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2화
582. 백세기 3
강감찬 대표가 회의실에 모인 모두를 보며 말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배우들에게 소속을 더 쉽게 옮기게 해줄 생각이다.”
관우 엔터 출신의 매니저들로선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다.
앞으로는 내가 직접 배우를 빼 와도 이번처럼 항의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니까.
순간 관우 엔터 쪽 출신의 매니저들이 술렁거린다.
결국 배우 5실의 백상범 실장이 대표로 항의를 한다.
“대표님 재고해주십시오!”
“재고라······ 왜 그래야 하지?”
백상범 실장이 표정을 굳힌 채 속내를 숨기지 않고 말한다.
“저희 같은 매니저들한테는 담당하는 스타가 재산 아닙니까? 내 재산을 다른 놈이 채갈 수도 있다는데 일할 맛이 나겠습니까?”
백상범 실장을 쳐다보는 강감찬 대표의 눈에 싸늘한 표정이 어린다.
스타를 돈 취급 하는 백상범 실장의 태도가 스타를 빛나게 하는 직종이 매니저라는 강감찬 대표의 평소 생각과 극렬하게 충돌했다.
“백 실장.”
“예. 대표님.”
“방금 발언 자네가 데리고 있는 스타들이 알아도 상관없겠나?”
강감찬 대표가 반문하자 백상범 실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진다.
백상범 실장의 이 말은 배우들이 듣는 순간 큰 분란이 될 여지가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아 아니 꼭 그런 말이 아니라······.”
백상범 실장의 입을 막아버린 강감찬 대표는 노여움을 거두지 않고 다른 실장들과 팀장들을 향해 말한다.
“예전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조금 전처럼 백 실장의 발언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다. 감히 누구 앞에서 스타와 연예인들을 재산 취급해?”
강감찬 대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리자 다들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굴렁쇠 엔터의 철학을 선명하게 드러낸 강감찬 대표가 다시금 백상범 실장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백 실장.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면 자네도 이참에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게 어떤가?”
궁지에 몰린 백상범 실장이 강감찬 대표의 곁에 있는 김관우 부대표를 보며 도와달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김장비 본부장과 김관우 부대표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결국 백상범 실장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인다.
“죄송······ 합니다 대표님.”
김관우 부대표와 김장비 본부장 거기다가 백상범 실장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자 관우 엔터 출신의 팀장과 실장들도 기가 팍 죽었다.
그렇게 강감찬 대표는 내가 준 판도라의 상자를 제대로 열지도 않고 김관우 부대표와 김장비 본부장을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 있었다.
역시나 강감찬 대표에게 장부를 건네준 것이 정답이었다.
* * *
회의가 끝나자 김관우 부대표를 중심으로 관우 엔터 출신들의 매니저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이어서 강감찬 대표와 다른 매니저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회사에 해를 끼친 행위로 잘리게 된 백세기는 넋이 나간 채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다.
난 백세기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모두 내보낸 뒤 회의실의 문을 닫았다.
쿵.
회의실에는 단둘만 남게 되었다.
난 천천히 백세기의 맞은 편으로 향했다.
하얗게 얼굴이 탈색된 백세기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맞은 편에 앉은 날 보자 정신을 차리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정윤호 너 이 새X······ 감히 나한테······ 이딴 짓을 해?”
“절 건드렸을 땐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죠. 백세기 씨.”
순간 백세기가 씩씩거리며 외친다.
“각오 같은 소리 하네. 그 장부가 얼마나 위험한 건지나 알아? 당장 내놔! 그걸 내돌리다가는 굴렁쇠도 문을 닫을 수 있다고!”
PD나 감독의 접대 장부는 공개되는 순간 여러 사람 인생을 날려버릴 수도 있는 폭탄이다.
방송국과 PD들도 징계를 받을 뿐 아니라 그걸 공개한 매니저나 회사에 제약이 생길 가능성도 있었다.
방송국의 그 어떤 누구도 접대를 기록한 장부 내용을 터트린 회사를 좋게 보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이 장부는 터트리지 않고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내가 백세기에게서 빼앗았다는 걸 스스로 밝힐 이유는 없다.
만에 하나 기사라도 나면 다들 날 의심할 테니까 말이다.
“글쎄요. 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이 이 자식······ 그걸 말이라고 해!”
난 어깨를 으쓱한 뒤 이 자리에 남은 이유를 말했다.
“장부고 뭐고 전 모르겠고 선혜 누나한테 빌린 돈은 다 갚으세요. 7억이나 빌리다니. 양심이 있긴 한 겁니까?”
이선혜는 몇 년간의 백세기와의 돈 거래에 관한 문자를 보관 중이었다.
그리고 백세기에게 준 돈 대부분을 통장으로 보냈기에 거래 내역도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니 차용증이 없다고 해도 고소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 점을 알지 못한 백세기는 큰소리로 우기기 시작한다.
“그 돈은 선혜가 그냥 준 거야! 차용증도 안 썼는데 갚긴 뭘 갚아!”
“판사님 앞에서 그렇게 말해 보시죠. 아마 씨알도 안 먹힐 테지만.”
“판사가 여기 왜 끼어? 그리고 그 일은 내가 선혜를 만나서 해결할 테니까 넌 신경 꺼!”
난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을 끊었다.
“선혜 누나는 법정에서 보자던 데요? 저보고 그쪽 만나면 이미 우리 사이는 끝났으니까 질척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아 그리고 선혜 누나 리버스 엔터에 취직해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언감생심 만날 생각은 꿈에도 생각지 마십시오.”
백세기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는다.
자기 딴에는 이선혜를 만나기만 하면 해결될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지난 10년.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춘 이선혜이니만큼 이번 일도 만나기만 하면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러나 이선혜는 완벽히 선을 긋고선 이수찬에게 보호를 받는 중이었다.
그러니 백세기가 감옥에 들어갈 때까지는 만날 일이 없었다.
그때였다.
까톡!
최소혜 기자의 까톡이 들어왔다.
[최소혜 기자 : 정 실장. 기사 올렸어.]
‘시작됐군.’
난 그 즉시 포털의 기사면을 확인했다.
[에이스 엔터 H 모양 <이상 주의보>의 감독 K 씨와 열애설!]
[에이스 엔터 출신 H 모양 <이상 주의보> 여주인공이 된 이유. 감독 K 씨와의 친밀한 관계 때문?]
[H 모양. 연예계의 로비스트?]
[H 모양 헤어샵 갑질 영상?]
며칠 전 내가 최소혜 기자에게 제보했던 한정연에 관한 내용이 기사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최소혜는 용케도 한정연이 <이상 주의보>의 강오준 감독과 팔짱 끼고 있는 사진을 구해 놓았다.
더군다나 어젯밤 내가 준 헤어샵 갑질 영상도 모자이크 되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제 한정연 역시도 더는 이 업계에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되었다.
“끝났네. 한정연.”
맞은 편에 있는 백세기가 말한다.
“뭐가?”
난 폰을 뒤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요. 새로운 여친님께서 알고 보니 양다리 중이시네요?”
기사를 본 백세기가 미친 듯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아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내가 보여준 기사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는지 백세기는 다급히 자신의 폰으로도 직접 검색을 해본다.
직접 기사를 확인한 백세기가 손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이 이 X이······.”
난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래서 옛말이 있잖습니까? 조강지처를 버리면 천벌을 받는다고요. 착하게 좀 사시지~”
순간 백세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주먹을 쥐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정윤호~~! 너 이 XX! 너 때문에······.”
백세기는 내가 복싱 전국 레벨이라는 걸 알지만 눈이 돌아가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회의실에는 CCTV가 있었기에 난 살짝 백스텝으로 물러난 다음 벽에 등을 대었다.
흥분한 백세기가 날 따라서 덤벼든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향해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다.
“으아아~아~”
난 그의 느린 주먹을 끝까지 보다 슬쩍 사이드 스텝을 밟으며 피해버렸다.
그 순간 백세기의 주먹은 그대로 벽을 때려버렸다.
쿵.
벽이 울리는 소리와 동시에 백세기가 주먹을 쥐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아아악!!”
뼈가 부러졌는지 백세기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그때였다.
벌컥.
회의실의 문이 열리더니 보안 팀원들이 뛰어 들어온다.
“잡아욧!”
보안 팀원 두 사람이 빠르게 뛰어 들어왔고 그 뒤로 강지영 이사가 나타났다.
“정 실장님. 괜찮아요?”
강지영 이사는 회의실에 나와 백세기 단둘이 남은 걸 걱정해 경호원들을 데려온 것이었다.
“저야 뭐.”
어깨를 으쓱했더니 강지영 이사가 한숨을 내쉰다.
“후우. 다행이네요.”
이후 강지영 이사는 바닥에 쓰러진 백세기를 보며 경호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끌고 나가요!”
“예. 이사님.”
백세기는 주먹을 잡고 끙끙대며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회의실에서 쫓겨나고 있었다.
‘백세기. 나중에 법원에서 다시 보자.’
백세기가 사라지자 강지영 이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제 정 실장님이 주신 장부책 덕에 일이 너무 쉽게 풀렸어요. 덕분에 앞으로 관우 엔터 출신들을 견제하기도 좋아졌고요.”
“아뇨. 저야말로 강 대표님께서 현명하게 처리해주신 덕이죠. 제가 가지고 있어 봐야 제대로 쓰지도 못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지영 이사가 묻는다.
“그보다 이제 관우 엔터 출신 배우들과 가수들도 빼낼 건가요?”
“그래야죠.”
강지영 이사가 씨익 웃는다.
“앞으로 진짜 재미있어지겠는데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난 강지영 본부장에게 자신 있게 말한 뒤 사무실로 향했다.
* * *
사무실로 내려온 난 배우 2실 구성철 실장과 가수 2실의 이동민 실장을 만나서 관우 엔터 출신들의 배우와 가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기 위한 논의를 마쳤다.
이후 난 배우 4실의 팀장들을 모은 다음 오늘 오후 방영하는 <화란전> 4화에 관한 홍보 회의를 시작했다.
“오늘 ‘화란전’ 4화는 미소가 퇴장하지만 대신 유진이와 비형랑을 맡은 한우혁 씨가 등장하는 화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기사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노출 횟수가 가장 중요합니다.”
순간 4실에서 홍보를 담당한 김미혜 대리가 말한다.
“안 그래도 이미 홍보실에서 미소와 한우혁 씨 스틸컷이랑 보도자료를 연예부 기자들한테 싹 다 보내뒀습니다.”
“잘했습니다. 그리고 방송 1시간 전후로 다시 한번 담당자들에게 전화하세요. 자칫하다간 다른 이슈에 묻힐 수도 있으니까.”
“예.”
“아 그리고 스타 특종과의 인터뷰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
“스타 특종 본사에서 오후 2시로 인터뷰가 잡혀 있습니다.”
난 일반적인 보도자료 이외에도 ‘스타 특종’의 최소혜 기자에게 특별 인터뷰를 부탁해 놓은 상황이다.
암을 이겨내고 수년 만에 복귀한 한우혁이 오늘 방송되는 ‘화란전’ 4화에서 비형랑 역으로 첫 등장을 하기에 그를 화제의 중심에 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 계획에는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다이어리에 있는 오늘 자 일정 하나 때문이었다.
[에브리데이 V12.2]
[날짜 : 2021년 1월 21일]
-PM 03:00 경부고속도로 양재IC 인근 25중 추돌사고 발생. (기타 : 100년 만의 겨울 폭우.) -PM 10:00 <연예계 방방곡곡> “SOO 엔터 보이그룹 ‘익스텐션’ 교통사고.” (기타 : 준수 형 장례식장 익스텐션 병문안 갈 것.)
회귀 전 오늘.
전국적으로 100년 만에 겨울 폭우가 내리게 된다.
당시 부산에서 골든 로드의 스케줄을 하고 서울로 올라오던 난 양재 IC 부근 고속도로에서 난 사고로 인해 스케줄도 하지 못한 채 고속도로 위에서 멈춰 섰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폰으로 오산과 서울을 오가는 9999번 광역버스 운전기사가 앞차를 들이박고 25중 추돌사고가 일어났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너무 큰 대형 사고다 보니 사람이 여러 명 죽고 수십 명이 다치는 사고였다.
수십 대의 119 구급차와 소방차들이 바쁘게 움직였는데도 사람들을 구조하고 정리를 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차츰 정체가 뚫려서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땐 이미 스케줄이 2개나 펑크가 나버렸기에 사고 현장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빠르게 서울로 향했다.
이후 남은 스케줄을 하고 밤이 되어 회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지나친 25중 교통사고 피해자 중에 아는 사람이 사고를 당했다는 걸 들을 수가 있었다.
굴렁쇠 엔터에서 독립한 이준수 대표와 그의 SOO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5인조 신인 보이그룹 ‘익스텐션’이 사고를 당했다고.
그리고 나와 친했던 이준수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뒷좌석에 탄 아이들도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마저 들었다.
이준수는 내가 입사했을 때 굴렁쇠 엔터 가수 2실 팀장이었는데 워낙 성격이 좋고 활달하다 보니 회사 내의 모두와 두루두루 친했었다.
그런 이준수가 죽었다는 소식은 굴렁쇠 엔터 매니저들 모두에게 다들 충격이었다.
나 역시 유독 나를 잘 챙겨주던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한동안 일을 손에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일에 관한 일정이 여전히 내 다이어리에 남아 있었다.
그동안 이 일정을 지우려고 몇 번 시도 했지만 에브리데이의 모든 일정이 그러하듯 쉽게 바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오늘이 오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회의실 밖의 창문으로 먹구름이 끼며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엔 사고가 있던 날처럼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후우······ 결국엔 일어나네요.”
후드득 떨어지는 비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뭐가 일어나나요?”
다들 무슨 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 기상청이 며칠 전부터 겨울 폭우가 올지 모른다고 하던데 그 일이 진짜 일어났다고요.”
“아~”
“하여간 오늘 평상시보다 속도를 30% 이하로 낮춰서 운전하세요. 만에 하나 그러다가 스케줄 펑크 나도 제가 다 책임질 테니까 무조건 매니저들과 배우들 안전을 최우선시하십시오. 박 팀장님은 여기 없는 매니저들한테 두 번 세 번 강조하시고요.”
“예! 실장님.”
“자 그러면 오늘도 파이팅합시다! 아자아자 파이팅!”
“아자아자 파이팅!”
다들 힘을 내서 파이팅을 외친 뒤 회의실을 나갔다.
그리고 난 홀로 남은 회의실에서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난 부정적인 생각을 떨치기 위해 여러 번 되뇐 다음 이 비극을 막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이준수와 그가 애지중지하는 ‘익스텐션’을 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구해줄게 준수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