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7화
557. 합병 3
“자네에게는 굴렁쇠 엔터가 상장할 때 내가 가진 지분의 3%를 무상으로 넘겨주겠네.”
소극장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라 최은태 회장을 쳐다본다.
지분 3%.
그 자체의 가치만 하더라도 엄청났지만 3%를 소유하면 상법상 여러 가지 권리가 생긴다.
그 권리라는 건 회사의 업무와 재산 상태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는 것부터 시작해 경영 활동을 감시할 수 있는 것까지 너무도 다양했다.
다시 말해 3%를 소유하면 경영에도 끼어들 수 있었다.
순간 ‘우리 사주’를 나눠주겠다고 기획한 최만식 대표가 화들짝 놀라서 외친다.
“회 회장님. 그건······ 안 됩니다.”
“내가 준다는데 뭐가 안 된다는 거지?”
“3%면······ 특혜나 마찬가지입니다.”
최은태 회장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인다.
“맞네. 특혜.”
“예?”
“특출한 실적을 낸 자에게 특혜를 주지 않고 평범하게 대하면 그게 오히려 불공정한 것 아닌가?”
“그건······.”
“결과를 낸 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정당한 보상이 따라야지 직원들이 노력하지 않겠나. 설마 자네는 정 실장 덕에 굴렁쇠가 이토록 성장한 걸 부정하는가?”
“······.”
“그래 자네도 그건 부정 못 하겠지? 그러니 그에 대한 보상은 돈으로는 부족하다고 봐야지. 이 굴렁쇠의 어떤 누구보다 심지어 우리 주주들보다 더 굴렁쇠를 자기 것처럼 아끼고 키워온 정 실장이네. 그러니······ 난 내 결정을 철회할 생각이 없네.”
최은태 회장은 그동안 최만식 대표에게 경계심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나와 굴렁쇠 엔터를 최대한 모른 척했었다.
종종 관여할 일이 생겨도 필요한 이상으로는 언급하지 않았고.
하지만 지금 최은태 회장은 적극적으로 굴렁쇠 엔터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었다.
‘회장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그가 갑자기 돌변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여기서 물어볼 수는 없다.
이어서 최은태 회장은 내게 거부하지 말라고 말한다.
“정 실장. 그러니 내가 주는 지분을 받게! 이건 자네 개인의 문제가 아닐세. 다른 이들도 정 실장만큼 실적을 내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네.”
현재 배우 2실과 가수 2실의 직원들이 마치 자신들이 상을 받는 듯 기뻐한다.
반대로 서예종 출신들은 시기 질투심 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즉 내가 여기서 주식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 편의 사기가 급락할 게 뻔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제야 최은태 회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 잘 생각했네. 아 그리고 이젠 굴렁쇠 엔터의 금고가 비게 되는 걱정은 하지 말게나.”
배우 2실과 강감찬 대표의 라인을 제외하고 서예종 라인들은 연말 보너스를 대다수가 미리 써버린 상황이다.
그동안 구성철 실장과 배우 2실의 팀장들이 적극적으로 유언비어를 퍼트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젠 최은태 회장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우리 사주’는 강감찬 대표의 식구들이 더 가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동안은 회장님께서 저희 굴렁쇠 엔터에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제가 오해를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최은태 회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앞으론 관심 가지겠네.”
최은태 회장이 이어서 최만식 대표를 쳐다본다.
“최 대표. 혹시 더 할 말 있나? 난 이제 다른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는데?”
최만식 대표가 부들부들 몸을 떨며 대답한다.
“아닙니다. 행사는 거의 다 끝났으니까 실장급 이상에게 당부사항만 전하면 됩니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은태 회장이 날 쳐다본다.
“그리고 정 실장은 잠시 따라오게. 지분을 넘기려면 몇 가지 절차에 관해 이야기해 줄 게 있네.”
날 부르는 걸 보니 따로 할 이야기가 있나 보다.
“알겠습니다.”
이어서 강지영 이사가 합병식의 끝을 알렸다.
“그러면 오늘 시무식 겸 합병식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웅성웅성.
여러 가지 폭탄 발언들로 인해 여전히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강지영 이사는 마이크를 잡고 최만식 대표를 대신해서 말한다.
“그러면 지금 실장급 이상은 7층 임원 회의실에 모이시고 나머지 분들은 업무 개시하세요~”
강지영 이사의 말이 소극장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난 최은태 회장을 따라 소극장 출구로 향했다.
* * *
소극장 출구를 나와 1층에 있는 VIP용 주차장으로 향했다.
검은색 롤스로이스 차량이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며 서 있다.
최은태 회장이 잠시 안에 타라고 한다.
역으로 열리는 문을 열고 롤스로이스의 왼쪽 뒷좌석에 앉았다.
최은태 회장이 자리에 앉아 버튼을 누르자 육중한 문이 부드럽게 스스로 닫힌다.
달칵.
이어서 최영호 은행장이 운전석에 앉는다.
평소와 달리 운전기사는 따로 없었다.
최은태 회장이 날 보며 조금 전 상황을 언급한다.
“정 실장. 내가 갑자기 지분을 준다고 해서 놀랐는가?”
“예. 그동안은 최만식 대표를 경계해서 아는 척도 안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셨습니까?”
최은태 회장은 그동안 강은기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 나와도 거리를 뒀었다.
그렇게 조심하던 최은태 회장이 갑작스레 변한 모습이 낯설었다.
그 순간 최은태 회장이 씨익 웃는다.
“박상곤 의원을 날릴 준비가 모두 끝이 났네. 그러니 더는 만식이 저놈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 게지.”
“정말입니까? 회장님.”
“그렇네. 2월 이후부터 작전이 시작될 걸세. 그리고 보궐선거를 전후해 한 판 승부를 걸 생각일세.”
여당 대표이자 차기 대통령 후보 1위인 박상곤 의원을 끌어내리기 위한 작전이 시작될 거란다.
회귀 전에는 감히 얽히지도 못했던 거대한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자네는 굴렁쇠 엔터의 지분을 차지하는 데 집중하게.”
굴렁쇠 엔터의 지분을 가지는 건 나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저 혼자도······.”
그러나 최은태 회장이 내 말을 자르며 말한다.
“아니. 예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네.”
“뭐가 말입니까?”
“자네 혹시······ 일본에 있는 굴렁쇠 엔터의 자회사인 A1 엔터테인먼트에 대해 알고 있나?”
“예. 도쿄에 있는 관리회사잖습니까?”
도쿄에 있는 A1 엔터테인먼트.
굴렁쇠 엔터테인먼트가 일본 쪽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만든 상주 직원의 수가 5명인 관리회사였다.
현재로는 굴렁쇠 엔터가 그 회사의 지분 100%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에 가 있는 골든로드와 차상진 실장도 A1 엔터테인먼트의 관리를 받으며 일본 협력사와 일을 하고 있다.
“실은 거기가 일본 쪽에서 내 비자금을 총괄해서 관리하는 회사이기도 하다네. 비자금은 조 단위는 될 거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A1 엔터테인먼트는 10평짜리 사무실을 사용하는 조그만 회사라서 일본 출장 때에 대부분 들리지도 않는다.
대신 A1 엔터테인먼트의 직원들이 숙소로 찾아와서 일을 본다.
그런데 바로 그곳이 최은태 회장이 일본 쪽에 숨겨둔 비자금을 관리하는 회사란다.
“아니······ 그걸 왜 알려주시는 겁니까?”
“자네가 가진 주식의 진짜 가치를 알았으면 해서.”
최은태 회장은 그런 회사를 자회사로 둔 굴렁쇠 엔터의 지분을 내게 무려 3%나 준다고 약속을 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최만식이 굴렁쇠 엔터에 그토록 집착한 겁니까?”
“처음엔 그저 로비 회사로 쓰고 싶어서 굴렁쇠 엔터테인먼트가 필요했을 거야. 하지만 최근에 그 녀석도 굴렁쇠 엔터의 자회사 중 하나가 내 비자금도 관리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어.”
“그러면 A1 엔터테인먼트가 위험한 거 아닙니까? 거긴 직원이 5명 밖에 없잖습니까?”
“현재 일본 중국 미국에 있는 굴렁쇠 엔터의 자회사들인 A1부터 A10까지 총 10개 자 회사 중에서 어떤 회사가 내 돈을 관리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네. 그리고 자회사의 직원들은 내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인물 들이고.”
아직까지 최만식 대표는 굴렁쇠 엔터가 가진 여러 개의 자회사 중 어떤 곳이 돈을 가진 곳이라는 걸 알지 못한단다.
“그건 다행이군요.”
순간 최은태 회장이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껏 말하지 않아서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놀라긴 했지만 제 재산도 아니고 회장님 재산 아닙니까? 제게 미안하실 일은 아닙니다.”
“이해해줘서 고맙네.”
“저기······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만에 하나 주식 상장을 하게 되면 자회사의 존재가 드러나서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전혀. 내가 손을 써뒀기에 상장해도 일반인들은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정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곳으로 몰래 옮길 수도 있고.”
“그러면 최만식은 다르다 이겁니까?”
“그래. 어쨌건 그놈은 현재 법적으로는 유일한 내 아들이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등골이 싸해진다.
최은태 회장이 그동안 숨겨왔던 이 이야기를 내게 해주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설마 이번 일을 하게 되면 회장님의 신변에 위험이 생기는 겁니까?”
“정치인들을 건든 이상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은기한테 최대한 많은 재산이 넘어가기로 되어 있으니까 그때 은기를 좀 도와줬으면 하네.”
최은태 회장은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하고 있었다.
강은기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 일을 내가 할 수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 정도 규모의 일은 회귀 전에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회장님 뜻은 알겠지만 저보다는 강 대표님이 더 잘하시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어제 만나봤지만 강 대표는 자네가 적임자라고 말하더군. 자신의 그릇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우리 정 실장이 적임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좀 부탁하지. 최만식을 처리할 때까지만······ 굴렁쇠 엔터를 지켜주게.”
최은태 회장이 내 두 손을 꼭 쥐며 부탁한다.
어차피 굴렁쇠 엔터의 지분 전쟁을 벌일 생각이었지만 조금 더 확실한 이유가 생겼다.
그리고 이 전쟁의 끝에는 강은기의 운명도 달려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순간 조금은 어둡던 최은태 회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하하하. 이제야 안심이군.”
최은태 회장은 그래도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라며 웃음을 짓는다.
그때였다.
일순간 그의 얼굴에서 씁쓸함이 지나간다.
친아들인 강은기와는 여전히 연락할 수 없고 양아들에게는 재산을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강은기에 관한 정보를 전했다.
“회장님. 은기는 잘 지내고 있고 연실이도 건강히 잘 지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은기가 나오면 꼭 만나게 해드릴 테니까 마음 약해지지 마십시오. 건강한 몸으로 은기를 만나셔야 할 것 아닙니까?”
최은태 회장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맙네. 자네라도 있어 다행이야.”
최은태 회장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올해는 작년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일들이 벌어질 것 같다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자 그러면 이만 가보게나. 나도 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가야겠네.”
“예. 회장님.”
인사를 하고 내리는 순간 최영호 은행장이 앞 좌석에서 말한다.
“정 실장. 희망병원 쪽은 회장님께서 책임져 주실 거네. 그러니 안심하게.”
최은태 회장이 빙긋이 웃는다.
“희망병원에서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병원이 지켜질 수 있도록 돕겠네.”
마르지 않는 돈의 샘물을 가진 자가 내게 약속한다.
“그렇다면 그 샘물이 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꼭 부탁하신 걸 도와야겠는데요?”
최은태 회장이 껄껄대며 웃음을 터트린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이 온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군. 허허허.”
최은태 회장의 웃음을 들으며 차에서 내렸다.
부웅.
육중한 롤스로이스 차량이 엔진음과 함께 사라진다.
난 떠나가는 차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과거를 어떻게 살아왔던 간에 현재 최은태 회장이 수많은 이들에게 삶과 희망을 안겨주는 것만큼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 * *
굴렁쇠 엔터로 돌아온 난 곧장 임원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를 끝낸 최만식 대표로부터 단둘이 보자는 메시지가 왔기 때문이다.
약속 장소인 김관우 부대표의 사무실로 들어오자 최만식 혼자만이 있었다.
“너 이 새X. 우리 영감이랑 대체 무슨 사이야?”
최만식 대표는 날 보자마자 으르렁거린다.
자회사에 얽힌 엄청난 비밀을 들은 터라 굴렁쇠 엔터를 가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구는 의도에 이해가 가고 있었다.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회장님이 나한테도 안 넘기던 피 같은 지분을 넘겨줬다고?”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최만식 대표는 분을 삭이지 못하더니 갑작스레 얼토당토않은 말을 한다.
“그 지분 나한테 넘겨. 내가 비싼 값에 사주지.”
속내가 뻔히 보이는 말에 난 고개를 저었다.
“적에게 왜 제 지분을 내어드립니까?”
“뭐? 적?”
“예.”
최만식의 눈이 독사처럼 가늘어지더니 스산한 경고가 흘러나왔다.
“너 지금······ 진짜로 나랑 싸울 생각이냐?”
사람 하나 죽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인간이 날 응시한다.
하지만 도망칠 생각 따윈 없었다.
혼자 살다 혼자 죽은 회귀 전과는 달리 나에게는 든든한 친구들이 있으니까.
강감찬 대표를 비롯한 굴렁쇠 엔터의 식구들.
진성그룹의 두 후계자들.
내게 엔터테인먼트를 열어준다고 한 대천그룹의 김애련 부회장.
중국의 왕민 부서기.
링링과 릴리의 아버지이자 상하이에서 상장하는 수 조 짜리 전자결재 시스템 레드페이의 대표 리커준.
그리고 우먼즈의 장지혜 대표와 예뜨랑 안석훈 대표.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최만식 대표와 자금력으로 붙어도 절대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최만식 대표는 정치 자금도 마련해야 하니 굴렁쇠 엔터에 전적으로 힘을 쏟을 수 없을 거고.
그렇다면 오로지 굴렁쇠 엔터만 신경 쓰면 되는 내가 훨씬 더 유리했다.
난 더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한번 붙어 보시죠.”
최만식 대표가 날 뚫어지며 쳐다본다.
“그래? 알았어. 내가 굴렁쇠 엔터를 모두 먹는 그 날이 바로······ 네 놈의 제삿날인 줄 알아!”
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날이 오겠습니까?”
‘최은태 회장이 박상곤 의원을 잡는 데 성공하면 그다음은 바로 최만식 당신 차례야.’
한때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경이 쓰였던 최만식 대표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난 앞으로의 일을 강감찬 대표와 논의하기 위해 고래고래 고함치는 최만식 대표를 두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 세상이 예전보다 조금 눈 아래로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많이 컸네. 정윤호.’
* * *
강감찬 대표에게는 내가 적임자라며 앞으로 자신이 날 돕겠다는 약속을 해왔다.
난 그렇게 굴렁쇠 엔터의 미래를 양어깨에 짊어지게 되었다.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날 믿어주는 이들이 생겼다는 건 한 편으로는 가슴이 벅찰 정도로 뿌듯한 일이었다.
강감찬 대표와 후속 이야기를 마친 난 파란만장한 오전 일과를 끝낸 후 에이스 엔터를 찾아가 박상규의 계약을 해지했다.
다행히 아직 김동수의 대표 취임 절차가 다 끝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상규와는 가계약서를 써뒀기에 내일 <도플갱어> 오디션을 본 뒤 정식 계약서를 쓰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후 난 리버스 엔터로 가서 에이스 엔터가 분할하면서 나온 배우와 매니저들이 리버스 엔터에서 어떻게 배치되면 좋은지를 조언했다.
이어서 주영인도 에이스 엔터에서 독립한 다음 1인 기획사 JU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그 결과 에이스 엔터는 과거보다 배우와 매니저들이 40%가 빠져나가 쪼그라들었고 이젠 업계 5위의 회사로 밀려나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다.
난 <도플갱어> 오디션을 위해 박상규와 함께 홍대에 있는 SUN 필름에 도착했다.
대기실에 들어가자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배우들이 보인다.
<경계 너머로>에서 이태풍과 주연을 놓고 다룬 에이스 엔터의 최양섭.
<백수 탈출>이라는 작품으로 전 국민을 웃고 울렸던 리버스 엔터의 연기파 배우 안동희.
4년 전 북극 탐사대 내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유빙>으로 황룡영화제 대상을 차지했던 TK 엔터의 백성현.
시한부 인생과 두 남자의 우정을 그린 <가족 같은 친구>의 주인공 최재명까지.
S급 배우들만 4명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알게 모르게 벌이는 신경전 때문에 급이 낮은 배우들은 다들 구석에서 말없이 대본을 훑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을 본 박상규는 떨기는커녕 TV 속 연예인들을 보듯 S급 배우를 관찰하고 있었다.
혹시나 조연 시절처럼 박상규가 미리 포기하고 관찰만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난 박상규에게 조심스레 ‘주인공’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형님. 오늘은 주인공을 노리셔야 합니다. 저 배우들과 전쟁한다고 생각하시고 긴장을 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박상규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걱정하지 마. 오늘은 반드시······ 주연 자리를 손에 거머쥘 테니까.”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주제를 넘는 조언을 드렸나 봅니다.”
고개를 숙이자 박상규가 얼른 날 일으켜 세웠다.
“아냐. 사실 나도······ 한국 최고의 매니저인 네가 곁에 있어 든든해서 이럴 수 있는 거야.”
박상규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린다.
그때였다.
끼이익.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5년 전 황룡영화제 대상을 차지했던 관우 엔터 <철혈>의 주인공 강상준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곁에는 이번에 배우 5실의 실장이 된 백상범 실장이 동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첫 만남 때 적으로 바라본 백상범 실장이 날 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백 실장. 대체 또 무슨 꿍꿍이야?’
그런데 그때였다.
날 발견한 강상준이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뜬금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