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화
51. 대본 리딩 1
2020년 1월 15일.
SBC 본관 701호에서 <파란 하늘>의 첫 대본 리딩이 있는 날이다.
웅성웅성.
방송국 본관은 시장통처럼 북적였다.
“정신없죠? 이쪽으로 오세요.”
드라마국이 있는 입구로 마중 나온 최은희 AD가 우릴 이끌었다.
“정훈 씨. 이거 빨리 편집실로 넘겨!”
“최 PD. 지난주 시청률 몇 프로 나왔어?”
“아 몰라. 원형 탈모증 생겼으니까 말 시키지 마.”
최성락 PD 박후돈 PD.
회귀 전 익히 알고 있던 스타 PD들의 새파란 시절이다.
저 쟁쟁하던 스태프들이 지금은 말단 PD라니.
김성운 AD만큼은 아니더라도 인맥을 다져 두면 나쁠 게 없는 사람들이다.
이 기회에 인사라도 해 볼까 눈치를 봤다.
하지만 내가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유진이를 발견한 PD들이 먼저 다가왔으니까.
“유진 씨! ‘파란 하늘’ 들어가기 전에 우리 드라마에 까메오로 출연 한 번만 해주면 안 될까?”
“유진 씨. 저희 ‘오늘만 산다’에 찬조 출연 어떻습니까? 확실하게 띄워 드립니다!”
“야. 최 PD. 네 드라마 시청률 7.5%잖아. 어디서 오늘만 살다 끝날 드라마를 들이미냐?”
“아니 선배는 꼭 말을 해도! 그거야 스타트라서 그렇죠! 금방 치고 올라갈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내가 널 업고 다니겠다. 좀 잘해라 엉?”
SBC의 드라마국 PD들이 저마다 유진이를 반기고 있었다.
시청률에 민감한 방송국 사람들이다 보니 다들 <아침이 간다>의 후반부 시청률을 유진이가 견인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나는 명함을 교환하며 허리가 뻐근할 정도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스케줄 확인하고 오늘 중으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때였다.
복도 한편을 서성이던 있던 정삼룡 CP가 우릴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여. 왔어?”
“안녕하세요. 정 CP님.”
“그래. 오늘은 하던 대로만 하면 되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예!”
“나랑 같이 가자고. 최 AD는 일 봐.”
“예. 정 CP님.”
우릴 안내했던 최은희 AD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졌다.
우린 졸지에 정삼룡 CP의 안내를 받아 대본 리딩 현장으로 향했다.
* * *
대본 리딩 현장에 들어서자 메인 연출자가 앉는 상석이 비어 있었다.
강수훈 PD는 눈치를 살피며 옆자리로 비켜나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정삼룡 CP가 혀를 찬다.
“나보고 연출하라고? 여긴 강 PD가 앉아야지.”
정삼룡 CP가 뒷좌석으로 가며 눈치 보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댔다.
그제야 강수훈 PD가 머리를 긁적이며 상석으로 자리했다.
“하하. 예. CP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사이 유진이를 지정된 자리로 안내했다.
“유진아 파이팅!”
유진이는 날 돌아보며 두 손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한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은 무슨.
살살해 살살.
선배들 기죽이지 말고.
유진이를 안내하곤 매니저들이 앉는 맨 뒤 열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먼저 온 주영인의 매니저 강명길 팀장이 옆자리를 두드렸다.
다른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눈에 띄었으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신인이면 좀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지. 배우가 철이 없으면 윤호 너라도 개념 좀 챙겨.”
자리에 앉기도 전부터 벌써 시비네.
늦기는커녕 제시간에 맞춰 왔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시비도 참고 웃어넘기는 게 매니저의 일이다.
“죄송합니다.”
“그보다 유진이 연습은 많이 했냐?”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배역을 잡았으니 고생 좀 하겠지만 얻는 것도 많을 거다. 다 경험이다 하고 생각하고.”
어이가 없네.
주영인 때문에 유진이는 주목을 받지도 못할 거로 생각하는 건가?
‘흥이다. 유진이가 낙점받은 노을이가 주연보다 훨씬 좋거든!’
난 참을 인을 23번 정도 그리고는 답했다.
“잘 보고 배우겠습니다.”
할 말이 없어진 강명길 팀장이 대본을 펼치며 고개를 돌린다.
비어 있던 자리에 배우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진이의 옆자리엔 하늘이 엄마 역의 이사랑이 앉았다.
이사랑은 경력 40년이나 되는 아역 배우 출신의 중견 배우.
올해로 45살이지만 겉으로 보기엔 30대 후반 같은 외모를 유지 중인 그녀는 여우 주연상 2회의 실력파이기도 하다.
“잘 부탁해. 우리 딸?”
“네! 엄마.”
이사랑이 장난스럽게 딸이라고 한 말에 유진이가 센스 있게 답했다.
“호호. 듣기 좋네. 앞으론 드라마 끝날 때까지 우린 엄마 딸 하는 거다?”
“한 번 엄마 딸이면 평생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호호. 얘가 말 이쁘게 하는 것 좀 봐.”
이사랑은 유진이를 보곤 흐뭇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그 후 두 사람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잘한다. 정유진.’
여기 오기 전.
유진이에게 특별히 이사랑을 신경 쓰라 일렀다.
<파란 하늘>에 출연한 선배 배우 중에서 유진이와 가장 많이 툭탁대며 호흡을 맞출 상대이니까.
<파란 하늘>에서 노을이 역이 뜬 건 반절은 이사랑의 공이다.
극 중 둘째 딸인 노을이를 ‘전국 둘째 연합의 대표’로 각인될 수 있도록 화끈하게 구박하는 엄마 역이니까.
‘일단 시작은 좋네.’
이내 배우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강수훈 PD가 대본 리딩의 시작을 알렸다.
“자. 다 오셨으니까 시작하죠. 전 파란 하늘의 연출을 맡은 강수훈입니다. 드라마 대박 날 수 있게 다들 최선을 다 해주시길 바랍니다.”
짝짝짝.
스태프와 배우들의 박수 소리가 현장을 가득 채웠다.
그 뒤로 하나둘 배우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하늘이 아빠 역의 정범규입니다. 존경하는 이사랑 선배님과 함께 연기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유진이와 호흡을 맞출 이사랑이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전 하늘이 엄마 역을 맡은 이사랑입니다. 극에서처럼 책임지고 여기 하늘이 아빠를 달달 볶아댈게요.”
“하하. 선생님도 참.”
이사랑의 장난에 정범규가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두 선배 배우가 분위기를 풀어주자 현장 분위기도 한결 밝아졌다.
소개가 진행될수록 왁자지껄한 웃음이 현장을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는 김솔잎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을 소개했다.
“대본을 맡은 김솔잎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지연 작가님 밑에서 배우고 이번이 첫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그늘에 머물 생각은 없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패기 넘치는 김솔잎 작가의 소개에 모두가 술렁거렸다.
정삼룡 CP가 화통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잡았다.
“작가라면 당연히 저래야지.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정삼룡 CP의 호응에 배우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작가님. 칼 가셨네.”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더니. 설렁설렁했다가는 우리 솔잎 작가한테 욕 좀 먹겠는데? 으하하.”
스태프들부터 중견 배우들까지 들뜬 기색이었다.
이지연 작가의 <아침이 간다>는 25%를 돌파하며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그런 작품을 쓴 이지연 작가의 그늘에 머물 생각이 없다는 것은 곧 시청률 25% 이상을 노리겠다는 선언과 같았다.
인사가 끝나자 강수훈 PD가 손뼉을 쳐 주위를 환기했다.
“자. 그러면 슬슬 시작해 볼까요?”
연출을 맡은 강수훈 PD의 말과 함께 대본 책이 넘어가는 소리가 일제히 들려왔다.
팔락팔락.
이제부터 진짜 전쟁의 시작이다.
배우들이 연기의 합을 맞추면 서로의 실력을 낱낱이 드러내게 되니까.
* * *
‘파란 횟집’을 운영하는 성파란네 집안과 ‘하늘 돼지갈비’를 운영하는 김하늘네 일가의 이야기 <파란 하늘>이 아역 배우의 대본 리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웅······.』
『우리 딸. 왜 그래? 고기가 입에 안 맞아?』
『아빠. 나 고기 자체를 못 먹겠어. 아무리 먹으려고 해도 안 돼. 싫어. 느끼해. 토하겠어.』
김하늘의 아역 배우가 팔짱을 끼고 볼을 뿌루퉁하게 하고 있다.
경력 30년의 하늘이 아빠 역의 정범규가 턱을 괴고 김하늘의 아역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래? 그럼 파란이네 가서 회 한 접시 먹을까?』
『응! 그리고······ 가는 김에 파란이 오빠도 불러서 같이 먹자!』
『허! 이 녀석. 설마 파란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였어? 언제는 아빠만 있으면 된다더니.』
『헤헤.』
정범규의 너스레에 김하늘의 아역인 김예진이 방실방실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김예진은 저 깜찍함으로 1화의 시청률을 확실히 잡아줬었다.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연기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 대본 리딩 현장에는 웃음이 가득 차고 있었다.
팔락- 팔락.
대본 책이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한다.
대사만 맞추다 보니 10분도 안 되어 1화의 끝부분에 도달했다.
아역들이 연기를 끝내고 성인으로 바뀌는 부분이다.
그리고 주영인이 첫 대사를 읊는 순간.
분위기가 바뀌어 버렸다.
주영인이 대본을 보지도 않은 채 연기를 시작해 버렸으니까.
‘역시나 저 짓부터 하는군.’
일종의 기죽이기 행위였다.
주영인은 태연히 상대를 바라보며 표정 연기까지 섞어가며 실제 촬영 때나 할 수준의 연기를 시작했다.
마치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나라는 걸 알리듯 독무대를 펼치며.
순간 조금 전까지 편하게 대본을 리딩하던 배우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5분 정도.
결국 주성진이 대사를 몇 번이나 씹어버리며 실수를 해버렸다.
에이스 엔터 출신의 경력 5년 차 배우 주성진.
충무로의 신성이란 소리를 듣는 주성진은 남자 주인공 ‘성파란’ 역이다.
“성진 씨. 잠깐만 쉬었다가 갈까?”
“아 아닙니다. 감독님.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영인의 특유의 템포와 연기력에 휘말려 자신의 연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주영인에게 지지 않으려 똑같이 대본을 보지 않고 연기하려다 생긴 일이다.
“심호흡 좀 하시고 그냥 대본 보고 하세요. 아직 대본 숙지가 좀 덜 되어 있는 거 같은데 촬영까지 시간이 남았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강수훈 PD의 디렉팅에 주성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어떻게든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에 괜찮다고 했지만 그게 쉽게 될 리는 없다.
멘탈이라는 게 한 번 가출하면 잘 안 돌아오니까.
그 뒤로 두 번 더 연속해 실수가 나왔다.
강수훈 PD는 그냥 주성진의 씬을 넘겨버렸다.
“안 되겠네. 그냥 바로 씬 52로 넘어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현장이라면 NG 컷 사인을 내고 쉬었다 가겠지만 여긴 대본 리딩장.
곧장 씬을 스킵해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기자들도 와 있었기에 주성진의 체면이 제대로 상해버렸다.
연이어 몇몇 배우들이 실수를 이어갔지만 주영인은 상대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연기를 이어갔다.
결국 하늘이 아빠 역의 정범규와 엄마 역의 이사랑이 나선 뒤에야 제대로 된 연기 합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마치 진짜 아빠처럼 엄마처럼 주영인을 대했다.
웃고 울고 찰지게 욕하고.
실전과 연습이 분간 가지 않을 수준의 연기가 펼쳐지자 김솔잎 작가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본 속에 머물러 있던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쉬니 그럴 수밖에.
이젠 유진이가 연기할 차례다.
방금까지 명품 배우들의 합을 본 뒤끝이라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텁.
주영인과 마주 앉은 유진이가 대본을 덮어 버리자 모두의 이목이 유진이에게 집중됐다.
“설마 쟤도 대본 숙지가 끝난 거야?”
“이거 설렁설렁하다가는 후배들에게 먹히겠는데?”
유진이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다 긴 호흡을 내뱉더니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순간 유진이를 둘러싼 분위기가 바뀌었다.
눈빛.
자세.
표정.
그 모든 것이 마치 ‘김노을’이 되어버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