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화
60. 어느 하루 2
『부모를 잃은 유진이와 부모를 잃은 미소가 이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19살의 나이에 엄마가 되어버린 유진이는 오늘도 미소를 위해서 대본 책을 놓지 않고 있지 않네요.』
『평생 해본 적이 없었던 ‘연기’란 것에 도전한 것은 오로지 그녀의 딸 미소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유진이를 딸 미소가 응원하고 있군요. 한창 놀자고 하고 싶을 텐데도 의젓하게 참으면서도요.』
원래 휴먼스토리의 나레이션은 ‘최승락’이라는 중견 배우가 전담한다.
그런데 이번 화에는 <파란 하늘>에서 유진이의 엄마 역을 맡은 ‘이사랑’의 목소리였다.
“이거······ 이사랑 선생님 목소리 맞죠?”
“그런 거 같은데?”
유진이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사랑은 대본 리딩 때마다 유진이를 친딸처럼 이뻐했다.
하지만 휴먼스토리에 직접 목소리 출연까지 해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정상급 여배우라 스케줄도 많으실 텐데.
‘인사 한번 드려야겠네.’
다시 한번 휘리릭 영상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구성철 실장과 내가 SNS 댓글과 기사를 보며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장면이다.
『도대체 왜 이런 댓글을······』
우리가 영상을 보며 토로하는 모습에 이사랑 배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레이션을 이어갔다.
주강용 기자란 사람이 쓰는 날조 기사에 유진이가 고통받고 있다고.
어떻게든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서려는 유진이가 좌절하고 있다며 말이다.
다시 한번 영상이 바뀌었다.
유진이가 급체했던 그날.
초췌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슬픈 눈으로 미소를 껴안고 있는 모습이다.
유진이는 힘없이 앉아 있고 미소는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에게 안겨 있었다.
『······그러니까 유진아. 이제 병원 가자.』
『예. 알았어요. 아 오빠 이따가 대본 리딩 가야 하는데······』
『몸도 안 성한 애가 무슨 소리야!』
『그래도 약속을 어길 수야 없죠. 병원에 갔다 바로 갈게요.』
유진이를 부축해 일어나자 반대편에선 미소가 낑낑대며 엄마를 부축했다.
그 모습을 배경으로 이사랑의 나레이션이 이어졌다.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나는 이 어린 소녀가 왜 이토록 가혹한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요?』
『이 두 모녀가 잘못한 게 뭐가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단둘이 남은 모녀의 어느 하루가 또 이렇게 지나고 있습니다.』
이사랑 선생님의 목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잦아들었다.
영상의 맨 마지막에는 119에 유진이가 실려 가는 모습으로 <휴먼스토리> 1부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동시에 <섬 집 아기>가 다시 한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영상만 본다면 유진이가 악플 때문에 생사를 넘나들고 죽어가는 것처럼 오인하기 딱 좋았다.
아무리 편집이 마법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로 공을 들였을 줄이야.
나훈석 PD가 단언한 것처럼 상상 이상의 결과물을 뽑아놓았다.
방송이 끝나자 유진이는 미소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자신들의 이야기인데도 너무도 슬픈 드라마 한 편을 본 듯 눈이 팅팅 부어 있었다.
그때였다.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 : 구성철 실장]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눈물을 닦은 뒤 전화를 받았다.
-야. 너······ 너······.
“어? 실장님. 왜 그러십니까?”
-그 그러니까······.
“설마 우십니까? 실장님?”
-아 아니. 그니까 내 말은. 자식아. 수고했다!
구성철 실장이 울고 있었다.
먹먹함이 차올라 뭔가 말하려는 걸 까먹었다가 뒤늦게야 유진이에게 그동안 잘 버텨내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라고 한다.
사모님과 딸들도 울면서 응원해 주라는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하더라면서.
구성철 실장은 아내에게 회사는 그동안 뭘 한 거냐고 혼도 났다고 한다.
유진이가 저렇게 맘고생을 하는데 회사가 뭘 한 거냐고.
그리고 그 순간 내 폰으로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김솔잎 작가와 이지연 작가 그리고 SBC 정삼룡 CP부터 굴렁쇠 엔터의 직원들까지 모두가 응원의 전화를 전해 왔다.
한 명씩 대화하는 동안 무려 10분의 통화를 한 듯하다.
그리고 강지영 본부장의 말을 듣고선 포털을 확인했다.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와 댓글은 주강용 기자에게 속은 사람들의 사과로 도배되고 있었다.
[네이브 실시간 검색]
1위 유진아 미안해
2위 정유진 찌라시
3위 휴먼스토리
(실시간 댓글)
-언니 미안해요. 이런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고. 좋아했었는데 배신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더 욕했어요. 진짜 미안해요.
-와 진짜. 기레기 기레기 하더니. 그딴 걸 기사라고 낸 거였어?
-악플러들은 아직도 망상을 팩트라고 우김. 미친 듯.
-미친 기레기들 때문에 억울한 사람만 잡았네;;; 미안해서 어쩌나;;; -욕하던 사람들 다들 머리부터 쎄게 박자.
-천호동 버거 알바 할 때도 친절하기로 소문났었음. 아무리 사실을 말해줘도 소속사 알바라고 날 욕하던 인간들 전부 스샷 따놨다.
-욕한 놈들. 어쩔? 소속사에서 고소한다던데?
-ㅋㅋㅋ 역시 인생은 실전이다. 고소각 잼.
-죄송해요. 그래도 전 조카 아니 따님 욕은 안 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내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 진짜.
유진이를 생각 없이 욕했던 사람들이 급격히 돌아서고 있다.
그 탓인지 포털 실검 1위는 ‘유진아 미안해’로 바뀌고 있었다.
반면 끝까지 유진이를 믿었던 사람들은 극성 팬덤으로 변하고 있었고.
이 정도까지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날 거라곤 기대하진 않았다.
회귀 전 김동수에게 들었던 말이 내 기억 속 밑바닥에 남아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대중들은 멍청해서 우리가 보여주는 것만 믿을 거야. 걔들? 개 돼지나 다름없어. 그러니까 진실 같은 건 안 통해. 내 말 믿어.
하지만 김동수가 틀렸다.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유진이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만으로 주강용의 자극적이고 거짓된 기사가 전혀 힘도 못 쓰고 있었다.
대중들은 지친 삶에 찌들어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이 없었을 뿐.
진실을 외면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두 번째 내 삶에서 유진이와 정실모들을 택한 것이 실수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전화가 울려서 받아 보니 휴먼스토리를 연출한 나훈석 PD였다.
[발신자 : 나훈석 PD]
전화를 받자 나훈석 PD의 밝은 목소리가 들린다.
-정 매니저! 시청률 집계 봤어요?
“집계라뇨?”
-아 맞다. 아직 포털에는 안 떴겠구나. 하여간 방송국에서 체크 해봤는데 실시간 집계로는 15% 찍혔습니다! 내일 정확히 확인해 봐야겠지만 역대급입니다! 내가 된다 그랬죠? 하하하!
15%?
교양에서 그게 가능해?
드라마도 아닌데 어처구니가 없는 시청률이다.
“저 정말입니까?”
-주강용 그 개XX가 쓴 기사에 대해 역풍이 제대로 분 거 같습니다. 나도 시작할 땐 반신반의했는데 정 매니저 말이 맞았어요. 으하하.
나훈석 PD가 흥분해 쉴 새 없이 떠벌였다.
그래 오늘은 그래도 괜찮다.
나훈석 PD가 공을 들여 작품을 뽑아 준 덕분에 이제부터 진행할 모든 일이 훨씬 수월하게 될 테니까.
“감사합니다. 모두 다 나 PD님 덕분입니다.”
-그건 아니지. 내 덕이라니. 이제껏 유진 씨가 바르게 살아서 그런 거죠. 그리고 보면 유진 씨가 확실히 여느 연예인들과 다르긴 해요. 요즘 세상에 어떤 사람이 형제자매가 남긴 자식을 입양까지 해 가며 키운답니까? 그것도 그 어린 나이에.
수많은 연예인과 인간을 찍어 봤지만 그렇게 피사체에 몰두하게 된 경험도 처음이라 고백하는 나훈석이었다.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멋진 경험이었다는 나훈석 PD의 말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가 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 또한 가슴 뭉클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
나훈석 PD의 이야기를 듣던 난 이제 움직여야 할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 PD님. 죄송한데 휴먼스토리 2부 촬영은 모레 아침부터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틀이나 빼면 빡빡하긴 한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예. 지금 움직여야 할 일이 있어서요. 이렇게 좀······ 해주십시오.”
잠시 내 이야기를 듣던 나훈석 PD가 알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하죠. 그러면 끝나는 대로 SBC에서 봅시다.
“예.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난 여운에 잠겨 있는 유진이를 재촉했다.
“유진아.”
“네?”
“짐 싸.”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네. 왜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줄 테니까 2 3일 정도? 호텔에서 잔다고 생각하고 짐 싸. 빨리 출발해야 해.”
“예······.”
유진이는 캐리어를 가지러 작은 방으로 향했다.
“삼촌. 삼촌! 난 뭐해요?”
갑자기 엄마가 바쁘게 움직이자 미소가 들뜬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그러면 미소는 그림책이랑 색연필 챙길래?”
“응! 근데 우리 어디 놀러 가요?”
두근두근하는 기대가 어린 눈이었다.
“호텔~.”
“우와! 진짜요? 거기 엄청 비싼 데 아녜요?”
“별로 안 비싸. 그리고 가서 맛있는 거 많이 먹자. 근데 빨리 가야 하는데 가방 싸는 거 삼촌이 도와줄까?”
“아니 나 혼자서도 가방 쌀 수 있어요!”
미소는 혼자 할 수 있다며 조막만한 손으로 그림책을 가방에 주섬주섬 담기 시작했다.
난 눈물을 닦고 있는 주인아줌마에게 당부 사항을 전했다.
“아주머니. 기자들이 유진이 찾으러 오면 회사에서 데리고 갔다고 말 좀 해주세요. 뭐 한 한 달 정도 촬영 갔다고 하시던가요.”
“나만 믿어. 근데 안 돌아올 건 아니지? 이대로 다른 곳으로 이사 가거나 하면 안 돼. 응?”
주인아줌마가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이죠. 유진이랑 미소가 아줌마 두고 어딜 가겠어요.”
“그래. 두 사람 없으면 난 적적해서 못 살아.”
남편을 사별하고 수원에 일하러 내려간 아들네 부부의 빈 자리를 채워준 게 유진이와 미소였다.
그리고 유진이와 미소에게 엄마와 할머니 역할을 한 분이 이 ‘정인지’ 주인아줌마였고.
사실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정인지 아줌마를 향해 유진이와 미소가 외쳤다.
“아줌마도 참. 우리가 집 놔두고 어디 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나 하룻밤만 자고 올게요!”
“그래. 그래야지! 암~. 기다릴게.”
주인아줌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진이와 미소가 일어나 서로를 꼭 껴안았다.
꼭 다시 보자며 이산가족이라도 되듯 인사를 나누면서.
짐을 챙긴 뒤 곧장 차를 타고 유진이를 집을 나섰다.
그런데 골목 어귀를 지날 무렵 이미 소식 빠른 기자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제야 난 안도의 한숨을 쉬며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유진이 지금 호텔로 데리고 가고 있습니다.”
-그래? 빠르게 잘 대처했다. 이왕이면 회사 앞에 있는 리츠칼튼으로 가라. 우리 회사를 찾는 외국계 손님들 숙소로 쓰는 곳이니까. 호텔 접객 팀에 있는 박상진 팀장 연락처 까톡으로 보낼 테니까 그 사람이랑 통화해. 돈 걱정은 말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유진이 데려다주고 곧장 회사로 들어와라. 완전히 마무리 지어야지.
“알겠습니다.”
앞으로 하루.
이젠 주강용을 당연히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줄 시간이다.
* * *
유진이를 호텔에 데려다준 뒤 회사로 돌아왔다.
대표이사실에 들어가자 강감찬 대표가 날 보자마자 덥석 껴안았다.
“애썼다.”
두꺼운 그의 팔이 날 꽉 껴안자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생했다는 그의 칭찬이 보너스를 주겠다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기분 좋게 들렸다.
“아닙니다. 대표님. 운이 좋았습니다.”
“아직도 운 타령이냐. 허허허.”
날 풀어준 강감찬 대표가 어깨를 토닥였다.
그런데 대표이사실에는 구성철 실장만 있을 뿐 강지영 본부장이 보이지 않았다.
“유진이는 어쩌고 있냐?”
“말씀하신 대로 리츠칼튼 스위트룸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박상진 부장님이 전담 컨시어지도 붙여 주셨고요.”
지하주차장에서 VIP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터라 유진이가 호텔로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이 없다고 보고했다.
“알아서 척척 하는구나.”
회귀 전
탑스타들을 케어한 경험 덕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한 탓인지 강감찬 대표가 날 쳐다보는 눈에 흐뭇함이 담겨 있었다.
난 감사를 표한 다음 주강용 기자는 어찌 되나 물었다.
“주강용 그놈. 조금 있으면 아마 정신 못 차릴 거다.”
지금 강지영 본부장은 최소혜 기자를 만나 주강용 폭로기사를 조율 중이란다.
곽무혁 법무팀장은 피해자들을 만나 증언을 받아내고 고소하기 직전이고.
잠시 후 모든 것이 마무리될 거라고 공언하는 강감찬 대표였다.
“한두 시간 이내로 다 끝날 테니 마음 편히 있어라.”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대응한 덕에 주강용의 기사는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했다.
굴렁쇠 엔터와 휴먼스토리 그리고 팬클럽과 최소혜 기자까지.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은 덕에 승리를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강감찬 대표가 옷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러면 우리도 다음 일을 해 볼까?”
“다음 일이라뇨? 주강용 고소하는 데 저희가 또 할 일이 있습니까?”
강감찬 대표가 씨익 웃는다.
“SBC로 간다. 따라와.”
벌써 밤 10시가 넘는데 SBC로?
무슨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