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화
48. 인연이 모인다 1
이동민 실장의 전화를 받고 회사로 돌아오자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실장님. 진짜로 휠리스에서 신발 협찬을 해 준답니까?”
“그래. 조금 전에 연락받았다.”
체리블라썸이 무대 위에서 신은 새하얀 어글리슈즈가 SNS 실검에 올라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 덕에 그 어글리슈즈의 제조사인 휠리스에서 협찬 제의가 왔다고 한다.
“오더만 넣으면 바로 퀵으로 보내 준다고 하니까 내일 아침 일찍 바로 연락해서 수령해.”
“예. 실장님.”
한명호 팀장이 기쁜 얼굴로 연락처를 건네받았다.
협찬은 보통은 기획사에서 요청한다.
제안서를 수백 장을 뿌리고 제품 담당자에게 굽신거리면서 광고해드릴 테니 저희에게 협찬 좀 해주세요라며 말이다.
하지만 협찬을 받을 성공률은 10%도 넘지 않았다.
물론 인기가 있으면 돈 드릴 테니까 제발 한 번만 써 달라고 입장이 바뀌지만 말이다.
그런데 휠리스가 먼저 연락을 해 왔다?
좋은 징조였다.
“광고 제의가 아니라서 아쉽긴 해도 이게 어디냐. 그리고 애들 코디 색상별로 여러 벌 달라고 해. 줄 때 확실히 받아둬.”
그래 줄 때 받아야지.
한명호 팀장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아쉬웠다.
체리블라썸의 인기가 더 높았다면 이번 기회에 아예 광고 제안도 함께 왔을 테니까.
“근데 윤호야. 그 신발은 도대체 어디서 난 거냐?”
“아 그러고 보니 혹시 개인 돈으로 산 건 아니지?”
이제야 이동민 실장과 한명호 팀장이 어글리슈즈를 어디서 구했냐고 묻는다.
“비품실에 있던 건데요?”
“뭐?”
협찬을 받아놓고 먼지만 쌓이고 있던 회사 비품실에서 빼 왔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데 한 켤레당 10만 원도 넘는 신발을 내 돈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
“비품실 최 대리님한테 허락받고 빼 온 거예요. 골든로드한테 협찬 들어온 건데 걔들은 안 신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반출 서류에 사인만 하고 가져가라고 하시던데요?”
“하하. 걔들이 제 발로 들어온 복을 걷어찼구나.”
“그런 셈이죠.”
경쟁자인 1실에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두 사람의 표정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밝아졌다.
그때였다.
이동민 실장은 체리블라썸 신곡 작업에 관해 이야기해줄 게 있다면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 윤호야. 체리블라썸 신곡은 내가 직접 프로듀싱 할 거다. 그리 알아 둬라.”
한명호 팀장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실장님께서 직접이요?”
“그래.”
한동안 손을 놓았지만 원래 이동민 실장의 프로듀싱 능력은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이다.
그런 이동민 실장이 체리블라썸의 프로듀서를?
그렇다면 체리블라썸의 다음 곡이 성공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올라갈 거다.
최종적인 완성도는 프로듀서의 눈높이에 맞춰지니까.
“실장님. 혹시 염두에 두고 계신 작곡가라도 있으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동민 실장이 피식하고 웃었다.
“왜? 맘에 둔 사람이 있냐?”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레벨에서 찾으시는지 궁금해서요.”
“찾아봐야지. 일단 친분이 있는 S급 작곡가들 위주로 직접 만나볼 참이다. 곡 비는 아끼지 않을 거고.”
S급 작곡가들의 곡 비는 평균 2천만 원 정도.
그런데 그 이상이 되어도 얼마든지 지불하고 가지고 오겠다며 굳은 의지를 보였다.
뭐 그렇다고 몇억씩 주고 사 오겠다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앨범이 아니라 한 곡만 낸다 생각하니 부담은 없네. 쭉 훑으면 하나는 건지겠지.”
한명호 팀장이 농담처럼 말했다.
“곡들이 다 마음에 드시면요?”
“그러면 다 사야지.”
현업에서 손을 떼고 일에는 늘 소극적이었던 이동민 실장이 변하고 있었다.
S급 작곡가라면 기본은 해 준다.
그중에서 어떤 곡이 내 기억 속 대박 곡과 일치할지 두근거린다.
“하여간 그렇게 되었으니까. 한 팀장 윤호야. 잘 부탁한다.”
“예. 실장님!”
“예. 실장님!”
체리블라썸에게 봄날이 찾아오고 있다.
활짝 만개해 팬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재능을 뽐낼 봄날이.
* * *
배우 2실로 오기 전.
이동민 실장에게 구성철 실장과 김동수 실장이 싸웠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주영인 때문이라는 말에 다이어리부터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4월 1일]
-PM 10: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SBC <파란 하늘> 모니터링. 시청률 7.5% 출발.)
‘주영인이 주연을 차지했구나.’
하지만 예상하던 내용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최근 주영인의 인지도와 연기력이라면 원래 ‘김하늘’ 역에 캐스팅되는 신인 여배우 최연아를 물리치는 것 정도야 간단했을 테니까.
다만 그렇다고 해도 두 실장들이 왜 싸웠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난 궁금증을 가친 채 배우 2실로 향했다.
띠링.
사무실이 있는 4층에 도착했다.
밤 11시가 되었는데 아직 불이 꺼지고 있지 않았다.
사무실 한구석에선 피곤에 쩔어 있는 구성철 실장과 오덕구 팀장이 보였다.
“어? 윤호 왔네.”
“수고 많았다.”
구성철 실장이 손을 들어 날 반겼다.
“우리 정 스타. 오늘도 한 건 했다며?”
“운이 좋았습니다.”
구성철 실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운도 반복되면 실력이지. 그런데 너 이러다 가수 2실로 가는 거 아니지?”
“에이. 구 실장님도. 전 영원한 배우 2실 소속입니다.”
“그래? 진짜지?”
의심한다는 태도에 손가락을 내밀었다.
“혈서라도 써 드려요?”
장난스레 말하자 구성철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팀장아. 윤호 잡아라. 혈서 쓰신단다. 칼은 내가 가져오마.”
“예. 실장님.”
오덕구 팀장이 장난스레 내 어깨를 감쌌다.
하지만 내가 리액션을 크게 보이지 않자 이내 장난을 멈추더니 헛기침을 한다.
“재미없긴. 그런데 혹시 주영인이 주연 딴 건 들었냐?”
“예.”
“그러면 김 실장이랑 싸운 것도?”
“예. 이 실장님이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어찌 된 영문인지 묻자 구성철 실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사정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실은 아까 오후에 김 실장 그 자식이 연예가 방방뉴스 작가와 전화 인터뷰를 하는데 유진이를 ‘끼워 넣기’ 배우라고 까더라고. 그래서 한판 했다.”
“끼워 넣기요?”
끼워 넣기란 제작사가 원하는 배우를 캐스팅할 때 같은 기획사의 배우 하나를 끼워 넣어주는 걸 말한다.
한마디로 실력 없는 애 하나를 깍두기로 끼워 넣어준다는 뜻이었다.
“와 진짜 어이가 없네요.”
언성을 높이자 구성철 실장이 날 진정시켰다.
“뭐 유진이가 먼저 오디션 보고 주영인이 뒤에 지원했다는 걸 확실하게 이야기했으니까 너무 신경은 쓰지 마라.”
아무래도 연예부 기자 한두 명을 포섭해야겠다.
김동수가 대놓고 언론 플레이를 한다면 나 역시 대비해야 하니까.
“그래도 뭐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잖냐. 유진이는 버거퀸 CF도 잘 찍었다며?”
“예. 실장님.”
“그래 광고가 대박 나길 빌어 보자. 그러면 우리 유진이 인지도도 더 올라갈 수 있겠지. 안 그러냐? 오 팀장?”
“예. 맞습니다! 실장님.”
두 사람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분함을 감췄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이태풍을 영입하자는 말을 쉽게 꺼낼 수가 있게 되었다.
난 어색하게 웃는 두 사람을 향해 넌지시 말했다.
“실장님. 혹시 김 실장님한테 한 방 먹일 생각 없으십니까?”
순간 두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반색하며 물었다.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냐?”
“뭔데 그래? 응?”
두 사람의 표정에 궁금증이 어리기 시작했다.
* * *
작년 연말.
업계 3위인 디딤돌 엔터와 4위인 루이스 엔터가 부도난 뒤 모든 엔터 회사들은 두 회사의 스타들을 영입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 배우 2실도 영입 리스트를 만들어 영입 시도 중이고.
난 그 영입 리스트에 배우 한 명만 더 추가하자 말했다.
“이태풍?”
구성철 실장은 고개를 갸웃하다 뒤늦게 기억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름다운 이별’에 나온 걔 맞지?”
“예.”
고등학교 3학년 때 길거리 캐스팅으로 단번에 데뷔한 이태풍은 조각 같은 외모로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연기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점점 출연하는 작품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은 ‘연못 다비드’.
‘연기 못하는 다비드상’을 줄인 말이다.
워낙에 잘생겼기에 CF로 버텨왔지만 그 CF마저도 1년 전부터는 거의 사라진 상황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구성철 실장이 대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걔 할 줄 아는 거 없잖아. 연기력도 엉망 발성도 엉망. 얼굴만 잘생겼지 배우로서는 이미 바닥이 드러났을 텐데. 그런 배우를 왜 영입하려고?”
“실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 친구 한동안은 광고를 쓸어 담더니 요즘은 이미지 소모가 심해서 CF도 잘 안 들어온다던데요?”
엔터 업계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잘생기고 이쁜 사람을 봐도 점점 무감각해진다.
개나 소나 다 이쁘고 잘생겼으니까.
팔리지 않는 조각상은 상품이 아닌 관상용일 뿐이다.
단 누군가가 그 관상용에 관심을 가졌다면?
없던 가치도 생기는 법이었다.
“그 이태풍을 김동수 실장이 노리고 있습니다.”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반짝였다.
“확실해?”
미래 다이어리엔 모레 김동수 실장이 이태풍을 영입하는 미팅이 잡혀 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1월 14일]
-PM 01:00 청담동 H 빌라 이태풍 영입 미팅.
“예. 확실합니다.”
“흐음······.”
돈 냄새를 잘 맡는 김동수 실장이 노린다는 말이 두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뭔가 모르는 게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구성철 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난 반대다.”
“예? 실장님. 왜······.”
“윤호야. 난 김동수 따라 하기 싫다. 그놈은 돈 냄새를 잘 맡지만 난 아니거든. 또 데리고 와서는 어쩔 건데? 망가진 배우 케어할 능력도 없는데.”
이미지 소모가 심하고 연기도 못하는 배우를 데리고 와서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그게 구성철 실장의 우려였다.
하지만 난 정확히 이태풍이 가진 문제를 안다.
어떻게 케어할 지도 말이다.
* * *
이태풍의 병명은 난독증.
그 탓에 대본을 읽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회귀 전 내 도움을 받아 난독증을 극복한 이태풍은 놀랄만한 연기력을 보이게 된다.
다만 현재로는 그가 가진 증상을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었다.
워낙 콤플렉스라 본인이 오랫동안 숨겼기에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도로 한정되어 있으니까.
잠깐 고민하던 난 준비했던 말을 털어놓았다.
그의 병명을 밝히지 않으면서도 구성철 실장과 오덕구 팀장을 설득할 방법이 있었으니까.
“이태풍 그 친구가 말을 안 해서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일종의 카메라 울렁증 같은 게 있답니다.”
“카메라 울렁증?”
“예. 아시다시피 카메라 울렁증은 고치는 게 가능하잖습니까? 그리고 일단 만나면 제가 설득할 자신도 있고요. 맡겨만 주십시오.”
“끄응······ 배우가 카메라 울렁증이라니.”
“그래도 일리가 있네요. 어쩐지 연기가 어색하다 했더니.”
그제야 두 사람이 납득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맞는다면 이태풍의 영입은 한번 시도해 볼만 한 일이니까.
“어렵구만. 그래도 확인도 없이 계약을 진행하는 건 모험인데······.”
당연히 어렵지.
그래서 이 일만은 적극적으로 내가 나서서 메이드 해야 했다.
정상적이라면 이뤄지지 않을 계약이니까.
“일단 단기 계약을 제시하시고 일정 조건을 채우면 장기로 자동 연장되는 계약서를 내밀면 안 되겠습니까?”
내 제안이 그럴듯한지 구성철 실장이 귀를 기울였다.
“내일 아침까지만 생각해보자. 배우뿐 아니라 매니저 한 명까지 추가로 데리고 오는 거라면······ 좀 복잡하다.”
나와 함께 이태풍을 도왔던 그의 매니저 후보 한 명도 영입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말했더니 확답을 하지 않는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낚인 게 틀림없다.
그럴 수밖에.
연못 다비드가 연잘 다비드가 된다면?
탑스타로 가는 특급 열차에 올라탈 사람을 거저 얻는 게 될 테니까.
* * *
다음 날 아침.
유진이의 집으로 간 나는 모레 있을 <파란 하늘> 첫 대본 리딩 일정을 체크했다.
유진이는 주영인이 주연배우가 되었다는 이야기에도 아무렇지 않은지 대본에만 집중했다.
자기 할 것만 잘하면 되지 않냐는 말에 난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난 땅바닥에 누워 발을 튕기는 미소 곁으로 다가갔다.
미소는 외곽선만 그려져 있는 캐릭터 그림 속을 온갖 색연필로 색칠 중이다.
이번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 집이다.
그런데 과자라고 칠해놓은 색깔이 적어도 인간은 먹지 않을 것 같은 색상이다.
‘혹시 색연필이 부족한 건가?’
힐끗 쳐다보니 36색 중 빠진 색은 없다.
‘그냥 자유로운 영혼이로구나.’
하지만 난 진실을 외면한 채 환호를 보냈다.
“우와. 우리 미소. 잘 그리네?”
그림을 그리던 미소가 고개를 들고 히죽 웃는다.
“진짜요?”
“응. 내가 본 여섯 살 중에 제일로 잘 그려! 미소 짱!”
미소가 배시시 웃는다.
“헤헤. 이제 나 일곱 살인데.”
손을 꼬물딱대며 손가락 일곱 개를 펴 이젠 일곱 살이라며 자기 나이를 강조한다.
“아 미안. 삼촌이 깜빡했다.”
“그리고요. 나 내년엔 학교도 들어가요!”
“우와~. 벌써?”
“응!”
“우리 미소 다 컸네? 축하해?”
미소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환한 얼굴의 미소를 보자 갑작스레 예전 질문이 떠올랐다.
유치원생 두 명과 삼각관계라 고민이라고 했었지?
난 고민에 고민한 대답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운을 떼며 말했다.
“미소야. 저번에 말했던 거 있잖······아.”
미소의 사랑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다.
사랑은 이르다!
그러니 그 아이들이 한 번만 더 그딴 소리를 하면 내가 직접 가서 혼을 내주겠다고.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런데.
“아. 그거요? 이제 괜찮아요.”
미소가 더는 답해주지 않아도 된다며 고개를 휙 돌렸다.
응?
왜?
대체 무슨 일인데 미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