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4화
594. 진성 호텔 & 리조트 1
진성식품에서 진성준 대표를 만난 뒤 진성식품 건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본사 건물로 향했다.
로비로 들어가자 예전과는 달리 본사 임원 10명 정도가 빠르게 다가와 고개를 숙인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현재 진대운 회장의 첫째 진명규 부회장은 여자와의 스캔들로 정직 상태고 둘째 진명희 대표는 오늘 부실 리조트 인수 건으로 인해 대형 사고를 친 상황이다.
반면 셋째 진성준 대표는 진성식품에서 승승장구하며 회사를 빠르게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임원들 몇몇은 진성준 대표가 차기 회장 후보라고 생각하고서 줄을 선 것이다.
하지만 진성준 대표는 그들을 보며 냉랭하게 말한다.
“그룹 전체가 위기 상황인데 인사를 나오다뇨. 지금 제정신입니까? 오늘 같은 날은 저한테 잘 보일 생각을 할 게 아니라 사태를 수습하는 데 신경을 쓰셔야지요!”
순간 로비에 모인 임원들이 땀을 흘린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미처 생각을······”
진성준 대표가 손을 들어 올린다.
“됐습니다. 회장님께서 아시면 역정을 내실 테니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하지 마십시오.”
진성준 대표는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딱 잘라 말한 뒤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임원들이 진땀을 닦으며 따라오려는 낌새를 보인다.
순간 여진수 비서실장이 고개를 돌리더니 절대 따라오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다.
결국 우리 셋만이 멀뚱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진성준 대표가 내게 볼 낯이 없다며 무안한 표정으로 사과를 해 왔다.
“못 보여드릴 꼴을 보여드렸네요. 죄송합니다.”
분식 회계를 한 세진 리조트를 인수해 버린 까닭에 그룹 전체에 심각한 난리가 난 상황이다.
그런데도 임원들이 차기 회장 후보에게 줄을 선다고 아부를 하는 모습을 보니 화가 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런데 그런 그의 모습에서 내가 회귀 전 탑 엔터테인먼트 부사장일 때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당시 난 줄 서기를 하는 인간들을 경멸했다.
심지어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아부꾼이라고 생각하며 혐오하고 밀어냈었다.
그 결과 내 곁에 남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후 죽음을 경험하고 회귀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내게 찾아와서 고개를 숙인 임원들은 대부분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을 위해서 자존심을 내려놓았기에 내게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보다 10살 이상 어린 나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도 말이다.
그래서 난 회귀까지 하고서야 알게 된 지식을 나와 손을 잡은 진성준 대표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전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분들도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인사를 온 걸 텐데 조금은 너그럽게 받아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진성준 대표가 말없이 날 빤히 쳐다본다.
하버드 출신에 최고의 엘리트 소리만 듣던 그에게는 이해가 안 가는 소리인 듯했다.
그래서 난 현실적인 이유도 하나 더 들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진 대표님이 저들을 품지 않는다면 저들은 다시 진명규 부회장에게로 돌아가서 붙을 겁니다. 적을 줄이고 아군을 늘리는 게 전쟁의 첫걸음 아니겠습니까?”
그때였다.
진성준 대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그런 생각은 못 했는데 듣고 보니 그 말씀이 맞는 것 같군요. 하긴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니 저와는 달리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한 거겠죠.”
잠시 생각을 정리한 진성준 대표가 여진수 비서실장을 불렀다.
“여 비서.”
“예. 대표님.”
“아까 인사한 임원들한테 개별적으로 찾아가서 이야기 좀 전해줘. 오늘 상황이 안 좋아서 격하게 반응했다고. 반겨줘서 고맙고 내가 사과하더라는 말도 꼭 전하고.”
“알겠습니다.”
비록 완벽한 대답은 아니지만 냉정한 진성준 대표치고는 엄청난 발전이다.
지시를 내린 진성준 대표는 굳은 표정을 풀고 씨익 웃는다.
“덕분에 제가 많이 배웁니다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는 자주 좀 해 주십시오. 제 주변에는 고언을 해 줄 사람이 없거든요.”
다행히 그는 내 조언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띠잉~
엘리베이터가 1층 로비에 도착하고 금색 문이 양쪽으로 천천히 열린다.
그런데 그 안에는 진명희 진성 호텔&리조트의 대표와 비서와 임원들만이 타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온 모양이다.
진명희 대표는 유난히 히스테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진 걸 보니 회귀 전에 당했던 기억이 아주 조금은 옅어지는 것 같다.
그때 진명희 대표가 빽 하고 외친다.
“야. 진성준! 가뜩이나 회사 분위기 뒤숭숭한데 여긴 왜 왔어?”
카랑카랑한 진명희 대표의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을 울리며 증폭되어 퍼져 나온다.
로비에 지나가는 다른 직원들이 듣거나 말거나 안중에도 없는 태도다.
하지만 진성준 대표는 워낙 경우 없는 일을 많이 당하고 살다 보니 이 정도로는 눈도 끔뻑하지 않았다.
“그룹 차원에서 큰일이 생겼는데 어떻게 안 와볼 수가 있습니까?”
“그러든 말든 넌 돌아가서 네가 맡은 진성식품이나 신경 써. 그리고 큰일······은 무슨 큰일! 그 새X들 잡으면 다 받아낼 수 있어!”
진명희 대표의 말은 세진 리조트 그룹 오너들에게 돈을 받아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작정하고 분식 회계를 저지른 터라 이미 돈을 해외로 다 빼돌렸기 때문이다.
진성준 대표는 진명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뭐야? 이거 타려고? 다음 거 타!”
“자리도 많이 남는 데 뭐 같이 타시죠.”
“야. 너 내가 우스워? 다음 거 타라면 다음 거 타라니까!”
“그럴 시간 없습니다.”
진성준 대표는 일부러 진명희 대표를 열받게 하려는 듯 엘리베이터 안에 올랐다.
나 역시 여진수 비서실장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띠잉~
엘리베이터는 진성 호텔&리조트가 사용하는 5층으로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엘리베이터 안.
문이 닫히자 진명희 대표가 이번에는 날 향해 폭언을 쏟아낸다.
“딴따라 뒤나 닦아주는 새X가 여긴 또 왜 왔어?”
그녀의 거친 말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그러나 예전처럼 참을 생각은 없다.
오늘 난 반드시 그녀를 진성 호텔&리조트의 대표이사에서 끌어내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대놓고 말했다.
“앞으로는 진아람 이사님이 진성 호텔&리조트를 이끌게 되실 거 같아서 이 기회에 파트너쉽을 맺을까 하고 왔습니다.”
오늘 일로 진명희 대표가 잘릴 거라고 말하자 진명희 대표의 볼살이 푸르르 떨린다.
“뭐라고? 이 이 새X가 말이면 단 줄 아나······”
흥분한 진명희 대표가 오른손을 들어 올린다.
당장이라도 내 뺨을 칠 듯한 분위기다.
촬영해서 제보라도 할까 하고 주머니의 폰을 손에 잡았다.
그런데 내가 촬영을 하기 전 진성준 대표가 진명희 대표의 손을 덥석 붙잡는다.
“지금 제 손님한테 뭐 하시는 겁니까?”
“야 이거 안 놔? 놔!”
진명희 대표가 표독한 얼굴을 하고선 팔을 흔들어댄다.
“진 대표님. 회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으면 눈앞의 일이나 처리하시지. 이게 뭐 하는 추탭니까?”
“이 새X가 감히 뭐가 어쩌고 저째?”
그때였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문 앞을 지나가던 한 무리가 고개를 돌린다.
그중에는 진대운 회장도 있었다.
손을 들어 올린 진명희 대표를 본 순간 진대운 회장이 혀를 쯧쯧 찬다.
“못난 놈!”
“아 아빠!”
“여기에 네 아빠가 어디 있느냐? 그리고 이런 날에 손을 올려? 넌 대체 무슨 생각인 게냐!”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진대운 회장의 목소리에 진명희 대표 목이 자라처럼 쏙 들어간다.
안 그래도 자신이 큰 실수를 했는데 눈앞에서 추태를 보였으니 할 말이 없는 거다.
“다들 따라와!”
진대운 회장은 그 말을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진성준 대표는 진명희 대표의 손을 탁하고 놓는다.
“저희 먼저 나가겠습니다.”
우리 일행은 진명희 대표의 일행에 앞서 엘리베이터를 내린 다음 앞서가는 진대운 회장의 뒤를 따랐다.
* * *
진성 그룹 본사 5층.
계열사인 진성 호텔&리조트의 본사로 사용하는 넓은 공간에는 모든 직원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사태를 수습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는 진아람 이사가 올린 머리카락을 펜으로 고정하고선 지시를 내리고 있다.
헝클어진 옷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서 밤을 꼴딱 새운 것 같았다.
“세진 리조트 쪽에서 넘어왔던 재무제표. 다시 한번 검토해보세요. 그리고 이번 거래 주선했던 회계 법인이랑 증권사 대표들 싹 다 들어오라고 해요. 법무팀에 연락해 소송 준비가 어떻게 되어가나 다시 한번 확인하고요.”
“예. 이사님!”
이어서 진아람 이사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흔들었다.
“이 서류 전부 엉터리니까 다시 뽑으세요. 그런데 우리 회사 IR 부서 임원들은 어디 갔어요?”
IR(Investor Relations) 부서들은 기업에 대한 정보를 주식 시장에 알리는 업무를 한다.
그런데 오늘 같이 인수한 회사에 대규모 부실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사로 났다면 이미 회사에 와 있어야 했다.
그래야지 잠시 후 열리는 주식 시장에서 주가의 대폭락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아람 이사가 소리를 치자 IR 부서 부장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IR 임원들은······ 아직 출근을 안 했습니다.”
“지금 회사가 침몰할 판인데 출근을 안 했다뇨! 평직원도 아닌 임원이요?”
“여 연락해서 빨리 오시라고들 하겠습니다.”
그 순간 진아람 이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만약 8시까지 사무실에 안 앉을 생각이면 그냥 오던 발길 돌려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세요.”
현재 시각은 7시 30분.
주식 시장이 열리는 9시까지는 1시간 30분이 남았지만 대응을 위해서 8시까지는 모여야 했다.
그렇게 진아람 이사는 마치 자신이 이곳의 대표라도 된 듯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적극적인 모습은 바로 내가 그녀에게 조언한 모습이었다.
회귀 전.
이맘때의 진아람 이사는 충분한 능력이 있으면서도 진명희 대표가 서투른 대응을 하는 걸 지켜만 봤었다.
이복 자매가 실각하게 되면 자기에게 당연히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대운 회장은 회사가 큰 곤란에 처했는데도 손을 놓고 있던 진아람 이사에게는 더욱 큰 실망을 하게 된다.
그래서 진명희 대표가 계속해서 진성 호텔&리조트를 이끌게 된다.
난 그 일을 막기 위해 이 상황이 된다면 ‘리더쉽’을 보일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었다.
그 결과 진아람 이사는 이렇게 멋진 리더쉽을 보이고 있었다.
진아람 이사가 일하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진대운 회장의 눈길이 이번에는 진명희 대표를 향한다.
“진성 호텔&리조트의 대표가 누구냐?”
뜬금없는 질문에 진명희 대표가 눈치를 보다 말한다.
“접니다. 회장님.”
진대운 회장의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간다.
“다시······ 물으마. 진성 호텔&리조트의 대표가 누구냐?”
진명희 대표가 주춤거리며 대답한다.
“접······니다······”
진대운 회장이 싸늘한 웃음을 짓는다.
“웃기는 소리! 네 눈은 동태 눈깔이냐? 이 층에 있는 모든 직원들이 따르는 사람이 대체 누구냔 말이다!”
현재는 누가 봐도 사무실의 가운데 서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진아람 이사가 대표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직원들 역시도 거부감 없이 따르고 있었다.
내 생각대로 진대운 회장은 어려울 때 나선 진아람 이사를 ‘이곳의 대표이자 리더’로 인정하고 있었다.
진명희 대표가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떤다.
그때였다.
언성을 높이는 아버지를 본 진아람 이사가 황급히 달려온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그러자 일을 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외친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진대운 회장이 손을 든다.
“다들 수고가 많다. 한심한 임원들의 실수로 다들 밤을 새웠나 보구나.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냐? 당분간은 고생을 좀 하자. 그룹 차원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까 오늘의 노고는 절대 잊지 않으마!”
진대운 회장의 말에 다들 환호성을 지른다.
이 일이 끝나면 두둑한 보너스와 승진의 기회가 올 수도 있었다.
직원들의 사기를 상승시킨 진대운 회장은 이어서 현재 대표인 진명희를 무시하고 진아람 이사에게서 업무 보고를 받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 상황은 어떠냐?”
진아람 이사가 한숨을 쉬고 보고를 시작한다.
“지금까지 살핀 정황으로는 세진 쪽이랑 중간 거래를 맡았던 회계 법인 쪽에서도 다 같이 작정하고 속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책은?”
“법무팀을 보내서 싹 다 털 겁니다. 또 세진 리조트의 오너들은 출국 금지를 걸었습니다. 돈을 숨겼다고 해도 파다 보면 나오게 될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진대운 회장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회사 내의 배신자는? 이쪽에서도 장난질 친 놈이 있을 텐데?”
그때 진아람 이사와 내 눈이 마주쳤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바로 내가 건네준 정보를 사용할 때기 때문이다.
“제가 이번 인수 합병을 담당하진 않아서 정확한 정보를 획득하진 못했지만······ 현재로서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아직 출근하지 않은 회계 담당 곽상효 전무입니다.”
곽상효 전무는 진명희 대표의 오른팔로 오랫동안 진명희의 비자금을 관리해온 인물이다.
겉으로는 충성스러운 인간이지만 달리 뒷돈을 챙기는 데 능했었다.
그리고 이번 인수합병 건 때 거래 당사자인 세진 리조트의 박은수 회장에게도 뒷돈을 받았다.
최고위 회계 담당 임원이 상대 회사의 부실을 눈감아 줬기에 일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사정을 안 진대운 회장의 얼굴이 붉어진다.
“뭐라고? 곽 전무가?”
“예. 하지만 아직 인수합병에 참여한 회계 직원들의 증언 이외 다른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증거를 가졌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뒤쪽에 있던 진명희 대표가 버럭하고 화를 내지른다.
“야! 진아람. 미쳤어? 네가 감히 곽 전무를 범인으로 몰아?”
곽상효 전무는 진명희 대표의 비자금 관리도 하고 있었기에 진명희 대표가 발작하듯 외쳤다.
그때 진대운 회장이 싸늘한 표정으로 진명희를 쳐다본다.
“입 다물어라. 진명희.”
“하지만 아빠!”
“입 다물라는 말 못 들었어!!!”
진명희 대표가 그제야 입을 다문다.
진대운 회장이 진아람 이사를 보며 말한다.
“계속 말해 봐라. 증거를 가진 사람이 누구냐?”
그때였다.
진아람 이사가 날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계시네요.”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드디어 내가 나설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