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6화
596. 천륜(天倫) 1
“이태풍씨와 정유진 씨가 저희 진성 호텔&리조트의 메인 모델이 되어 주셨으면 해요. 두 사람 광고료는 각각 연간 11억으로 맞춰 드릴게요.”
진성 호텔&리조트의 광고 모델은 호텔 업계에선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현재 에이스 엔터의 윤주연과 TNT 엔터의 조선재가 모델인데 두 사람은 대략 8억 정도 모델료를 받는 걸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보다 3억이나 더 많은 모델료를 준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놀랐지만 진짜 놀란 건 바로 그다음이었다.
“그리고 저희 진성 호텔에서 벌이는 국내 외 귀빈들이 오는 행사에 두 분과 정 실장님께 항상 초청장을 보낼게요. 초청료는 각각 2천만 원부터 시작할 거고요.”
진성 호텔&리조트에서는 매년 많은 행사를 벌어진다.
그런데 진아람 이사는 그 행사에 이태풍과 유진이를 매번 초청하겠다고 한다.
매번 2천만 원에 달하는 초청료를 받는 것도 엄청났지만 그때마다 외국 VIP들을 만나 인맥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진아람 이사도 그 점을 언급한다.
“다른 매니저들이면 모르겠지만 왠지 정 실장님이라면 VIP들과 큰일을 하실 수 있을 거 같아서 준비해 봤어요. 마음에 드세요?”
“글로벌 광고 계약을 맺거나 연예인들 해외 진출을 시킬 때에 큰 도움이 되겠네요. 배려해 주신 것 너무 감사드립니다.”
“역시나 바로 알아보시네요. 그리고 배려라뇨? 정 실장님이 절 여기까지 데리고 와 주셨잖아요. 이 정도 보상 정도는 해드려야죠.”
진아람 이사는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아 맞다. 그리고 제가 진짜 진성 호텔&리조트의 대표이사가 되면······ 다음 보상은 조금 더 기대하셔도 좋아요.”
이것만 해도 상당한 보상이었기에 다음번 보상은 도통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한 편이 된 상황이었기에 흔쾌히 대답했다.
“다음 보상이 뭔지 알기 위해서라도 꼭 진아람 이사님을 대표이사로 만들어 드려야겠는데요?”
진아람 이사가 웃으며 손을 내민다.
“꼭 이요!”
난 가녀린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아람 이사는 그렇게 자신을 대표 대행으로 만들어 준 보상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이복 남매에게서 자신을 지켜준 오빠를 진성 그룹의 회장으로 밀고 있지만 이 정도 배포라면 그녀도 충분히 진성 그룹의 회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진명희 대표를 무릎 꿇리며 진아람 이사를 후계자의 위치로 올리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띠잉.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진아람 이사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진성 호텔&리조트가 있는 5층에서 내렸다.
그리고 진성준 대표와 난 1층에서 내린 다음 본사 옆에 붙은 진성식품 건물로 향했다.
다음 달 초 발매될 ‘THE 베스트’ 최종 제품 테스트와 함께 홍보 전략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 * *
TNT 엔터의 대표이사실.
유강석 대표와 곧 KBC의 이사가 될 나태환이 서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봉숙희 CP가 사퇴한 다음 일절 연락이 되지 않고 집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태환은 혹시 유강석이 봉숙희 CP를 또 만난 적이 있나 싶어 찾아왔지만 유강석 역시도 봉숙희 CP가 갑자기 사퇴해서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대체 봉숙희 대표는 왜 대표이사직을 자진사퇴를 한 거랍니까?”
나태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한다.
“자세한 내막은 저한테도 말씀 안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퇴하기 직전 정윤호 그놈이 대표이사실을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협박을 당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니 방통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봉숙희 대표가 그깟 놈의 협박에 대표 자리를 던졌다고요?”
유강석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정윤호가 유능한 매니저라지만 차기 KBC 대표이사를 낙마시킬 정도로 힘이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거니까.
하지만 나태환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터라 이번에는 봉숙희 CP의 여동생에 관해 물었다.
“혹시 엔젤 미디어 컨설팅은 찾아가 보셨습니까?”
나태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집기는 엉망이 되어 있고 직원들도 없었습니다. 무슨 변호사들이랑 폐가구 수거업체 직원들만 가득했습니다. 폐업 절차를 밟은 것 같더군요.”
“허~ 거참······.”
그동안 연락이 되지 않아 불안했지만 너무 바빴기에 이번 주말이 지나면 만나러 가볼까 싶었다.
그런데 그사이에 봉숙희와 봉순자 두 사람 모두와 이렇게 연락이 끊길 줄은 몰랐다.
그때였다.
벌컥.
대표이사실의 문이 열리며 방성창 비서가 들어온다.
“대표님!”
“야! 지금 손님 계신 거 안 보여!”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평소라면 물러났을 방성창 비서가 꿋꿋이 버티고 있다.
유강석이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고 말한다.
“뭐야? 말해 봐.”
“진성 호텔&리조트에서 조선재와의 광고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통보를 해왔습니다.”
“뭐?”
진성 호텔&리조트의 전속 모델 자리는 5년째 연간 8억을 받은 알짜배기 광고였다.
그런데 그게 단번에 날아가게 생겼다.
“어떻게 된 거야? 오늘 진성 호텔의 부실 인수 때문에 기업 차원에서 허리띠라도 졸라 맨데?”
“아닙니다. 부족한 돈은 그룹 본사에서 나서서 메꾸겠다고 회장이 직접 보증했습니다. 심지어 직원을 10% 더 늘리고 업계 1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더 공격적인 투자를 하겠다던데요? 고작 1천억으론 진성의 기둥뿌리 안 흔들린다고요.”
진성 그룹의 막대한 자본력을 뽐내는 과감한 행동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하락하던 주가도 10%만 떨어지고 멈췄다고 한다.
“그런데 광고를 왜 잘라? 선재는 2월에 새 영화 들어가잖아. 영화 나올 때 광고 효과가 얼마나 더 되는지 모를 리도 없을 텐데?”
방성창 비서가 주춤거리며 말한다.
“그게 사실······ 진성호텔 본사 경영부서에 있는 친구한테 알아봤는데······ 굴렁쇠의 정윤호 실장이 오늘 본사에 들른 뒤 광고 모델을 이태풍과 정유진으로 교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답니다.”
“진명희 대표가 그랬다고?”
“아뇨. 진명희 대표 대신 진아람 이사가 대표 대행으로 당분간 회사를 이끌게 됐습니다. 그 첫 번째 지시였답니다.”
유강석의 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또······ 정윤호야?”
뿌드득!
손님이 있었기에 유강석은 이를 악물고 분노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젠X. 그러면 빨리 진아람 이사랑 약속을 좀 잡아 봐. 기획실 식구들 모아서 대책도 좀 세우고.”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방성창 비서는 여전히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또 왜? 아직 할 말이 남았어?”
“예. 실은······ 규환이가 모든 일정을 교묘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연무(煙霧)’에 출연시켜달라고 항의하는 거 같습니다.”
“걘 또 왜 그런대? 이미 다 끝난 일을 가지고.”
“이쪽도 정윤호가 관련된 것 같습니다.”
“뭐라고?”
TNT 엔터의 매니저들은 며칠에 한 번씩 연예인들의 차를 몰래 뒤져 운행 기록을 확인한다.
그리고 차에 달린 블랙박스도 확인하고선 자사의 연예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파악한다.
그 기록 중에서 정윤호를 만난 흔적이 나왔다는 걸 넌지시 말한다.
“여기도······ 저기도······ 정윤호. XX! 규환이 들어오면 바로 내 방으로 올라오라고 해!”
“예.”
방성창 비서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간다.
유강석은 숨을 쌕쌕 골랐지만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였다.
나태환이 기회다 싶어 물었다.
“유 대표. 저랑 같이 정윤호를 상대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제 별을 달게 된 나태환에게는 ‘좋은 파트너’가 필요했다.
때론 협찬을 도와주고 때론 대신 접대해 줄 파트너로 엔터 회사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특히 봉숙희가 사라진 이상 그가 직접 사단을 이끌어야 했기 때문이다.
“무슨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나태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열한 웃음을 짓는다.
“현재 드라마 제작사 ‘미리내’의 회생 절차가 진행되는 건 아시죠? 그 회사에서 제작할 ‘연무’는 정식으로 편성까지 됐고요.”
“들었습니다.”
“한 대표가 그 미리내의 지분 일부를 정 실장한테 넘긴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아니 한 대표한테는 장성한 자녀들이 있잖습니까. 근데 왜 정윤호한테 지분을 넘긴답니까?”
“한 대표의 회사가 망할 때 자식들이 입을 싹 닦았다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자녀 세 사람이 욕심이 좀 많은 편입니다. 다들 의사 교수 변호사라서 힘도 꽤 있고요.”
그 순간 유강석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잘하면 수십 수백억이 될지도 모르는 드라마 제작사의 지분이 엉뚱한 사람에게 넘어간다면······ 그 자녀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군요?”
“예. 정윤호를 고소하려 들 겁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이거 잘하면 정윤호를 엿 먹일 수 있겠는데요? 혹시 지금 바로 그 친구들을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유 대표님이랑 만나고 나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가시죠.”
이렇게 KBC의 나태환과 TNT 엔터 유강석의 연합이 결성되고 있었다.
* * *
진아람 이사와의 일을 끝낸 이후 진성준 대표와 식품 연구소에 들러 ‘THE 베스트’의 최종 테스트 버전을 시음했다.
대규모로 생산한 제품이지만 내가 처음 시제품으로 줬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난 다음 주 초에 이태풍의 ‘THE 베스트’ 광고 일정을 잡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그동안 한집에서 지냈던 ‘미리내’의 한유식 이아은 부부와 작별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 집 건너 옆집으로 가는 터라 사실상 붙어사는 셈이지만 말이다.
난 우선 한유식과 이아은이 자던 방에서 정인지 아주머니가 내어준 이불과 베개를 금빛 포대에 쌌다.
한유식과 이아은은 캐리어 하나 분량밖에는 짐이 없었기에 진즉에 다 싸둔 상태였다.
집 현관문을 나가기 전 정인지 주인아주머니는 이아은의 손을 잡고 눈물을 찍어낸다.
“바로 옆으로 이사 가는 데도 왜 이렇게 허전하니?”
이아은 여사 역시 손을 맞잡으며 말한다.
“저도 그래요. 언니.”
어느새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된 두 사람은 마치 생이별을 하는 듯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자 한유식이 헛기침을 하며 말한다.
“당신은 나 출근했을 땐 여기 와 있으면 되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아쉬워 해?”
이아은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거고요.”
한유식이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짓는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지만 왠지 생각을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사람 좋던 이아은이 한유식 대표를 살짝 흘겨보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한유식은 잠시 움찔하더니 이어서 정인지 주인아주머니에게 고개를 숙인다.
“요 며칠간 신세 많이 졌습니다. 덕분에 저도 아내도. 아픈 기억이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정인지 주인아주머니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말한다.
“그러면 매일 아침은 여기 와서 드세요. 대표님. 저도 적적해요.”
“그래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그렇게 작별 인사답지 않은 작별 인사를 마친 뒤 이사(?)를 시작했다.
난 이부자리를 싼 포대를 등에 지고 30m도 떨어지지 않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유식과 이아은은 각자 캐리어를 끌고 따라왔고 정인지 아주머니는 시장용 손수레를 끌고 간단한 집기와 함께 이사를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 이사를 마치고 나자 조금은 이른 점심시간이다.
뭘 먹는 게 좋겠냐는 말에 엄격 근엄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사엔 무조건 중국집이죠.”
“하긴 그렇지.”
한유식이 오늘은 자기가 사겠다며 문 앞에 비치된 전단지를 한 장 꺼내 들었다.
“으흠. 보자. 오늘은 중국집 메뉴 중에서도 맛있는 걸 좀 먹어야겠는데······.”
그런데 그때였다.
지잉~
내 폰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발신자 : 제1 경비초소]
유진이가 있는 천호동 집의 골목 양쪽에는 경비초소가 세워져 있다.
이 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모두에게 허락을 받고 세운 것들로 초소에는 24시간 골목을 지키는 경비들이 있다.
경비들은 이 골목에 사는 사람과 미리 허가된 사람만을 들여 보내주는데 문제가 있을 땐 이렇게 내게 전화를 한다.
전화를 받자 경비초소에 있는 경비원이 말한다.
-실장님. 입구에서 벤X를 끌고 와서 난동을 피우는 손님들이 있습니다.
“바로 경찰부터 부르세요. 뒤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평소에도 유진이를 만나기 위해 광고주나 기자들이 좋은 차를 타고 위세를 자랑하며 나타난다.
난 그때마다 책임은 내가 지니까 경찰에게 넘기라고 했고 대부분은 찍소리 못하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저기······ 저희도 평소 같으면 그랬을 텐데······ 이분들이 한유식 대표님 자녀분들이라고 합니다.
한유식의 자녀는 세 사람이다.
첫째 한준태는 성공한 성형외과 의사고 둘째 한준희는 미디어 관련 교수이자 방송 패널로도 활동하는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한준식은 법무법인 성의(誠意)의 대표변호사였다.
한유식이 그들을 자식 취급도 안 한다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물어보지도 않을 수 없었다.
“잠시만요.”
난 중국집 메뉴를 고르던 한유식에게 말했다.
“대표님. 자녀분들이 오셨답니다.”
멈칫.
한유식이 전단지를 넘기던 움직임을 멈추더니 한숨을 푹 내쉰다.
“자네도 알지 않나? 내겐 자식은 없다는 거.”
한유식의 곁에서 함께 전단지를 보던 이아은 여사 역시 딱 부러지게 대답한다.
“제 자식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어요.”
입을 꾹 다문 두 사람의 표정에선 깊이를 알 수 없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결국 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실장님. 이 사람들이 실장님을 고소하겠다는데요?
“고소요? 무슨 죄로요?”
-자기들 부모님을 감금했다는 죄로요.
어이가 없었지만 법적으로는 그들이 자식인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인 이상 신고를 받게 되면 경찰은 우릴 조사하려 들 게 틀림없다.
그때 통화를 들은 한유식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정 실장. 그 쓰레기들을 들어오라고 하게. 이 기회에 내 똑똑히 말해줘야겠네.”
이아은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정 실장님. 그게 좋겠네요. 저희 때문에 정 실장님이 피해를 받으면 안 되죠.”
두 사람은 이 기회에 제대로 자식들 모두와 절연하겠노라 선언하고 있었다.
결국 난 세 사람을 들이라고 말했다.
* * *
덜컹.
이사한 집의 현관문이 열렸다.
한유식의 세 자녀들이 기세등등하게 들어온다.
첫째인 한준태는 옛날 주택으로 된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들어오자마자 미간을 찌푸린다.
둘째인 한준희는 신발장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셋째인 한준식은 흠을 잡을 게 없는지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세 사람 다 부모를 방치한 것 치고는 지나치게 당당한 표정들이다.
거실에 들어온 올해 36살인 한준태가 허락도 없이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아버지도 참. 이왕 집을 잡으려면 좀 제대로 된 곳을 잡으시지. 이게 뭡니까? 인테리어도 안 되어 있고 뭐 이런 싸구려 집에 살아요?”
34살인 둘째 한준희는 보자마자 이아은에게 달라붙어 팔짱을 낀다.
“엄마. 그동안 섭섭했지? 그땐 나도 많이 힘들어서 못 도왔어. 미안. 오빠랑 준식이가 도울 줄 알고 있었다가 나중에서야 사정을 알았다니까?”
그러자 33살인 셋째 한준식도 한마디 거들며 끼어들었다.
“그땐 저도 좀 힘들었습니다. 이제 꼬인 게 다 풀렸으니까 두 분은 제가 모실게요.”
내 눈에도 보일 정도로 얄팍한 짓거리였지만 어디까지나 한유식 대표의 일이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유식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얼굴을 굳히고 말한다.
“무슨 수작을 부리러 온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왔다. 오늘부로 우린 서로 남남으로 살아가자.”
뒤이어 이아은은 딸을 팔에서 떼어내며 말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우린 죽은 셈 치고 앞으로는 각자 제 살길 찾아가자꾸나.”
독한 마음을 먹은 두 사람이 절연(絶緣)을 선언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첫째 한준태가 입꼬리를 올리더니 터무니없는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