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화
52. 대본 리딩 2
『야! 김하늘 지금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야?』
『이게 어디 언니 이름을 함부로 불러? 너 미쳤어?』
『그래! 미쳤다! 한 번만 더 엄마한테 큰소리쳐 봐! 언니고 뭐고 머리카락을 확 다 뽑아 버릴 거니까!』
유진이의 떨리는 음성에는 원망과 분노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너무도 생생한 감정 표현력에 오싹한 기분이 들 정도다.
몇 마디 대사만으로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는 건 절대로 쉬운 게 아니다.
하지만 유진이는 앉은 자리에서 그걸 해냈다.
그 순간 대본 리딩 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유진이에게 쏠려 버렸다.
고작 대본 리딩일 뿐인데.
유진이는 이미 본 촬영에 들어간 듯 진지한 연기를 시작했다.
용호상박.
유진이가 주영인에 뒤지지 않는 연기를 보여 주자 주영인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고 있었다.
주도권을 쥐기는커녕 유진이의 연기에 점점 말려든 탓이다.
주영인이 다시 한번 강한 어투로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넌 내 일에 간섭하지 말고 네 할 일이나 잘해! 공부도 못 하는 게 어디서 끼어들어?』
『그러는 언니는? 공부만 잘하면 다야? 그 잘하는 공부 머리로 생각이란 걸 좀 해! 엄마가 언니 대학 학자금 마련한다고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기나 하냐고!』
모든 자매의 싸움이 그렇듯.
주영인과 유진이가 주고받는 대사 하나하나에 날이 서 있다.
두 사람이 멀리 떨어져 앉아서 다행이지 바로 곁에 앉아 있었다면 머리채라도 쥐어 잡고 흔들 기세였다.
대본 리딩장의 모든 이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팽팽한 연기 대결을 살펴보며 침을 꼴딱 삼켰다.
마치 절벽 위 외줄 타기를 보는 심정처럼.
그렇게 연기가 이어지길 3분가량.
먼저 대사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놀랍게도 주영인이었다.
『그 그건······ 아니 잠깐만요. 대사가 씹혀서 다시 할게요.』
주영인은 다음 대사가 생각나지 않은 탓에 말을 더듬거렸다.
그 순간 아찔했던 겨루기가 끝이 났다.
주영인은 유진이를 잠깐 노려보다 결국엔 대본을 다시 펼쳤다.
팽팽했던 줄다리기가 끝났고 대본 리딩 현장을 감쌌던 긴장감도 동시에 풀려 버렸다.
그와 동시에 정삼룡 CP가 두 사람의 연기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어휴. 첫날부터 왜 이리 화끈해? 잠깐. 여기서는 한 템포 쉬었다가 가자고. 화장실 갈 사람들 잠시들 다녀들 오고.”
정삼룡 CP가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 끄는 소리를 낸다.
그제야 현장의 모든 스태프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구경만 해도 숨이 콱 막히네.”
“실전도 아닌데 왜 저렇게 힘을 주나 몰라. 사람 기죽게.”
“오메. 이게 대본 리딩이여 현장이여?”
“촬영 팀. 오늘 끝나고 다 남아라. 카메라 동선 세팅 전부 새로 짠다!”
바짝 조였던 고삐가 풀려나자 배우들도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한숨을 돌렸다.
유진이도 뒤늦게서야 다시 대본 책을 펼쳐 대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유진이가 가진 포텐셜은 주영인에게 결코 뒤처지지 않는 걸 확인했으니까.
그리고 그걸 목격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 * *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2차 리딩은 22일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열띤 현장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강수훈 PD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려 2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대본 리딩이 있었는데도 분위기가 워낙에 고조되었던 탓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였다.
짝짝짝!
스태프들의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어휴! 시간 가는 줄 몰랐네. 대본만 읽어도 어지간한 드라마보다 재미있는 거 같더라.”
“우리 이러다 시청률 30% 찍는 거 아냐?”
“대박. 나 숨도 못 쉬고 봤어.”
정삼룡 CP는 주요 연출진을 불러 훌륭한 시작이라며 격려했다.
그사이 배우들도 각자 교분을 나누기 시작했다.
“영인 씨. 좀 살살 하자.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잖아.”
“죄송해요. 선생님이라면 받아 주실 거라 믿다 보니······.”
“하하하. 그런 거야? 난 또 나한테 덤비는 줄 알았잖아.”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요······.”
대본 리딩이 끝나자 주영인은 고개를 납작 숙인 채 선배 배우들부터 찾아다녔다.
아빠 역의 정범규와 엄마 역의 이사랑에게 굽신대면서 반했다 존경했다는 말을 늘어놓으면서.
연기를 잘하는 이상으로 사회생활도 참 잘한다 싶다.
단 그 사회생활이라는 게 철저히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하는 게 문제지만.
하지만 유진이의 경우엔 선배 배우와 스태프들이 먼저 몰려들고 있었다.
일순간이지만 주영인을 발라버린 연기를 보인 임팩트 때문이다.
“유진 씨. 멋지던데?”
“설마 대본을 다 외우고 온 거야?”
“신인이 그런 패기는 있어야지. 암!”
“살살하자. 살살. 그렇게 대본도 안 보고 연기하면 우린 어쩌라고.”
유진이는 연기가 끝나자마자 본래의 웃음 많은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배역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속도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다.
노련한 배우들이야 배역과 자신의 분리를 능숙하게 해낸다지만 유진이는 이제 겨우 단역 한 번 마친 생초짜.
한국 최고의 여배우라 불리는 명품 배우 최수희도 한 번 배역에 몰입되면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게 쉽지 않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미래의 유진이가 보여준 재능조차 전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직은 작은 불씨지만.
정유진이라는 배우의 잠재력을 엿본 것 같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앞으로는 꼭 대본을 읽고 하겠습니다!”
풋풋한 유진이의 모습에 다들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얘 너 지금 나 놀리는 거니? 대본도 못 외웠다고?”
“아 아니에요. 절대로요!”
“호호. 농담이야 농담. 편한 대로 해.”
“그래 최 선배는 원래 농담 짓궂게 하는 사람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대로 해요. 그리고. 우리 앞으로 잘 해 봐요.”
“예. 선배님!”
분위기 한번 훈훈하네.
다만 아직은 긴장을 풀 때가 아니었다.
드라마의 흥행을 알고 있는 것만큼 이번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는 남자 배우들이 여성 편력이 심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유진이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남자 배우가 있었다.
“우리 정유진 씨 연기도 연기지만 발성이 아주 좋던데요? 난 목소리 좋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붉은 스웨터에 웨이브진 머리카락 샤프한 턱선과 8등신의 몸매.
주연인 성파란 역을 맡은 주성진이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데뷔하고 나서는 모든 출연 드라마의 여주인공과 썸을 탄 스캔들 메이커다.
그런데 대본 리딩에서 실수를 한 게 부끄럽지도 않은지 유진이에게 찝쩍대고 있었다.
주성진의 칭찬에 유진이가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직 부족합니다. 격려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부족은 무슨. 그리고 앞으론 오빠라 불러요. 같이 촬영할 사이인데 선배는 좀 딱딱하지 않나?”
유진이는 내 조언에 따라 분명한 선을 그으며 거리를 벌렸다.
“하늘 같은 선배님에게 편하게라뇨? 깍듯이 하겠습니다.”
유진이가 철벽을 치자 주성진의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흘렀다.
자기가 찍은 여자는 다 넘어온다고 착각하는 전형적인 도끼병 말기라 거절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그 그래요? 그럼 좋을 대로 해요.”
그때였다.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근육질의 남자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성파란의 동생 성맑음 역을 맡은 최종혁이다.
TK 엔터 소속의 최종혁은 30살 이상의 글래머들만 노리는 연상 킬러이기에 일단은 경계 대상에서 빼 둔 인간이다.
연상 말고는 매력이 없다며 거들떠보지도 않기도 하고.
“성진이 형. 그러다 또 스캔들 내려고?”
“야! 스캔들은 무슨! 기레기들이 멋대로 소설을 쓴 거 가지고! 유진 씨! 이 자식 말 믿지 마세요!”
주성진이 화들짝 놀라 최종혁의 말을 부인했다.
최종혁이 은근슬쩍 주성진을 엿 먹인 뒤 유진이에게 악수를 권했다.
“최종혁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여기까진 일상적인 배우들의 대화라 간섭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최종혁이 표정을 풀더니 유진이에게 폰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번 드라마는 유진 씨와 내가 연기하는 장면이 제일 많잖아요. 합을 맞춰야 할 일도 많을 거 같은데 서로 연락처나 교환하죠?”
최종혁이 운을 떼자 옳다구나 하고 주성진도 끼어들었다.
“그거 좋네. 나도 번호나 알려 줘요.”
주성진이 연락처를 요구할 거란 건 예상했던 범위의 일이다.
하지만 최종혁이 먼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내 기억 속 최종혁은 관심 두지 않는 여자와는 귀찮아서 말도 안 나누는 타입인데?
왠지 등골이 싸늘해졌다.
그 탓에 급히 대화를 나누는 세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저희가 스케줄이 급해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 제 명함입니다. 연락하실 일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성진과 최종혁이 투덜거렸다.
“아 뭐야. 아이돌도 아니고. 전화번호도 교환 못 해? 왜 이리 빡빡하게 굴어?”
“너무하시네. 매니저님.”
두 사람이 일으킨 스캔들 사건만 생각하면 이 정도만 해도 많이 양보한 거다.
타이밍 좋게 파고든 덕에 유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선배님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유진이가 생긋 웃으며 다시 한번 두 사람과 선을 그었다.
‘잘한다 내 배우.’
난 유진이와 함께 빠르게 대본 리딩 현장을 빠져나왔다.
* * *
대본 리딩을 마친 주성진은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 거울을 바라보며 머리를 가다듬기 위해.
주성진은 화장실로 따라온 박주오 매니저에게 넌지시 말했다.
“주오야. 유진이 걔 반반하지 않디?”
박주오 매니저는 사색이 되어 주성진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 형님. 제발 여배우한테 신경 좀 그만 쓰세요. 이번에도 스캔들 일으키면 대표님이 가만 안 두신다고 했잖아요!”
“웃기고 있네. 야. 대표가 날 칠 수 있을 거 같아? 나 주성진이야.”
“아. 전 몰라요. 안 들은 거로 할래요. 그리고 정유진은 형 스타일 아니잖아요.”
“짜식아. 걔가 아직 어려서 안 꾸며서 그렇지 제대로 꾸미면 남자 배우들이 일렬종대로 부산까지 늘어서고도 남아. 인마.”
“아 몰라 몰라.”
박주오는 귀를 막고 화장실을 나가버렸다.
그때였다.
또 다른 남자 배우 최종혁이 화장실로 들어왔다.
“형은 어떻게 된 게 매번 볼 때마다 머리를 만지고 있냐? 털 고르기 해?”
최종혁은 혀를 차며 세면대에 손을 씻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선배한테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야 근데 너 뭐냐? 왜 유진이한테 찝쩍대? 니 취향 아니잖아?”
최종혁은 씻은 손을 털어대며 물었다.
“그러는 형이야말로 왜? 주영인 같은 타입이 형 스타일 아냐?”
“아까 보니까 영~ 별로. 기가 너무 세서 마음에 안 들어.”
“하여간 말은 잘해요. 대본 씹혀서 쪽팔려서 그런 거면서. 안 그래?”
“인마. 나야 그렇다 치고 넌? 늘 연상만 노리던 놈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래? 정유진이 호적 까면 30살 정도 되냐?”
최종혁은 대답도 않고 콧방귀를 꼈다.
“잠깐. 너 혹시······”
“뭐가 혹시야?”
“아니다. 뭐 들이대든가 말든가.”
“싱겁긴.”
최종혁이 나가려 하자 주성진이 넌지시 물었다.
“종혁아. 너 나랑 내기할래? 정유진 누가 먼저 넘어뜨리나? 5백만 원 빵. 어때?”
“애도 아니고. 무슨 내기야?”
그 말을 마친 최종혁은 기분 나쁘다는 듯 화장실을 먼저 나가버렸다.
최종혁이 나가는 걸 본 주성진은 혼잣말을 지껄였다.
“새X. 누굴 속이려고. 저 연상 킬러가 연하에게 먼저 접근할 리가 있나. 이거 뭔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주성진은 상황을 파악하곤 입맛을 다셨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최종혁. 나 주성진이야. 알잖아?”
주성진은 느끼한 말투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긴 머리카락을 뒤로 살짝 넘겨 스타일링을 바로 잡았다.
“역시나 잘 생겼단 말이야.”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
도끼병 말기 환자의 혼잣말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