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0화
600. 천륜(天倫) 5
MBS 신관 2번 스튜디오.
한유식의 둘째 한준희가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인 <만물척척>이 촬영되고 있다.
<만물척척>은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에 대한 해결책을 교수와 전문가 그리고 연예인들이 등장해서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매주 수요일 밤 11시에 방송되는데 시청률이 13%에 이를 정도의 인기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기도 했고.
이 방송에는 굴렁쇠 엔터의 배우 2실 신예 여배우 유소민도 패널로 출연 중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스태프들 사이로 메이크업을 마친 한준희가 나오는 게 보인다.
그녀는 맨 앞 열에 있는 자기 자리로 가려다 날 발견하고 뚜벅뚜벅 다가온다.
안 그래도 그녀를 만나려고 했는데 먼저 다가와 주니 편하게 되었다.
내게 다가온 그녀가 눈을 치켜뜨며 말한다.
“정윤호. 넌 여기 왜 왔어? 아~ 혹시 나랑 미리내 지분 가지고 협상이라도 하러 온 거야? 그렇다면 꿈 깨. 너한테는 지분을 한 톨도 줄 생각이 없으니까.”
“협상하러 온 게 아니라 경고를 하러 온 겁니다. 그러니 말로 할 때 미리내의 지분에 관심을 끄십시오. 그러면 지금 출연 중인 이 프로그램에도 계속 출연할 수 있게 해드리죠.”
그녀가 욕심을 내려놓을 리는 없지만 최소한 기회는 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한준희가 코웃음을 친다.
“웃기고 있네 네가 뭐라고 출연을 하니 마니 하고 있어? 이 프로그램 메인 협찬사가 우리 남편이 하는 현성 가구인 건 알아?”
현성 가구는 연간 매출만 수백억대에 달하는 업계 3위권 가구 전문 기업인데 그 대표인 이형두는 자기 아내를 위해 메인 협찬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후회 안 하십니까?”
“후회는 네가 해야지! 그리고 내가 경고한 거 기억 안 나? 아버지 앞에서 알짱대면 네가 데리고 있는 배우들 출연을 다 막아버린다고 한 거?”
역시나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때 <만물척척> 프로그램의 장성호 PD가 한준희와 내가 있는 걸 보고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온다.
“어~ 한 교수님. 정 실장이랑 아는 사이십니까?”
한준희가 장성호 PD에게 고개를 돌린다.
장성호 PD는 일그러진 한준희의 표정을 보고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하하. 이 이거. 두 사람이 그렇게 편한 사이는 아닌가 보군요.”
한준희가 눈을 부라리며 말한다.
“장 PD. 오늘 우리 남편 회사랑 협찬 계약하기로 했던 거 기억하지?”
장성호 PD가 움찔하며 대답한다.
“아 예. 오늘 촬영 끝나고 갱신하기로 하셨죠.”
“그거 좀 힘들 거 같아.”
“예?”
장성호 PD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간다.
한준희의 남편이 대표로 있는 ‘현성 가구’는 아내의 방송 활동을 돕기 위해 <만물척척> 총제작비의 20% 정도를 쏟고 있다 들었다.
그 계약 갱신이 물거품 될 위기에 처하자 당황한 장성호 PD가 다급히 말한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한준희가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본다.
“자세한 걸 말하기는 좀 그렇고······. 현장에서 정 실장네 회사 식구들이 안 보이면 협찬 갱신해 줄게. 우리 장 PD 분위기 파악 잘하잖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사실 방송 협찬의 세계에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프로그램 협찬사가 미는 배우와 경쟁 관계에 있는 배우를 PD가 출연시키면 협찬을 끊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깟 협찬.
그게 얼마나 별 게 아닌지 지금부터 보여줘야겠다.
그리고 클래스가 다르다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 것인지도 말이다.
‘연예계는 내 홈그라운드야 한준희 씨.’
난 팔짱을 끼고 의기양양하게 있는 한준희를 향해 피식하고 웃어준 뒤 당황한 장성호 PD에게 말했다.
“장 PD님. 비는 협찬은 제가 채워드려도 되겠습니까?”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성호 PD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진짜?”
“예. 제작비를 지원해드리는 정도라면야 가능하죠.”
“물론이지. 어딘데?”
“잠시만요.”
난 그 즉시 진성 호텔&리조트의 대표 대행인 진아람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자 진아람 이사가 대번에 전화를 받는다.
-네 정 실장님. 왜 그러세요?
“혹시 수요일 밤에 하는 ‘만물척척’이란 프로를 보십니까?”
-전 바빠서 자주 못 보는데 저희 어머니가 즐겨 보세요.
“혹시 ‘만물척척’에 협찬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해당 프로그램은 평균 시청률 13%에 40대 이상이 주 시청자층입니다. 호텔 사용자들의 층과 겹쳐서 호텔 홍보 효과가 제법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진아람 이사의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야~ 벌써 우리 진성 호텔 쪽을 챙겨주는 거예요?
“겸사겸사요. 진 이사님이 대표 대행이신데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해드려야죠.”
-그러면 대신에 이태풍 씨 좀 출연 가능해요? 영화 개봉하고 3주간만 부탁드릴게요.
<지리산>이 개봉할 타이밍에 맞춰 세 번을 해달라고 한다.
아무리 우리 사이지만 세 번은 요구가 과하지.
“두 번 해드릴게요.”
-딜! 그러면 협찬 제안서 팩스로 넣으라고 해주세요. 제 앞으로 직접 보내주면 돼요.
“감사합니다.”
-그럼 전 바빠서요. 나중에 제가 연락드릴게요오~
진아람 이사가 너무도 친근한 태도를 보이며 전화를 끊는다.
덕분에 장성호 PD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본다.
“뭐야? 이거 실화임? 지금 진아람 대표 대행이랑 직접 통화한 거야? 맞아?”
그는 어찌나 놀랐는지 연신 되묻는다.
“설마 제가 이런 걸로 PD님한테 장난치겠습니까? 팩스 넣어 보세요. 진 이사님 성격이 급해서 바로 답변 올 겁니다.”
“아 알았어. 그리고 진짜 이태풍도 출연시켜주는 거고?”
“예. 다음 주 녹화부터 2주 연속이요. 대신 녹화는 4시간 이내로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 무조건 다음 녹화는 4시간 안에 끊을게. 이야~ 하하하. 진성 호텔 쪽 협찬에 이태풍까지. 내가 어제 똥 밭에 구른 게 이것 때문인가 본데? 하하하.”
졸지에 협찬이 끊길 뻔했는데 더 큰 협찬이 들어오자 장성호 PD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반면 한준희는 설마 내가 이처럼 쉽게 대형 협찬을 따낼 줄 몰랐다는 듯 멍한 표정이다.
하지만 난 이쯤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장 PD님. 진성식품 협찬은 안 필요 하십니까?”
장성호 PD가 침을 꼴딱 삼킨다.
“서 설마 그것도 줄 수 있어?”
“물론이죠.”
“협찬이야 다다익선이지!”
난 즉시 진성식품의 진성준 대표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진성준 대표는 흔쾌히 2월 초에 나오는 ‘THE 베스트’의 제품 협찬과 진성식품의 모든 제품 협찬을 약속했다.
MBS의 <만물척척>에는 음식 만드는 법이나 기성 제품을 이용해 간편히 해 먹을 수 있는 요리 방법 같은 것도 나온다.
주로 CK 식품 제품들을 사서 요리하곤 했는데 이 기회에 진성식품도 끼워 넣자는 말에 대번에 오케이를 내린다.
-윈윈이네요. 감사합니다. 정 실장님.
“아닙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진성식품 대표에게도 직접 광고 협찬을 받아내자 장성호 PD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다.
“저 정 실장. 내가 뭘 어떻게 해줄까? 응?”
이제 한준희에게 어설픈 힘으로 장난질을 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다.
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한준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장 PD님. 그런데 여기 한 교수님. 만물척척에 충분히 나올 만큼 나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장성호 PD가 대번에 알아듣고 씨익하고 웃는다.
“흠. 하긴 그렇긴 하지. 음······ 새해도 됐고 하니까 신선한 얼굴을 들이는 게 좋긴 하겠네요.”
한준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발끈하며 말한다.
“장 PD!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장성호 PD가 한준희를 힐끗 쳐다본다.
“어이쿠? 아직 계셨어요? 진작 가셨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귀가 어두우신가 보네요?”
장성호 PD는 조금 전 협박을 당한 게 기분이 나빴던지 대놓고 면박을 주고 있다.
한준희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한다.
“자 장 PD. 내가 이 프로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지 몰라?”
장성호 PD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그동안 협찬을 해줘서 비위를 좀 맞춰드렸더니 오해가 좀 있으신가 보네. 이봐요. 한 교수님. 그쪽 나올 때 시청률 별로 안 좋아요. 시청자 게시판 댓글도 별로고요. 한마디로 꽝입니다 꽝.”
“뭐 뭐라고?”
“한 교수님은 시청자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안 해주시고 본인 하시고 싶은 이야기만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출연하셔도 아쉬워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화가 난 한준희가 씩씩대며 말한다.
“장 PD. 당신 진짜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알았어. 그럼 난 CP랑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지 뭐. 어디서 고작 PD 따위가 내 출연을 놓고 이래라저래라해?”
그때였다.
자신을 비하하듯 말하자 장성호 PD가 더는 참지 않고 말한다.
“아~ 씨X! 보자 보자 하니까 눈치 더럽게 없네. 어이~ 한 교수. 누군 화 못 낼 줄 알아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 CP님한테 연락한다고? 그래 해봐. PD 회의에 이 안건 올려서 당신 다시는 우리 방송국에서 발 못 디디게 할 거니까. 막말로 당신이 교수지 방송인이야?”
“뭐. 뭐라고?”
“아직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 같은데 막말로 당신 X도 아냐. 협찬을 잘 주길래 고개 좀 숙여줬다고. 알겠어?”
사실 PD는 방송국에서 상당한 힘을 갖고 있다.
특히나 인기 프로그램의 PD라면 CP나 국장들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실제로 시청률을 매주 책임지는 건 PD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협찬이 있어야지 제작도 할 수 있기에 협찬을 해주는 사람들에게 비위를 맞춰주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런 PD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다.
장성호 PD는 어찌나 열을 받았는지 아예 방송국에 출연 금지를 내리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제야 한준희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챘다.
“자 장 PD. 진짜로 이럴 거야?”
“아 그 면상 보기 싫으니까. 당장 여기서 나가!”
장성호는 세트장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정도로 고함을 치며 한준희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모든 스태프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한준희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나 버렸다.
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장성호 PD에게 인사한 뒤 곧장 한준희의 뒤를 쫓았다.
아직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 * *
MBS 세트장 복도.
“잠깐만요!”
우뚝.
씩씩거리며 걸어가던 한준희의 발걸음이 멈췄다.
“왜 불러!”
“다시 한번 말합니다. 미리내 지분에 관심 끄세요. 아니면 다음에는 남편 쪽 회사에 피해가 갈 겁니다.”
“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진성 그룹의 대표들과 직접 전화하는 사이라는 걸 안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진작에 이럴 걸 그랬다.
“뭐 별건 아니고요. 진성 계열에서 납품하는 현성 가구를 받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리려고요. 그룹 전체에 현성 가구가 안 들어가면 꽤 타격 좀 있을 거 같은데요? 안 그래요?”
한준희의 기세가 한풀 더 꺾인다.
날 보는 눈에는 독기가 씻은 듯 사라지고 있었다.
자기 빽인 남편이 큰 타격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이젠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한준희의 그런 모습을 보니 한숨만 나온다.
한준희의 아버지인 한유식 대표가 KBC에서 나왔지만 그의 라인들은 여전히 KBC에 남아 있었다.
또한 한때 KBC 전무까지 올라간 터라 한유식의 부탁을 들어줄 PD와 CP들은 MBS나 SBC에도 한 트럭이 있다.
즉 방송국 내에서는 자기 남편의 빽보다 자신이 버린 아버지의 빽이 몇십 배가 더 센데 그녀는 그걸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걸 보고 제 복을 제가 발로 찬다고 하는 것 같다.
한준희는 내 협박에 겁을 먹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 알았어. 미리내에 완전히 관심 끌게. 그럼 됐지?”
“그리고 한유식 대표와 이아은 여사님께 다시는 연락하지 마십쇼. 두 분은 이제 좀 편하게 살게 놔두시고요. 아시겠습니까?”
“아 알았어. 그 그러니까 남편 회사만큼은 건드리지 마. 제발. 응?”
“약속만 지킨다면 저도 당신 쪽에 신경 쓸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그쪽처럼 한가한 줄 아십니까?”
한준희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대답한다.
“알았······ 어.”
“그럼 가 보십쇼.”
한준희가 몸을 부르르 떨다 홱 하고 돌린다.
또각또각.
하늘이 내린 천륜을 버리고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부모마저 버린 자의 힘없는 발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준희까지 정리한 난 다시 최영호 은행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행장님.”
-그래? 어떻게 됐나?
“첫째와 둘째는 정리했습니다.”
-정 실장답게 속전속결이군.
“혹시 셋째는 추가적인 정보가 있습니까?”
셋째 한준식을 상대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했기에 조금 더 정보를 달라고 했다.
그때 최영호 은행장이 말한다.
-정 실장. 그러지 말고 한준식 변호사는 나한테 한번 맡겨 봐. 오늘 당장 처리해 주지.
잠시 고민했지만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난 이번 일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만 사람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주먹을 쓰지 말아 달라고 말하자 최영호 은행장이 껄껄대며 웃는다.
-믿어 봐. 이 기회에 은행이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주도록 할 테니까.
최영호 은행장은 30분 뒤에 한준식의 법무법인 건물 로비에서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난 전화를 끊은 뒤 방송국을 나와 한준식의 법무법인으로 향했다.
* * *
강남에 있는 법무법인 성의(誠意).
1층 로비에 가자 최영호 은행장과 장기호 상무 그리고 정장을 입은 여섯 명의 수행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부장판사 출신인 홍준호 법무총괄 부행장도 끼어 있었다.
“정 실장도 왔으니 인사들이나 하지. 이쪽은 홍준호 부행장. 그리고 이쪽은······.”
대흥 저축은행의 임직원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갔다.
띵.
10층의 문이 열리자 미리 기다리던 한준식과 변호사들이 우릴 반긴다.
대흥 저축은행장의 위세 때문도 있지만 자신들의 직속 법무총괄 부행장인 홍준호 때문이었다.
“오셨습니까? 선배님.”
법무법인 성의(誠意)의 변호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법조계에서는 기수가 상당히 중요하다.
특히 부장판사 정도만 되면 본인은 물론 그에 딸린 인맥이 있었기에 같은 회사가 아니더라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 수고들 하네.”
홍준호 법무총괄 부행장이 인사를 받고 나자 다들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우찬중 대표는 안 보이네?”
한준식이 대답한다.
“클라이언트 때문에 잠시 나가셨는데 이따가 들어오실 겁니다.”
법무법인 성의(誠意)는 남부지검장 출신의 우찬중 대표가 설립한 법무법인인데 한준식은 대표변호사 3명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준식이 최영호 은행장 뒤에 내가 있는 걸 알아차렸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길?”
그 순간 최영호 은행장이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내 일행에게 너라니? 한 변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최영호 은행장은 시작부터 한준식의 기를 죽이기 시작한다.
한준식이 이를 꽉 깨물고 대답한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그래. 앞장서.”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한준식이 최영호 은행장의 앞에 서서 회의실로 우릴 안내 한다.
회의실에 대흥 저축은행에서 나온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
한준식은 날 애써 무시하며 최영호 은행장을 보며 말한다.
“갑자기 절 보자고 하셔서 놀랐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최영호 은행장은 한준식과 예전에 몇 번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고 했었다.
은행업을 하다 보면 온갖 업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무법인이 민사 소송을 할 땐 저축은행 1위인 대흥 저축은행 쪽과는 업무 협조를 주고받는 일도 많았고.
그러다 보니 갑작스레 찾아왔는데도 만나주고 있었다.
최영호 은행장이 안색을 굳히고 말한다.
“한 변. 자네 지금 부모 재산을 빼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던데 사실인가?”
한준식은 그제야 최영호 은행장이 왜 찾아왔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날 힐끗 쳐다본 뒤 최영호 은행장에게 뻔뻔하게 대답한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예. 정 실장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었든 아닙니다.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건 은행장님이 상관하실 일은 아니잖습니까?”
최영호 은행장이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한준식을 보고 이놈 보게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이내 눈이 매섭게 변한다.
“알았어. 그래. 개인적인 문제를 갖고 그러는 건 프로답지 못하지. 그럼 우리 프로답게 문제를 풀어 볼까?”
“예?”
“자네가 욕심내는 그 ‘미리내’란 기업. 내가 직접 회생을 진행하는 걸 알고는 있나?”
한준식이 인상을 찌푸린다.
변호사인 그가 대흥 저축은행이 ‘미리내’의 회생을 진행한다는 걸 모를 리는 없다.
그런데 설마 은행장이 직접 그 일에 신경을 쓸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게 분명했다.
“몰······ 랐습니다.”
최영호 은행장이 거두절미하고 말한다.
“이젠 알았으니 됐지? 두말하지 않겠네. 손 떼게.”
한준식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다시 한번 날 바라본다.
그러더니 힘겹게 입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는······ 못하겠습니다. 그건 아버지와 저희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못 하겠다?”
“예.”
“프로답게 처리하려고 했는데도 싫다라······ 그럼 어쩔 수 없군.”
최영호 은행장이 심호흡을 잠깐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내게 말한 대로 최영호 은행장이 터무니없는 은행의 힘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