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2화
472. 진성그룹 2
“설마······ 온장고 실온 냉장고 온도에 맞춰서 시음하자는 겁니까?”
편의점에 있는 온장고는 대략 50도에서 60도의 온도를 유지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냉장고는 6도 정도.
그냥 상온에서 보관하게 되면 22도.
그 세 가지 온도를 설정해두고 시음하자고 말한 걸 정대윤 소장은 대번에 알아차렸다.
“예. RTD 커피는 주로 편의점에서 소비되니까 그 온도를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하하. 이거 저희가 한 방 먹었네요. 이렇게 전문적인 분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연구소에서도 최종 상품화하기 전에 그런 테스트를 하기는 합니다만······ 앞으로는 다른 음료도 개발 시음 단계부터 온도별로 확인해야겠네요.”
순간 곁에 있던 진성준 전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한다.
“거봐요 정 소장님. 내가 우리 정 팀장님을 만만히 보면 안 된다고 했죠?”
정대윤 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블렌딩을 하셨다고 해서 커피만 잘 타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상품화까지 미리 생각하셨을지는 몰랐네요.”
“예. 그러니까 괜히 우리 회사 분 아니라고 배척하지 말고 최대한 의견을 반영해 주세요. 제 지시라고 하면 다른 이사들도 그러려니 할 겁니다.”
“당연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보다 온도에 맞춰 세팅하려면 5분 정도 걸릴 건데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 일 보세요.”
정대윤 소장이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연구원들과 함께 시음실로 향했다.
진성준 전무가 날 보며 빙긋이 웃는다.
“생각보다 훨씬 프로페셔널 하시네요.”
“과찬이십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회귀 전과는 너무 다른 대우에 적응이 안 될 정도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진아람 이사와 최희선 비서가 내린다.
“오빠. 나 왔어.”
“아람이 네가 여긴 웬일이야?”
“오늘 박 이사님이랑 우리 호텔에 납품하는 음료 문제로 왔는데 오빠가 말한 정 팀장님이랑 로비에서 만났거든. 궁금해서 올라왔어.”
“그래? 직접 보니 어때?”
진아람 이사가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걸 꼭 말로 해야 해?”
진성준 전무가 장난스레 답한다.
“오올~ 우리 아람이 눈에 차는 남자가 다 있네?”
“아~ 몰라.”
진아람 이사와 진성준 전무가 남매답게 장난스레 대화를 주고받는다.
회귀 전에도 두 남매를 만났지만 그땐 지금과는 달랐다.
무례하진 않았지만 거리감이 있어 도통 친해질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격의없이 친하게 굴고 있었다.
그러나 난 두 사람과는 어울릴 생각은 없었다.
이 둘과 엮이는 순간 진성그룹 후계 전쟁에 얽히게 되니까.
“관심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사님과 어울릴 급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는 여기까지 했으면 합니다.”
“쳇. 알았어요. 대신에 마음 바뀌면 연락해줘요. 제 번호 알죠?”
아마도 쉽게 놓아줄 생각은 아닌 듯하다.
진성준 전무가 피식 웃더니 시음실을 가리킨다.
“자 이제 세팅된 거 같네요. 들어가시죠.”
“예. 전무님.”
그렇게 우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음실로 향했다.
* * *
시음실에는 내가 타온 정 커피가 온도별로 작은 컵에 나눠 담겨 있었다.
총 30종의 커피를 세 가지 온도대로 나누면 90종류가 된다.
그걸 10명씩 마실 수 있게 세팅해놓다 보니 테이블 위에는 무려 900잔의 작은 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온도가 유지되는 테이블 위에는 시음 후 뱉을 수 있는 작은 스테인리스 컵과 입을 헹굴 수 있는 물병이 놓여 있다.
커피를 맛만 보고 뱉은 뒤 입을 헹궈내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시음에는 진성준 전무와 여진수 비서 진아람 이사와 최희선 비서를 비롯해 정대윤 소장과 미각이 뛰어난 연구원들이 나섰다.
그들은 모두가 태블릿을 들고선 커피를 시음하고 항목별로 점수를 매기기 시작했다.
“쌉싸름한데 묘하게 입맛에 맞네요.”
“7번 드셔보세요. 전 단 커피는 별론데 이건 절묘한데요? 거부감이 없어요.”
“온도가 바뀌어도 맛 차이가 거의 없네요.”
원래는 커피를 맛만 보고 뱉어내야 했는데도 다들 맛을 보고서는 커피를 꿀꺽 삼켜버리고 있다.
이후 입만 물로 헹군 뒤 곧장 다음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시음단은 그렇게 계속해서 커피를 마시며 태블릿에 점수와 평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모두가 시음을 끝낸 뒤에 정대윤 소장에게 점수표를 전송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태블릿으로 점수표를 집계한 정대윤 소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진성준 전무를 쳐다본다.
“저기······ 전무님.”
“왜요? 설마 반응이 안 좋습니까?”
정대윤 소장이 흥분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아뇨. 그게 아니라 전부 다 평균 97점 이상이 나왔습니다.”
“예?”
“커피들이 모두 밸런스가 너무 잘 잡혀 있습니다. 보통은 온도 변화를 시키면 맛이 달라지는데 이 커피들은 어떻게 블렌딩 했는지 맛에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
당연하지.
내가 미리 온도계로 측정까지 하고 균일한 맛이 나게 만든 블렌딩 제품인데.
진성준 전무가 침을 꼴딱 삼킨다.
“그 정도입니까?”
“예. 어떤 걸 골라서 상품화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제 입이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채점표를 받아봤는데 모두의 의견이 같습니다.”
“그 채점표를 저한테도 좀 보내주십시오.”
“예.”
진성준 전무가 태블릿으로 받은 채점표를 쳐다본다.
“97.9 98.7 98.3 99.1······ 정말이군요.”
“예. 이 정도라면 표본 수를 저희 열 명이 아니라 천 명으로 늘린다고 해도 큰 차이가 안 날 겁니다.”
태블릿에서 시선을 뗀 진성준 전무가 상기된 표정으로 묻는다.
“그러면 어떤 제품을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정대윤 소장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전무님이 고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다 상용화가 가능한 레벨이라서요.”
“알았습니다.”
그 순간 진성준 전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날 빤히 쳐다본다.
“정 팀장님. 커피에다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입맛이 까다로운 배우들의 취향을 맞춰주려다 보니 커피에는 제법 일가견이 생겼습니다.”
회귀 전.
깐깐한 입맛을 가진 작가와 배우들의 입에 맞는 커피를 타려고 갖은 노력을 했었다.
당시 난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고 어지간한 바리스타들보다 수십 배나 많은 커피를 마시며 최적의 커피를 만들어 냈다.
이후 각 배우와 작가마다 그들이 더 좋아하는 스타일을 찾기 위해 노력했었고.
즉 이곳에 내놓은 커피들은 회귀 전의 내 몸을 갈아 넣어서 만든 커피들이었다.
하여간 내 자식과도 같은 커피들이 인정받게 되자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때 진성준 전무가 아예 선택을 맡겨 버린다.
“이것 중에서 정 팀장님이 세 개를 골라 주십시오. 전부 훌륭하다면 아무래도 본인이 직접 추천하는 제품을 출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난 그 즉시 채점표도 보지 않고 3종류의 커피를 골랐다.
모든 종류의 커피 맛은 내 머릿속에 들어 있었으니까.
“아메리카노 스타일은 7번 카페라떼 스타일은 13번 에스프레소 스타일은 25번이 가장 대중적일 것 같습니다.”
진성준 전무가 태블릿을 힐끗 쳐다보더니 혀를 내두르며 말한다.
“거참······ 대단하십니다.”
뒤에서 있던 정대윤 소장과 연구원들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예. 전무님. 셋 다. 개중에서도 99점 이상을 기록한 제품들입니다.”
연구원들 또한 점수표를 보고 술렁거리고 있었다.
만족한 진성준 전무가 씨익 웃는다.
“그러면 해당 제품들의 레시피를 넘겨주십시오.”
“예.”
그와 동시에 진성준 전무가 고개를 돌린다.
“계약서 준비된 거 있지?”
여진수 비서가 내게 준비된 계약서를 내민다.
“확인해 보십시오 정 팀장님.”
난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이번에는 조금 더 꼼꼼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 * *
계약서를 검토하던 도중.
구두로 말한 것들과는 조금씩 달라진 게 눈에 띄었다.
“저기 계약서 항목이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요?”
“어디가 말입니까?”
“매출 대비 1%가 아니라 1.2%로 적혀 있는데요? 그리고 레시피의 라이센스 기간이 20년이긴 한데 일방의 거절이 없다면 귀속이 아니라 자동 연장이 되어 있고요.”
약속한 것보다 0.2%나 더 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0.2%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천억대 매출이면 무려 매년 2억이라는 돈을 더 준단 소리였다.
게다가 20년이 지나도 레시피가 진성식품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 여전히 내가 소유한 채 진성 그룹에 빌려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내가 원한다면 죽을 때까지 이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순간 진성준 전무가 씩하고 웃으며 계약서의 아래 항목을 가리킨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7조 1항을 확인해 보십시오.”
7조 1항.
갑(정윤호)은 제품 리뉴얼을 위한 레시피의 검토 및 변경 시 적극적으로 을(진성 식품)의 요구에 협력한다. 이에 응하지 않을 시 레시피는 진성에 종속된다.
그 경우 레시피가 을(진성 식품)에 종속된 날을 기준으로 3년간은 갑(정윤호)에게 계속해 라이센스비를 지급한다.
진성준 전무는 제품의 리뉴얼을 핑계로 날 계속 보고 싶다는 걸 계약서에 담아 놓았다.
“자주 보자는 거군요?”
“설비 변경이나 물의 변경 등등 사소한 것으로 커피 맛이 변경될 수도 있잖습니까? 하하. 그리고 친하게 지내면 더 좋고요.”
‘박수무당’인 날 곁에 두고 싶다는 속내가 빤하다.
하지만 연간 수십억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정도면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 년에 최대 두 번까지로 하시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세세한 조정을 끝낸 뒤 도장을 찍었다.
그제야 난 내가 준비해온 레시피를 건넸다.
여진수 비서는 레시피를 받은 다음 연구소장을 따로 불러 어디론가 나간다.
보안 처리를 하기 위한 모양이다.
그때였다.
곁에서 말없이 계약을 지켜보던 진아람 이사가 또 다른 제안을 한다.
“저희 진성 호텔&리조트에도 레시피를 제공해주시면 안 될까요? 판매량의 1.2% 드릴게요.”
“거긴 고급 리조트이잖습니까? 제 커피는 주로 일반적인 대중한테 맞춘 겁니다.”
“제가 듣기론 아니던데요? 이지연 작가님처럼 입맛 까다로우신 분도 단번에 사로잡으셨다던데요?”
그건 또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다.
“패키징은 저희가 고급스럽게 할 테니까 원두 비율을 더 높여서 한번 만들어 봐주세요.”
돈을 벌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열렸지만 난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진성 호텔&리조트는 인수 중인 세진 리조트의 분식 회계로 인해 조만간 자금 사정에 압박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일단 진성 식품에서 출시한 상품의 판매량을 지켜보고 찬찬히 생각해보시죠.”
“알았어요. 그러면 계약도 끝났으니까 오빠 방에 올라가서 간단히 차 한잔하고 가실래요?”
“예. 팀장님. 오신 김에 다른 제품 광고 이야기도 좀 하고 가시죠.”
진성준 전무는 다른 제품 광고 문의가 있다며 날 붙잡는다.
어제 영입한 서희주의 실력 테스트 때문에 가봐야 했지만 광고 제안이라면 그냥 가긴 뭣하다.
“알겠습니다. 대신 10분은 넘기기 곤란합니다.”
“예. 가시죠.”
진성준 전무가 엘리베이터로 몸을 돌린다.
그런데 그때였다.
띠잉~
갑자기 7층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린다.
“여어~ 여기들 있었네?”
진성그룹의 맏이인 진명규 부회장이 손을 흔들며 내린다.
1년 전까지 이곳 진성식품의 대표였던 그는 현재 그룹 부회장 자리를 맡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임원들이 동행하고 있는데 그 사이로 진성그룹의 둘째 진명희 진성 호텔&리조트 대표도 보인다.
회귀 전 저 두 남매가 하던 갑질들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진다.
당시 굴렁쇠 엔터의 연예인들은 진성에 모델이 되기 위해 두 사람이 부른 행사에 비용도 받지 않고 불려가곤 했었다.
심지어 난 웨이터 복을 입고 서빙도 해야 했었다.
어쨌건 갑질이 익숙한 두 남매는 현재 차기 진성그룹의 후계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였다.
진명규 부회장이 46살 진명희 대표가 44살로 진성준과 진아람 남매와는 띠동갑이나 차이가 나 이미 회사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뒤에 서있는 임원들 대부분 역시 진명규 남매의 사람들이었고.
세를 과시하며 나타난 진명규 부회장을 보자 진성준 전무가 인상을 찌푸린다.
“형님과 누님이 여긴 웬일입니까?”
진명규 부회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히 웃었다.
“네가 재미난 짓을 한다는 소문이 들리더라고. 그래서 와 봤어. 그 일 잘하던 최 소장을 바꾸고 새로운 커피를 만든다길래 궁금하기도 하고.”
진성 식품 연구소는 본사와 붙어 있었기에 내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바로 찾아온 모양이다.
진성준 전무가 불평 어린 말투로 말한다.
“식품 쪽은 제게 알아서 하라고 하셨잖습니까?”
“아~ 물론. 커피를 만들든 연구소장을 바꾸든 니 맘이지. 인정. 그런데 말이야······”
진명규 부회장은 진성준을 노려보며 말한다.
“새 커피 레시피가 우리 진성의 사람이 아니라 외부 사람이 만든 거라던데 맞아?”
진명규 부회장의 지적에 진성준 전무가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천하의 진성 식품이 커피 레시피 하나 못 만들어내냐는 질책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 식품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외부 사람을 불러들여서 우리 진성의 체면을 바닥으로 꼬라박은 주제에 뭔 변명이 그리 많아!”
진명규 부회장이 기가 찬다는 듯 말하자 진성준 전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진성준 전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는 걸 보자 얼마큼 힘 차이가 나는지 알 수가 있었다.
진명규 부회장은 그렇게 진성준 전무의 체면을 뭉갠 이후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 진성 식품을 시끄럽게 만드는 게 너냐?”
진명규 부회장이 보자마자 반말을 한다.
그런데 이 인간 날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배다른 동생이 쓸만한 카드를 손에 넣었다는 소식이라도 들었는지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이다.
회귀 전 내 기억 속 진명규 부회장은 작은 것 하나도 동생에게 양보하고 싶어 하지 않는 욕심 많은 형.
날 보는 음습한 그의 눈빛을 본 순간 진성그룹의 후계 싸움에 얽혀들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진명규 부회장은 한번 눈 밖에 난 사람을 호의적으로 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되네.’
그렇다면 내게 남은 선택지는 진성준 전무를 차기 회장으로 미는 것뿐이다.
쉽진 않겠지만 내 손에 들린 다이어리가 있다면 충분히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진성그룹 후계 전쟁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