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9화
499. 시작 2
우먼즈의 본사 건물.
편집장실이 있는 층에 엘리베이터가 선다.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우먼즈의 이재희 제1팀장이 날 반긴다.
“팀장님. 빨리 오셨네요.”
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헉헉. 예.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에이스 엔터의 이찬동 실장님이 와서 장 대표님이랑 이야기하고 있어요.”
1월 표지 모델은 정 팀의 연예인들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9월부터 계속 내가 데리고 있는 연예인들이 표지 모델로 나오자 다른 엔터 회사들은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찬동 실장은 표지 모델을 바꾸지 않는다면 앞으로 에이스 출신 배우와 가수들은 우먼즈에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협박하고 있었다.
우먼즈의 입장에서는 표지 모델도 중요하지만 분량의 60%를 채우는 에이스 엔터 소속 연예인들도 중요했다.
에이스 엔터는 한국 업계 1위였기에 보유하고 있는 연예인들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물러날 생각은 없다.
올 한 해 우리 애들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난 짧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지금 장 대표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예. 안 그래도 대표님이 전화 넣으라고 한 거였어요.”
“알겠습니다.”
이재희 팀장이 날 문 앞으로 안내한다.
난 편집장실의 문을 두드린다.
똑똑.
-들어와요.
그때 이찬동 실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예? 누가······ 오는 겁니까?
-보면 알아요.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지혜 대표가 소파의 상석에 그 오른쪽에 이찬동 실장이 앉아 있다.
이찬동 실장이 놀란 눈을 하고 날 쳐다본다.
설마 이곳에서 날 만날지 몰랐다는 눈치다.
“저 정 팀장. 여 여긴 왜······.”
“안녕하십니까? 이 실장님?”
그때 장지혜 대표가 입을 연다.
“에이스 엔터가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걸 굴렁쇠 엔터도 알고는 있어야 할 거 같아서 불렀어.”
이찬동 실장이 다 된 밥에 코가 빠진 듯하다는 표정이다.
그때 장지혜 대표가 날 쳐다본다.
“정 팀장. 1월 표지. 자기 연예인들 뺄 생각 있어?”
“아니요. 전혀요.”
“그럴 줄 알았어. 그러면 에이스 엔터 배우들이 빠지면 1월호에 분량이 상당히 빠지는데······ 한 50페이지쯤.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장지혜 대표도 본인만의 해결책이 있었겠지만 그보단 내게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듣겠다는 소리였다.
난 오면서 준비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1월 중순에 잡힌 ‘화란전’ 특집 기사 1월 말에 개봉 예정인 ‘지리산’ 특집 기사 12월 말에 각종 시상식 결과 특집 기사를 채워 넣으면 될 거 같습니다. 그러면 50페이지는 거뜬하죠.”
장지혜 대표가 고개를 갸웃한다.
“우리 1월호는 12월 26일에 수상 예보를 담아서 나갈 건데? 근데 어떻게 결과를 담아서 내?”
매년 연말.
우먼즈는 방송 3사 TV 시상식 결과를 예측하는 기사들을 담아 1월호를 낸다.
어떤 작품이 상을 수상할지.
방송 삼사별로 예측하는 프로가 꽤 재미난 항목 중 하나였다.
하지만 우먼즈는 앞으로 2년 뒤부터 연말 잡지 출간일을 변경하게 된다.
예측은 예측일 뿐.
시상식의 결과를 잘못 예측한 터라 우먼즈가 우롱을 당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12월 말에 잡힌 잡지 발간 일정을 1월 초로 변경하면 바로 해결되잖습니까.”
“1월?”
“예. 시상식 결과 예측은 인터넷판으로만 하시고 잡지에는 실제 결과들을 모으고 인터뷰를 실으면 페이지는 금방 채울 겁니다.”
“흠. 그거 좋은 아이디어네.”
장지혜 대표가 귀를 기울이자 이찬동 실장이 다급히 외친다.
“자 장 대표님!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올 겁니까? 이런 식이면 앞으로 2월호도 아니 3월호도 우리 애들은 절대 인터뷰 안 할 겁니다! 우리 에이스 엔터에 얼마나 S급이 많은지 아시죠?”
난 이찬동 실장의 말을 무시하고선 이어서 말했다.
“현재 굴렁쇠 엔터는 관우 엔터와 합병을 준비 중입니다. 그렇게 되면 TNT 엔터를 젖히고 업계 3위가 됩니다. 인터뷰할 S급 배우와 가수들은 넘쳐날 겁니다. 부족한 페이지는 저희 굴렁쇠가 책임지고 다 채우겠습니다.”
이찬동 실장이 날 노려본다.
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답했다.
“거기다 지리산도 조만간 개봉하고 TVM ‘먹방 유람단’도 런칭 할 겁니다. 조민성 배우도 작품을 맡았고요. 아 맞다 저희 S급 배우 성호준도 ‘어쩌다 보니 김철수!’란 작품 개봉도 하고요. 그 작품들이 흥행하면 아마도 페이지는 절대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한 4월까지는 메인 이슈 보장해 드리죠.”
“됐네. 그럼!”
이윽고 장지혜 대표가 소파에 몸을 기댄다.
그리고는 커피를 마시며 한숨을 내쉰다.
“정 팀장. 이제 내가 나이가 들긴 했나 봐.”
“나이가 드시다뇨 한창이신데요.”
장지혜 대표가 고개를 젓는다.
“아냐. 예전 편집장 할 때는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빽을 쓸 생각도 안 했는데······ 이젠 그러기가 싫어지네? 귀.찮.아.서.”
순간 장지혜 대표의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 실장님? 아니 이 실장.”
“예······ 예?”
“덕분에 내가 내 위치를 자각하게 됐어. 고마워?”
우먼즈의 장지혜 대표는 재계 32위 명성 그룹 장학준 회장의 셋째 딸.
그러나 우먼즈의 편집장이 된 이후 아버지의 도움 없이 컸던 예전처럼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편집장 장지혜가 사라지더니 로열패밀리이자 우먼즈의 대표 장지혜가 나타났다.
장지혜 대표는 이찬동 실장과 눈을 맞추고 섬뜩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에이스 엔터 배우들. 우리 잡지에 실릴 일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
“대 대표님.”
“아 참. 1월이고 2월이고. 그냥 쭈욱~ 우리랑 연락 없이 살자?”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어서 장지혜 대표가 전화를 든다.
“여보. 어 난데. 에이스 엔터가 감히 겁도 없이 나한테 선전 포고를 하네? 자기 회사랑 자회사 중에 에이스 엔터 출신 광고 모델은 싹 다 빼줘. 어어. 알았어.”
이찬동 실장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다.
“대 대표님. 이 이게 무슨······.”
하지만 장지혜 대표의 분풀이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잠깐. 아직 전화 안 끝났으니까 입 다물어.”
장지혜 대표는 이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이번에는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들려주는데 그 대상이 무려 명성 그룹의 회장이다.
-그래. 지혜야. 무슨 일이냐?
재계 32위의 장학준 회장이 점잖은 말투로 말한다.
장지혜 대표가 조금은 톤이 올라간 말투로 말한다.
“어 아빠. 나 한 가지 부탁 좀.”
-어허. 우리 막내딸이 왜 이렇게 목소리를 올릴까? 이럴 때면 아빠가 좀 불안해지는데?
올해 50살인 장지혜지만 나이 든 아버지에게는 늘 귀여운 막내딸일 뿐이다.
“에이스 엔터 쪽에서 자기들 뜻을 안 들어주면 우먼즈에서 배우들을 빼겠다고 협박해서~”
-허허. 엔터 회사 따위가······ 감히 우리 딸을 협박해?
이찬동 실장이 다급히 말한다.
“혀 협박이 아닙니다. 회장님.”
-누군지 모르겠지만 난 내 딸과 이야기 중일세. 그러니까 그 입 좀 다물지?
이찬동 실장이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다.
그러자 다시 장지혜 대표가 말을 잇는다.
“아빠. 에이스 엔터 쪽 사람이니까 신경 쓰지 마. 하여간 아빠 회사 쪽에 있는 에이스 엔터 광고 모델들은 싹 다 빼줘.”
-허허허. 우리 딸.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갑자기 사람을 빼면 소문이 안 좋게 난다. 그리고 그만한 배우를 대신해서 다른 모델을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왜 없어? 굴렁쇠 엔터에 있는 좋은 배우들 추천해 줄 테니까 아빠는 고르기만 해. 내가 소개해 줄게.”
-거기가 이태풍이 있는 곳이지?
“응.”
-흠. 하긴 그 친구들이 요즘 뜨긴 하더군.
명성 그룹은 공연 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회사로 출판과 미디어 관련 회사를 가지고 있고 그 이외에 보험 증권 회사도 갖고 있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소유 부동산이 많아 알짜배기 자산이 넘쳐나는 곳.
-알았다. 막내딸 부탁이니까 그렇게 하지. 저녁때 집으로 와.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알았어. 이따가 갈게. 사랑해요~ 아빠.”
-크흠. 이럴 때만이냐?
“이럴 때라도 해줘야지! 아빠 그러면 이따가 봐?”
장지혜 대표가 너스레 떨며 전화를 끊는다.
하얗게 창백해진 이찬동 실장은 설마 이럴 줄 몰랐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게 바로 로열패밀리를 상대할 때 주의할 점이다.
그들이 수가 틀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모든 판을 뒤엎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찬동 실장은 에이스 엔터라는 업계 1위의 그늘 안에 있다 보니 잠시나마 겁을 상실한 모양이다.
이찬동 실장이 무릎을 꿇고 싹싹 빈다.
“자 장 대표님. 자 잘못했습니다. 제가······ 제가······.”
장지혜 대표가 인터폰을 누른다.
“한 비서. 들어와서 이 실장님 모셔다드려.”
-예.
달칵.
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들어온다.
장지혜 대표가 고개를 갸웃하자 남자들이 다가와 이찬동 실장을 데려간다.
“대 대표님!!”
이찬동 실장이 바둥바둥거리며 쫓겨나가고 있었다.
겁도 없이 장지혜 대표를 건드린 대가로 말이다.
* * *
쾅.
문이 닫혔다.
장지혜 대표가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마신다.
“휴우. 나 이제 편집장도 못 해 먹겠다. 예전에는 잘만 참았는데 이제는 그냥 화부터 나네.”
과거 우먼즈를 키울 때는 혼자서 모든 걸 다 키웠기에 로열패밀리의 갑질은커녕 자기 힘으로 영업도 뛰고 인쇄를 하러 가곤 했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젊은 시절.
그녀는 더 이상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정 팀장한테 추한 꼴을 보였네. 나 좀 꼴불견이었지? 재벌 갑질하는 꼴을 보여버리고······.”
“아닙니다. 대표님. 시원하던데요?”
장지혜 대표가 피식 웃는다.
“자기한테 광고 준다고 해서 아부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사실은 반 정도는 맞다.
이찬동 실장을 물리치기만 하면 됐는데 광고 모델을 소개해 준다고 할 줄이야.
장지혜 대표가 씨익 웃는다.
“그나저나 대체 에이스 엔터랑 무슨 일이 있는 건데?”
난 잠깐 고민하다 현재의 내 상황을 말했다.
“에이스 엔터랑 전면전 중입니다.”
“뭐? 왜?”
“그쪽에서 먼저 시작했습니다.”
난 현재 에이스 엔터가 처한 상황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임성학 대표가 날 파멸로 이끌려고 한다는 것도.
가만히 듣고 있던 장지혜 대표가 말한다.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당장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우먼즈는 현재 일간지를 제외하고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잡지.
그 잡지에 실리지 않는다면 생각보다 타격이 클 수 있었다.
“알았어. 그러면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대신 오늘 저녁. 우리 아빠랑 식사나 같이해. 광고 모델 바꿔야지.”
이찬동 실장의 어이없는 행동에 졸지에 추가 광고를 수주해 버렸다.
이찬동 실장에게 감사의 꽃바구니라도 하나 보내줘야겠다.
* * *
에이스 엔터 대표이사실.
장지혜 대표를 만나고 온 이찬동 실장이 무릎을 꿇고 있다.
임성학 대표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묻는다.
“이 실장. 지 지금 뭐라고 했어?”
“죄 죄송합니다. 일이······ 생각처럼 안 되었습니다.”
우먼즈에 모든 에이스 엔터 배우들의 인터뷰가 취소되었다.
그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졸지에 명성그룹의 증권사 출판 관련 S급 광고 2개가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유성 건설 S급 광고 1개도 날아가 버렸다.
피해액만 드러난 것만 최소 30억.
돈도 문제였지만 그 광고 모델들과의 관계가 더 문제였다.
그들은 광고 모델에서 잘린 이유를 알게 되면 에이스 엔터에 더는 자신들의 매니지먼트를 맡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을 뭐 그따위로 해!”
“저 정윤호가 생각보다 인맥이······ 좋았습니다. 대표님.”
“장난해? 그딴 새X가 뭐가 인맥이 좋아서!”
임성학 대표는 이찬동 실장을 믿지 않았다.
그때 회의실에 있던 장성민 부사장이 말한다.
“대표님. 진정하시죠.”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제길······ 로열패밀리를 얼마나 얕봤으면.”
이번엔 박찬혁 본부장이 말한다.
“맞습니다 대표님.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이 실장에 대한 처우는 나중으로 미루고 한시라도 빨리 정윤호를 흔들어놓으셔야 합니다.”
임성학 대표가 한숨을 내쉬며 묻는다.
“어쩌자고?”
“이번에 유은아가 하는 영화 촬영 현장에 우리 애들이 많습니다.”
유은아가 조연으로 촬영하게 될 <시공의 발레리나>에는 에이스 엔터 출신의 배우들이 많다.
박찬혁 본부장은 그 배우들을 이용해 흔들어 대자고 한다.
“배우들이 흔들리면 정윤호도 흔들릴 겁니다. 그때를 틈타 놈의 평판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보겠습니다. 그러면 광고도 줄줄이 끊길 겁니다.”
“하아······ 알았어. 진행해봐!”
“예.”
박찬혁 본부장은 현장에 나간 최한종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최 실장. 난데~
* * *
명성그룹의 증권과 보험 쪽 광고 모델로는 이태풍과 조민성을 각각 소개했다.
에이스 엔터의 공격을 막아낸 보상으로 우먼즈의 인터뷰 페이지 또한 추가로 배정받았다.
그리고 우먼즈 1월호는 1월 3일에 발간하기로 일정을 변경했고.
대신 우린 그 날짜에 맞춰 인터뷰하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에이스 엔터의 공격을 막아낸 다음 날.
난 백희영 팀장과 함께 은아를 데리고 <시공의 발레리나> 촬영 현장으로 향했다.
남양주에 있는 <시공의 발레리나> 세트장.
주차장에 차를 멈춰 세우자 뒷좌석에 앉은 은아가 한숨을 내쉰다.
지난번 <먹방의 대가>에 까메오로 출연한 것 말고 제대로 된 촬영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후우~”
“은아야. 괜찮아. 걱정하지 마.”
소심하고 낯을 가리는 은아가 눈치를 살핀다.
“윤호 오빠. 저······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걱정하지 마.”
은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용기를 낸다.
난 이어서 에이스 엔터의 그 누구도 조심하라 말하려 했다.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지잉~
폰에서 진동이 울리더니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지잉~
[알림 : 2020년 12월 15일 ‘유은아’에게 새로운 일정이 발생하였습니다.]
난 급히 오늘 자 다이어리를 급히 확인했다.
그런데 새로운 일정은 은아에게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