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5화
535. 한소진 1
[에브리데이 V12.1]
[날짜 : 2021년 1월 2일]
-PM 10:00 [NEW. 김세리] <연예계 방방곡곡> “체리블라썸 정모 씨의 MBS 음방 폭행 사건 발생” “체리블라썸 음악방송 무대 자진 사퇴” “11주 연속 1위의 대기록 물거품”
일정에 적힌 내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가수와 매니저를 비롯해 스태프들까지 합하면 수백 명이 오가는 음방에서 내가 폭행을 저지른다고?
하지만 에브리데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대로 현장을 벗어나 버릴까? 아니야.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였으면 내가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
곰곰이 생각해봐도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체리블라썸이 음방 11주 연속 1위를 하는 오늘 같은 날 폭행 사건을 벌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 만에 하나 내가 폭행을 저지른다면 그건 체리블라썸이 큰일을 당할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일 게 분명했다.
가령 남자 아이돌이 심각하게 치근덕댄다거나 스토커가 들어와서 우리 아이들을 향해 위해를 가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결국 난 현장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대신에 주먹을 쓰는 걸 최대한 자제하고선 체리블라썸에게 일어날 일을 막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난 에브리데이가 알려주는 경고를 머릿속에 담고서 우선 도란희에게 먼저 경고했다.
“란희야. 오늘은 현장에서 신경 좀 써. 그리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싶으면 일단 현장을 피하면서 나한테 전화해. 뒷수습은 내가 다 할 테니까.”
여자 아이돌들이다 보니 내가 가지 못하는 장소들도 있다.
그런 곳에서 발생할 위험을 차단해야 한다고 말하자 도란희는 걱정하지 말라며 대답한다.
오늘은 음방 11주 연속 1위의 대 기록이 있는 날이라서 본인도 잔뜩 긴장하고 있다면서.
그때였다.
벌컥.
대기실의 문이 열리면서 <쇼! 음악센터>의 문영세 AD가 나타났다.
문영세 AD는 올해 30살의 나이로 차후 음악방송의 PD가 되는 꽤 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 정 실장님. 여기 계셨군요.”
“아. 예. AD님.”
문영세 AD가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저기 실은······ 오늘 음방 무대 순서를 좀 양보 해주실 수는 없으시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실은 한소진 가수님이 맨 끝 순서로 좀 옮겨달라고 부탁을 하셔서요.”
보통은 음악방송 1위 후보가 그날 녹화의 맨 마지막 순서에서 노래한다.
음방은 방송 후반부로 갈수록 시청률과 관심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내어 달란다.
하지만 오늘은 체리블라썸에게는 음방 11주 연속 1위를 도전하는 날이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디바 한소진의 부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우리 애들이 음방 11주 연속 1위에 도전하는 날이라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런 날에 무대를 비켜주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문영세 AD가 한숨을 내쉰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인 탓에 그도 마지못해 말한 티가 난다.
“저기 AD님. 그러지 말고 차라리 첫 무대로 배정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안 그래도 그렇게 말씀드려봤죠. 그런데 이제껏 한소진 가수님이 컴백 무대는 늘 끝 무대를 하셨다네요. 징크스 때문이라면서 꼭 끝 무대를 고집하십니다.”
스포츠 선수들이 징크스가 있는 것처럼 가수나 배우들도 징크스가 있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내가 알기로 그녀의 징크스는 딱 하나뿐이다.
무대에 설 때 붉은 구두를 신는 게 바로 그것이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땐 붉은 슬리퍼라도 신고 올라가곤 했다.
만약 체리블라썸이 기록을 도전하는 날이 아니라면 양보를 했을 수도 있었다.
괜히 트러블을 일으키면 한소진이 체리블라썸을 만날 때마다 괴롭힐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한국 기록을 경신하는 영광스러운 무대를 앞에 두고 있었기에 절대로 양보할 수가 없었다.
난 체리블라썸에게 그 영광을 안겨줄 의무가 있는 매니저이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PD님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이건 저나 PD님 뜻이 아니란 것만 알아주십시오.”
문영세 AD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곤란한 표정으로 대기실 문을 닫았다.
탕.
문이 닫히자 참고 있던 도란희가 씩씩거리며 분통을 터트렸다 “한소진 선생님.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기록 경신하는 걸 뻔히 아시면서 어떻게 무대를 달라고 해요?”
“대접받던 버릇이 있어서 그렇지 뭐. 어쩌겠어.”
한때는 최고의 인기를 갖고 있다 보니 한소진이 나올 때면 방송국에서는 특급 대우를 해주곤 했었다.
그러나 인기가 잠잠해진 지금에도 그때의 특급 대우를 잊지 못하고선 가끔 이렇게 현장에서 멋대로 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부분은 귀찮아서 그냥 받아줬겠지만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일이다.
“근데 혹시 오세찬 CP님이 멋대로 출연 순서 바꾸는 거 아니겠죠?”
“아냐. 그럴 거면 이렇게 찾아와 협의도 안 했을걸? 그리고 만약 윗선의 압력이 있다면 내가 대표님을 찾아뵙는 한이 있더라도 뒤집어엎을게.”
오늘은 <화란전>의 제작발표회가 망가질 뻔한 걸 막은 데다 HK 그룹이 뺀 광고 자리에 칠성전자 모바일 사업부의 광고까지 주선해 줬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MBS에서 내 말빨이 설 게 틀림없다.
그런데 대기실 인사를 나간 체리블라썸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애들이 왜 이렇게 안 오지?”
“올 때가 되었는데······”
아무래도 내 다이어리에 쓰인 일정 때문에 신경이 쓰여 안 되겠다.
더군다나 조금 전 한소진이 무대를 바꿔 달라고 한 것도 심상치가 않았고.
의심이 생긴 즉시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희야. 애들 찾아올게.”
“예? 어디서요?”
“이렇게 안 오면 어딘가 선배한테 잡혀 있다는 소리인데······ 이말순 선생님은 아닐 거고 아무래도 한소진 가수 대기실로 가 봐야겠다.”
“저도 같이 갈까요?”
“아니 넌 여기서 기다리다가 애들이 대기실에 돌아오면 바로 전화 줘. 엇갈릴 수 있으니까.”
“예. 아 알았어요.”
길이 엇갈릴 일을 대비해 도란희를 대기실에 두고선 곧장 한소진 가수의 대기실로 향했다.
* * *
한소진 가수의 대기실은 체리블라썸의 대기실과는 가장 먼 곳에 있는 임시 대기실에 있었다.
현장에서 갑자기 출연 순서를 잡다 보니 대기실은 제일 작고 초라한 곳이었다.
이래서 급이 있는 가수들은 절대로 당일에는 스케줄을 잡지 않는다.
대기실이 초라하면 가수들의 기분과 컨디션도 멋대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실 앞에 도착한 난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문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 나온다.
-야! 매니저들은 빠져 있어!
한소진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대기실을 뚫고 나온다.
-선생님. 저희 애들이 알고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이어서 체리블라썸을 인도하고 나간 은지유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한소진은 더욱 언성을 높이며 은지유 팀장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이것들이 오랜만에 왔더니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알고. 나 때는 선배 얼굴도 못 쳐다봤어! 그런데 뭐? 급하니까 빨리 가봐야 한다고? 니들이 그렇게 잘났어?
-그런 뜻이 아니라······
-시끄럿! 야 그리고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아니깐 징크스라는 걸 알고서도 그 지X한 거 아냐!
아마도 내가 무대 순서 변경이 안 된다고 하자 애꿎은 체리블라썸을 쥐잡듯이 잡는 듯했다.
아무리 한소진 가수가 20년의 경력을 가졌다고 하지만 이런 대우를 참을 수는 없었다.
난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간 순간.
눈이 뒤집히는 꼴을 목격해버렸다.
‘뭐지······ 이건?’
믿을 수 없게도 체리블라썸과 내 매니저들이 차가운 대기실 바닥에 일제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대기실 의자에 앉은 한소진은 다리를 꼰 채 우리 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리고 한소진의 곁에는 에이스 엔터의 매니저 오인정 실장과 스타일리스트 박예영이 폰을 쥔 채 체리블라썸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목격한 탓에 심장이 미친 듯 뛰고 혈압이 오르기 시작한다.
쿵쿵쿵.
너무도 흥분했는지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당장이라도 분노를 폭발시키려던 순간 에브리데이가 알려줬던 일정이 내 머리를 스친다.
‘설마. 내가 폭행을 일으킨다는 게 이것 때문이었나?’
그 순간 난 죽을힘을 다해 들끓던 분노를 가라앉혔다.
이대로 내가 흥분해서 주먹질이라도 하면 아무리 전후 사정이 있다고 해도 내 잘못이 될 게 분명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 피해는 체리블라썸이 고스란히 입게 되고.
‘침착하자. 침착해. 윤호야.’
에브리데이의 경고대로 폭력으로 상황을 해결해서는 안 된다.
다만 눈뜨고 이 상황을 그대로 지켜볼 수는 없었다.
난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진정시키며 외쳤다.
“얘들아 일어나! 은 팀장님도. 이 대리도 다 일어나세요!”
순간 무릎을 꿇고 있던 여섯 명이 일제히 고개를 홱 하고 뒤로 돌린다.
눈물을 글썽글썽하는 체리블라썸이 이젠 살았다는 듯 얼굴이 활짝 펴진다.
“윤호 오빠!”
“유노 오빠~”
체리블라썸이 날 보며 이름을 부른다.
“일어나. 뭐하고 있어? 빨리 가서 무대 준비해야지.”
난 웃음을 내보이며 체리블라썸을 안심시켰다.
눈치를 보던 우연희와 은지유 팀장이 저린 무릎을 펴며 일어난다.
이어서 일어난 이주영 대리까지 아이들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순간 한소진이 빽 하고 외친다.
“아주 지X들을 하네. 야! 누가 일어나랬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대기실에 울린다.
그러나 난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서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때 세리가 내 손을 잡고 울먹이며 사정을 말하려고 한다.
난 괜찮다며 세리를 달랬다.
“괜찮으니까 나중에 하자. 그니까 빨리 좀 나가 있어.”
“아 알았어요. 유노 오빠.”
세리가 눈물을 훔치고 이주영 대리와 다른 멤버들의 부축을 받고 나선다.
체리블라썸이 나가자 은지유 팀장은 내 곁에 남아서 사정을 설명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괜찮으니까 이말순 선생님 좀 불러와 주세요. 빨리요.”
“알겠어요. 빨리 모셔 올게요.”
은지유 팀장까지 나갔다.
이제 대기실에는 한소진 가수와 그녀의 매니저 오인정 그리고 스타일리스트 한 명만이 남게 되었다.
순간 한소진이 날 향해 고함을 지른다.
“어디서 후배들 기강을 잡는 데 와서 이래라 저래라야!”
“기강을 잡는 것도 정도껏 하셔야죠!”
“뭐? 야! 너 지금 뭐랬어? 어?”
한소진이 빽 하고 소리를 내지르자 곁에 있던 오인정 매니저가 앞으로 나선다.
“이봐요 굴렁쇠는 대체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무대 좀 양보해달라고 했는데 끝까지 고집을 피워요? 선생님이 징크스라고 부탁했으면 알아서 재깍재깍 비켜줘야죠.”
난 오인정 실장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컴백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건 알겠는데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그리고 징크스요? 어이가 없네. 한소진 씨 징크스는 무대에 오를 때 붉은색 신발을 신는 거 말고는 없잖습니까? 어디서 거짓말로 우리 애들 무대를 뺏으려고 하십니까?”
오인정 실장이 당황한 나머지 오히려 화를 버럭 내버린다.
“뭐 뭐라고요? 거짓말이요? 당신 지금 말이면 다 인 줄 알아? 엉?”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한바탕 더 쏘아주려는 순간 이번엔 한소진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른다.
“매니저가 이따위로 싸가지 없으니까 가수들이 그 모양이지. 야! 체리블라썸이 요즘 잘나간다고 이젠 매니저까지 눈에 뵈는 게 없어?”
“한소진 가수께서 선을 넘으신 것 같지는 않으시고요?”
최대한 정제해서 말을 하고 있지만 분노가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런데 내 말에 기분이 나빴는지 한소진이 씩씩거리며 다가온다.
코앞에서 고성이라도 내지르나 싶었는데 그녀는 갑자기 대뜸 손을 들어 올려 버렸다.
휘익!
가느다란 한소진의 팔이 채찍처럼 휘어서 내 뺨으로 향한다.
그녀의 손버릇이 나쁜 걸 알고 있었기에 슬쩍 뒤로 물러나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한소진은 비명을 지른다.
“아아악!”
그러자 매니저 오인정이 내게 덤벼들었다.
“야! 당장 그 손 놔! 어디서 감히 선생님의 손을 잡아!”
오인정은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려는 듯 두 팔을 뻗었다.
이어서 난 다른 한 손으로 오인정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제대로 반항하지 못하게 팔을 머리 위로 쭉 하고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은 팔이 달랑 들리자 발을 까치발처럼 들고 서서는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놔! 이거 놔! 이거 안 놔?”
“꺄아아악! 놔! 놔!”
이제 두 사람을 빼고 남은 건 단 한 명 스타일리스트 박예영이다.
그런데 그때 박예영의 손에 든 폰이 내 쪽을 향하고 있는 게 보였다.
단순히 폰을 쥐고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내가 들어올 때부터 ‘촬영’을 하고 있었나 보다.
‘설마 체리블라썸을 이렇게 해놓고 날 불러서 내가 열받아서 사고를 치게 셋업을 한 건가?’
에브리데이가 알려준 것이 바로 이 일을 녹화한 영상이 새 나가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이대로 달려가 당장이라도 폰을 부숴버릴까 하던 순간.
한소진과 매니저들을 엿 먹일 기막힌 수가 떠올랐다.
‘당신들은 이제 끝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