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5화
575. 성규환
통화 중이던 한유식 대표가 폰 하단부의 마이크 부분을 가린 채 성규환의 말을 전해준다.
“성규환은 자기 생각이 회사의 뜻과 다르다고 하는군.”
“예?”
“돈을 더 안 받고도 출연하고 싶다는 전화야.”
성규환은 회사와 의견이 다르다며 배우가 직접 연락을 해왔다.
“매니저 없이 무작정 차를 끌고 나왔다면서 지금 좀 보자고 하는데 여기로 불러도 될까?”
순간 머릿속에 수도 없이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성규환 배우와 손을 잡는 순간 TNT 엔터와 다시 한번 충돌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규환 배우는 2년 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성공하는 연기파 배우.
그를 잡는다면 제작사 ‘미리내’의 부활은 한층 더 쉬워질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은 1층에 게스트룸으로 불러서 이야기 들어보시죠.”
“알았네.”
한유식은 성규환에게 JU 엔터테인먼트의 주소를 알려준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이라 5분 안에 도착할 거란 대답을 받았다.
난 전화를 끊은 한유식 대표와 함께 1층 게스트룸으로 향했다.
* * *
올해 32살인 성규환.
TNT에서 작정하고 키워 온 신인 배우로 짧은 스포츠 헤어를 하고 있는데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외모를 갖고 있다.
그는 작년 한 해 유진이의 활약 때문에 빛이 가렸지만 <물고기 선생님>이란 작품에서 다정한 섬마을 선생님역을 소화하며 눈에 띄는 연기를 펼쳐 업계 관계자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후에는 영화 <태산>과 <교수 사회>란 작품에서 야심만만한 남자의 카리스마를 선보이며 대중들에게도 관심을 받는 스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인물도 좋고 연기력도 좋다 보니 TNT 엔터가 성규환의 차기작에 무리한 욕심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연무(煙霧)>보다 더 대형 작품에 출연시키기 위해 성규환의 출연을 막았다고 한다.
회색 후드티셔츠에 패딩점퍼 그리고 청바지를 입고 온 성규환은 1층 게스트룸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어찌 된 일인지를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하여간 회사가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야기한 겁니다.”
“근데 규환이 넌 역할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거 아니었나? 내가 너희 회사로 찾아갔을 때는 입도 뻥끗 안 했잖냐.”
“그건 회사에서 조용히 있으면 더 좋은 분량을 확보해 준다고 해서 가만히 있었던 겁니다. 돈을 더 달라고 말한 것도 분량을 더 받아내기 위해서 하는 흥정이라고 이야기했고요. 그래서 입을 다문 겁니다.”
“그런 거였나?”
“예. 저 진짜 이 작품 하고 싶었습니다. 대본도 잘 나왔고 무엇보다 상대 여배우가 주영인이잖습니까? 돈 안 받고도 출연하라고 해도 하려고 했습니다.”
한유식이 고민하다 한숨을 내쉰다.
“다 좋아. 좋은데······ 제작사가 아닌 엔터 회사 내부의 일이라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 말과 동시에 한유식이 날 쳐다본다.
“정 실장. 무슨 방법 없겠나?”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만······.”
“무슨 방법인가?”
“그런데 제 방식으로 일을 풀면 TNT 엔터 대표와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안 그래도 TNT 유강석 대표와 전 사이가 안 좋은데 이런 조언을 해드렸다는 걸 알면 회사 차원의 문제가 될 수도 있고요.”
순간 성규환의 표정이 고민으로 일그러진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다른 회사가 피해받을 걸 생각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마친 성규환이 다시금 말한다.
“정 실장님! 저 재계약까지 8개월 남았습니다. TNT 엔터랑 계약하려 했지만 다음에는 굴렁쇠랑 하겠습니다. 이래도 안 되겠습니까? 정 실장님?”
미래의 굴렁쇠 엔터 배우가 하는 제안이라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잠깐 고민하던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너무도 쉽게 대답하자 오히려 성규환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 뭐 계약서 같은 거라도 써야 하는 거 아닙니까?”
회귀 전이라면 난 이 상황을 동영상으로 녹화라도 했을 거다.
나는 잘못이 없고 상대가 원해서 상담을 해줬을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로는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없다는 걸 회귀를 하고서야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난 회귀자.
성규환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란 걸 알았기에 그런 절차가 필요하지는 않았고.
“괜찮습니다. 규환 씨에 대한 평판을 잘 알고 있는데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야 없습니다. 대신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굴렁쇠로 이직할 거라는 사실만 말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성규환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고 날 쳐다본다.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출연 제안에 퇴짜를 놓으면 됩니다.”
“퇴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TNT 엔터에서 연무에 출연시켜 줄 때까지 회사에서 제안하는 작품은 모조리 거부하십시오. 어차피 싫다는 영화에 강제로 출연시킬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으니까요. 아 대신에 미리 잡힌 스케줄은 반드시 소화하셔야 합니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배우들은 엔터 회사가 따온 배역이나 광고에 무조건 사인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회사가 불이익을 줄까 봐 걱정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실상 배우에게 인기가 생기면 오히려 회사는 그 배우의 눈치를 보게 된다.
인기 배우가 벌어들이는 수익은 상상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아직 본인의 인기를 체감하지 못하는 그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규환 씨 정도라면 이제 작품을 고를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그러니까 거부를 할 때 영화나 드라마는 배역이 마음에 안 든다든지 혹은 상대 배우나 감독이 싫다든지 해서 거절하면. CF 광고는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든지 싫어하는 제품이라든지 핑계를 대고요. 그러면 TNT에서 먼저 물을 겁니다. 왜 그러냐고. 그때 연무(煙霧)에 출연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내십시오.”
성규환이 고민하는 표정으로 묻는다.
“그렇게 하면 진짜로 회사가 출연을 시켜줄까요?”
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해결될 겁니다.”
성규환 정도의 인기 있는 배우라면 하루만 그렇게 버텨도 TNT는 발칵 뒤집힐 게 분명했다.
이대로 조언을 끝낼까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확실하게 그의 마음을 낚아 보자 싶었다.
지금은 성규환의 머릿속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각인시켜 둘 기회니까.
순간 내 기억 속에 있는 일정 하나가 떠올랐다.
난 잠깐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있네.’
[에브리데이 V12.2]
[날짜 : 2021년 1월 29일]
-PM 10:00 <연예계 방방곡곡> TNT 엔터 성규환 화장품 PJK와 법적 다툼. (회의 내용 : 광고 에이전시 조롱박 부도 및 사기.)
회귀 전 성규환은 신생 화장품 브랜드 PJK의 광고 모델로 계약서에 사인했다가 큰 곤란을 겪는다.
광고 에이전시인 조롱박이 광고주의 돈을 중간에서 떼먹고선 부도를 내기 때문이다.
졸지에 성규환은 사기에 휘말리게 되는데 금전적인 피해도 겪는 데다가 재판에도 여러 번 출석하며 시달리게 된다.
그때의 일정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기에 난 성규환에게 그 건에 관한 정보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규환 씨. 혹시 지금 PJK와 계약 중이십니까?”
성규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한다.
“예. 모레 조롱박 에이전시랑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했는데요?”
“딴 건 몰라도 거기랑 계약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성규환이 고개를 갸웃한다.
어차피 모든 광고를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콕 짚어주는지를 궁금해한다.
“거기에 무······ 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요즘 조롱박 에이전시에서 잡음이 많이 들리고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부도가 날 가능성이 있는 상태입니다.”
“예? 거기 현금 많기로 소문난 곳인데요?”
“믿지 마십시오. 현재 자금 사정이 간당간당할 겁니다. 그리고 거기 대표가 사설 카지노로 돈을 잃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고요.”
원래 조롱박 에이전시의 장우칠 대표는 업계에서 꽤 신망이 있다 보니 광고주나 엔터테인먼트 회사로부터 계약금을 미리 지급 받곤 했었다.
하지만 장우칠 대표가 최근 사설 카지노에 빠진 이후 크게 돈을 날려버리면서 회삿돈에도 손을 댄다.
그리고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고의 부도를 내어 버리고.
나에 대한 신뢰가 높아진 덕분인지 성규환은 곧바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알겠습니다. 그 건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확실하게 거절하겠습니다.”
대화가 끝나자 성규환은 속이 시원하단 표정을 짓는다.
그때 곁에 있던 한유식은 날 보고 씨익 웃으며 놀리듯 말한다.
“가만히 보면 우리 정 실장이 참~ 머리가 좋아. 응?”
난 헛기침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저희 작품 이야기나 좀 해볼까요?”
그때부터 우린 오랫동안 <연무(煙霧)>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 *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기사를 확인했다.
아침 뉴스에는 어제 있었던 한모금 우유와 연관된 기사들이 더욱 늘어나 있었다.
[(단독) 한모금 우유 본사 경찰 조사 불가피.]
[식약처 한모금 우유 생산시설 조사와 우유 성분 검사.]
[(단독) 한모금 우유 막대한 과징금 예상!]
[한모금 우유 임원 조만간 한우혁 씨를 사과 방문할 예정.]
[한모금 우유 Y 부장 경찰 조사 의뢰.]
[한모금 갑질 부장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연예인이 얽힌 갑질 조작 사건과 제품 과대광고까지 얽힌 탓에 한모금 우유 본사의 경찰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리고 유문호 부장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사진까지 찍으며 한우혁에게 용서를 빌고 있었다.
‘끝났네 유문호 부장.’
속이 시원했지만 그보다 더 기분 좋은 기사들이 연예 기사 면에 올라와 있다.
[한우혁 4년 만에 컴백!]
[한우혁 암을 이겨내고 ‘화란전’의 도깨비가 되다.]
[한우혁 현장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
어젯밤.
홍보팀에게 준 현장 스틸컷들이 연예계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음 주 <화란전> 4화가 방영되고 나면 훨씬 더 이슈가 되겠지만 이번에는 이 정도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어쨌건 아침부터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려온 덕에 온몸에 힘이 돌고 있다.
힘차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나는 1층으로 내려가 정인지 주인아주머니와 한유식 부부와 아침 식사를 같이했다.
팔팔 끓는 우거짓국에 김과 채소가 알알이 박힌 짭조름한 계란말이에 잘 익은 김치 그리고 고추장 참기름과 깨를 듬뿍 뿌린 진미채까지.
맛있는 국과 반찬 덕에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단숨에 그릇을 비워버렸다.
그런데 그때 똑같이 식사를 마친 백설기와 인절미가 뛰어와서 내 다리에 달라붙는다.
“왕왕!”
“냐아아~옹!”
백설기는 두 발을 딛고 일어나 먹을 걸 더 달라고 조르고 인절미는 이쑤시개 발톱을 세우고 내 다리를 타고 등반을 시작한다.
폭폭폭.
인절미의 발톱이 내 트레이닝복을 뚫고 들어와 피부를 따끔따끔 찔러댄다.
“야 니들은 사료 잔뜩 먹었잖아”
큰소리가 나자 백설기와 인절미가 움찔한다.
그리고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날 쳐다본다.
“왕?”
“미야~”
“시치미 떼기는?”
하지만 백설기와 인절미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몸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결국 난 포기하고 간식을 하나씩 빼 들었다.
백설기에게는 작은 개껌을.
그리고 인절미에게는 츄르를.
양손에 하나씩 개껌과 츄르를 든 나는 두 마리를 향해 말했다.
“니들 말 잘 들을 거야?”
“왕왕!”
“미야야야아아~”
“그럼 자.”
콱콱-와드득.
할짝할짝.
백설기와 인절미가 정신을 잃고선 양손에 들린 간식을 먹기 시작한다.
한유식의 아내 이아은이 호기심에 가득한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우리 정 실장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들도 잘 따르네요. 매니저라서 그런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아 그게요······.”
한유식이 피식 웃는다.
“왜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정 실장이 사람이나 동물이나 감는 것 하나는 잘하는 거 같은데.”
“감다뇨?”
“휘감는다 이 말일세. 품 안에 들어온 사람이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말이지.”
어젯밤 성규환을 유혹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크흠. 칭찬이시죠?”
“암. 칭찬이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아 그리고 말이야. 저기 우리 부부가 기거할 집 말인데······ 웬만하면 이 골목 근처로 구해주면 안 될까?”
한유식의 아내인 이아은과 1층의 정인지 주인아주머니가 자매처럼 죽이 잘 맞는 게 보기 좋다고 한다.
“이 동네에 빈집이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먼저 알아보는 게 우선일 듯합니다.”
그때 정인지 주인아주머니가 말한다.
“정 실장. 이 옆에 덕수네 집이 빈다던데?”
“그래요? 그럼 잘됐네요. 이따가 오늘 중에 제가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
순간 정인지 주인아주머니와 이아은 여사가 두 손을 잡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 사이 백설기와 인절미가 간식을 다 먹고 내게서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두 마리는 새끼 때처럼 구석으로 가더니 서로 껴안고 잠에 빠져버렸다.
잠시 두 마리를 쳐다보다가 출근하러 가려고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국제전화) 발신자 : 왕룽]
링링은 작년 연말 오기로 한 일정이 또다시 늦춰져서 이달 말일 한국에 오기로 되었다.
한국 학교로 전학하는 문제가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어 왕룽. 왜? 혹시 또 한국 오는 날이 연기되었어?”
-아니. 이번에는 확정됐어. 1월 31일 오후 2시에 갈 거야.
드디어 일정이 정확히 확정되었다.
“오케이. 그러면 그날 VIP 출국장 앞에 있을게.”
-그리고 나랑 릴리도 같이 갈 거야. 가면 며칠 있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잘됐네. 안 그래도 유진이랑 미소가 오면 우리 집에서 자라고 말하더라. 릴리랑 링링은 유진이랑 같이 자고 넌 나랑 같이 가면 되겠네.”
-오케이. 그렇게 하지 뭐.
그럼 수고하라고 하며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왕룽이 오늘 전화한 또 다른 목적을 말하기 시작한다.
-아 그리고 윤호야. 장웨이 회장 있지?
장웨이 회장.
화연 미디어 그룹의 회장이자 유진이에게 눈독을 들였던 인간이다.
그러다 날 스카우트하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나의 적이 된 인물이다.
“그 인간은 왜?”
“아 그게······.”
그 순간 왕룽이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