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8화
488. 말을 갈아타다 2
“팀장님이 이쪽으로 말을 갈아타시면 제시한 금액의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내 제안을 들은 박희준 팀장이 얼이 나가버렸다.
“그 그게 갑자기 무슨······.”
내게는 진아람 이사가 준 JS 클럽 카드가 있었기에 그 정도 돈을 쓰는 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박 팀장님이나 저나 진성그룹의 후계 전에 휘말린 신세 아닙니까? 어차피 한 놈만 살아남을 텐데 이왕이면 이기는 쪽에 서시죠. 그리고 보시다시피 이쪽이 돈도 더 많이 줍니다.”
“······.”
“아 그리고 당분간 진성에서 일하기에는 곤란할 테니까 박 팀장님이 능력을 발휘할 만한 일자리도 새로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최근 리버스 엔터가 영입한 김승문 비서실장 밑으로 실무를 볼 인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난 박희준 팀장에게 비서실장의 바로 밑 자리를 권유할 생각이었다.
박희준 팀장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난 내친김에 그의 과거까지 읊었다.
“충남 K대 4년 연속 수석 장학생에 킹 실업에서 최연소 경영 지원팀장이셨죠? 그 커리어를 진성그룹의 뒤처리 반으로 쓰기에는 너무 아깝잖습니까? 지금처럼 이런 시시한 일 하려고 진성에 간 건 아니실 텐데 말입니다.”
박희준 팀장이 얼굴을 붉힌다.
“설마 제 뒷조사도 하셨습니까?”
“상대에게 말을 갈아타라고 권할 정도라면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죠.”
“그 대가는······ 당연히 진명규 부회장의 비리 같은 걸 알려 달라는 거겠죠?”
“대가가 없는 일은 없지요.”
박희준 팀장이 한참이나 고민하다 눈을 질끈 감는다.
“죄송합니다.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박희준 팀장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현재 진성그룹의 후계 구도상 지금은 누가 봐도 진명규 부회장이 다른 형제들보다 많이 앞서 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직장에 이제 막 쌍둥이들이 태어난지 100일이니 쉽사리 선택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를 흔드는 데 성공한 것만은 확실했다.
못 들은 거로 하겠다는 말이 무엇보다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박희준 팀장이 고민하다 말을 꺼낸다.
“정 팀장님.”
“아. 예.”
“이제부터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부회장님과 최형운 비서실장님이 아마도 꽤 거칠게 손을 쓰실 겁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왜 제게 그런 걸 말해주시는 겁니까?”
박희준 팀장이 조심스레 말한다.
“제게 좋은 제안을······ 해주신 보답입니다.”
그렇다 이거지?
“그렇다면 저도 보답으로 정보 하나 드리죠.”
“괜찮습니다.”
몸을 돌리려던 그에게 잠시 후 일어날 일을 말했다.
“조만간에 진명규 부회장이 박 팀장님에게 큰 짐을 씌울 겁니다.”
박희준 팀장이 발걸음을 멈춘다.
“무슨 짐······ 말씀이십니까?”
“대충 짐작하실 텐데요? 부회장님의 범죄를 뒤집어쓰는 것 같은 거 말입니다.”
“······.”
“그러니 한 가지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그런 부당한 지시를 듣는다면 별도로 기록해 두세요. 녹음이든 파일 백업이든. 그러면 그게 결국 팀장님 생명줄이 될 겁니다. 뭐 당장 오늘이라도 두 사람이 팀장님을 위협할지도 모르고요.”
박희준 팀장의 눈이 격렬하게 흔들린다.
“하여튼 생각이 바뀌게 되면 언제든 연락해 주십시오. 어떤 상황이든 어떤 문제가 있든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짓던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자신의 차로 가버렸다.
이내 차에 시동을 건 그가 허둥지둥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뭐 반 정도는 넘어왔네.”
떡밥은 뿌렸으니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잠시 후.
을왕리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뒤집어쓰라는 지시를 받게 되면 그땐 아마도 내 말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될 거다.
그때가 그를 빼 올 시기였다.
* * *
박희준 팀장은 서울로 올라가며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최형운 비서실장이 고성을 지른다.
-병신 새X. 그거 하나 설득 못해? 하여간 이래서 지방대 나온 새X는 안 된다니까?
최형운 비서실장은 언제나 이처럼 자신에게 지방대라며 모욕을 주고 욕설을 퍼부었다.
자신은 한국 최고의 엘리트 한국 대학교 출신이라면서 말이다.
박희준은 한숨을 내쉰 뒤 트렁크에 담긴 현금의 처리를 물었다.
“실장님. 저기······ 돈은 어떻게 합니까?”
-야! 나 지금 을왕리에 있으니까 내일 내 방으로 갖고 들어와 새X야. 아 그리고 거기서 한 푼이라도 빼돌리면 넌 그냥 뒤질 줄 알아.
“손도 까딱 안 했습니다.”
-끊어. 부회장님 찾으신다. 아오. 씨X. 너 때문에 또 깨지겠네.
달칵.
전화를 끊자 박희준은 심한 자괴감에 한숨이 나왔다.
“하아······ 난 진성이랑은 안 맞는 건가?”
평생을 이렇게 살 생각을 하니 정윤호가 한 제안이 끌리기 시작한다.
현재 진성그룹 부회장실의 비서실 1팀부터 3팀까지는 모두 한국대학교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
반면 자신은 지방대 출신으로 비서실 4팀 즉 ‘뒤처리 반’을 이끌고 있다.
그러니 정윤호의 말대로 부회장이 문제를 일으키면 뒤집어써야 할 수도 있었다.
순간 박희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잠깐 회사에 들렀다가 갈까?’
회사 컴퓨터에는 4팀이 그동안 다른 팀들에게 인계받아서 처리한 일들이 파일로 저장되어 있다.
대부분은 비서실장만 볼 수 있게 암호화가 되어 있지만 아닌 파일들도 꽤 많았다.
박희준은 자신과 자신만을 바라보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향하던 차를 돌려 회사로 향했다.
* * *
경주 <화란전> 세트장에서 촬영을 마친 뒤 서울 천호동의 집에 돌아왔다.
유진이와 미소를 2층에다 데려다주고 나니 이미 밤 10시였다.
그 순간 다이어리의 일정대로 기사가 떠올랐다.
[(속보) “을왕리 음주 교통사고. 진성그룹 후계자 A 씨 B 양과 단둘이 밀회? 단독 취재!”]
‘떴군.’
아까 서울로 올라오던 중.
오후 9시 정도에 진성준 전무에게 전화를 받았었다.
진명규 부회장이 을왕리에서 올라오면서 사고를 냈다고.
진성준 전무는 곧장 신문사에 제보하려 했지만 난 그를 진정시키고 계속 뒤를 쫓게 했다.
진명규 부회장이라면 분명히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이 일을 덮을 거라고.
진성준 전무도 내 말이 맞다 싶은지 계속해 진명규 부회장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진성준 전무에게 연락해 봐야겠군.’
이제 만나서 대처 방법을 논의해야 할 때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 발신자 표시 제한]
“설마 박희준 팀장인가?”
전화를 받는 순간.
예상한 대로 박희준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예상보다 떨리고 있었다.
-저 저······ 저 좀 살려주세요. 팀장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협박을 받았다는 걸 직감했다.
“말을 갈아타실 겁니까?”
-예. 그럴게요. 그러니까 제발······.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난 그 즉시 박희준 팀장의 집으로 향했다.
* * *
압구정에 있는 방 두 칸짜리 연립 빌라.
정윤호와 거실 쪽에서 조용히 통화를 마친 박희준이 한숨을 내쉰다.
“하아······ 진짜······ 어떻게 하지······.”
조금 전 집에 도착하자마자 회사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진명규 부회장이 사고를 쳤으니까 수습을 하라고.
정윤호가 말한 대로였다.
박희준은 그 즉시 통화 녹음을 시작했다.
최형운 비서실장은 그 사실도 모른 채 박희준에게 대신 경찰에 가서 자수하라고 종용했다.
블랙박스 파일은 이미 지워놓았고 박희준의 행적도 이미 다 꾸며 놓았다고 말이다.
어차피 인명 사고가 나지 않았으니 큰 무리는 없을 거라며 말이다.
더군다나 함께 있던 여배우도 매니저가 대신 뒤집어쓰기로 했단다.
그리고 그 대가로 방 세 칸짜리 아파트로 옮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정윤호가 말한 대로 상황이 벌어지자 박희준은 소름이 오싹 돋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박희준은 시키는 일을 못 하겠다 외쳤다.
자신은 그런 일을 하려고 진성그룹으로 온 게 아니라고.
그러자 최형운 비서실장의 태도가 변했다.
-이게 오냐오냐하니까 세상 무서운 걸 모르네? 지방대 나온 촌놈 주제에 일을 가려? 야! 사람 보내기 전에 당장 회사로 튀어와. 알겠어?
박희준 다시 한번 싫다고 했다.
하지만 최형운 비서실장은 이번엔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협박을 해왔다.
-지금 안 튀어 오면 네 손에 들린 3억. 그거 횡령으로 걸어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설마 정윤호에게 가져다주라고 한 돈이 이렇게 족쇄가 될 줄이야.
“하아······ X 같은 인생······.”
그때였다.
작은 방문이 달칵하고 열리더니 노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준아.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니?”
평생 홀로 자신을 키워온 노모는 최근 허리가 좋지 않아 거동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방문에 기댄 채로 자신을 안쓰럽게 보고 있었다.
순간 박희준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심약한 노모를 걱정시킬 수는 없어 애써 밝은 얼굴로 답했다.
“아 아니에요. 어머니. 회사에서 지금 맡은 일을 빨리 좀 마무리해 달라고 연락을 해와서요.”
박희준의 노모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한다.
“아무리 대기업이지만 우리 아들만 부려 먹는 거 아니니?”
“제가 에이스라서 그래요. 제가 없으면 우리 회사가 안 돌아간다니까요?”
박희준은 허풍을 쳐서 노모를 안심시켰다.
노모가 마지못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우리 아들 고생하는데 엄마가 도움이 안 되어서 미안해~?”
“에이~ 또 그러신다. 어머니가 왜 도움이 안 돼요? 어머니 없으면 연주 혼자서 쌍둥이를 어떻게 키워요? 그런 말씀 마시고 빨리 주무세요.”
박희준은 눈물이 고이는 걸 꾹 참고 어머니에게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라 말했다.
순간 노모가 잠깐 기다려 보라며 방안에서 포장된 검은 박스 하나를 꺼내 자신에게 내밀었다.
“이거 차고 가렴. 요새 춥다더라.”
“이게 뭐예요?”
“목도리 하나 샀어.”
박희준은 왈칵하고 나오는 눈물을 참으라 이를 꽉 깨물었다.
자신이 어머니에게 주는 용돈은 한 달에 고작 10만 원.
연고 하나 없는 서울로 올라와서 집을 구하고 쌍둥이를 키우다 보니 어머니에게 드릴 용돈이 많이 부족했다.
그런데 그 돈을 아껴서 샀다는 말에 목이 메어왔다.
“이런 걸······ 왜 사셨어요.”
“왜긴. 우리 아들 추울까 봐 샀지. 근데······ 우리 준이. 우니?”
“아 아니에요.”
박희준은 고이는 눈물을 닦으며 노모에게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때 큰방 문이 열렸다.
초췌한 얼굴을 한 아내 이연주가 코트와 옷을 가지고 나온다.
“여보. 어머님이 제 것도 사주셨어요. 용돈도 제대로 못 드리는데 커플 목도리를 하라고······ ”
이연주 역시 눈물이 가득했다.
노모가 다시 한번 웃는다.
“늙은 내가 돈 쓸데가 어디 있다고. 우리 아들이랑 며늘아기가 건강해야지.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 거라.”
박희준은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오로지 자기만을 보고 있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이제 갓 태어난 두 명의 쌍둥이.
네 사람의 운명이 자기 어깨에 달렸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아내 이연주가 다가와 박희준을 껴안았다.
“여보. 우린 괜찮으니까······ 진짜 괜찮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요.”
박희준이 눈물을 참으며 대답한다.
“아 아냐. 괜찮아. 다 잘될 거야.”
그때였다.
띵동.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박희준의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정윤호는 천호동에서 출발한다고 했기에 아직 도착할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다.
시간만 보면 최형운 비서실장이 다른 비서들을 보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진명규 부회장의 집은 한남동에 있었기에 비서들의 집 대부분이 근처 이태원이나 용산 쪽에 있기 때문이다.
박희준은 정윤호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띠이-.
스크린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우르르 서 있었다.
“누구······세요?”
젊은 남자가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안녕하십니까? 리버스 엔터 이수찬이라고 합니다. 정윤호 팀장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리버······스 엔터요?”
순간 이수찬이 들어 올린 폰에서 정윤호의 목소리가 나온다.
-저 정윤호입니다 팀장님.
“아! 예. 팀장님! 근데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뭡니까?”
-제가 말씀드린 이직하실 회사 임직원들입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 테니까 우선 어머님이랑 아내 그리고 쌍둥이들을 데리고 그 친구들을 따라가십시오.
진성그룹의 비서실에서 데리러 올지 모르니 당장 피하라는 제안이다.
마치 앞을 훤히 내다보는 그의 말에 한층 더 신뢰가 생기고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박희준은 문을 열어주며 다급히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애들 챙겨. 그리고 어머님은 내가 모실 테니까 나갈 준비해.”
“여 여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예요?”
“가면서 설명해줄게! 나쁜 짓 한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예. 알았어요.”
달칵.
문이 열리자 이수찬과 일행들이 따뜻한 옷가지를 가지고 달려온다.
“짐은 다 놓아두시고 폰 지갑만 가지고 나오세요. 어서요.”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갑니까?”
리버스 엔터의 직원 여섯 명이 와서 웃음을 짓는다.
“앞으로 박희준 팀장님이 사실 사택으로 갈 겁니다. 고급 빌라라서 보안은 이곳과는 비교도 안 될 안전한 곳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수찬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리버스 엔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
신사동에 있는 HQ 빌라.
30가구가 아파트 단지처럼 모여 있는 고급 빌라 중 3개 정도를 리버스 엔터가 소유하고 있었다.
그중 201호에 박희준 팀장의 가족들이 모여 있다.
다만 노모와 아내는 안색이 상당히 어두운 상태였다.
박희준 팀장이 회사의 희생양이 될 위기에 놓였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박희준 팀장은 그런 가족들을 안심시킨 뒤 내게 마이크로 SD 카드를 내민다.
“팀장님.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뭡니까?”
“최형운 비서실장과의 통화 녹음 파일과 회사에 저장되어 있던 보안자료 일부입니다. 90% 정도가 암호화되어 있지만 나머지는 제 권한이라 암호를 풀어놨습니다.”
드디어 진명규 부회장에게 치명타를 입힐 무기가 내 손에 들어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