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6화
556. 합병 2
작년 한 해.
나의 활약으로 인해 우리 회사에서 서예종 파벌 핵심은 거의 다 정리된 상태다.
그 탓에 최만식 대표는 서예종 라인을 이용해 굴렁쇠 엔터를 손아귀에 넣으려던 계획은 차질이 생겨버렸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내가 희망 병원을 날로 먹으려는 음모까지 우연히 막아버렸다.
그 탓인지 관우 엔터와 합병식을 하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오는 최만식 대표의 눈에선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정윤호. 넌······ 절대로 가만 안 둬!’
마치 최만식 대표는 그런 뜻을 담은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난 태연하게 그 눈빛을 흘려넘겼다.
최만식 대표를 처음 만난 날 이후 어차피 그가 날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은 ‘폭풍우’가 몰아칠 거라고 한 날이다.
그래서 난 최만식 대표에게 대항할 방법을 준비한 상태였다.
‘어디 두고 봅시다 최 대표.’
최만식 대표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단상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마이크를 잡은 강지영 이사는 다시 한번 박수와 호응을 요구했다.
“오늘 특별히 시간을 내주신 굴렁쇠 엔터의 주주분들께 감사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짝짝짝.
지하 소극장에 손뼉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면 이제부터 합병식을 진행하겠습니다.”
강지영 이사는 두 회사의 연혁을 말하기 시작했다.
굴렁쇠 엔터가 종합적인 엔터 회사였다면 관우 엔터는 음악 쪽에 치우친 회사였다.
김관우 대표는 아이돌 1세대 제작자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프로듀서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어서 두 회사 대표 각각의 30년 매니저 인생에 관한 전설적인 일화들이 소개됐다.
그렇게 10분이 지났다.
강지영 이사가 신생 굴렁쇠 엔터를 이끌게 된 강감찬 대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대표님. 소감 한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강감찬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강감찬 대표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표정이 가득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회사가 이렇게 성장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먼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힘을 내준 임직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굴렁쇠 엔터 소속의 매니저들이 감격해서 손뼉을 쳐댄다.
짝짝짝.
환호와 손뼉 소리가 한데 얽혀 지하 소극장에 메아리가 울린다.
사실 내가 회귀하기 전만 하더라도 굴렁쇠 엔터는 이 정도로 확장을 꿈꾸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관우 엔터와의 합병으로 TK 엔터와 TNT 엔터에 이어 업계 3위의 업체가 되었다.
직원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 소리에 강감찬 대표는 잠시 감격해 가만히 서 있다가 말을 잇는다.
“그동안 함께 힘든 길을 걸어온 굴렁쇠 엔터의 동료들. 그리고 오늘부터 함께 하게 된 관우 엔터 출신의 동료들. 앞으로 힘을 모아 엔터 업계 1위를 노려봅시다!”
강감찬 대표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난 힘차게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직원들도 다시 한번 손뼉을 치며 힘차게 외친다.
“굴렁쇠 엔터. 파이팅!”
“대표님! 올해 1위 가시죠!”
“예 맞습니다! 싹 다 치워버리시죠.”
강감찬 대표가 손을 들고 감사를 표한다.
이어서 강감찬 대표가 김관우 부대표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김관우 부대표는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짤막한 소감을 말한다.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진 뒤 주주들에게 마이크가 넘어간다.
“그러면 다음은 주주 대표이신 최만식 대표님 말씀이 있겠습니다.”
네 사람의 주주들을 대표해 최만식 대표가 마이크를 잡는다.
“합병 축사는 강감찬 대표님이 하셨으니 전 현실적인 이야기나 할까 합니다.”
최만식 대표는 주변을 쳐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올 상반기 내에 굴렁쇠 엔터의 상장이 있을 겁니다.”
그 순간 직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주식 상장’이 주주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최만식 대표가 굴렁쇠 엔터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기 위한 선포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 대표인 강감찬 대표의 라인과 날 몰아내려고 할 게 분명했고.
다이어리가 알려준 대로 폭풍우가 몰아치려고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다면 그 폭풍우가 내게로 몰려들 게 확실했다.
그때부터 난 최만식 대표와 정면으로 부딪칠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달 늦어도 일사분기 중에는 우리 사주가 발행될 겁니다. 지난 연말에 넉넉히 뿌린 보너스. 다른 곳에 쓰지 않고 잘 모아두셨길 바랍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최만식 대표의 얼굴에 자신감이 어린다.
마치 돈 앞에 어쩔 수 없는 건 당연한 이치라는 듯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 웅성거림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미 나와 배우 2실이 유언비어를 퍼트린 까닭에 배우 2실을 제외한 대부분이 이미 연말 보너스를 필요한 곳에 써버렸다는 것을.
그때 최만식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단상에서 날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에 오만함이 가득했다.
마치 이런 게 진짜 사업이라는 듯 그리고 너 따위는 할 수 없을 거라는 듯 말이다.
득의양양하게 회사 상장을 외친 최만식 대표는 주변을 둘러보며 묻는다.
“자~ 그렇다면 짧게나마 여러분과 질의응답을 갖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회사 내에 있었으면 하는 몇 가지 변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자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손을 들고 물어보십시오. 제가 주주분들을 대신해 대답하겠습니다.”
‘지금이다!’
최만식 대표가 변화를 말하기 전 내가 선수를 쳐야 했다.
그 변화라는 건 아마도 서예종 라인에게는 유리하고 강감찬 대표와 내 쪽에는 불리한 것일 테니 말이다.
인생은 타이밍.
난 그 즉시 손을 들었다.
넓은 소극장에 유일하게 나 혼자 손을 들고 있자 최만식 대표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손들지 않았기에 최만식 대표는 결국엔 날 가리킬 수밖에 없었다.
“예. 정 실장님. 궁금한 게 뭡니까?”
난 심호흡을 한 뒤 최만식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굴렁쇠 엔터를 상장했을 때 자금 사정에 문제는 없겠습니까? 이번 관우 엔터와의 합병으로 꽤 많은 돈을 썼기에 회사 잔고가 10억도 안 남았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까 전과는 비할 바 없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굴렁쇠 엔터 정도 되는 회사의 잔고가 10억도 없다면 사실상 부도 직전인 상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의 재정 상태에 관한 불안한 사정을 직접 듣게 되자 매니저들은 안절부절못한다.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한 최만식 대표가 이를 꽉 깨물고 외친다.
“일시적인 자금난일 뿐 금방 호전될 겁니다!”
순간 하마터면 입꼬리를 올리고 웃을 뻔했다.
‘최 대표. 당신 실수한 거야.’
이 상황에서 최만식 대표가 대답해야 할 말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여야만 했다.
하지만 최만식 대표는 ‘자금난’이라는 말을 입에 담아 버렸고 직원들은 그 말로 인해 가슴속에는 불안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역시 2실 쪽 사람들 말이 맞았네.
-난 이럴 줄 알고 지난 연말 코인에 올인했어. 지금 얼마나 뛰었는지 말해 줄까?
-좋겠다. 난 와이프랑 여행 다녀오는데 써버렸는데.
-난 돈 들어오자마자 카드빚 갚았지.
-그런데 회사 자금난이 좀 심한 거 아냐? 작년 한 해에 배우 2실에서 벌어다 준 돈이 얼만데 남은 돈이 고작 10억? 돈 어디다 쓴 거야?
-그럼 우리가 일해서 번 돈이 관우 엔터에 다 들어간 건가?
-아 난 조금 남겨뒀는데······ 경영진들이 하는 거 보니까 우리 사주 못 사겠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뒤늦게 직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은 최만식 대표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일반 직원들이 어떤 눈으로 ‘우리 사주’를 생각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내가 오래전 뿌려둔 음모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장면은 꽤 볼만했다.
순간 당황한 최만식 대표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다들 조용!”
쨍하는 소리가 울리자 직원들이 황급히 입을 다문다.
이어서 최만식 대표가 언성을 높이고 내게 묻는다.
“정 실장.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흥분한 그에게 기다렸다는 듯 내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선 확신을 주십시오.”
“확신?”
“예. 주주분들이 굴렁쇠 엔터를 버리지 않겠다는 확신 말입니다. 가령 우리 최만식 대표님이 사재를 투입해 주시거나 하면······ 저희도 우리 사주에 대한 신뢰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제······ 돈을 내놓으라고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요청에 최만식 대표가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희망병원 부지 매입도 실패로 돌아갔으니 돈을 내놓기는 쉽지 않겠지.
당황한 최만식 대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
그러나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다 모인 자리였기에 결국에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회사에 사재를 투입하도록······ 하지요.”
최만식 대표가 은근슬쩍 도망치려고 한다.
하지만 난 다시 한번 그를 몰아붙였다.
“문제는 벌써 생긴 것 같지 않으십니까? 이미 직원들도 알게 되었으니 배우들이 아는 건 시간 문제고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시원하게 투자 약속을 해주시죠.”
최만식 대표가 이를 빠드득 갈며 날 노려본다.
약속하는 순간 다른 곳에 써야 할 돈이 굴렁쇠 엔터에 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답이 늦어지자 소란이 더욱 커진다.
결국 최만식 대표의 입에서 부족한 회사 재원을 확충하기 위해 개인 돈을 투자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알았······습니다. 제가 사비 50억을 추가로 즉시 출자하도록 하지요. 됐습니까?”
최만식 대표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다.
‘낚였다.’
현재 최만식 대표는 정치인인 예비 장인 박상곤 의원의 선거 자금까지 마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 돈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할 거다.
하지만 모든 굴렁쇠 엔터 직원들 앞에서 사재출연을 무려 50억이나 약속했으니 이제 물릴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에 몰렸다.
연달아 예상치 못한 일에 돈이 나가게 되자 최만식 대표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마이크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당장이라도 단상에서 내려와서 내게 주먹을 날릴듯한 표정이다.
그때였다.
최만식 대표가 마이크를 잡더니 얼토당토않은 역공을 해온다.
“정 실장. 그렇다면 정 실장은 회사의 고통을 분담할 생각이 있습니까?”
고작 생각한 게 물귀신 작전이라니.
내게 굴렁쇠 엔터는 집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고통을 분담할 생각은 있다.
단 그건 작년처럼 최고의 수익을 올릴 때가 아니라 회사가 진짜 어려워졌을 때다.
‘나랑 배우 2실이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을 멋대로 써 놓고선 염치도 없이 무슨 X 소리야?’
그가 한 말에 대꾸하려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최만식 대표. 그건 자네가 해서는 안 될 말인 듯하군.”
이제껏 가만히 지켜보던 최은태 회장이 입을 열었다.
순간 소극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시선이 최은태 회장에게 쏠린다.
강지영 이사가 다급히 마이크를 건넨다.
“회장님. 여기······.”
“고맙네.”
마이크를 받은 최은태 회장이 점잖은 목소리로 최만식 대표를 계속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작년 한 해. 배우 2실과 정 실장은 최고의 실적을 올렸다고 들었네. 그런데도 회사의 잔고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건 정 실장이 아닌 경영진과 감시하지 못한 주주들 문제지. 그런데 그걸 왜 정 실장한테 책임을 묻는가?”
엄중한 질책이 이어지자 최만식 대표가 당황한 기색을 띤다.
내가 알고 있기로 최은태 회장은 단 한 번도 최만식 대표를 몰아세운 적이 없다.
예전에는 자신의 양아들이었기 때문이고 강은기가 친아들이라는 게 밝혀진 이후로는 경계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최은태 회장은 처음으로 모두의 앞에서 아들을 질책하고 있었다.
“회 회장님······.”
최은태 회장이 최만식 대표를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그리고 내가 이 엔터 업계라는 건 잘 모르지만 돈 하나만큼은 잘 안다고 자부하네. 지금 회사의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 사람은 경영진이야. 오히려 정 실장한테는 더 큰 인센티브를 줘야지.”
“회 회장님. 정 실장은 작년 인센티브가 10억도 넘을 정도로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 주라시는 건······.”
그때였다.
최은태 회장이 언성을 높이고 최만식 대표를 꾸짖기 시작한다.
“최 대표! 자네가 주주라고는 하지만 방금 말한 항목은 비밀 사항이라는 것도 모르는가?”
“아 그건······.”
최만식 대표가 입을 다문다.
최은태 회장이 한동안 최만식 대표를 노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연예인들의 순익 10%를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고 들었네. 그런데 이기철 이사와 몇몇 놈들이 그걸 3%로 줄여버렸다지? 지금 정 실장한테 돈을 덜 준 걸 미안하다고 하지 못할망정 더 책임을 지라고 해? 자네 지금 그게 주주로서 할 말인가!”
폭풍 같은 꾸지람에 최만식 대표가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숙인다.
“죄송······ 합니다.”
최은태 회장은 수많은 직원들의 앞이었기에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앞으로 조심하게.”
그때였다.
강감찬 대표가 자신이 경영을 잘못했다며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큼! 알면 됐네.”
난 오늘 일을 벌이기 전 강감찬 대표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 없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감찬 대표가 스스로 책임을 자청했다.
자신이 약간의 오명을 뒤집어써야지 내 계획이 완벽해진다면서 말이다.
강감찬 대표는 최만식 대표를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세운 내 계획을 위해 고개를 숙이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강 대표님.’
이후 최은태 회장은 최만식 대표와 강감찬 대표를 질책한 뒤 날 쳐다본다.
그러나 날 보는 눈에는 조금 전과 달리 다정함이 어려 있다.
“정 실장. 작년 한 해 수고 많았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네가 책임을 질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여기 최만식 대표가 사재 출연을 약속했으니까. 걱정은 내려놓게.”
“예. 회장님.”
“그리고 연예인들이 나눠주는 순익 인센티브 비율을 3%에서 조절하는 건 앞으로도 힘드네. 10%를 주는 건 예전처럼 작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지 이 정도 규모의 회사에서는 불가능해. 그건 양해해 줬으면 하네.”
“예. 저도 그 이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최은태 회장이 껄껄 웃는다.
“좋아. 대신에 자네에게는 다른 보상을 하도록 하겠네. 자네에게는······.”
그런데 최은태 회장이 말한 보상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