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1화
591. 지리산에서 2
박선재 감독이 10시에 예정된 일정을 9시로 바꿔줬지만 에브리데이의 일정은 여전히 그대로다.
[에브리데이 V12.2]
[날짜 : 2021년 1월 26일]
-AM 10:00 [NEW. 이태풍] 진주 K 병원 응급실로 긴급 헬리콥터 이송. (기타 : 태풍이 부모님께 긴급히 연락드릴 것.)
촬영 순서를 바꿨는데도 이 일정이 바뀌지 않는다는 건 문제의 원인이 다른 데 있다는 걸 의미한다.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
할 수 있는 걸 다 해본 다음 정 안되면 촬영을 중단시켜서라도 이태풍을 지켜낼 생각이다.
물론 욕이야 먹겠지만 내 배우가 다치는 것에 비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그때 안유주 제작실장이 조심스레 묻는다.
“저기 그런데 재수 씨는 오늘 촬영 가능할까요? 아까 보니까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던데요.”
“아 제가 챙겨서 데려갈 테니 안심하십시오.”
“하긴 정 실장님이 계신데 제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네요.”
안유주 제작실장은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이어서 난 이태풍과 강시아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촬영 순서가 좀 바뀌어서 너희부터 가야 할 것 같은데 두 사람은 괜찮아?”
이태풍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강시아를 안아 들었다.
“우리 딸. 아빠랑 같이 밖에서 달리기 놀이할까?”
“응! 난 달리기 너무 좋아!”
씬 122는 산장에서 도망을 치는 씬인데 이태풍은 진짜 아빠처럼 곱게 말을 돌려 하고 있었다.
아이가 무서워하기라도 할까 봐 모든 것을 술래잡기 달리기 등 놀이라고 말하며 살인마와 대치한다는 극 중 설정을 계속 유지하는 거다.
그리고 강시아 역시 극 중 아역이란 설정에 맞게 이태풍의 연기에 자연스레 호응하고 있었다.
이런 배우들이 내 배우들이라는 게 가슴이 벅차 올라온다.
그 사이 이태풍의 전담 매니저 이대호가 2층 방 한쪽에 걸어놓았던 두툼한 점퍼 두 벌을 가지고 왔다.
영화를 찍으면서 해진 붉은색 점퍼와 노란색 아동용 점퍼였다.
이태풍이 노란색 아동용 점퍼를 먼저 받아 들고선 강시아의 머리 위에서 펼친다.
“우리 딸. 위로 팔 쭉!”
“쭉!”
강시아가 위로 팔을 번쩍 든다.
이태풍이 노란색 점퍼에 강시아의 두 팔을 끼워서 입힌 뒤 무릎을 굽혀 아래로부터 점퍼 지퍼를 올려 준다.
강시아의 눈이 반달로 휘어지며 까르르 웃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이태풍을 지켜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나 버렸다.
이렇게 친아빠처럼 호흡을 맞춘 이태풍이 다친다면 강시아는 큰 충격을 받을 게 틀림없다.
그러니 반드시 이태풍을 지켜내야 했다.
그렇게 옷을 입은 이태풍이 강시아와 손을 맞잡고 1층으로 내려간다.
난 이태풍을 따라가려는 이대호를 다급히 불러 세웠다.
“태풍이한테 경량 보호대는 입혔습니까?”
난 이태풍의 몸에 꼭 맞는 경량 보호대를 주문한 다음 산장에 비치해두었다.
“아뇨. 아직 안 입혔습니다. 행동이 불편하다고 싫어해서요.”
“오늘은 싫어해도 입히세요. 산장으로 오다 보니 얼음 빙판이 눈 아래 잔뜩 쌓여 있어서 넘어지면 다치겠더라고요.”
며칠 전 겨울 폭우가 내리면서 눈이 녹았지만 곧바로 찬바람이 몰아쳤기에 두꺼운 얼음이 생겼을 거다.
거기다 그 위로 눈이 다시 쌓인 터라 눈 아래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알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대호가 보호대는 1층에 있다며 급히 뛰어 내려간다.
다시 다이어리를 확인했지만 일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것도 아닌가?’
점점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만 간다.
마음 같아선 당장 1층으로 달려가 화목 난로 위에서 끓는 뜨거운 주전자 속 물이라도 원샷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난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1층으로 내려간 난 고재수에게 명상 호흡법을 가르쳐줬다.
고재수는 의외로 쉽게 호흡을 조절하더니 금방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렇게 고재수를 달랜 난 곧장 천왕산장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재 시각 오전 8시 50분.
10시까지는 시간이 남았기에 난 위험해 보이는 곳들을 돌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곳은 이따가 추격 씬을 촬영할 천왕산장 바로 뒤의 산비탈이다.
그런데 폭설로 인해 잔뜩 쌓인 눈들과 그 사이로 삐죽빼죽 솟아난 나무들만 보인다.
“저기······ 박 팀장님.”
나는 제작팀의 고참 박철융 팀장을 찾았다.
“아 예? 무슨 일입니까?”
“죄송합니다. 산비탈 추격 씬을 어디서 찍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박철융 팀장이 전방의 큰 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 나무 중간 정도에 녹색 크로마키 테이프 붙여둔 거 보이시죠?”
자세히 보니 나무들 사이로 녹색의 크로마키 테이프가 붙어 있다.
“예. 보입니다. 저 나무들 사이가 길입니까?”
“예. 길바닥 돌 고르시려는 거라면 눈 내리기 전에 이미 한번 해뒀으니까 안심하세요.”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박철융 팀장이다 보니 내 생각 이상으로 꼼꼼하게 체크를 해 놓았다.
하지만 에브리데이의 일정은 그대로였기에 난 마음을 놓지 않고 다른 곳도 보기 시작했다.
이후 난 천왕산장 앞 발코니에서 촬영을 대기 중인 이태풍과 강시아에게로 향했다.
* * *
천왕산장 앞 발코니.
이태풍과 강시아는 나란히 대본 의자에 앉은 채 대본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딸. 이따가 아빠한테 안겨서 도망갈 땐 아빠 목을 꼭 잡아야 해. 알았지?”
“응. 두 손으로 이렇게 할게. 꼭.”
강시아가 두 손목을 붙이고선 이태풍의 목을 감싼다.
현재 두 사람은 잠시 후 찍을 씬 122의 리허설을 하고 있다.
씬 122는 산악용 로프로 두 손이 묶인 주인공이 딸과 함께 산장에서 빠져나오는 씬이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오명진 몰래 나오는 장면인데 이태풍은 등산화도 신지 않고 등산 양말만 신고 도망치게 된다.
난 혹시나 못 같은 걸 밟을까 봐서 걱정되었기 때문에 발코니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때 제작팀원 최민권이 지나가며 대답해 준다.
“정 실장님. 못 튀어나온 거 없으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어요.”
“제가 잔걱정이 많아서요. 괜히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보기 좋은데요?”
최민권이 웃으며 사라진다.
안전을 챙기는 건 그 팀장에 그 팀원이다.
하지만 여전히 일정이 남아 있었기에 난 이태풍에게 다가가서 등산 양말을 점검했다.
“태풍아. 등산 양말은 좀 어때?”
이태풍이 강시아와의 대화를 멈추고 날 쳐다본다.
“형이 말한 대로 양말을 2겹으로 신었어요. 안에는 형이 준비해 온 방수 양말도 신었고요.”
“양말 밖에 미끄럼 방지 테이프는?”
“당연히 붙였죠.”
이태풍이 신발을 벗고 양말을 들어서 보여준다.
알록달록한 등산 양말의 밑면에는 마찰력을 늘리기 위해 미끄럼 방지 테이프를 붙인 뒤 다시 한번 실과 바늘로 단단하게 기워놓았다.
“그래도 조심해. 스파이크가 아니라서 얼음을 밟을 땐 미끄러질 수도 있으니까.”
“예. 알았어요. 근데 윤호 형 오늘따라 걱정이 심한 거 아니에요?”
순간 내 손에 들린 에브리데이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선 나밖에 볼 수 없는 다이어리였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마지막 촬영이잖아. 끝까지 조심해야지.”
며칠 전 폭우가 내려서 눈이 모두 녹았는데 다시 폭설이 내렸다.
즉 눈 아래엔 어디에 뾰족한 얼음들이 남아 있을지 몰랐다.
난 이태풍의 보호대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말했다.
“태풍아. 연기하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일단 멈춰. 재수 씨처럼 막 가지 말고.”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전 재수 형처럼은 안 하잖아요.”
“퍽이나 그렇겠다. 촬영 들어가면 눈 돌아가는 건 여전하면서.”
연기 광인(狂人) 이태풍.
그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태풍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난 이태풍에 이어 강시아에게도 몇 번이나 당부했다.
“시아야. 오늘 촬영이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위험하거나 아프면 바로 이야기해야 해. 알았니?”
아역 배우들은 주변에서 어른들이 큰소리를 치거나 하면 잔뜩 겁먹고 의사 표현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종종 다치는 경우가 있었다.
강시아가 손을 번쩍 들며 대답한다.
“네! 삼촌.”
“그래. 그럼 우리 시아도 파이팅.”
그렇게 이태풍과 강시아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나자 촬영 준비가 끝이 났다.
현재 시각 오전 8시 55분이다.
그때 산장 앞 공터에 마련해둔 모니터 앞에 선 박선재 감독이 확성기를 잡았다.
“씬 122 산장에서 나오는 씬부터 가겠습니다. 스태프들 준비되는 대로 신호 주세요. 태풍 씨랑 시아도 산장 안으로 들어가서 준비하고요.”
박선재 감독이 다음으로 무전기를 잡는다.
“산장 안에 있는 재수 씨도 들리나요?”
치칙.
-예. 잘 들립니다.
“싸인 주면 고함칠 준비 하세요.”
-예!
박선재 감독의 지시에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이태풍이 강시아의 손을 잡고 천왕산장 안으로 들어간다.
스태프들이 무전기로 준비 완료 사인을 준다.
아직 사고가 일어나기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았지만 긴장을 풀 순 없었다.
여전히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박선재 감독이 모니터 앞에 앉아 확성기를 잡았다.
“자~ 준비됐으면 마지막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레디~~~액션!”
“액션!”
씬 122를 시작으로 <지리산>의 마지막 날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끼익.
이태풍이 경첩 소리가 거의 나지 않게 아주 느린 동작으로 천왕 산장의 문을 연다.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의 틈이 벌어졌다.
양손을 테이프로 묶인 이태풍이 강시아를 끌어안고 나온다.
극 중 주인공은 사이코패스 살인마 ‘오명진’에게 신발을 뺏긴 터라 이태풍은 등산 양말만을 신은 채였다.
한 발 두 발.
이태풍은 숨조차 쉬지 않은 채 강시아를 안고선 천천히 발코니를 지나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끼익끼익.
소리를 최대한 내지 않으려 하지만 천왕산장의 낡은 목조 계단은 야속하게도 비명을 지른다.
긴장으로 굳어버린 이태풍의 이마 위로 굵은 땀이 흘렀다.
나무 계단 소리가 멈춰 들자 천왕산장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 들려온다.
휘이잉~
이태풍은 이를 꽉 깨물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눈 속으로 발을 넣지만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를 느끼지 못하는 표정이다.
살인마가 자신의 딸을 위협할 수 있다는 긴장감 때문에 그저 다급한 표정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내 건물 난간에서 벗어난 이태풍은 무릎까지 오는 눈을 헤치며 산 쪽으로 향했다.
그때 강시아가 아빠의 품에 안긴 채 속삭인다.
『아빠 발 안 시려?』
『아빠는 괜찮아. 근데 영아야. 아빠랑 약속했지? 이제부터는 조용해야 해. 쉿.』
『읍!』
강시아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린다.
이태풍은 강시아를 혼내지 않고서 더욱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박선재 감독이 무전기를 잡고 작게 속삭인다.
“3초 뒤.”
박선재 감독이 말하고 정확히 3초 뒤.
천왕산장의 열린 문틈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강대현! 이 XX놈이 날 속여? 으아아아악!』
악에 받친 섬뜩한 괴성이 울리자 목덜미에 솜털이 바짝 곤두선다.
심지어 몇몇 스태프들은 몸까지 부르르 떨 정도다.
그때였다.
“커~~~엇~트!! 오케이!”
지리산을 울리는 살의(殺意) 가득한 포효 소리는 단 한 번에 박선재 감독에게서 오케이를 불러내었다.
난 그 즉시 접이용 의자와 담요 핫팩을 들고선 이태풍에게 달려갔다.
“태풍아. 발 올려.”
이태풍이 눈 속에서 발을 뺀 뒤 의자 위로 올린다.
“아으으. 방수 양말을 신었는데도 발이 시리네요.”
원래 오전 10시에 찍었어야 하는 씬 122가 끝났지만 일정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역시 촬영 그 자체에 위험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현재 시각 오전 9시 10분.
사고가 일어나기까지는 아직 50분이 남았다.
* * *
박선재 감독은 씬 122를 단번에 촬영한 것을 만족하며 바로 다음 촬영에 나섰다.
“준비됐으면 123으로 바로 갑니다. 준비들 되셨습니까?”
씬 123은 사이코패스 살인마 오명진이 도망친 두 사람을 쫓으려고 산장에서 나오는 씬이었다.
-예. 감독님.
스태프들이 무전기로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박선재 감독은 천왕산장을 바라보며 무전기와 확성기를 동시에 잡고 힘차게 외친다.
“레디~ 액션!”
그때였다.
반쯤 열린 천왕 산장의 문이 거칠게 열린다.
쾅.
머리를 헝클어뜨린 고재수가 문을 걷어차고 나온다.
고재수는 오른손에 피가 묻은 흔적이 있는 등산용 칼을 들고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산을 향해 외친다.
『꼬옥~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아~』
고재수가 산을 쳐다보며 키득거리면서 웃기 시작한다.
눈에는 광기가 가득하고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가 있다.
『어차피 결국엔 다~ 나랑 같이 이곳 지리산에 묻히게 될 텐데······ 왜 괜히 힘을 빼고 그래? 응? 크흐흐······』
고재수는 주인공 부녀를 마지막으로 죽이고서 자살을 생각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해 내고 있었다.
『친구야~~ 노올~올~~자』
고재수의 광기 어린 외침을 들으며 박선재 감독은 그렇게 한동안 촬영을 이어갔다.
“컷!”
오케이가 떨어진 순간 고재수의 다리가 비틀거린다.
자기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느라 엄청난 심력 소비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자 이제 씬 124를 바로 가겠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저한테 와서 직접 말씀하시고요.”
박선재 감독의 말에 고재수가 외친다.
“괜찮······습니다. 이 기분. 유지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박선재 감독은 곧장 다음 씬을 지시했다.
다음에 찍을 씬 124는 이태풍이 강시아를 안고 산비탈을 달려 도망가는 장면이다.
그리고 씬 125는 고재수가 두 사람을 쫓는 장면이다.
씬 126은 강시아를 돌 뒤에 숨겨 놓는 씬이고 씬 127은 이태풍이 돌아와서 고재수와 격투를 해야 하는 씬이다.
그런데 예상보다 촬영 속도가 너무 빨랐다.
시간이 걸릴 줄 알았던 장면들이 단번에 오케이 사인을 받게 되자 대체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현재 시각은 오전 9시 20분.
사고 발생 시간까지는 40분이 남았다.
* * *
“컷~! 오케이!! 수고했습니다.”
씬 124부터 씬 127까지 배우들은 단 한 번의 NG도 내지 않고 촬영을 완벽히 해냈다.
보통은 음향 문제나 카메라 문제 등등으로 한두 번의 재촬영은 있지만 오늘은 모든 게 완벽하게 딱딱 떨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현장의 분위기는 최고조였다.
그러다 보니 이도 저도 안 되면 촬영을 미루자고 말하려 생각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 정도로 현장 분위기가 달아오른다면 박선재 감독과 스태프 그리고 배우들 중 누구도 촬영 중단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순간 박선재 감독이 다음 씬을 지시한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씬 130과 131로 바로 넘어갑시다. 이 씬만 찍고 나면 휴식할 거니까 다들 마지막까지 집중하시고. 아시겠죠?”
두 씬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씬 130은 주인공 강대현과 살인마 오명진이 암벽 위에서 싸우는 장면이다.
그리고 씬 131은 발을 헛디딘 살인마 오명진이 절벽에서 강대현의 손을 잡고 있다가 떨어지는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높이 수백 미터의 암벽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산비탈에 살짝 튀어나온 암벽에서 찍는다.
산비탈에 있는 암벽은 가로 세로 2m 너비로 비탈에서 튀어나와 있는데 마치 한옥의 처마처럼 밖을 향해 수평에 가깝게 뻗어있었다.
그리고 그 암벽의 끝은 아래 산비탈에서 대략 2.5m 정도의 높이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암벽의 끝 바로 아래에다가는 녹색 크로마키 천을 깔아두고 차후에 CG로 합성해 절벽처럼 표현할 예정이었다.
다만 그냥 떨어지다가는 다칠 수도 있었기에 크로마키 천 아래에는 두툼한 매트리스가 넓게 깔아 놓았다.
또한 배우의 등에는 도르래에서 연결한 줄을 달아 이중으로 안전을 도모하고 있었다.
현재 시각 9시 40분.
이젠 사고가 나기는 20분이 남았다.
“자~ 도르래 점검만 끝나면 바로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박선재 감독의 지시에 스태프들이 도르래 쪽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바로 이번 씬을 촬영하다 사고가 날 게 분명했다.
이중으로 안전장치를 해 놓았는데도 말이다.
결국 난 촬영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그렇게 조심하고 준비했는데도 사고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해야지 큰 무리 없이 촬영을 중단시킬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순간 이영진이 다가와서 말한다.
“실장님.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들어가서 좀 쉬시죠?”
“아 아냐.”
“그게 아니면 따뜻한 차라도 한 잔 타 드릴까요?”
그 순간 현장 스태프들의 사기도 떨어뜨리지 않은 채 이태풍을 촬영에서 자연스럽게 빼낼 방법이 번쩍이며 떠올랐다.
‘그 방법이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