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8화
528. 지각 변동 3
안석춘 대표가 테이블 위에 놓인 화투패를 잡으며 심리전을 걸기 시작한다.
“에이스 엔터 지분의 오늘 가치가 300억 정도야. 그런데 넌 그 앞에 놓인 50억이랑 오늘 갖고 왔다는 30억이 전부인데 부족한 건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좀 빌려줄까? 이자는 싸게 해줄게.”
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승부를 받아들이니까 잠깐 착각하셨나 보네요. 그냥 여기서 판 접을까요?”
실제로 도박이나 게임판에서는 모든 이의 판돈이 동등하지 않다.
상대가 받아만 주면 그뿐이다.
난 덧없는 심리전을 거는 안석춘 대표에게 이런 식이면 지분이고 뭐고 판을 엎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내가 지분을 갖고 싶은 이상으로 날 짓밟고 싶은 안석춘 대표가 슬쩍 한발 물러난다.
“새X. 말하는 본새하고는. 게임을 입으로 배웠나. 알았어 인마. 그리고 패는 한 번씩 돌리는 걸로 하고.”
“그러시죠.”
안석춘 대표가 넌 이제 다 끝났다는 표정으로 와이셔츠를 팔꿈치까지 접는다.
소매에 패를 숨기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밑장 빼기나 패 바꾸기 같은 기술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패 돌릴 테니까 너도 와이셔츠 접어.”
“알겠습니다.”
난 그와 똑같이 와이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었다.
착착착.
안석춘 대표의 손에서 빠르게 화투패가 섞였다.
화투패가 스치며 내는 마찰음이 경쾌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회귀 전 같이 게임을 했을 때의 완숙한 기술에 비하면 아직은 미흡한 부분이 보인다.
“그럼 어디. 시작해볼까?”
안석춘 대표는 자신이 이 판의 ‘호구’인 줄도 모른 채 자신만만한 기색이다.
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그가 내미는 패를 받아들였다.
“패 돌리시죠.”
그렇게 호구와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 * *
안석춘 대표가 패를 까며 힘차게 외친다.
“팔땡!”
난 아쉬운 표정으로 패를 내려놓았다.
“구땡입니다.”
“XX!!”
안석춘 대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간다.
벌써 50판째.
난 질 때는 작게 지고 이길 때는 크게 이기면서 그의 돈 150억 가량을 딴 상황이다.
배팅에 제한이 없다 보니 한 판 한 판에 상당한 액수가 오가고 있다.
“이번엔 제 차례입니다.”
“어서 패나 돌려!”
내 차례가 되어서 패를 섞기 시작했다.
착착착.
그때였다.
덥석.
안석춘 대표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너 기술 썼지?”
“증거 있습니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이번에는 기술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안석춘 대표는 돈을 잃기 시작하면서부터 의심이 가득해진 터라 몇 번이나 이렇게 섞는 것을 멈춰대고 있다.
‘흔들리는군.’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한 그는 이제 먹잇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난 어쩔 수 없다는 듯 패를 까뒤집었다.
기술을 쓸 때 나타나는 패들이 보이지 않자 안석춘 대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이럴······ 리가 없는데?”
“계속 섞어도 되겠습니까?”
“XX. 그래!”
난 손을 뒤집고 다시금 패를 섞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태연하게 기술을 써서 내가 원하는 패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안석춘 대표의 앞에 2장 내 앞에 2장을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2장의 패를 확인한 안석춘 대표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힘차게 외친다.
“10억! 쫄리면 뒈지시던지?”
안석춘 대표의 높은 배팅에도 난 태연하게 응대했다.
“10억 받고 10억 더.”
“콜!”
“패 먼저 까시죠?”
안석춘 대표가 웃으며 패를 까보인다.
“18광땡! 내가 이겼어 인마!”
18광땡이라는 건 38광땡의 바로 아래 단계의 패지만 사실상 최고의 패로 불린다.
1과 3 그리고 8은 광이 한 장씩밖에 없기에 이 패가 나오는 순간 38광땡은 못 나오기 때문이다.
흥분한 안석춘 대표가 두 팔을 뻗어 테이블에 깔린 칩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때였다.
난 안석춘 대표의 손 위에 내 손을 살포시 얹었다.
“대표님. 제 패는 보고 가셔야죠.”
안석춘 대표의 눈이 흔들린다.
“설마······ 아 아니지?”
난 무심한 표정으로 ‘암행어사’를 내밀었다.
‘암행어사’란 4월 열끗과 7월 열끗 패의 조합으로 13광땡과 18광땡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패였다.
안석춘 대표는 내 패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한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 않게 그의 손을 들어 올린 뒤 테이블에 깔린 모든 칩을 내 앞으로 가져왔다.
촤라락.
그때였다.
“너 이 새X! 지금 손장난 친 거지? 맞지?”
예상대로 안석춘 대표가 분노를 터트린다.
“증거 있습니까?”
“증거? XX. 이렇게 일방적인 게 증거지!”
자신이 패를 돌릴 때는 손기술을 써놓고선 자신이 당하니 적반하장이다.
순간 곁에서 관전하던 진아람 이사가 내 곁에서 대신 화를 내기 시작한다.
“안 대표님. 너무 어거지를 쓰시는 거 아니세요?”
“아니! 진 이사도 보면 알잖아! 이거 완전히 사기란 거!”
“글쎄요. 전 모르겠는데요? 정 팀장님이 패를 섞었을 때도 무조건 본인이 다 이긴 것도 아니잖아요.”
난 흥분한 진아람 이사를 달랬다.
현재 안석춘 대표에게 광땡을 주고 지게 만든 건 상대의 심리를 흔든 다음 마지막 한 수에서 이기려는 설계였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진 이사님.”
내 표정을 본 순간 진아람 이사가 빠르게 물러난다.
머리가 좋은 그녀는 대번에 내가 의도하는 바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 죄송해요 팀장님.”
난 씨익 한번 웃어준 다음 안석춘 대표를 쳐다봤다.
안석춘 대표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다.
난 그를 잠시 쳐다보다 내가 딴 칩을 모두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버렸다.
촤라라락.
내가 딴 칩 모두를 배팅하자 안석춘 대표가 미간을 찌푸린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엉?”
“도저히 납득 안 가시는 모양인데 이 한 판으로 결판을 짓죠. 올인하겠습니다.”
지금 가진 칩은 내가 안석춘 대표보다 더 많다.
하지만 난 아낌없이 모든 칩을 다 걸어버렸다.
마지막 승부를 위한 노림수였지만 안석춘 대표는 이미 흥분에 싸여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단 한 판만 이기면 자기가 잃은 칩을 모두 찾고 80억을 딸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발역전의 기회.
그 달콤한 미끼 앞에서 누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난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워낙에 의심이 많으시니······ 이참에 화투패도 바꾸죠. 아 하나 더. 마지막 판은 안 대표님이 패를 섞으셔도 됩니다.”
타짜에게 패를 섞으라는 건 그 판을 먹으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안석춘 대표의 눈이 둥그레진다.
“진짜야? 내가 패를 잡아도 된다고?”
“예. 뭘 해도 제가 기술을 썼다고 의심하시니까 안 되겠네요. 그냥 깔끔하게 한 판으로 승부를 보죠. 패도 안 대표님이 섞으시죠.”
이길 가능성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안석춘 대표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새X. 제법인데? 오케이. 여기서 쫄면 내가 남자가 아니지! 나도 올인!”
안석춘 대표 역시 자신의 앞에 쌓인 칩을 앞으로 밀어 버린다.
촤라락.
난 테이블에 깔린 화투패를 모아 딜러에게 건넸다.
“새 화투패 꺼내 주세요.”
수백억이 깔린 판이 펼쳐지다 보니 보고만 있던 딜러가 손을 덜덜 떨기 시작한다.
“아 예.”
딜러는 떨리는 손을 주무르며 테이블 아래에서 화투패를 꺼냈다.
딜러는 화투패에서 20장을 골라 섰다 패로 만든 뒤 우리 앞에 패를 내려놓았다.
총 380억이 걸린 한 판.
안석춘 대표가 웃으며 패를 섞기 시작한다.
착착착.
난 그 타이밍에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설마 이런 판에서 38광땡이 나오거나 하진 않겠죠?”
안석춘 대표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내가 이렇게까지 양보했는데 지금 38광땡을 뽑는다면 대놓고 손기술을 썼다는 걸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순간 안석춘 대표의 손 움직임이 변하더니 말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그 그거야 쪼아보면 알겠지! 운이 좋으면 나올 수도 있는 거고! 안 그래?”
확실히 이기고 싶어서 38광땡을 뽑으려고 했나 본데 내 말에 작전을 바꾼 게 틀림없다.
그제야 난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하긴. 게임이라는 게 쪼는 맛이 있어야죠.”
“그래. 그렇지.”
그러는 사이 안석춘 대표가 패를 섞는 게 끝이 났다.
탁탁.
안석춘 대표가 섞은 패를 한 장씩 내려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려놓은 패 옆으로는 탑처럼 수북이 쌓인 칩들이 있다.
380억.
일반인은 평생 구경도 못 할 돈이 이 한판에 걸려있었다.
수천억의 거부인 안석춘 대표도 처음 겪는 승부다 보니 잔뜩 흥분해 있다.
안석춘 대표는 패를 겹쳐 천천히 확인하고 천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술을 써서 의도한 패가 나왔다는 증거다.
“나부터 패 깔까?”
“예.”
“크하하. 장땡이야!”
장땡.
10월 패 2장을 의미하는 꽤 높은 패였다.
그 위로는 광땡들이 있지만 안석춘 대표는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눈빛이다.
자신이 직접 패를 섞었기 때문이다.
난 패를 덮은 채로 안석춘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님.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군말하기 없습니다? 패도 안 대표님이 섞으셨고 화투패도 바꿨잖습니까?”
“XX. 말이 왜 그렇게 길어? 빨리 패나 까! 빨리!”
안석춘 대표뿐 아니라 VVIP룸 에 모인 이들도 역시 내 패가 어떤 건지 궁금해한다.
“알겠습니다.”
난 어깨를 으쓱이며 패를 하나씩 까서 내려놓기 시작했다.
툭.
하나는 3 광이다.
툭.
그리고 또 하나는 8 광.
합쳐서 38광땡이다.
‘섰다’의 최고 패.
모든 것을 이기는 패가 나와 버렸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번에도 제가 이겼네요.”
순간 VVIP룸에 있던 관객들이 다 같이 감탄사를 터트린다.
“어 어떻게 38광땡이 나와?”
“미친 거 아냐? 어 어떻게 이 상황에서······”
“저게 가능해?”
“도박신이 붙었나······”
내 뒤에 있던 진아람 이사와 이수찬 역시 주먹을 불끈 쥐고 작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환호가 이어질수록 안석춘 대표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다.
“너 이 새X.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하다뇨? 대표님이 패 섞고 패 나눠주셨잖습니까?”
“그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내가 너한테 준 건······”
“설마 손기술을 쓰신 겁니까?”
멈칫.
안석춘 대표가 그대로 입을 다문다.
스스로가 손기술을 썼다고 고백하면 그 또한 패배로 간주 될 뿐 아니라 카지노 출입을 금지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이이······”
안석춘 대표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가 설계한 판이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진짜 마지막 한 수를 둘 차례였다.
“안 대표님. 저와 독대를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XX. 무슨 수작이야?”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면 절대 손해되진 않을 겁니다.”
그러자 진아람 이사가 날 말린다.
“정 팀장님. 그러시지 마시고 저랑 같이 이야기할 수 있게······”
도박에서 돈을 잃은 사람과 단둘이 남게 되면 거의 100% 싸움이 일어난다.
하지만 난 괜찮다며 모두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했다.
눈치를 보던 이수찬과 이호재가 먼저 밖으로 나가자 이어서 안석춘 대표의 일행들 역시 밖으로 나선다.
마지막으로는 진아람 이사가 불안한 표정을 하고 나간다.
덜컹.
VVIP룸의 문이 닫힌다.
난 그 즉시 본론을 꺼냈다.
“안 대표님. 제가 딴 돈. 모조리 돌려드리겠습니다. 대신 에이스 엔터의 지분을 오늘 시가로 매입할 수만 있게 해주십시오.”
안석춘 대표가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날 위아래로 쳐다본다.
“너 인마.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속셈 같은 거 없습니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돈을 다 내놓을 이유가 없잖아!”
“어차피 전 제값 치르고 지분을 사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대표님께서 제 이야기를 안 들어주셔서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실은 내가 오늘 딴 돈을 모조리 내놓는 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이 칩을 현금으로 환전하는 순간 난 불법을 저지르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 VIP 카지노를 관리하는 진성 그룹에 약점을 잡히는 꼴이다.
도박은 엄연히 불법이니까.
그러나 난 아직 현금을 교환하지 않았기에 돈이 아니라 그저 칩이라고 불리는 플라스틱 조각을 배팅하며 게임 했을 뿐이었다.
두 번째로는 이번 기회에 수천억을 가진 안석춘 대표와의 관계 때문이다.
도박을 좋아하는 안석춘 대표였지만 그는 앞으로 콘텐츠 비즈니스의 투자자로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다.
그런 그와 척을 세워봤자 좋을 게 없었다.
더군다나 앞으로 안석춘 대표는 포커를 잘 치는 김동수와도 꽤 친한 관계가 된다.
그러니 아직 두 사람이 제대로 된 관계를 맺기 전에 난 김동수보다 더 돈독한 관계를 쌓고 싶었다.
안석춘 대표가 잠시 고민에 휩싸인다.
내게 무슨 의도가 있는지 알아보려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멈추고 굳은 표정을 풀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수를 뒀든 수천억의 거부인 그에게도 300억이 넘는 돈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근데 지분을 살 돈은 있어?”
“예. 저와 동행했던 리버스 엔터의 부대표가 매입할 겁니다.”
“크흠. 그러면 그에게 지분을 팔면 되나?”
“예. 그리고 에이스 엔터의 분할도 좀 도와주십시오.”
안석춘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 알았어. 그렇게 하지.”
“그러면 매매 계약서를 쓰는 대로 칩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래.”
‘됐다.’
어마어마한 한 판 승부에서 이긴 덕에 안석춘 대표의 지분 30%를 살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김동수가 에이스 엔터를 통째로 인수할 수 없게 되었다.
안석춘 대표는 30%의 지분을 가진 최대 주주인데다 여전히 에이스 엔터의 주주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휴우~”
나도 긴장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안석춘 대표의 눈에서도 적개심이 조금 옅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 나이답지 않게 배포가 상당하군?”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은 무슨. 수백억을 보고도 자네처럼 돌보듯 하는 사람은 난생처음 봤어.”
“뭐 바라는 게 달랐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돈을 돌려받은 덕분인지 안석춘 대표가 한결 정겨운 표정으로 승리의 비결을 물어왔다.
“그런데 말이야. 아깐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내가 장땡을 먹고 자네한테는 3땡을 줬거든? 패도 내가 돌렸는데 어떻게 거기서 38광땡이 나왔지?”
“궁금하십니까?”
“당연하지.”
난 씨익 웃으며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