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7화
527. 지각 변동 2
-오늘 오후에 아빠가 HK 그룹 쪽 식구들과 식사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홍석준 HK 전자 대표가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HK 전자 홍석준 대표는 HK 그룹의 3남으로 올해 34살의 미혼남이다.
보통 재계의 인물들끼리 하는 식사 자리에 자녀들을 동반시킨다면 그건 십중팔구 선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그 자리를 피하려고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절 총알받이로 쓰겠다는 겁니까?”
진아람 이사가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말한다.
-아 아니에요! 절대 그런 건 아니고요.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려고 스케줄을 다 빼놨더니 핑곗거리가 좀 필요해요. 가서 비즈니스 이야기나 좀 해주시면 돼요.
진아람 이사의 뜻과는 달리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거절할 수는 없다.
어차피 JS 클럽 카드를 받은 순간 그녀와 함께 후계 전쟁에 뛰어든 동지가 된 셈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만약 지금 이 시기에 그녀가 홍석준 대표와 어울리게 되면 나로서도 진성그룹의 후계 전쟁을 치르기 힘들어진다.
함께 싸워야 하는 파트너가 홍석준 대표와의 만남에 불려가는 일이 잦아질 테니까.
즉 지금으로서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아싸! 그러면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그녀는 진성그룹의 얼음공주답지 않게 내 앞에서는 평범한 20대처럼 굴고 있다.
“그러면 리버스 엔터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바로 출발할게요.
전화를 끊고 10분 뒤.
진아람 이사가 도착했다.
난 그녀의 벤X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경기도 광주의 진성 리조트로 향했다.
그리고 이수찬은 이호재와 임형주 법무 이사와 함께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 * *
진아람 이사의 차를 타고 광주로 내려가는 동안 들은 정보에 의하면 안석춘 대표는 현재 에이스 엔터의 지분을 한시라도 빨리 팔려고 하고 있었다.
지분의 값이 더 내려갈 수 있다는 위기감과 동시에 검찰과 국세청의 조사가 자신에게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 인해 에이스 엔터의 주가가 곤두박질쳤다고 생각하다 보니 내가 하는 연락은 아예 받질 않고 있었다.
옆 좌석에 앉은 진아람 이사가 묻는다.
“그런데 어떻게 에이스 엔터의 지분을 팔라고 할 건데요?”
“게임으로요.”
진아람 이사가 놀란 눈을 하고 말한다.
“안 대표랑 게임을 할 거라고요?”
“예.”
“안 대표가 타짜인 거 아세요?”
“압니다.”
“그런데도 붙어서 이길 자신이 있다는 건······ 설마 정 팀장님도 타짜예요?”
회귀 전 김동수와 함께 다니다 보니 필연적으로 접대를 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난 타짜 출신의 매니저를 데리고 다녔다.
그러다 자연스레 난 그에게 기술(?)을 전수받았다.
난 권투선수 출신으로 눈과 손은 누구보다 빠른 편이었기에 몇 개월이 지나기 전에 청출어람을 해버렸고.
그 이후로 난 김동수와 단둘이서 다니며 일부러 잃어주고 따는 접대 게임을 하기도 했다.
“타짜까지는 아니고. 그냥 뭐~ 따고 싶으면 따고 잃어주고 싶으면 잃어줄 실력은 됩니다.”
“응? 그게 타짜 아니에요?”
“그런가요?”
태연히 웃으며 대답한 순간 앞 좌석에 있는 비서 최희선이 말한다.
“도착했습니다.”
눈앞에 거대한 진성 광주 리조트가 나타났다.
“옛날 실력이 돌아올지 저도 좀 걱정이 되는데요?”
난 목을 까닥이며 안석춘 대표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 * *
리조트의 VIP 전용 출입구에서 내린 다음 진아람 이사 쪽의 문을 열었다.
덜컥.
옅은 보라색의 투피스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차에서 내리더니 갑자기 내게 팔짱을 낀다.
“뭐 하시는 겁니까?”
“이래야 절차가 더 간단해져요. 복잡한 걸 좋아하시면 팔 빼셔도 돼요.”
진아람 이사는 자기 사람이라는 걸 보여야지 군말이 없을 거라며 내 팔짱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도움을 받아야겠다 싶었다.
“그러면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알았어요 윤호 오빠.”
장난스레 웃는 그녀를 보며 슬쩍 팔을 빼는 척했다.
“생각해보니 복잡한 게 더 좋은 거 같습니다.”
진아람 이사가 입술을 삐죽거린다.
“하여튼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다니까. 알았어요. 정.팀.장.님. 됐죠?”
“예.”
그때 우리 뒤로 최희선 비서와 이수찬과 이호재가 달라붙었다.
그런데 이수찬과 이호재는 내가 진아람 이사와 팔짱을 낀 걸 보고 씨익 웃는다.
‘그런 거 아냐!’
입을 벙긋거렸지만 두 녀석은 뭐가 좋은지 서로 키득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러다가 최희선 비서에게 뜨거운 눈총을 받았지만 말이다.
이후 우린 아치형 VIP 전용 통로로 들어갔다.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대기해 있던 직원들이 고개를 숙인다.
“몇 층으로 모실까요?”
“12층. VIP 카지노 갈 거예요.”
“알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문이 열린다.
순간 진아람 이사가 함께 타려던 직원을 향해 지시한다.
“우리끼리만 올라갈 거니까 같이 안 올라가도 돼요.”
직원이 눈치를 채고 발걸음을 멈춘다.
“예. 이사님.”
일행과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자 진아람 이사가 12층의 버튼을 누른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진아람 이사가 말한다.
“정 팀장님. 저도 게임을 좀 하는데 같이 판에 껴 드릴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제가 혼자서 이기지 못하면 어차피 지분을 살 수도 없을 겁니다.”
내 계획대로라면 승부의 끝에는 안석춘 대표와 나 단둘이 게임을 하게 될 거다.
난 그때 에이스 엔터의 지분을 판돈으로 걸게 만들 생각이었다.
진아람 이사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알았어요. 대신 같은 방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막지 마세요. 만약의 경우도 대비해야 하니까.”
“그건 오히려 부탁드릴 생각이었는데요?”
“그건 다행이네요.”
띠잉.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12층의 문이 열리자 VIP 전용 카지노가 나타난다.
내국인 카지노는 불법이지만 VIP들은 법을 무시하고 이렇게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홀에는 연예인들도 몇몇 보였고 TV에서 보던 사회적 명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딜러 복장을 한 사람들과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가자 홀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진성그룹의 얼음공주가 내 팔짱을 끼고 있는 장면이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아람 이사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담당 지배인을 불렀다.
정장을 입은 담당 지배인이 찾아와 넙죽 고개를 숙인다.
“안 대표님은 몇 번 방에 계세요?”
“11번 방에 계십니다.”
“누구랑 쳐요?”
“박 대표님이랑 최 회장님 지인분들과 함께 총 일곱 분이 치고 계십니다.”
“알았어요.”
진아람 이사가 날 이끌고 왼쪽 코너를 돌아 VVIP 구역으로 향했다.
원래 이 구역은 VIP 중에서 VIP만 올 수 있는 곳이라 신분 증명과 잔고 증명을 하고 입장해야 했다.
하지만 진아람 이사와 함께 온 덕에 단번에 그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다.
11번 방에 도착하자 앞에 서 있던 경호원이 옆으로 비켜난다.
똑똑.
진아람 이사가 방문에 노크하자 안석춘 대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저예요. 진아람 이사. 안 대표님이랑 같이 치고 싶은 손님이 있어서 그런데 들어가도 될까요?”
-진 이사 손님이라면 내 손님이나 마찬가지지. 들어와!
“예.”
진아람 이사가 앞서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우린 그 뒤를 따라 안으로 향했다.
수많은 칩들이 올려져 있는 테이블 위에선 텍사스 홀덤이라는 포커 게임이 치러지고 있었다.
텍사스 홀덤은 플레이들이 각각 2장의 카드를 들고 바닥에 깔리는 5장의 공통카드와 조합해 더 높은 카드 조합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현재 테이블에는 [♣A ♠Q ♥J ◆A] 카드 네 장이 깔려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카드가 바닥에 깔리려던 찰나다 보니 안석춘 대표는 우리가 들어오는 것도 보지 않고 외친다.
“올인!”
그 순간 함께 놀던 동료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패를 버렸다.
“다이!”
“죽어.”
안석춘 대표가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하! 오늘 왜 다들 이렇게 비리비리해? 이거 여엉~ 재미가 없는데?”
그의 패는 에이스 풀 하우스.
에이스 카드 3장과 Q 원페어로 상당히 높은 카드 조합이었다.
안석춘 대표가 두 팔을 벌려 테이블에 널린 칩을 껴안는다.
촤라락!
진아람 이사가 손뼉을 치며 축하를 보낸다.
“축하드려요 안 대표님.”
안석춘 대표가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어 진 이사. 고마워. 그런데 함께 온 사람들은······”
그때 안석춘 대표와 내 눈이 마주쳤다.
“정윤호······ 너 이 새X······”
나로 인해 큰 손실을 입은 터라 그는 날 보자 으르렁대기 시작한다.
“안녕하십니까 안 대표님.”
“안녕? 너 같으면 안녕하겠냐?”
나로 인해 에이스 엔터 주식 수백억이 날아간 터라 그의 말에는 날이 가득 서 있다.
“직접 뵙고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 왔습니다.”
“이야기? 난 너랑 할 이야기 같은 거 없는데? 주먹 안 날리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해 인마.”
지분 이야기는커녕 말도 하기 싫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단 포커를 치며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포커나 치고 가죠. 설마 포커판에도 안 끼워주시는 건 아니죠?”
안석춘 대표가 날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
안 그래도 날 짓밟아주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는 표정이다.
“VVIP룸 안에 들어올 땐 20억을 들고 와야 하는데 그런 돈은 있고?”
실제로는 잔고 증명만 되면 되지만 내가 이런 곳에 초짜라고 생각했는지 블러핑을 친다.
어이가 없어 한소리를 하려고 하는 순간 곁에 있는 진아람 이사가 말한다.
“정 팀장님은 오늘 30억 들고 오셨어요. 제가 보증하죠.”
의도치 않았지만 졸지에 내가 가진 판돈은 30억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어차피 난 안석춘 대표를 이길 자신이 있었기에 태연히 30억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안석춘 대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정 팀장이 뭔데 진 이사가 보증까지 하고 그러지? 둘이 무슨 사이라도 돼?”
“궁금하면 여기 정 팀장님을 이겨보시죠?”
안석춘 대표가 입맛을 다신다.
“오~ 그래? 그러면 내가 저 인간의 돈을 싹싹 다 털어버리면 우리 진 이사가 나랑 데이트 한번 해주기라도 하나? 그러면 게임에 끼워주지.”
그는 나와 진아람 이사와의 관계를 오해하고선 날 엿 먹이려는 심산인 듯했다.
물론 그녀의 미모에 반해서 수작을 부리는 것이기도 했고.
40살이 넘은 데다 아내까지 있는 안석춘 대표의 제안이 상당히 불쾌할 텐데도 진아람 이사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데이트 한번이 뭐라고요. 그렇게 해요.”
“오케이!”
“대신 지면 정 팀장님 부탁 들어주세요.”
“알았어.”
진아람 이사가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날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겨요. 저딴 인간이랑 데이트할 생각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풀며 우선 칩 10억을 달라고 부탁했다.
안석춘 대표가 맹수와 같은 눈빛으로 날 노려본다.
“우선 실력 한번 볼까?”
안석춘 대표의 얼굴에는 마치 호구를 보는 듯한 표정이 어린다.
난 그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판의 호구는 당신이야 안 대표.’
그와 달리 난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덤덤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보여드리죠.”
“새X. 허풍은······”
그 순간 게임이 시작되었다.
* * *
두 시간이 지나기 전.
내 테이블 앞에는 칩이 가득 쌓이게 되었다.
내가 가진 원래 칩을 빼고도 50억이 훌쩍 넘는 금액이다.
반면 맞은 편에 앉은 안석춘 대표의 앞에는 칩들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너······ 이 자식. 대체······ 정체가 뭐야?”
안석춘 대표가 얼굴을 붉히고 씩씩거린다.
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매니저입니다.”
“거짓말하지 마! 무슨 매니저가 포커를 이렇게 잘 쳐?”
아차.
‘회귀한’이라는 말을 빼먹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기에 그저 빙긋이 미소만 지었다.
진아람 이사가 나보다 더 활짝 웃으며 말을 건다.
“이제 약속은 지키셔야죠?”
하지만 안석춘 대표는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 됐고! 종목 바꿔서 다시 해!”
지고 나면 억지를 쓰는 건 회귀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였다.
난 칩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제가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이미 돈은 다 땄고 제 부탁도 들어주시기로 약속하셨잖습니까?”
안석춘 대표가 씩씩거리며 말한다.
“부탁이고 나발이고 종목 바꿔서 게임 더 해! 안 그러면 네 부탁이 뭐든 절대로 안 들어줄 거야.”
‘됐군.’
이성을 잃은 그가 어떻게든 날 밟으려고 게임을 하자며 억지를 쓴다.
진아람 이사가 경고를 하려 했지만 내가 먼저 나섰다.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원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척 칩을 만지작거리던 난 어쩔 수 없다는 듯 조건을 걸었다.
“대신에 판돈은 에이스 엔터의 지분으로 받겠습니다.”
안석춘 대표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에이스 엔터 지분을 판돈으로 받는다고?”
“싫으십니까? 싫으시면 없던 일로 하시죠.”
안석춘 대표가 날 빤히 쳐다본다.
날 향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이대로 포기를 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역시나 그는 내가 건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누가 안 한대! 대신 종목은 ‘섰다’로 하지. 단 둘이서만. 어때?”
‘섰다’는 화투패 20장으로 하는 게임으로 타짜들이 손기술을 발휘하기 좋은 게임이다.
쉽고.
간단하고.
사기를 치기 쉽고.
모든 것이 내가 예상한 대로 판이 흘러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오케이!”
안석춘 대표가 넌 이제 끝났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계산해서 이길 수 있는 텍사스 홀덤과는 달리 ‘섰다’는 타짜가 손기술을 쓰는 순간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딜러! 내 에이스 엔터 지분 담보로 하고 칩 내 줘.”
300억이 넘는 지분을 칩으로 다 바꿔 달라고 하자 딜러가 침을 꿀떡 삼키고 진아람 이사를 쳐다본다.
“서류에 사인받고 칩 넘겨드려요. 어제 종가 기준으로 302억이니까 2억 수수료 떼고 300억만요.”
“아 예······”
딜러가 테이블 아래 있는 서류를 꺼낸다.
안석춘 대표가 자신의 사인을 넣으며 칩을 교체했다.
담보 수수료로 무려 2억이 날아가고 있었지만 안석춘 대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날 꺾을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수백억의 판돈이 걸린 지금부터가 진짜 승부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