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화
5. 첫날 3
유진이는 이지연 작가의 질문에 솔직히 답한 후 날 보며 히죽 웃었다.
저건 ‘나 잘했죠’라는 표정이다.
배우가 자기 어필을 하지 않고 공을 매니저에게 돌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지.
철없는 솔직함에 고맙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냥 ‘열심히 연습했습니다!’라고 말하면 될 것을.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이지연 작가에게 빠르게 답했다.
“예. 작가님. 평소에도 작가님 드라마와 대본을 읽었기에 약간의 조언을 해 줬을 뿐입니다.”
“매니저가~? 혹시 그쪽. 작가 지망해?”
이지연 작가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닙니다. 그저 팬의 입장에서 이지연 작가님이 쓰신 모든 작품을 읽었습니다. ‘엄마의 노래’ ‘그대와 나와 딸의 이야기’······를 모두 대본으로 구해 읽었습니다.”
내 입에서 자신의 작품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이지연 작가의 눈썹이 꿈틀댄다.
설마 매니저가 이런 것까지 다 아느냐는 눈치다.
작가에게 작품은 자신의 분신이나 딸과도 같은 존재.
작품 칭찬을 싫어할 작가는 없다.
“흐음~. 뭐가 제일 좋았어?”
“전 ‘엄마의 노래’가 제일 좋았습니다.”
“제법 보는 눈은 있네. 나 그거 쓰는 데 5년 걸렸거든.”
그때가 생각나는 듯 이지연 작가가 흐뭇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호감도가 올라가는 틈에 이때다 싶어 쐐기를 박았다.
미래에선 그녀가 내 커피를 정말로 좋아했으니까.
“저기 작가님. 여기 현장이 생각보다 춥습니다. 뜨거운 커피 한잔 드시면 추위를 견디시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이지연 작가는 내 보온병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커피? 아니 나 네스프레소 리스트레토 아님 안 마셔~.”
이지연이 고개를 젓자 대신 김솔잎이 활짝 웃으며 잔을 받았다.
“안 그래도 추웠는데 잘됐네요. 저에게 주세요.”
“예. 김솔잎 작가님.”
잔에 커피를 받는 김솔잎이 손사래를 쳤다.
“호호. 매니저님도 참. 그렇게 불러 주셔서 기분은 좋은데 전 아직 작가 아녜요.”
“솔잎~. 무슨 소리야? 너도 작가 맞아.”
김솔잎의 대답에 이지연이 괜히 발끈한다.
생각보다 이 둘 사이 좋은 것 같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이지연 작가가 보조 작가인 김솔잎의 체면을 세워 주고 있었으니까.
졸졸졸.
종이컵에서 나는 커피 향을 맡은 김솔잎이 말했다.
“흠. 향 좋다. 저기 매니저님. 혹시 한 잔 더 받아 갈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곁에서 자신도 모르게 코를 킁킁대던 이지연 작가가 내심 켕겼는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솔잎~. 나 안 마신데도!”
“작가님. 그렇게 말씀하시고 맨날 제 거 뺏어 드시잖아요. 그러니까 미리 받아 둬야죠.”
“진짜 안 마셔!”
이지연 작가가 아이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분명히 안 드신다고 말씀하셨어요? 알았어요. 그럼 제가 두 잔 다 마시면 되죠 뭐.”
“얘는 왜 말 두 번 하게 해? 셔럽! 나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싫어하는 거 몰라?”
그런데 생각보다 김솔잎 보조 작가의 너스레가 상당하다.
이지연 작가의 날 선 말을 아무렇지 않게 대응하다니.
하긴 김솔잎은 모두가 한 달 만에 나가떨어진다는 이지연의 보조 작가 짓을 5년 동안이나 했다고 했었지.
생각해 보니 그건 그것대로 대단하긴 하네.
커피 두 잔을 받아 든 김솔잎이 내게 감사를 표했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저기 명함 좀 주시겠어요?”
“예. 작가님.”
쓸데없던 내 명함이 회귀 첫날에 두 장이나 팔려나갔다.
이거 느낌 좋은데?
“아 잠깐만요.”
김솔잎이 종이컵을 입으로 물고 오른손으로 내가 내미는 명함을 받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작가니~임!”
저 멀리에서 PD와 AD가 한 무더기로 뛰어오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고 달려온 박 PD가 이지연 작가를 보곤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바쁘실 텐데 현장엔 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헉헉.”
“집필실 가기 전에 잠깐 들렀어. 왜? 나 여기 오면 안 돼?”
“아니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작가님도 참. 하하하.”
스태프들은 나와 유진이를 마치 없는 사람인 듯 관심도 두지 않고 이지연 작가와 함께 세트장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두 손을 가슴팍에 올린 유진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수고했어. 통과야.”
유진이가 무슨 말이냐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보여준 연기가 합격이라고. 잘했어. 정말로. 상상 이상이야.”
유진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진짜요?”
“어. 아마 지금 한국에서 너보다 이설란을 더 잘 소화할 사람은 없을 거야. 장담해.”
엄지를 치켜세우자 유진이가 환하게 웃었다.
“헤헤. 기분 좋다.”
“그리고 이지연 작가님은 어지간해선 사람 이름 안 묻는데 네 이름을 물었다는 건 그만큼 잘했다는 소리야. 그러니까 자신감 가지고 지금 한 대로만 연기하면 돼. 알았지?”
“넵!”
유진이의 얼굴에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대화가 길어졌지만 미소가 사고를 당하는 시간까지 그래도 아직 한 시간 이십 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난 혹시나 하고 다시 한번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12일]
-PM 05:30 강동경희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미소가 죽었다.
여전히 미소가 죽는단 일정은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미소를 직접 데리고 와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진아.”
“예?”
“너 본 촬영에서도 잘할 자신 있지?”
잠깐 고민하던 유진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작가님 앞에서 한번 해보니까 별거 아닌 거 같아요.”
“그래 방금처럼만 하면 돼. 그리고 미안한데 나 어디 좀 갔다 와야겠다. 3시까지 내가 안 돌아오면 택시 타고 MBS 스튜디오로 가. 이창환 조연출님 기억하지? 세트장에서는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네. 저번에도 한 번 뵈어서 기억나긴 하는데······ 어디 멀리 가세요?”
유진이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냐. 잠깐 이 근처에 우리 회사 배우가 와 있어서 확인 좀 하러 가는 거야. 혹시나 시간 못 맞출까 봐서. 미안하다. 내가 딱 붙어 있어 줘야 하는데······.”
“오빠. 그러면 미소는 어떻게 해요? 오늘 방송국 구경시켜 주신다면서요?”
“갔다가 오면서 미소 데리고 올게. 혹 늦으면 바로 MBS로 데리고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어쩔 수 없죠. 대신 저녁때 나랑 미소한테 맛있는 거 사줘요!”
“그래 알았어.”
아무래도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해야겠다.
내 대답에 유진이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활짝 웃기 시작했다.
“그러면 오늘 저녁 먹고 후식은······ 제가 쏠게요.”
유진이의 말은 내 귀엔 이렇게 들렸다.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니까 ‘저녁도 맛있는 거 먹고 후식도 챙겨 먹고 싶어요’라고.
모른 척 넘어가 줘야겠다.
“알았어. 대신 나중에 작가님이 커피 찾으시면 보온병에 있는 이걸 드려. 보조 작가인 김솔잎 작가님도 꼭 챙겨 드리고.”
이지연 작가가 내 커피를 한입 맛본다면 반드시 다시 찾을 거란 확신이 있다.
회귀 전에도 그녀는 내가 탄 커피에 홀딱 반해 나와 사이가 친해졌으니까.
곧 눈까지 내리니까 따뜻한 커피가 있다면 몸을 녹이긴 딱 좋을 거다.
“예. 저만 믿고 어서 가 보세요.”
난 주차장으로 뛰어가며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간절히 빌었다.
‘미소야. 내가 간다.’
난 제발 아무 일이 없길 빌며 천호동 리라 유치원으로 차를 몰았다.
* * *
천호동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유치원 원장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 순간 에브리데이 V10의 일정이 바뀌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크리스마스트리 만들기를 하다가 잠시 애들 간식 챙겨준다고 주방에 갔었는데······. 그사이에 미소가 혼자 집에 가버린 것 같아요.
일이 이런 식으로 꼬일 줄이야.
당황한 원장 선생님이 연신 사과를 해 댄다.
-미안해요. 내가 어떻게든 챙겼어야 했는데······.
원장 선생님은 지금이라도 미소를 찾으러 가고 싶지만 유치원에 원생들이 남아 있어 도저히 여유가 안 된다고 말했다.
“제가 집에 가 볼게요. 그런데 그사이에 혹시나 미소가 유치원으로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미소 오면 꼭 좀 잡아주세요.”
-알았어요. 그리고 정말 미안해요. 정 매니저.
수도 없이 사과하는 원장 선생님과의 전화를 끊었다.
“이래서 일정이 안 변했었나?”
다시 한번 <데스티네이션>이란 영화가 떠오른다.
한 번 피했다고 끝이 아니고 어떻게든 운명대로 이뤄진다는 그 영화의 내용이 머릿속을 뒤죽박죽 헝클어트렸다.
까딱 잘못하면 미소의 죽음을 다시 겪을지도 몰랐으니까.
소름이 오싹 끼쳤다.
‘빨리 가야 해.’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연말의 도로 위는 주차장이나 다름없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 탓에 사람들의 날 선 목소리와 크락션 소리가 한데 뭉치고 있다.
빠아앙~.
“아 좀 비켜요!”
“아 거 끼어들지 좀 마세요 진짜!”
나 역시 답답한 마음에 크락션을 울려 댔다.
빠아앙~.
그때 안 주머니에 넣어 둔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부르르르.
김동수 실장의 전화다.
하필이면 이때 말이다.
“이건 변하지도 않네.”
회귀 전 대략 이맘때 김동수의 전화가 왔었다.
받을까 말까 하고 갈등하다 통화 아이콘을 클릭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다음번엔 유진이의 폰으로 전화할 게 틀림없으니까.
“예. 실장님.”
-1년 차 새X가 전화 받는 속도 하고는. 너 지금 어디야?
전화기 너머에서 젊은 시절 김동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재수 없는 목소리다.
순간 죽기 전 상황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죽기 전 나는 병원 의사에게 죽음을 인지하기까지 다섯 단계가 있다 들었다.
심리상담 해주고 돈 더 받아먹으려고 수 쓰는 거냐고 분노를 터트렸었다.
하지만 그게 두 번째 과정일 줄이야.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
의사가 사기꾼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죽기까지 그 다섯 과정을 착실하게 밟았다.
즉 열 내고 화낼 건 이미 다 냈다는 이야기다.
그 덕에 난 김동수의 통화에도 가까스로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다.
거기다 이번 생은 시작부터 달라졌으니 내가 겪었던 그 미래는 오지 않을 미래.
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미래에 있었던 과거’ 일을 머릿속에서 지운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금 유진이 데리고 구리 촬영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아! 그래? 구리라면 마침 잘됐다. 일단 유진이는 택시 태워서 다음 현장으로 이동하게 하고 너는 남양주로 가서 영인이 픽업 좀 해 와라.
주영인.
나의 전 아내이자 지금은 3년 차의 떠오르고 있는 신성이다.
이 시기라면 주영인이 메이저 소주의 광고 모델을 따낸 직후로 인기가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고 치솟고 있을 때다.
거기다 <세 자매 전쟁>이란 드라마에서 젊은 천재 여의사 역할을 소화해 내며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연기력까지 뛰어나단 평단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그녀의 매니저 김철준이 현장에서 이탈하고 곧바로 잠수를 타 버렸다.
제멋대로인 주영인의 성격을 맞춰 주다 못 참고 폭발해 버렸었다지.
어쨌건 김동수의 이 지시가 문제였다.
이 지시만 없었다면.
NG를 내고 잘린 뒤 미소가 보고 싶다며 울던 유진이에게 미소를 데려다 줬을 거다.
그랬다면 미소는 가스 폭발 사고에 휘말리지 않았을 거고.
사망자 명단에 유일하게 미소의 이름만 있던 그 끔찍한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때의 후회를 다시 하라고?
거기다 배우 3실 소속도 아닌 2실 소속인 내게?
웃기는 소리 하네.
심호흡을 한 나는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지금 여기 현장 돌아가는 상황 때문에 남양주로 가기는 어렵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감히 1년 차 매니저가 실장의 지시에 토를 단다?
김동수에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니까.
-너 지금 뭐 뭐라고 했냐?
“현장을 이탈하기 힘들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야! 이게 미쳤나! XX······.
순간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의 욕설이 터져 나왔다.
고막 나간 거 같은데 산재 처리는 될지 모르겠다.
씩씩대는 소리와 함께 김동수의 속사포 같은 말이 이어졌다.
-와 내가 어이가 없어서 정신이 잠깐 나가 버렸네? 1년 차 새X가 빠릿빠릿하다고 이쁘다 했더니. 회사가 만만해? 너 영인이 스케줄이 펑크 나면 회사 손실이 얼마인 줄이나 아냐? 진짜 잘리고 싶어?
나왔다.
김동수의 전매특허인 ‘잘리고 싶어?’
이 당시 나는 상사들의 눈치를 많이 봤었다.
부모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었으니 회사에서 잘리기라도 하면 바로 길바닥에 나앉을 테니까.
그 탓에 다른 실의 실장인 김동수의 지시도 거부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지금의 나는.
10여 년의 경험을 가진
‘1년 차 만렙 매니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