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1화
581. 백세기 2
이브 헤어샵을 나온 이선혜는 가장 먼저 샵의 주인인 태현진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내가 찍은 동영상을 전송하자 금방 사과를 해왔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부원장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일 줄은 미처 몰랐어.
“떠나는 마당에 더는 뭐라고 하기 싫어요 원장님. 하여간 전 오늘부로 관둘 테니까 그동안 일한 야근 수당이랑 특근 수당은 빠짐없이 챙겨주세요. 퇴직금도요.”
그때였다.
태현진 원장이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다.
-이 실장. 사실 요즘 우리 샵 사정이 좀 힘들어. 퇴직금은 제대로 지불할 테니까······ 수당은 좀 봐줘. 그거 기록도 제대로 안 남았잖아. 그리고 그 돈 한 번에 나가면 아르바이트 애들 몇 명 정도 잘라야 할 수도 있어. 꼭 그래야겠어?
태현진 원장이 혼이 실린 연기를 하지만 난 이브 헤어샵의 미래를 알고 있다.
‘웃기고 있네. 누굴 속여?’
이 무렵 태현진 원장은 이태원에 제2 분점을 열기 위해서 가게 터를 알아보는 중이다.
그러니 태현진 원장의 말을 듣게 되면 이선혜만 받아야 할 돈을 못 받게 된다.
가진 사람이 더하다는 게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난 그 즉시 이선혜의 통화에 끼어들었다.
“원장님. 저 정윤호 실장입니다.”
-아 정 실장. 오랜······ 만이에요.
“예. 오랜만이네요. 죄송하지만 원장님이 이태원에 2호점 확장 중인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돈 없다는 핑계는 그만두시고 선혜 누님께 10년간 밀린 돈이나 제대로 지급해 주시죠.”
-아 아니 그쪽이 그걸 어떻게······.
태현진 원장이 놀라자 이선혜는 곧장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 똑 부러지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원장님. 10년이에요 10년! 그동안 야근비도 제대로 안 챙겨주셨지만 샵을 성장시켜서 직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비전만 보고 참았어요. 그런데 다 제 착각이었나 보네요. 그동안 일한 거 모두 다 정산해서 챙겨주세요! 아니면 변호사 끼고 진행할 거예요!”
태현진 원장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한다.
만에 하나 통장 압류라도 된다면 새로운 이태원 분점을 여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아 아냐. 미안. 그럴 거 없어. 확실히 정산해 줄게.
이선혜가 날 보면서 고맙다며 입 모양으로 말한다.
‘고마워.’
나 역시 그녀를 향해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누나. 길소미 부원장은 이야기 안 해요?’
‘아 맞다!’
이선혜는 심호흡한 뒤 조금 전 길소미 부원장이 저질렀던 짓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아 그리고 4층 CCTV 확인해 보세요.”
-응? 4층은 왜?
“길소미 부원장이 오늘 손님들에게 특별 트리트먼트 해준 다음에 현금으로 돈 받아서 떼먹은 증거가 찍혀 있을 거예요. 근데 오늘 와서 확인 안 하면 부원장이 지울 수도 있을걸요?”
-뭐라~고오~?
태현진 원장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치솟는다.
그렇게 이선혜는 마지막으로 폭탄을 하나 더 투하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한숨을 푹 내쉰 이선혜가 날 쳐다본다.
얼굴에 씁쓸하다는 표정이 가득하다.
“한 건은 해결했고······ 이제······ 백세기만 남았네.”
이선혜가 슬픈 눈으로 날 쳐다본다.
“윤호야. 진짜로 세기랑 한정연이 그렇고 그런 사이 맞아?”
난 씁쓸한 표정을 짓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누나가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폰을 들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벨 소리가 몇 번 울리고 난 이후 백세기의 목소리가 들린다.
-서 선혜야! 니가 뭘 생각하던 그거 다 오해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한정연 걔가 일방적으로 날 쫓아다니다가······.
백세기는 이미 한정연에게서 연락을 받았는지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이선혜는 평소와 다른 백세기의 태도만으로도 내 말이 맞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순간 이선혜의 입에서는 강남역 근처 골목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백세기~~! 야이~ XXX야!! 잘 먹고 잘~~ 살아아라~아아!!”
달칵.
이선혜는 생전 처음으로 속 시원하게 욕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혔다.
“후우~ 저런 인간을 믿었던 내가 등신이지······.”
잠시 후.
조금은 진정한 그녀가 날 쳐다보며 묻는다.
“윤호야. 혹시 세기가 너한테도 실수한 게 있니?”
“예. 실은······.”
그제야 난 굴렁쇠 엔터로 온 백세기가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를 말했다.
에이스 엔터의 사주를 받고 날 축출하기 위해서 뒤통수를 쳤다고.
“너나 나나 사람 하나 잘 못 만나 이게 무슨 고생이니?”
회귀한 이후 가장 배신감을 느낀 게 바로 백세기였다.
하지만 10년간의 뒷바라지가 허무하게 끝난 그녀만큼은 아니었다.
“아뇨. 저보다는 누나가 걱정이죠.”
“아냐. 안 그래도 이상해서 헤어질까도 생각을 하긴 했었어.”
다행히 그녀 역시도 조금은 생각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그때 이선혜가 눈빛을 번뜩이며 말한다.
“윤호야. 혹시 차 가지고 왔어?”
“예.”
“그러면 우리 집으로 가자. 집에 그 인간이 몰래 숨겨놓은 장부가 하나 있어.”
“장부요?”
“그래. 무슨 영수증이 가득 붙어 있던데 아마도 PD랑 감독들한테 접대한 기록인 거 같아.”
이선혜에게 도와달라고 하려 했지만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준다.
그런데 그녀가 말한 것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것이었다.
“정말요?”
“그래. 그 자식은 내가 어디 숨긴지 모르는 줄 알겠지만······.”
“바로 가시죠.”
백세기가 만든 장부가 있다면 그를 회사에서 쫓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난 그 즉시 이선혜를 태우고선 빠르게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 * *
백세기는 이선혜의 전화를 받은 뒤 즉시 두 사람이 사는 강남 오피스텔로 향했다.
10년의 세월을 함께 한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컥.
“선혜야!”
백세기의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지만 집 안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더군다나 아무도 온 적이 없는 것처럼 깔끔하다.
“아예 집에 안 들어온 건가······.”
이선혜가 깔끔하게 정리하는 성격이라곤 해도 가지고 간 게 아무것도 없다.
백세기는 씁쓸한 표정을 잠깐 짓다가 물건을 챙기기 위해 작은 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옷가지 같은 것들은 한정연과 함께 사는 오피스텔에도 다 존재한다.
그런데도 여길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의 책상 뒤쪽에 붙여둔 PD와 감독들에 대한 접대 장부 때문이었다.
작은 방을 들어가던 백세기가 거실에 놓인 액자를 쳐다본다.
10년 전부터 함께 찍은 사진들이 가득하다.
그걸 본 백세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지겹게도 오래 살았네.”
백세기는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은 뒤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작은 방의 불을 켠 백세기가 책상 뒤로 손을 넣었다.
책상 아래 설치된 가림판 뒤쪽에 테이프를 붙여 고정시켜 놓은 장부를 떼 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백세기의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어? 뭐야?”
놀란 백세기가 있는 힘을 다해 책상을 밀었다.
책상에 올려진 연필과 화분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콰직.
화분이 부서졌지만 백세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힘차게 책상을 밀었다.
“장부가 어딜 간 거야?”
책상 가림판에 테이프만 덜렁거리고 장부책은 사라지고 없다.
“어······ 어······ 이게 왜······.”
당황한 백세기는 아차 싶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이선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응?”
백세기는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또다시 목소리가 반복된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순간 백세기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선혜가 자신의 번호를 차단했다는 것을 말이다.
“야! 이선혜!”
언젠가 자신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 준비했던 무기를 이선혜가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 이선혜는 정윤호와 함께 있었다.
싸악!
백세기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정윤호라면 이 증거를 절대 놓칠 리가 없기 때문이다.
* * *
이선혜에게 장부를 받자마자 난 그녀를 데리고 오피스텔을 나왔다.
그리고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막 오피스텔을 떠날 때쯤 이선혜의 오피스텔 위치에 불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간발의 차이로 백세기를 따돌린 우린 그의 접대 장부를 들고선 천호동으로 향했다.
“누나. 오늘은 저희 집에서 주무세요. 그리고 당분간 집에는 들를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따로 경호원이랑 숙소 구해드릴게요.”
장부를 뺏긴 백세기가 이선혜를 해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난 오늘은 아줌마의 허락을 받아서 1층에서 재우고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붙여줄 생각이었다.
“알았어.”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백세기한테 빌려준 돈을 내놓으라고 고소하면 그것만으로도 감방 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만 참으세요.”
이선혜는 백세기에게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빌라를 판 5억과 10년간 밤늦게 일하면서 모은 돈 2억을 백세기에게 빌려줬다.
당연히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차용증은 쓰지 않았고.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계좌 이체 기록과 돈을 빌려줬다는 문자 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차용증을 쓰지 않아도 반환 요청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이선혜를 더 쉽게 지킬 방법이 떠올랐다.
“누나 혹시 수찬이네 회사에 헤어 디자이너로 가실래요?”
“리버스 엔터에?”
“예. 대표 대행인 수찬이가 제 동생이에요. 어차피 누나 연예인 머리 만졌으니까 하는 일은 똑같잖아요.”
난 이수찬네 회사로 가면 동생들에게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상세하게 말해줬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난 그 즉시 블루투스로 이수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형님.
“어 수찬아. 나 너한테 부탁 하나만 하자.”
난 이선혜의 사정을 말한 뒤 리버스 엔터에서 이선혜를 보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변호사님에게 부탁해서 돈도 돌려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순간 이수찬이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형님. 저희 예전에 뭐 했는지 잊으셨습니까?
“응? 뭐?”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라고······.
아 그러고 보니.
내 동생들.
강한파 소속이었지.
이제는 조폭물이 대부분 다 빠진 터라 깜빡깜빡한다.
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받아줄 수 있냐?”
이수찬이 자신 있게 말한다.
-아슬아슬한 합법 선에서 최대한 받아드리겠습니다.
“오케이. 콜! 그리고 선혜 누나는 잘 보호해 주라.”
-예. 십세기고. 백세기고. 어떤 세기가 와도 다 막아드리겠습니다.
든든한 이수찬의 말에 이선혜의 얼굴이 활짝 밝아지고 있었다.
물론 한정연 역시 나락으로 떨어뜨려 주겠다는 약속을 한 이유도 있었고.
* * *
끼이익.
주차장에 차를 댄 난 차 안에서 백세기의 장부를 펼쳤다.
장부에는 백세기가 에이스 엔터에서 팀장이 된 후부터 방송 3사와 케이블 방송국의 PD들 그리고 영화사 감독들을 만나서 접대한 내역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이선혜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빌라를 판 금액 5억과 그녀가 밤12시까지 피땀 흘려 일하면서 번 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2017년 1월 12일 로즈피아 123만 원 KBC 박우식 PD ‘어두운 밤’ 김서연 출연 확정.]
······
[2019년 5월 7일 샤크 93만 원 오지태 감독 영화 ‘우리들의 유토피아’ 박석태 출연 확정.]
······
장부책에는 시기와 접대한 장소 금액 대상 작품 로비한 배우의 이름이 순서대로 열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곁에다가 친절하게 가게 영수증도 붙여 놓았다.
대충 중복되는 이름들을 제외하고 나니 명단의 수는 대략 50명 정도였다.
‘판도라의 상자네.’
회귀 전 탑 엔터테인먼트 시절에 돈을 받던 인물이 대다수였지만 내가 모르는 인물도 일부 있었다.
그렇게 한 장씩 넘겨 가며 확인하다 보니 어느덧 맨 뒤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2021년 1월 9일 아리스토텔레스 203만 원 SBC 고기창 PD ‘박 터지는 세상’ 사영미 동반. 출연 로비.]
······
“뭐야? 굴렁쇠로 와서도 똑같이 했다고? 미쳤네.”
백세기는 배우 3실의 미성년자 배우인 사영미 데리고 로비를 갔다는 기록이 있었다.
난 그 즉시 강감찬 대표에게 영상통화로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이 밤에 무슨 일이야?
“백세기 실장이 따로 접대 장부를 만들었습니다.”
난 폰으로 장부책을 촬영해 보여주기 시작했다.
“접대한 PD들과 감독들 명단과 자금 내역이 있는데 못해도 50명은 되어 보이는데요?”
강감찬 대표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그거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겠는데?
“예. 대표님. 저도 동감입니다. 백세기 실장을 쳐내는 건 가능할 것 같지만 외부로 알리는 건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백세기가 우리 회사에 속해 있는 이상 함부로 이 자료를 기사화할 순 없다.
그랬다가는 모든 것이 굴렁쇠 엔터의 책임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잠시의 침묵 후 강감찬 대표가 말한다.
-그래. 내 생각도 같다. 함부로 제보하면 우리가 오히려 PD나 감독들의 타깃이 되겠지.
난 신중한 강감찬 대표의 말을 듣는 순간 이 장부를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상황에서는 강감찬 대표가 나보다 더 이 파일을 잘 활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대표님. 이 장부를 드리겠습니다. 백 실장을 해고하는 데 사용해 주십시오.
잠깐 고민하던 그가 대답한다.
-후우. 알았다. 그러면 지영이를 보내마. 그편으로 넘겨줘.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다.
전화를 끊은 난 이선혜를 향해 말했다.
“누나. 대표님께서 도와주신다고 하셨으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
“그러면 이제 내리죠. 아 그리고 1층 거실에 유진이랑 미소가 있을 거예요.”
오늘은 <화란전> 3화가 방송되는 날인데 지방 촬영을 마친 유진이와 미소가 돌아온 날이다.
그녀는 유진이의 팬이기도 했기에 그녀는 애써 기분 좋은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이후 난 이선혜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가 유진이와 미소에게 인사를 시켰다.
이미 허락을 받고 데려온 것이다 보니 유진이와 미소는 반갑게 이선혜를 맞이했다.
“언니. 어서 오세요~”
“이모. 안녕하세요~”
이선혜가 주춤거리며 인사를 건넨다.
“아 안녕하세요.”
“에이~ 말 편하게 하세요. 윤호 오빠한테 누나시잖아요.”
유진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하자 미소가 손을 번쩍 들고 말한다.
“이모! 나 머리 좀 땋아줄 수 있어요?”
이선혜가 헤어 디자이너라고 하자 미소는 설레는 표정을 짓고 있다.
“어 어. 얼마든지?”
미소가 같이 놀자며 이선혜의 손을 끌고 거실로 향한다.
유진이와 미소에게 친근한 대접을 받자 이선혜는 잠시나마 끔찍한 실연의 아픔을 잊어낼 수가 있었다.
이후 우린 불닭발과 족발을 야식으로 시킨 뒤 <화란전>을 볼 준비를 마쳤다.
잠시 후.
띵동.
벨소리를 듣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강지영이 닭발과 족발 배달 봉지를 양손에 들고 있다.
“저 정 실장님. 오다 받았어요.”
난 비닐봉지를 받고 백세기의 장부를 건넸다.
“여기 장부요.”
마치 닭발과 백세기의 장부를 물물교환한 것과 같은 꼴이 되었다.
“잘 부탁드릴게요.”
강지영 이사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인다.
“저 저만 믿으세요.”
“닭발이랑 족발 그리고 막국수인데······ 드시고 가실래요?”
강지영 이사가 입가에 고인 침을 닦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 아뇨. 가봐야죠. 오늘 장부 분석하려면 밤새야 할 거 같아요.”
난 군침을 흘리는 강지영 이사에게 장부를 들려 보낸 뒤 닭발과 족발을 들고 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 같이 둘러 앉아 <화란전>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자~ 시작합니다.”
이후 한 시간 동안 이어진 <화란전> 3화의 최종 시청률은 무려 21.2%나 나왔다.
미소의 열연이 빛난 3화와 화끈한 불닭발 덕인지 이선혜의 얼굴이 붉은빛으로 맴돌며 점점 생기를 찾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팀장급 회의가 열렸다.
평소에도 굴렁쇠 엔터 쪽 식구들과 관우 엔터에서 온 식구들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었지만 오늘은 유독 그 거리감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다.
어제 관우 엔터 식구들이 관리해오던 배우 양지선이 우리 배우 4실로 옮겨오겠다고 선언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지민 실장은 날 적의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내가 자신의 목숨줄인 장부를 들고 있다는 것을 아는 백세기는 한숨도 못 잔 듯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벌컥.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강감찬 대표가 강지영 이사 김관우 부대표 그리고 김장비 본부장과 같이 들어온다.
네 사람 모두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들이다.
강감찬 대표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 앉아 우릴 쳐다본다.
그리고는 평소와 달리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양지선은 배우 4실과 가수 2실에서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했다. 그렇게들 알도록.”
순간 소지민 실장이 벌컥 하고 외친다.
“대표님! 그럴 순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강감찬 대표가 아닌 김관우 부대표가 언성을 높이며 말한다.
“소 실장은 입 다물어! 나도 동의한 거니까!”
“부 부대표님?”
김관우 부대표가 강감찬 대표의 편을 들자 소지민 실장의 눈이 큼지막해진다.
‘어제 장부를 다 분석했나 보군.’
내가 본 백세기의 장부에는 백세기가 김관우 부대표와 함께 만났던 기록도 한번 나왔다.
그 일을 덮는 대가로 별도로 협상했는지 김관우 부대표는 강감찬 대표의 편을 들고 있었다.
내 예상대로 강감찬 대표가 어제 보내준 장부책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어서 강감찬 대표가 백세기를 쳐다보며 쩌렁쩌렁하게 외친다.
“그리고 백세기 실장은 조만간 징계 위원회를 열어 징계 수위를 논의할 예정이다. 미성년자인 사영미를 술집에 끌고 갔을 뿐 아니라 감독에게 로비까지도 했더군. 혹시 백 실장. 할 말 있어?”
백세기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김관우 부대표를 쳐다본다.
하지만 김관우 부대표는 이번에도 냉정하게 백세기를 외면해 버렸다.
결국 백세기는 더욱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버렸다.
‘잘 가라 백세기.’
백세기의 몰락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강감찬 대표의 입에서 마지막으로 놀라운 지시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