닌 유진이에게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그렇게 유진이는 자신의 미모와 드레스를 한껏 자랑한 뒤 작은 무대에서 한 바퀴 뱅그르르 돌고서 출구로 나간다.
그때 내 곁에 앉은 김애련 부회장의 장녀 이하윤이 감탄사를 내뱉는다.
“유진 씨는······ 참······ 예쁘시네요.”
이하윤은 날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조금은 기가 죽은 모습이다.
비록 이하윤이 재계의 양대 미녀라고 불린다지만 유진이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괜히 연예인이 연예인이 아니지.
그 이후 탑클래스 모델들이 L.M.L 블랙라벨에서 제작한 새로운 의상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영아 대표가 만든 옷들은 아름다웠고 모델들의 워킹들은 황홀했지만 누구도 유진이만큼 존재감을 드러내진 못했다.
그렇게 L.M.L 블랙라벨 패션쇼 1부가 끝이 났다.
은은하던 조명이 환하게 밝아진다.
김애련 부회장이 마이크를 들고 말한다.
“지금부터 20분 정도 휴식한 뒤 2부 쇼를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쉬시면서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순간 흰색 장갑을 낀 직원들이 나와 핑거 푸드와 음료수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노현희는 핑거 푸드는 관심도 두지 않고 함께 온 고위층 사모님들과 뭔가를 숙덕이기 시작했다.
에브리데이가 알려준 그 일을 계획하는 모양이다.
난 그 즉시 곁을 향해 말했다.
“왕룽 릴리. 나 부회장님 잠깐 뵙고 올게.”
그렇게 난 왕룽과 릴리를 두고 대기실로 향했다.
순간 이하윤이 재빨리 날 따라온다.
“실장님. 같이 가요~”
이하윤은 아마 오늘은 내 껌딱지가 되기로 단단히 작정한 모양이다.
* * *
대기실과 탈의실이 함께 있는 공간에 도착하자 입구에 경호원들 2명이 서 있다.
“정 실장님이세요. 문 열어주세요.”
이하윤이 말하자 경호원 2명이 문을 열어준다.
안으로 들어가자 탈의실과 대기실이 따로 분류되어 있다.
열린 대기실 문으로 김애련 부회장과 L.M.L 이영아 대표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대표. ‘영광’ 가격을 5천만까지 올리는 건 어때?”
“원래는 3천만에 판매하기로 했잖아요?”
“아냐 현장 반응을 보니까 그 정도 가격은 문제도 아냐. 어차피 저 사람들은 가격표도 안 보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이번 기회에 L.M.L 블랙라벨을 최고가 브랜드로 안착시키려면 가격을 더 올려 쳐야겠어.”
5천만 원으로 올린다고 해도 억 소리가 나는 해외 최고급 명품 드레스에 비하면 절반 이하의 가격이다.
그러니 김애련 부회장은 ‘L.M.L 블랙라벨’을 최고급 브랜드로 만들려면 금액부터 더 올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영아 대표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요. 그쪽으로는 부회장님 경험이 많으니까 맡길게요.”
“그래. 자기가 좀 더 자신 있게 치고 나와줘야 해. 솔직히 ‘영광’은 해외 명품 디자이너라면 1억은 받았을걸? L.M.L은 아직 그 정도 브랜딩은 안 되었으니까 5천이고.”
김애련 부회장은 L.M.L 블랙라벨 디자인에 자신이 있어 보였다.
대충 대화의 끝이 보이는 터라 나는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냈다.
“크흠. 부회장님.”
김애련 부회장이 몸을 돌린다.
“아. 정 실장. 유진 씨는 지금 옆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고 있어. 불러줄까?”
“아뇨. 그게 아니라 노현희 여사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찾아왔습니다.”
“안 그래도 하윤이한테 이야기 들었어. 지하에서 그렇게 난리를 쳤다며? 걱정하지 마. 이제 그런 일 없도록 2부 무대에선 내가 직접 마이크 잡을 거야.”
난 즉시 폰을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2.2]
[날짜 : 2021년 1월 31일]
-PM 11:00 [NEW. 정유진] L.M.L 패션쇼 2부 현장에서 노현희 여사의 갑질 폭행. (긴급회의 : 고소 논의.)
일정에 변화가 없다.
즉 이건 HK 그룹의 안주인인 노현희가 김애련 부회장을 무시하고 사고를 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물러설 수는 없었다.
“부회장님. 노현희 여사는 부회장님이 있든 없든 수작을 부릴 겁니다. 자기 아들 둘을 감옥에 보낸 저한테 복수하려고 유진이에게 해코지를 할 것 같습니다. 쇼가 아마 엉망이 될 거 같은데요?”
김애련 부회장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녀는 내 판단 덕분에 언니를 물리치고 대천 그룹의 경영권을 확보한 이후 내 말을 꽤 신뢰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정 실장이 볼 때 노 여사의 분노가 그 정도였어?”
“예.”
그때 곁에 있던 이하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정 실장님. 노 여사님이 차기 대천 그룹의 주인을 무시한다는 건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저 때문에 자식이 둘이나 감옥에 갔습니다. 악에 받친 어머니가 이성적인 판단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VVIP들이 모인 자리에서 품위 없는 짓을 하실 분은 아니에요. 노 여사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 분인데요.”
이하윤은 아직 어리다 보니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앞에서 보여준 노현희의 모습만을 보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귀 전 내가 본 그녀는 이하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집요하고 악랄했다.
다행히 김애련 부회장은 노현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보니 내 의견을 따라준다.
“알았어. 만에 하나 노현희가 유진 씨한테 수작을 부리면 바로 쇼를 멈출게. 그럼 되겠어?”
그러자 이하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김애련 부회장에게 조언한다.
“음~ 엄마. 다 좋은데 노 여사님이랑 싸웠다간 VVIP들 10명 아니 그 이상과 관계가 끝장날 거야. 그럼 앞으로 백화점 매출이 엄청나게 떨어질 건데 그건 어떻게 해?”
나 역시 이하윤과 같은 생각이다.
가장 쉬운 해결책은 쇼를 멈추는 것이겠지만 노현희 때문에 결과적으로 손해를 볼 순 없다.
이 쇼에는 유진이의 평판뿐 아니라 내게 큰 도움을 준 L.M.L의 이영아 대표의 미래도 걸려있기 때문이다.
“부회장님. 쇼는 계속 유지하면서 노현희 여사를 견제할 방법이 있습니다.”
김애련 부회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어떻게?”
“명예회장님을 부르시죠.”
김부호 명예회장의 나이는 76살로 대천 그룹을 창립한 창업주다.
재벌가의 창업주들은 타 그룹의 일원들에게도 큰 존중을 받는 편인데 김부호 명예회장은 나이도 76살이다 보니 재계의 큰 어른 대접을 받는다.
그가 현장에 나타나면 아무리 노현희라도 나대지 못할 수가 있었다.
“우리 아버지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정 실장밖에 없을 거야 아마.”
“연락해보실 겁니까?”
“지금 할게. 하지만 아버지가 응할지 안 응할지는 장담 못 해.”
“알겠습니다. 만약 안 오시면 그때 쇼를 중단하시죠.”
“그래.”
난 그렇게 말을 마친 뒤 대기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돌아가면서 폰을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2.2]
[날짜 : 2021년 1월 31일]
-PM 11: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NEW. 정유진] L.M.L 패션쇼 2부 현장에서 노현희 여사의 갑질 폭행. (긴급회의 : 고소 논의.))
‘오시겠군.’
그때였다.
날 따라붙은 이하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날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한다.
“정 실장님. 우리 외할아버지가 진짜 오실 거라고 생각하세요?”
김부호 명예회장은 일선에서 은퇴한 터라 어지간해선 관련 비즈니스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에브리데이 일정이 삭제되었기에 확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그럴걸요?”
이하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안 오실 텐데······.”
이하윤은 승부욕이 꽤 많은 타입이다.
그걸 알았기에 난 슬쩍 장난을 걸었다.
“그러면 내기할까요?”
이하윤이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예! 내기해요 우리.”
이하윤이 미끼를 덥석 문다.
“그런데 내기에서 이기면 보상은 뭡니까?”
이하윤이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요. 단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요. 어때요?”
회귀자에게 내기라니.
심지어 에브리데이도 들고 있는 내게 내기라니.
이하윤 씨.
당신 큰 실수한 거야.
“그렇게 하죠.”
난 피식 웃으며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 * *
‘이 사람. 대체 뭐지?’
이하윤은 앞선 정윤호의 넓은 등을 보고 의문에 잠겼다.
분명 연예인 매니저라고 들었다.
그런데도 외할아버지와 엄마는 마치 그가 재벌 후계자라도 되는 듯 먼저 나서서 VVIP 초청장을 발급해줬다.
VVIP 초청장은 재벌가의 직계나 다선 정치인급은 되어야 발급해주는 건데 말이다.
게다가 외할아버지와 엄마는 눈앞에 남자를 만나보라며 종용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이제껏 아르바이트도 해 본 적도 없는 자신에게 백화점 직원이나 입는 옷을 입히고 안내까지 하라고 시키면서 말이다.
외할아버지와 엄마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따르지 않으면 카드와 차를 다 뺏는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꽤 잘생긴 외모였기에 괜히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전혀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직원 복장을 입었다고 해도 명색이 대천 그룹의 3세인데 말이다.
게다가 엄마에게 노현희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했다고 말했는데도 그는 자신을 무시하고 기어코 엄마에게 찾아갔다.
살짝 화가 났기에 괜히 곁에서 투덜거렸다.
그런데 남의 말이라곤 귓등으로도 안 듣는 엄마는 정윤호란 남자의 말은 너무도 쉽게 수락을 해버렸다.
거기다가 그 남자는 대천 그룹의 설립자인 자기 외할아버지도 무서워하지 않고선 와달라 하였고.
재벌가의 후계자들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워하는 외할아버지인데 말이다.
하지만 절대로 외할아버지는 오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었기에 내기를 걸었다.
그런데 그가 너무 해맑게 웃는다.
왠지······ 당한 것 같다.
그런데 그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정윤호와의 키 차이 때문에 거리가 벌어졌다.
“같이 가요 정 실장님. 왜 이렇게 발걸음이 빨라요~”
목소리에 살짝 비음이 섞여 나온다.
그런데도 정윤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빠른 걸음걸이가 느려진다.
무심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섬세한 사람인 것 같다.
어쩌면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 *
L.M.L 블랙라벨 패션쇼 2부 무대가 시작되었다.
1부 무대와는 달리 2부는 5명씩 의상과 백 그리고 액세서리를 착용한 채로 VVIP들 앞에 선다.
그러면 VVIP들은 각자의 옆에 있는 진행요원을 불러 마음에 드는 옷을 가리킨다.
VVIP들은 물품 구매 시에 가격을 묻지 않는 것이 에티켓이다.
다만 나갈 때 자신들이 선택한 옷과 백 그리고 액세서리의 총합계 금액만 보고 구매 여부를 결정한다.
내키지 않으면 NO라고 선택할 수 있지만 다음부터는 VVIP 패션쇼에 초청받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YES를 선택한다.
그때 김애련 부회장이 마이크를 잡고 나와 사회를 보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구매를 원하시는 분은 진행 요원들에게 사인을 주시면 됩니다.”
현재 50명이 되는 VVIP 멤버들 곁에는 50명의 진행 요원들이 태블릿을 들고 1대 1로 붙어 있다.
“자 드레스 1번부터 5번까지 먼저 보시죠.”
유진이를 비롯해 모델 4명이 나온다.
1번은 유진이가 입고 있는 ‘영광’이고 2번에서 5번까지 드레스는 다른 모델들이 입고 있다.
다들 드레스 이외에도 백 액세서리를 하고 있었다.
순간 VVIP들은 곁에 있는 진행요원들에게 구매를 요청한다.
“정유진이 입고 메고 끼고 있는 거 싹 다 넣어줘.”
“난 정유진 백만 줘.”
“난 1번부터 5번까지 드레스 전부다. 아 정유진 백은 따로 챙겨 줘.”
다들 금액 따윈 묻지도 않고 유진이가 착용한 것을 중심으로 구매를 요청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여기!”
드디어 노현희가 손을 들어 올린다.
그런데 그녀의 눈은 진행 요원이 아니라 김애련 부회장을 향하고 있었다.
“노 여사님. 제품 구매는 곁에 있는 요원에게 하세요.”
“아니. 그거 말고.”
노현희는 김애련 부회장과 띠동갑 이상 나이 차이 나는 데다가 평소에도 알다 보니 말을 편히 하고 있었다.
“그러면요?”
노현희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같은 옷을 입어도 격이 있는 애들이 입어야지 태가 살지. 어중이떠중이 모델한테 입혀서 어떻게 판단해? 나 오늘 돈 좀 팍팍 쓰고 싶은데 다른 애들 다 치우고 정유진한테만 입혀서 다시 선보이면 안 될까?”
옷을 갈아입고 백을 메고 액세서리를 끼고 나오는 데만 못해도 5분은 걸린다.
준비한 옷이 총 30벌이니 그냥 옷만 갈아입고 나와도 150분이다.
거기서 옷을 입고 나왔을 때마다 구경한다고 시간을 들이면 앞으로 새벽 몇 시가 되어야 쇼가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노현희는 유진이를 노리고 큰 곤욕을 치르게 할 셈인 게 분명했다.
김애련 부회장에게 사인을 주자 노현희를 막고 나선다.
“노 여사님. 유진 씨한테 오늘 의상을 모조리 입혀서 선보이라는 건 조금 과한 요구가 아닐까요?”
점잖은 말투였지만 김애련 부회장의 말에 날이 서 있다.
“내가 공짜로 보자는 것도 아니고 돈 쓰겠다잖아. 대천 백화점 VVIP 대우가 왜 이래? 부회장이 바뀌어서 그래?”
VVIP들은 어딜 가든 어떤 무례한 요구를 하든 왕처럼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는 대우를 받는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건 안된다는 말.
아니나 다를까.
김애련 부회장의 입에서 ‘할 수 없다’란 말이 나오는 순간 다른 VVIP 회원들도 술렁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구속된 첫째 김애자 부회장 이름까지 나오자 웅성거림이 커진다.
그때 노현희와 함께 온 일행들이 바람잡이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정유진은 판매액도 나눠 받는다는데 나쁠 게 없지 않아요?”
“VVIP라고 해서 기대하고 왔는데 실망인데요? 부회장님?”
VVIP들이 특별한 대우를 바라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톡톡톡.
최상층 플로어 끝 쪽에서 지팡이의 끝이 플로어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노 여사는 나이가 들어도 목청이 아직 정정하구먼?”
대천 그룹의 창업자인 김부호 명예회장이 나타나 버렸다.
난 옆에 앉은 이하윤을 쳐다봤다.
“내기는 제가 이겼죠?”
이하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인다.
“예······ 제가 졌어요.”
이하윤이 너무도 선선히 대답하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가 내가 알던 것과 달라 이상했지만 지금은 그 일에 신경 쓸 타이밍이 아니었다.
난 다시금 노현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노현희가 인상을 찌푸리고 김부호 명예회장을 바라본다.
“회 회장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근처를 지나가다가 품위 없이 남의 업장에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들려서 한 번 들러 봤어.”
노현희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지금 저······ 말씀하시는 거예요?”
김부호 명예회장은 뻔히 알며 시치미를 뗀다.
“허허허 그럴 리가 있는가? 우리 노 여사가 품위 있는 걸 내가 왜 몰라? 와 보니까 그게 거짓말이라는 게 뻔히 알겠던데.”
노현희는 누가 들어도 자신을 지적한다는 걸 알았지만 맞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 그럼요.”
“그런데 말이야 조금 전에 보니까 모델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이렇게 하는 게 어떤가?”
김부호 명예회장이 씨익 웃더니 한 가지를 제안했다.
그런데 그 제안은 노현희의 계획을 단번에 무너뜨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