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1화
551. 박상규 5
희망병원 원장실.
작은 평수의 원장실에 비치된 가구는 오래된 탁자와 낡은 소파뿐이다.
직접 커피를 타준 서환희 원장은 병원 부지의 매매에 얽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 죽마고우인 김창수라는 친구가 저를 대신해 계약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병원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구매자를 물어준 사람이 그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 근처에 조만간 쓰레기 소각장이 들어온다고 해서 빨리 팔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더 늦으면 땅값이 평당 200만 원이 아니라 20만 원도 안 할 거라고 말입니다.”
희망병원이 보유한 토지는 병원 뒤의 공터를 합해 총 5000평 평당 시세는 대략 200만 원이다 보니 총 예상 매매가는 100억이다.
그런데 땅값이 10분의 1로 된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졌다고 한다.
오랫동안 땅을 팔아서 병원의 적자를 메꿔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마침 일주일 전에 은행에서도 대출 연장을 거부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어제 급한 대로 계약금의 10%인 1억에 가계약을 했다고 한다.
터무니없는 수작에 헛웃음이 나온다.
“아무래도 친구와 은행 쪽이 짜고서 병원장님을 속인 것 같습니다.”
개발 계획을 미리 들은 부동산 중개업자와 은행이 짜고서 순진한 땅 주인을 속이고 있는 게 확실했다.
어차피 모든 거래는 도장을 찍는 순간 본인 책임이었기에 사기로 걸기도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은행 직원이야 그저 대출 조건을 까다롭게 봤다고 하면 그만이고.
그 순간 서환희 원장이 소파에 기대며 한숨을 내쉰다.
“창수 그놈이 그딴 짓을······ 허······ 거······참······.”
그는 평생 병원과 치료에만 신경을 쓰던 사람이라 부동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그런데 일곱 살 때부터 친구였다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자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참 이 나이 먹도록 사람 하나 제대로 못 보다니. 부끄럽습니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흥 저축은행 쪽에서 도와준다고 했으니 이참에 대출도 갈아타시죠.”
중개업자와 은행도 같은 편이 분명했기에 대출부터 바꾸자고 말했다.
그런데 서환희 원장의 입에서 익숙한 은행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거래하는 미래상상 저축은행에서 대출을 빼서······.”
“잠시만요. 미래상상 저축은행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미래상상 저축은행은 최은태 회장의 소유 은행이지만 현재는 최만식 대표가 사실상 소유하고 있는 곳이다.
이번 일은 아무래도 최영호 은행장에게 부탁해서 직접 도와달라고 해야 할 듯하다.
“잠시만요.”
난 곧장 최영호 은행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최영호 은행장도 은행 부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선 똑같은 소리를 한다.
-그 땅에 미래상상 저축은행도 끼어 있더군?
“예. 그래서 아무래도 은행장님이 직접 오셔서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수백억 차익이 나는 건이라면 최만식도 이 일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내 생각도 같네. 안 그래도 그 근처니까 부동산팀을 이끌고 가도록 하지. 그리고 이번 기회에 원장님께 우리 은행으로 대출도 갈아타도록 권해야겠네.
“예.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잘하면 희망병원도 살리고 최만식 대표에게 치명타를 안길 수가 있게 되었다.
이 땅이 최만식 대표에게 넘어갔다면 그의 손에 수백억이 떨어졌을 테니까.
전화를 끊은 난 서환희 원장에게 말했다.
“최 은행장님이 직접 오신다고 합니다. 이제 그분과 모든 걸 상의하시면 될 겁니다.”
그때였다.
노쇠한 서환희 원장이 갑작스레 일어나더니 머리를 숙이며 내게 감사를 표한다.
“감사합니다 정 실장님. 실장님이 병원 식구들과 환자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까지 살리신 겁니다.”
난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뒤 허리를 폴더로 접었다.
“아 아닙니다 원장님.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더 감사를 드려야 하는데······.”
식물인간이 된 이사연을 유일하게 받아준 곳이 바로 이 희망병원이다.
그래서 난 서환희 원장에게 선의(善意)를 보답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박상규와 이사연은 만날 수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서환희 원장은 기분이 좋은지 허리를 굽힌 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더니 진짜로 그렇게 되는군요.”
“네 원장님.”
그런데 그때였다.
『Hurry UP~! Listen UP~!』
서환희 원장의 폰에서 체리블라썸의 이 벨 소리로 울려 퍼진다.
서환희 원장이 웃으며 말한다.
“허허허. 이제 허리를 펴라고 하는 건가 봅니다.”
“체리블라썸이 허리 업을 하라면 해야죠.”
난 허리를 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벨 소리가 저희 체리블라썸 노래군요?”
“예. 처음엔 우리 손자 녀석이 좋아해서 같이 들었는데 어느새 저도 모르게 빠져들더군요. 그래서 손자보고 벨 소리로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이제 보니 우리 체리블라썸의 팬이셨군요.”
“하하.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건가요?”
“예 원장님. 저희 체리블라썸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니저로서 깨알같이 팬 관리를 한 나는 서환희 원장과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폰 액정을 본 서환희 원장의 안색이 흐트러진다.
“제 친구 놈이군요.”
“나중에 연락한다고 하시죠.”
“알겠습니다.”
서환희 원장이 전화를 받는다.
“오늘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좀 바쁘네. 미안한데 내일 보는 건 어떤가?”
그때였다.
-무슨 소리야? 다 왔으니까 잠시만 짬을 내서 계약을 해치우자고. 어차피 사인만 하면 끝이잖아? 올라갈게!
달칵.
김창수는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서환희 원장이 당황해서 다시 전화를 걸려 한다.
그 모습을 본 난 덤덤히 말했다.
“이렇게 된 거 오라고 하시죠. 어디 그 면상이나 봐야겠군요.”
누군지는 몰라도 어떤 X소리를 하는지 봐야 할 것 같았다.
* * *
덜컥.
문이 열리고 투 버튼의 짙은 군청색 정장을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서환희 원장과도 같은 80살이지만 겉보기에는 60도 안 되어 보일 정도로 정정하다.
법무법인 성실의 대표 변호사이자 공인중개사이기도 한 김창수 대표.
그가 40대 초반의 비서와 함께 회의실에 들어섰다.
“하여튼 이 친구. 아무리 바빠도 오늘이 계약인데 미루면 쓰나?”
김창수 대표가 중절모를 벗으며 서환희 원장에게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서환희 원장은 김창수 대표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
“거 사람하고는. 오늘따라 왜 이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김창수 대표가 다시 한번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서환희 원장은 화난 목소리로 대답한다.
“있지. 일곱 살 때부터 형제처럼 지낸 친구 한 명을 오늘 잃어버렸다네.”
서환희 원장은 말 한마디로 73년의 우정을 정리해 버렸다.
하지만 김창수 대표의 능구렁이 같은 표정은 그대로다.
“응? 또 왜 그러는가? 이 땅에 대해서 누가 또 X소리를 했나 본데 듣지 말게. 쓰레기 소각장이······.”
“됐네. 길게 말 섞고 싶지 않네. 이대로 돌아 나가게.”
그제야 김창수 대표의 인상이 찌그러진다.
“자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뭔가? 병원 사정이 힘들다고 사정을 하길래 좋은 거래처를 물어다 줬더니 왜 이리 푸대접을 해?”
“자네야말로 솔직히 말하게. 이 땅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렇지?”
김창수 대표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다.
“그 그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었나?”
“맞군. 더 할 말 없으니까 어서 나가게! 다신 날 찾아오지도 말고.”
서환희 원장이 축객령을 내리자 김창수 대표가 다급히 서환희 원장의 손을 붙잡았다.
“서원장. 뭔가 오해가 생긴 거 같은데 일단 대화를 좀 해 보자고.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그게 그러니까······.”
“손 놓게. 자네와 더 말 섞고 싶은 생각 없으니 이만 나가보래도?”
서환희 원장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손을 턴다.
그러자 김창수 대표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날 향해 쏟아진다.
“설마? 저놈인가? 저놈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놈이야?”
난 그의 적의 넘치는 눈빛을 받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을 알려드렸죠. 더는 원장님이 그쪽에다가 팔 일은 없으니까 이대로 돌아가십쇼. 그리고 위약금은 가계약금의 2배로 입금하실 겁니다.”
가계약서에 문제가 있었기에 계약금의 2배가 아니라 가계약금의 2배만 내면 해지가 가능했다.
갑작스러운 계약 해지 선언에 김창수 대표의 볼이 푸르르 떨린다.
“이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디서······.”
당황과 흥분으로 가득한 그가 내게 삿대질한다.
난 그 손을 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사람 목숨 몇백 명을 살릴 수 있는 돈을 갈취하시려고 한 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겨우 참고 있는데 선을 넘는다면 전 어르신을 더는 사람으로도 안 보고 대할 겁니다.”
진심을 다해 분노를 터트리자 김창수 대표는 들었던 손을 아래로 천천히 내린다.
그리고 그건 곁에서 덤벼들려고 하던 40대의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달칵.
원장실의 문이 열리더니 최영호 은행장이 나타난다.
“어? 이거 김창수 대표님 아니십니까?”
최영호 은행장이 김창수 대표를 알고 있었다.
“최영호 행장? 자네 여긴 어쩐 일인가?”
김창수 대표가 깜짝 놀란 눈을 한다.
“아~ 지금부터 이 땅에 대출도 갈아타고 매매 계약을 도울 예정이라서요.”
한국 저축은행 1위인 대흥 저축은행의 최영호 은행장이 나타난 이상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걸 김창수 대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젠장!”
김창수 대표가 결국엔 아무것도 못 한 채 문밖으로 향한다.
최영호 은행장이 그 뒤에 대고 말한다.
“김 대표님. 최만식한테 가서 이야기하십시오. 어디 동네 양X치 새끼들도 아니고 남의 땅을 거저먹으려고 하냐고요.”
졸지에 염치없는 양아치 1이 되어 버린 김창수 대표가 몸을 파르르 떨더니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쾅.
그 뒷모습을 보며 최영호 은행장이 내게 말해준다.
“저 양반. 최만식 대표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인간일세.”
“그렇다면······ 저희가 제대로 한 방 먹였네요.”
내가 예상한 대로 최만식이 이 일에 얽혀있었다.
최영호 은행장은 웃으며 다음으로 서환희 원장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이 땅을 거래하고 새로운 병원 부지를 찾고 부동산을 관리하는 모든 일은 저희 대흥 저축은행이 맡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희망병원에 새로운 희망이 깃들기 시작한다.
* * *
압구정 소 한 마리.
사과와 보리를 번갈아 먹여 키운 최고급 한우를 맛볼 수 있는 한식 레스토랑의 VIP 2번 방.
최만식 대표와 관우 엔터의 김관우 대표와 그의 동생 김장비 이사가 마주 앉아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내일부터 곧 김관우는 굴렁쇠 엔터의 부대표로 그리고 김장비는 본부장으로 취임하는 터라 미리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잘 좀 부탁드립니다. 굴렁쇠는 다시 우리 서예종이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관우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최 대표님. 그리고 저희가 들어가면 금방 주도권을 가져올 겁니다. 주식 상장 시기에 맞춰 제가 여러모로 작전을 짜 뒀습니다.”
김장비도 간교한 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강지영 본부장이 이사로 승진한 이상. 실질적인 업무 총괄은 본부장이 될 제 몫입니다. 믿어보십시오. 밑의 애들 군기는 확실히 휘어잡겠습니다.”
코스닥 상장을 주도한 경험이 있는 김관우와 조직 장악력이 특기인 김장비가 굴렁쇠로 들어가게 된 터라 최만식도 기대를 숨기지 못했다.
“자자 일단 건배들 하시죠. 이 집 주인이 직접 담근 가양주가 아주 좋습니다.”
반투명한 호박색의 술을 따른 세 사람은 호쾌하게 잔을 비웠다.
“아참. 내부에서 백세기 실장과 주호성 팀장이 관리를 맡고 있으니 우리 동문끼리는 서로 협조들 해 주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그리고 정윤호. 그놈만큼은 확실히 견제해주십시오. 그놈만 잡으면 다 잡는 겁니다.”
김관우와 김장비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이제까지야 운이 좋아서 그런 걸 겁니다. 저희 형제가 들어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런데 그때였다.
최만식의 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상대는 비자금을 만들게 시켜놓은 김창수 대표였다.
“예. 김 대표님. 인수는 끝났습니까?”
-그 그게······ 정윤호라는 놈과 최영호 은행장이 끼어들었습니다. 앞으로는 땅은 대흥 저축은행이 맡겠다고 하는군요.
“뭐라고요?”
최만식 대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수백억의 비자금을 챙길 수 있는 거대한 계약이 물거품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김 대표님! 어제 가계약을 했다고 당신 입으로 분명히 말했잖습니까!”
김창수 대표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죄 죄송합니다. 워낙 갑작스럽게 상황이 바뀌다 보니 미처 대응을 못 했습니다.
최만식은 분통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다시 가서 위약금을 물린다고 하세요! 20억을 쌩으로 토해내고 저도 대출 상환 압박을 넣을 테니까······.”
그때였다.
-저 저기. 위약금은 20억이 아니라 2억만 내면 됩니다.
“지금 뭐랬습니까? 2억? 어제 가계약 맺을 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최만식은 머리끝까지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김창수가 중간에서 따로 돈을 빼돌리려고 계약서에 장난질을 쳤다는 걸 알아차린 까닭이다.
더군다나 대흥 저축은행이 끼었다면 모든 게 끝이었다.
그때였다.
최만식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제가 어른 대접을 해줬더니······ 아주 절 XX으로 봤군요. 김 대표님?”
-그 그게 아니라······ 정윤호라는 놈만 아니었으면······.
정윤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최만식은 다시 한번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놈은 갑자기 왜 구로에 나타나서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전생에 무슨 원한을 진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당장에 분풀이할 대상은 분명했다.
“변명은 됐습니다. 그리고 상조 회사에 연락이나 해 두십시오. 곧 갈 것 같다고.”
-대 대표님!
달칵.
전화를 끊어버린 최만식 대표의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이번에 만들 돈은 조만간 박상곤 의원에게 바칠 비자금이었기 때문이다.
화가 난 최만식 대표는 분을 참지 못하고 상을 뒤엎어버렸다.
와장창!
“으아아악~!! 정윤호!!”
최만식이 정윤호의 이름을 외치며 난리를 피우자 순식간에 방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순간 자신만만하던 김관우와 김장비도 숨을 죽였다.
동시에 두 사람의 머릿속에도 정윤호란 이름이 분명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 * *
희망병원 부지의 땅 거래를 최영호 은행장에게 맡겨 놓은 난 병실로 돌아왔다.
이사연이 잠들어 있었기에 대본을 보고 있던 박상규와 정상봉을 데리고 비품실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도플갱어>의 나태양 감독에게 보낼 영상 오디션을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환희 원장이 알려준 비품실로 들어가자 도구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비품실 한쪽에는 하얀 벽과 빈 공간이 있었다.
“상규 형님. 대본은 다 보셨습니까?”
“어. 다 봤어. 나태양 감독님 필력 좋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진짜 대단한 대본이던데?”
<도플갱어>는 한 명의 배우가 1인 2역을 연기해야 하는 작품이다.
선역 주인공 강수호는 경찰이고 악역 주인공 강철민은 사이코패스 살인마다.
두 사람 간에 이뤄지는 치열한 심리 게임이 주를 이룬 범죄 스릴러물이다 보니 대본에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회귀 전에는 배우가 각본을 따라가지 못해서 흥행하지 못한 작품이었다.
“이쪽 벽 앞에서 연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난 정상봉에게 내 폰을 맡기며 촬영을 지시했다.
그리고 난 박상규에게 태블릿을 돌려받은 뒤 대본을 체크했다.
박상규가 심호흡하며 묻는다.
“그런데 지금 내 몸이 이런데······ 괜찮을까?”
현재 박상규는 빼빼 마른 데다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강수호라면 어울리지 않는 외모지만 강철민이라면 딱 이었다.
“오히려 딱 인데요? 씬 23에는 지금 모습이 더 어울립니다.”
내가 선택한 오디션 영상은 바로 씬 23이다.
씬 23에선 사이코패스 강철민이 어릴 때 헤어진 쌍둥이 형제 강수호를 다시 만난 후 자신과는 달리 부유하게 사는 모습에 시기심과 질투심에 휩싸여 강렬한 살의(殺意)를 느끼는 장면이다.
“알았어. 그러면······ 감정 좀 잡고 시작할게.”
비품실의 흰 벽을 앞에 두고 박상규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2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연기였기에 시간이 꽤 걸린다.
잠시 후.
박상규가 입을 다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난 태블릿을 꼭 쥐고선 힘차게 외쳤다.
“레디~ 액션!”
10초 정도 적막이 흐르고 박상규가 꼭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기 시작한다.
그 순간 박상규가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