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화
6. 첫날 4
S급 드라마 작가가 가진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10억 중국 팬을 들썩이게 만드는 한류 스타는 물론이고 거물 제작자와 방송국의 사장님들도 S급 드라마 작가 앞에서는 을에 불과하니까.
그런 S급 작가 중에서도 독보적인 이지연 작가가 특정 배우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크나큰 기회였다.
이지연 작가는 마음에 든 배우를 파격적으로 캐스팅하는 거로 유명하니까.
“현장에서 이지연 작가님이 유진이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으셨습니다. 아무래도 유진이한테 꽂힌 거 같습니다.”
하지만 김동수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진짜 어이가 없네. 1년 차가 어디서 판단을 해?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시키는 일만 하랬지? 이지연 작가가 눈여겨보면 다 한 자리씩 얻어? 영인이 일에나 신경 쓰라고!
김동수가 쉬지 않고 닦달을 해 댔다.
그런데 주영인을 챙기는 게 생각보다 좀 과하다.
설마 이때부터 주영인에게 관심이 있던 건가?
아니다.
더는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지난 인생은 진즉에 끝내고 왔으니까.
난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 버렸다.
“일단 저희 구 실장님께 먼저 보고하고 허락하시면 남양주로 가겠습니다.”
김동수가 당황했다.
-야! 여기서 구 실장님 이야기가 왜 나와?
한시가 급한데 이렇게 계속 통화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어? 작가님이 부르십니다. 끊겠습니다~. 죄송함다.”
-어 어디서 내 전화를······
달칵.
수화기 너머로 욕설이 들려왔지만 이젠 이 정도로 멘탈이 흔들리진 않는다.
난 곧바로 내가 속한 배우 2실의 구성철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까지의 상황을 설명했다.
-유진이가 이지연 작가 눈에 들었다고? 이야~ 우리 막내가 큰일 했네! 아 그리고 김 실장 지시는 씹어. 감히 누구 새끼를 오라 가라 그래? 앞으로도 현장 일은 선 조치 후 보고. 알지?
“예. 실장님. 사랑합니다!”
-오우~. 나도 사랑해 우리 막내.
행보관 같은 성격의 구 실장은 너그럽게 내 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직 미소에 관한 일정은 변함이 없다.
꽉 막힌 강동대로는 마치 내 심정 같다.
결국 난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 * *
-이봐요. 경찰서에 장난 전화하시면 잡혀가는 거 모르세요? 지금 당장 위치추적······
달칵.
“헉헉. 법이 바뀌었나? 112가 이제 위치 추적까지 할 수 있어?”
경찰서에 전화해 미소네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거짓 신고를 했다.
어린아이가 침대 밑에 숨은 채 겁에 질려 벌벌 떤다고.
혹시나 경찰이 보호해 줄까 싶었지만 전화를 받은 경찰은 단번에 내가 천호동에 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위치 추적해서 당장 유치장에 잡아넣는다기에 깜짝 놀라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이번엔 국민의 영웅 119다.
뚜루루루.
달칵.
-여보세요?
친절한 상담사의 목소리에 코를 잡고 말했다.
“여보세용. 천호동 XX 번지에 사는데용. 이 근처에서 가스 냄새가 나는 거 같아서용. 2층에서 나는 거 같아요옹~.”
-장난 전화하지 마십시오. 119는 위치 추적됩니다. 지금 강동대교 남단 쪽에 계시군요. 구리 방면에서 내려오시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이젠 나도 물러설 수 없다.
“아 진짜라고요! 제 사촌 동생이 이상한 가스 냄새가 난다고 까톡 보냈다니까요? 나중에 벌금을 내라고 해도 낼 테니까 좀 가 봐 줘요! 예? 제발요!”
내 간절한 부탁에도 119 상담사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전화하신 분의 주소지로 벌금 부과될 겁니다. 나중에 고지서 날아오면 수납하세요. 늦게 내시면 가산금도 붙으니 알아서 하시고요.
달칵.
전화가 끊겼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경색된 곳일 줄이야.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심부름센터다.
“저기 마당발 심부름센터죠? 위치가 천호동 XX에 XX인데요. 거기에 사는 애 좀 근처에······ 예? 유괴하는 거 아니고요! 진짜입니다! 경찰에 신고하지 마세요! 아니라니까요? 아 미치겠네!”
미친놈 취급받았다.
경찰에 신고한다기에 전화를 끊었다.
왜 이리 다들 준법정신이 강해?
애가 죽는다는데!
겨우 강동대교를 빠져나온 난 근처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전동 퀵 보드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헬멧이 없다.
어쩔 수 없지.
벌금을 물어도 내가 간다 미소야!
* * *
미소네 집에 도착했다.
“헉! 허억!”
500m 남았을 때부터 내린 눈 때문에 퀵 보드를 들고 뛰어왔더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낮은 담을 넘은 뒤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현관문이 열린 터라 곧장 안으로 들어가며 미소를 불렀다.
“미 미소야!”
“어? 유노 삼촌이다!”
미소가 눈을 뎅그렇게 뜨며 날 반겼다.
유진이를 닮아 아역 배우를 해도 될 법한 깜찍한 외모다.
뭘 하나 봤더니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두 갈래로 땋은 채 거실 한가운데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고작 30cm 정도 되는 문방구에서 파는 장난감 트리지만 솜도 붙이고 야광 스티커도 붙여 꽤 공을 들여놓았다.
“미소야. 유치원에 있으랬잖아. 왜 여기 있어?”
나는 다급한 내심을 숨기려 최대한 상냥한 태도로 미소에게 다가갔다.
데리고 나가야 하는데 혹여라도 겁을 먹고 울면 곤란하니까.
“그게요 엄······ 아니 이모 서프라이즈 파티해 주려고요! 우리 이모 크리스마스 대땅 좋아하거든요! 이거 다 만든 다음에 유치원에 돌아가서 기다리려고 했어요.”
미소의 얼굴에는 천진난만한 미소가 가득했다.
어쨌건 안 다쳤으면 됐다.
“알았어. 그러면 삼촌이랑 같이 이모 보러 갈까?”
“이거 다 만들어야 하는데요?”
“그러면 트리는 들고 나가서 만들자. 아저씨가 트리에 붙일 야광 스티커 많이 사줄게. 차에서 만들면 되잖아. 그치?”
그 순간 가스 냄새가 미약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촉박했다.
고민하던 미소가 엄지와 검지를 펼쳐 쭉 내밀었다.
“알았어요. 그러면 반짝이는 스티커 2개 사주세요! 큰 거!”
“그럼. 우리 미소 부탁이라면 뭔들 못 할까? 큰 거 3개 사줄게. 그리고 나가는 대로 바로 이모랑 원장님이랑도 통화하고. 어때?”
“응!”
그제야 미소가 내 손을 잡았다.
미소와 함께 밖으로 나가자 메슥거리는 양파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가스가 바람을 타고 1층에서 올라온 것 같다.
미소와 같이 걸어가다가는 늦을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난 미소를 안고 가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우리 미소. 삼촌이 비행기 태워줄까?”
“응!”
미소가 해맑게 답하며 두 손을 들어 내 목을 감쌌다.
미소를 품에 꼭 안은 뒤 미소가 놀라지 않게 하려 활짝 웃음을 지었다.
“부릉부릉~.”
“그래 부릉부릉~.”
미소의 말에 대꾸하며 조심스레 1층으로 향했다.
1층에 도착하자 가스 냄새가 심하게 나기 시작했다.
“삼촌. 이상한 냄새나요!”
“미소야. 미안. 삼촌이 방귀 꼈어. 코 좀 막고 있을래?”
“에이 디러. 뿡뿡이!”
미소가 양손으로 자기 코를 막았다.
그래 그렇게 있어.
나 역시 코를 막고 대문으로 향했다.
녹슨 철문을 보자 쉽게 문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스파크가 튀어 폭발이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는 미소를 가슴으로 감싼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마치 천둥이 울리는 것처럼 커다랗게 들렸다.
폭발하지 말라고.
제발 미소만이라도 다치지 않게 해 달라고 몇 번이나 빌었다.
그리고 문이 열린 순간.
밖으로 몸을 던질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슈욱- 슈욱.
문 앞에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119대원이 마스크를 쓰고 거친 숨소리를 내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신고하신 분입니까?”
“허어억.”
하마터면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신고하신 분 아닙니까?”
“예! 예! 제가 신고했어요. 저기 벌금 내도 되니까 저 안에 지금······”
“예.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가스 수치가 굉장히 높군요. 저쪽으로 빨리 대피해 주십시오.”
고개를 돌려 보니 도로 쪽으로 이미 차단선이 설치되어 대피 작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대한민국 소방관 최고!
전화로는 퉁명스럽게 말하더니 실제로는 출동을 해 주다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삐이이익.
삑.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가 골목 곳곳에 울려 퍼졌다.
“다들 비키세요. 거기 어르신. 위험하니까 뒤로 물러나세요.”
“가스 농도가 높으니까 이 너머로는 접근하지 마십시오. 어허! 거기 학생! 접근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천호동 주택가에 무려 8대의 소방차가 출동해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이 마치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대피선을 따라가는데 어디선가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찰칵.
“여기 좀 보세요! 저기 그쪽이 신고하신 분이라면서요?”
고개를 돌려 보니 사진을 찍는 사람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잠깐.
이 남자는 장문기 기자?
회귀 전엔 구민지 기자가 몸을 담고 있던 주간 스타의 편집장이다.
장문기 기자는 5년 뒤쯤 주간 스타의 편집장이 되는데 왜곡 날조 기사라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악명높은 인물이다.
근처 걸그룹 방송이라도 찍다가 소란에 뛰어온 거 같은데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저기 이쪽을 좀 보시고요. 예~. 좋습니다.”
찰칵찰칵.
가십란에 실을 사진인데 열심히도 찍는다.
연신 터지는 플래시에 미소가 눈을 찡그리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히잉~ 삼촌. 눈 아파.”
미소의 투정에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아 기자님. 플래시 좀 조심하세요. 어린 애 얼굴 정면에 대고 이게 뭐 하는 겁니까?”
내가 언성을 높이자 장문기 기자는 카메라를 아래로 내렸다.
“이크. 죄송합니다. 그러면 사진은 이만하고 인터뷰나 좀 할까요? 인터뷰해 주시면 문화상품권 한 장 드립니다.”
장문기가 웃으며 종이봉투를 꺼내 들었다.
어차피 이걸 받으나 안 받으나 기사가 나가는 건 확정이다.
현장을 떠난 사진을 찍혔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초상권 개념도 없는 연예부 기자에게 따져봤자 입만 아프니까.
이왕이면 문화상품권이나 좀 더 뜯어내서 미소한테 스티커나 왕창 사 줘야겠다.
“인터뷰는 기본이 상품권 두 장 아닙니까?”
장문기 기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하하. 요즘 회사 사정이 좀 어려워서······”
“아 그러면 인터뷰는 됐고요.”
“아 아니! 왜 이리 성격이 급하실까. 한국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지. 어려워도 드린다는 말입니다. 자. 여기. 두 장.”
10만 원짜리 두 장도 아니고 5만 원짜리 두 장이면서 생색은 엄청 낸다.
“그러면 바쁘니까 5분만 인터뷰에 응하겠습니다. 모자이크는 꼭 좀 해주시고요.”
“하이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장문기가 그런 거 하나는 철두철미한 사람입니다 내가.”
웃기시네.
가슴팍을 퉁퉁 치면서 배를 내미는 장문기 기자의 별명은 ‘변검’이다.
워낙에 안면을 잘 바꾼다고.
하여간 엉터리 기사를 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인간이었기에 난 최대한 꼬투리 잡히지 않게 인터뷰에 응했다.
* * *
“여기까지 하시죠.”
“이야. 인터뷰 좀 해보셨나? 기사 와꾸가 딱딱 맞게 떨어지는데 혹시 동종업계에서 일하시는 분인가?”
인터뷰가 끝나자 장문기가 혀를 내둘렀다.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방송계 쪽이라도······”
난 조금이라도 인터뷰를 더 하려는 장문기를 내버려 두고 미소를 등에 업었다.
“미소야. 꼭 잡아?”
“응! 삼촌.”
새하얀 눈이 내리는 천호동을 크리스마스트리와 전동 퀵 보드를 들고 승합차를 향해 달렸다.
등에 꼭 달라붙은 미소의 입김이 느껴지는 순간 가슴에서 뭔가 울컥하고 차올랐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 삼촌 울어요? 왜요?”
“아 아냐. 미소야. 눈에 눈이 들어가서 그래. 이거 다 눈이 녹은 물이야.”
“아. 그렇구나.”
미소가 오른손을 뻗어 내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쓱쓱.
“헤헤. 다 됐다.”
눈에 고인 물이 사라진 순간 미소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런 미소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운명을 거스르고 미소를 구했지만 털끝만큼도 두렵지 않았다.
설령 이로 인해 미소와 유진이의 운명이 변한다고 해도 예전과 달리 난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미래의 일정이 고스란히 적힌 다이어리도 가지고 있으니까.
“자~. 그럼 출발합니다. 공주님. 부릉부릉~!”
“꺄하하. 유노 삼촌~. 부릉부릉~. 꺄하하.”
미소의 맑은 웃음소리가 터질 것 같은 내 심장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