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화
55. 기자와 기레기 2
회의를 끝낸 나는 곧장 유진이의 집을 찾았다.
“삼~~촌~!”
밤 10시가 넘은 시간.
파워터프걸 잠옷을 입은 미소가 도도도 달려와 내 품에 안겨 왔다.
덥석!
“미소야. 넘어지면 어쩌려고 이렇게 뛰어?”
“나 유치원에서 달리기 1등이에요. 넘어진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미소는 내가 사준 파워터프걸 봉제 인형을 껴안은 채 자랑스럽게 콧대를 치켜세웠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코가 높은 건지.
유진이가 곤약 젤리를 우물거리며 미소에게 물었다.
“우리 미소 3살 때~ 머리 콩 해서 아야 한 거 기억 안 나?”
미소가 유진이 쪽으로 고개를 힐끗 돌린다.
“기억 안 나!”
“그래? 그럼 4살 때 손바닥 까져서 빨간 약 바른 것도 기억 안 나겠네?”
유진이가 개구진 얼굴로 다시 묻자 미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적 없어.”
“아항. 그러면 작년에 엄마한테 뛰어오다가 무릎이 까진 건?”
“······그 그건 아니야! 미끄러져서 그런 건데! 엄마 미워!”
유진이가 장난스레 과거의 상처를 말하자 미소의 볼이 복어처럼 볼록 부풀어 올랐다.
‘아니 왜 애한테 팩폭을 날려?’
다만 미소의 높은 코가 거짓말쟁이 피노키오의 코처럼 보인다.
하지만 난 언제나 미소 편이다.
미소와 시선을 맞추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미소가 달리기 1등인데 다칠 리가 없지. 엄마가 다이어트를 하느라 예민해져서 기억을 못 하는 건 가봐. 난 미소 편!”
그러자 미소의 부푼 폴이 사그라들었다.
방실방실 미소를 짓는 미소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다.
“헤헤. 나도 삼촌 편.”
미소가 내 품에 더욱 꼭 안겨 왔다.
유진이를 상대로 미소와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우와. 우리 미소. 엄마보다 삼촌 편이라니. 실망인데?”
유진이가 배신감이 느껴진단 표정이다.
하지만 미소와 난 아랑곳하지 않고 손뼉을 마주했다.
전우애가 불타올랐다.
이게 뭐라고 말이다.
장난이 끝나자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새로운 스케줄이라도 잡혔어요? 미소는 이리와.”
“응. 엄마.”
조금 전 투덜댄 기억도 없는지 미소는 해맑은 미소를 짓고 유진이의 품에 안겼다.
“그게 말인데 잠시 둘이서 이야기를 할 수 없을까?”
내 말이 조금 무거웠는지 유진이가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다.
“혹시 최종혁 선배나 주성진 선배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런 건 아냐.”
“그러면 그냥 이야기 해주세요. 제가 어떤 일을 하던 우리 미소도 같이 듣고 결정하고 싶어요.”
유진이는 미소가 소외되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두 사람. 엄마와 딸이라는 걸 이젠 슬슬 밝히자는 이야기가 나왔어.”
그 순간 유진이의 몸이 굳어버렸다.
“대 대표님께서 이제는 숨기지 않아도 된대요?”
유진이의 목소리가 잠겨 있다.
“응.”
내 대답을 듣자 유진이는 미소를 품에 껴안고 볼을 부벼대기 시작했다.
“미소야. 이제 엄마한테 엄마라고 해도 된대. 잘됐지. 그치?”
미소가 눈물을 글썽이는 유진이를 빼꼼히 쳐다본다.
“응. 잘됐어. 근데 엄마. 울지 마. 엄마가 울면 나도 슬퍼!”
미소가 잠옷 소매로 흘러내리는 유진이의 눈물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소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주강용 기자에 대한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다.
오로지 자극적인 기사로 돈을 버는 그런 놈들 때문에 상처받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두 사람은 한동안 부둥켜안고 울다가 눈물을 닦고 바로 앉았다.
난 두 사람에게 지금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주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내 계획을 들은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미소는 상황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거란 의도만큼은 잘 받아들였다.
미소가 딸이란 걸 숨기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뭐든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한 유진이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전 오빠가 시킨 그대로만 하면 되는 건가요?”
“어. 일단은.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고.”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미소도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 알았지? 나쁜 사람들이 엄마를 헐뜯으려 하고 있으니까!”
미소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응! 사람들이 거짓말해도 우리 엄만 내가 제일 잘 알아!”
미소가 두 손을 엑스 자로 크로스를 시키고선 가슴에 가져다 댔다.
애니메이션 <파워터프걸>에서 주인공이 보여주는 ‘파워터프걸과 함께라면 우리가 최강’이라는 포즈다.
“장하다 우리 미소.”
미소를 보며 나 역시 같은 포즈를 취하며 결심을 다졌다.
주강용 같은 쓰레기가 두 번 다시 이 두 모녀를 괴롭힐 수 없게 말이다.
그리고 난 내친김에 2층으로 식혜를 들고 올라온 집주인인 정인지 아줌마에게도 간단한 상황을 늘어놓았다.
사정을 들은 그녀는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더 화를 내었다.
“정 매니저. 걱정하지 마! 나 폰 잘 써. 그 못된 놈이 하는 말은 다 녹음해 둘 테니까.”
“아주머니만 믿을게요. 유진이와 미소. 잘 부탁드립니다.”
유진이와 미소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그녀의 존재가 어떤 때보다 든든했다.
그렇게 대처 방안을 이야기하고 나자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게 있었다.
엄마 곁에 딱 달라붙어 눈을 끔뻑이는 미소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미소야. 근데 삼촌 휴가가 좀 밀릴 거 같아. 이 일 끝나고 나면 눈썰매장 가자. 그래도 돼?”
미소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곤 눈을 감더니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깊은 생각에 빠져 버렸다.
“으으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떠오를 정도로 엄근진이다.
잠시 후.
“1박~~ 2일!”
미소가 활짝 웃으며 왼손에는 검지 하나 오른손에는 엄지와 검지를 펼쳤다.
“1박 2일?”
“네! 늦어지는 대신에 눈썰매장에서 하룻밤 자고 하루 더 타고 오면 안 돼요? 아 참 그리고 난 이글루에서 잘 거예요!”
‘이글루라니. 얘가 뭘 본 거야?’
도대체 어떤 눈썰매장에서 이글루에서 잔다는 광고를 한 건지 따져 보고 싶다.
하지만.
“당연하지. 이 일 끝나면 1박 2일로 놀러 가자! 이글루로!”
미소가 기대에 부푼 표정을 짓는다.
“우와! 우와! 그럼 진짜 우리 이글루에서 자요?”
“그 그래!”
난 에라 모르겠다고 하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 미소가 두 손을 치켜들고 방방 뛴다.
“신난다!”
1박 2일을 이글루에서 지낼 생각을 한 미소의 웃음소리가 방을 한가득 채웠다.
덕분에 난 잠시나마 주강용에 대한 걱정을 잊고 이글루가 있는 눈썰매장을 찾느라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 * *
SBC 교양국.
휴먼스토리의 나훈석 PD가 우리를 국장실로 안내했다.
교양국 우지한 국장에게 인사한 우리는 곧장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훈석 PD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강 대표님에게는 대략 사정은 들었습니다. 휴먼스토리는 매주 편성이니까 방영하기로 했던 스케줄만 바꾸면 됩니다.”
방영 스케줄 조정이 끝나자 강지영 본부장이 말을 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신 2부작으로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시간이 빡빡하긴 하지만 그 정도야 문제도 아닙니다. 아 그리고 이쪽이 매니저이신가요?”
“예. PD님.”
나훈석 PD가 날 가리킨 순간 벌떡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그는 6년 정도 지나면 교양국 국장이 된다.
나름 평판도 좋고 무엇보다 눈물 쪽 뽑는 연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고.
나훈석 PD가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하하. 인사성 좋으시네. 그보다 매니저님도 제법 그림이 나오는데. 혹 얼짱 매니저로 같이 영상에 나오실 생각 있습니까? 나오면 시청률에도 도움 될 거 같은데요?”
나는 나훈석 PD의 제안을 곧장 승낙했다.
“시청률이 올라간다면 어떤 식으로라든 쓰셔도 됩니다.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버거퀸 광고 때는 개인적인 일이라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 한 몸 희생하는 게 뭐라고.
나훈석 PD가 좋은 소스를 얻었다며 미소를 머금었다.
교양국에 있지만 이 사람도 역시나 시청률에 목숨을 맨 방송인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드라마국에도 말은 해 둬야 진행이 편할 거 같은데. 어느 선까지 말해도 되는 겁니까?”
“일단 정삼룡 CP님께만 이야기해 주십시오. 김솔잎 작가님은 저희가 말하겠습니다.”
“하긴 애당초 유진 씨는 김솔잎 작가님이 추천한 배우이니만큼 그게 더 좋겠네요.”
그다음부턴 어떤 식으로 휴먼스토리의 이야기를 구성할지에 대한 기획 회의가 이어졌다.
SBC 휴먼스토리의 촬영은 모레부터 시작하고 방송은 1월 말로 잡았다.
일정을 말한 나훈석 PD가 단언했다.
“유진 씨는 주강용 같은 인간말종에게 밟히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입니다. 최선을 다해 좋은 그림을 뽑아 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사 중의 신사로 알려진 나훈석 PD가 욕까지 해대며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우린 각자의 역할을 맡아 움직였다.
* * *
김솔잎 작가의 집.
대본 수정을 하던 김솔잎 작가가 날 반겼다.
하지만 유진이의 상황을 듣고 금세 고민에 빠져 버렸다.
주강용 기자가 메인 캐릭터 중 하나인 유진이를 파고든다면 <파란 하늘>의 시청률에도 영향을 줄 테니까.
“드라마가 방송되기 전까지는 확실히 정리될 겁니다. 작가님. 아니 오히려 시청률을 더 올릴 수도 있을 겁니다.”
김솔잎 작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요 조연이 찌라시에 휘말리는 데 드라마 시청률이 올라갈 거라뇨?”
“현재 이지연 작가님과의 대결 이슈가 사라진 이상 아무리 SBC에서 밀어준다고 해도 강한 푸쉬를 받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김솔잎 작가가 수긍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의 이름이······ 그 후우. 죄송합니다. 그 자식이 쓰는 찌라시 기사에 유진이의 이름이 언급되면 자연스레 파란 하늘도 동시에 언급되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니까 작가님께서 양해를 좀 해 주시면······”
순간 김솔잎 작가의 눈이 반짝였다.
“무플보다 악플이 마케팅에 좋다는 말씀이군요.”
무플보다 악플?
관심도가 있는 게 좋다 이거군.
동감이다.
노이즈 마케팅도 엄연한 마케팅이니까.
“그렇습니다. 작가님.”
김솔잎 작가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그럼 한번 해 보죠. 그런데 유진 씨는 지금 어때요? 이제부터 그런 기사들이 나온다면 앞으로 더 힘들어질 텐데······”
“이 일만 끝나면 이제 편하게 미소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살 수 있으니까요. 유진이 입장에서는 그거 하나 보고 가는 겁니다.”
“하긴 영원히 숨길 수 있는 일은 아니죠. 저도 응원한다고 전해 주세요.”
그런데 그때였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며 이지연 작가가 들어왔다.
“어? 유노~? 구 실장? 여기들 있었네?”
반가운 표정의 이지연 작가를 본 순간.
선택의 순간에 놓였다.
이 이야기.
이지연 작가에게도 말을 해야 해?
말아야 해?
그런데 신발을 벗던 이지연 작가는 대번에 이상함을 눈치챘다.
“뭐야? 딱 보니 숨기는 게 있네. 나 이지연이야. 귀신도 내 눈은 못 속이는 거 알지?”
결국엔 이지연 작가에게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솔잎 작가가 선생님은 아셔도 된다며 바람을 잡기도 했고.
더군다나 그녀는 유진이의 차기작으로 정해진 <신의 이름으로>의 작가.
혹시나 주강용 기자의 기사로 선입견이라도 생기면 곤란해질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이지연 작가는 한 가지 제안을 해 왔다.
“유노~. 휴먼스토리 다큐멘터리는 언제부터 촬영에 들어간대?”
“다음 주에 바로 촬영 시작한답니다.”
“그래? 그럼 다큐팀. 나한테도 잠깐 보내 줘.”
이지연 작가는 사진 찍히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자신의 대본 리딩 때도 메이킹 팀에게 자신을 촬영하지 못하게 철저히 단속했었고.
“작가님. 혹시 그 말씀은······?”
“몇 마디 도움 주겠다고. 왜 필요 없어? 없으면 말고.”
“아닙니다. 필요하고 말고요! 완전 필요합니다!”
고마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곁에 있던 김솔잎 작가도 다큐에 함께 출연해 좋은 이야기 한마디 정돈 거들어준다고 말했다.
늘 연기에 열심이고 작품을 대하는 태도나 상대 배우를 대하는 태도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을 거라고 해줄 거라나?
의외의 지원군을 얻은 이 날.
방송국을 맡았던 강지영 본부장에게서도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
<파란 하늘>의 총 책임자인 정삼룡 CP로부터 어떤 외압에서도 유진이의 배역을 지켜주겠단 약속을 받았다면서.
이제 남은 것은 주강용을 쳐낼 가장 중요한 핵심인물인 최소혜 기자와의 미팅이다.
콧대 높은 일간지 기자라 만나기 어려울 거로 생각했지만 최소혜 기자와의 만남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중간일보의 연예문화부 팀장 최소혜가 우리 강지영 본부장과 술친구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