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6화
456. 한우혁
한우혁은 키 183cm의 장신에 새하얀 피부 우수에 젖은 눈동자를 가진 미남 배우였다.
그런데 3년간의 투병 생활에 지쳤는지 지금은 꽤 마른 체형을 하고 있었다.
반질반질하던 피부에는 기름기가 없어 퍽석하고 안색은 파리해 보인다.
머리카락이 많이 자란 걸 보니 항암 치료가 끝나긴 한 모양이지만 아직은 완벽한 몸이 아니란 걸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한우혁의 곁에는 <정희왕후>의 이선창 PD와 리버 엔터테인먼트의 구일선 이사가 앉아 있다.
딱 봐도 배역 캐스팅 중이었다.
‘늦었나?’
배역에 캐스팅되면 자연스레 현 소속사와의 계약도 연장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당황한 기색을 지운 채 우선 인사부터 꺼냈다.
“안녕하십니까? 이 PD님.”
올해 45살인 이선창 PD는 사극 연출만 10년 넘게 한 사극 전문 PD였다.
게다가 배우들 연기 지도에도 도가 터 있어 그의 손을 거치면 신인마저 좋은 사극 배우로 거듭나게 하는 능력자이기도 했다.
KBC에서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었기에 이선창 PD가 편하게 말을 꺼낸다.
“여긴 무슨 일인가 정 팀장?”
이선창 PD는 우리 <화란전>과 경쟁하는 <정희왕후>의 PD.
그런 그에게 <화란전>의 배역 캐스팅 때문에 왔다고는 말을 할 순 없었다.
“우혁 씨가 완치되셨다고 해서 저희 회사로 스카우트할까 하고 찾아왔습니다.”
거실에 있는 한우혁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설마 자신을 데려가려는 회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표정이다.
“저 저를요?”
난 한우혁을 향해 빙긋이 웃으며 명함을 건넸다.
“굴렁쇠 엔터 정윤호 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아 예. 알고 있습니다.”
명함을 건네자 이선창 PD가 피식하고 웃는다.
“하긴 우리 우혁이. 작품만 잘 만나면 크게 터질 배우지.”
한우혁과 함께 일을 해 봤기에 그의 진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선창 PD였다.
“그런데 PD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조연 배우 캐스팅 때문에 리버 엔터에 들렀는데 우혁이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뭐 나도 상태 좀 보러.”
역시나 캐스팅을 하러 온 게 맞았다.
애써 태연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이선창 PD는 내가 온 것만으로도 의심을 시작한다.
“사실 우혁이 상태가 조금 불안해서 배역을 확정하지는 않았었는데······ 정 팀장이 여기 온 걸 보니 미리 잡아둬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예?”
“하하하. 자네. 우혁이를 데려다 화란전에 꽂으려고 하는 거 맞지?”
역시나 방송국 경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느긋하게 웃으며 정곡을 찌르다니.
이선창 PD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더니 한우혁에게 말한다.
“우혁아. 너 이번에 나랑 같이 작업 하나 하자. 김종서 아들 역인데 대본을 보면 알겠지만 비중 있는 역이야. 나 믿지?”
<정희왕후>에서 김종서의 아들 역은 초반부를 견인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현재 한우혁의 몸 상태로는 소화하기 힘든 역이다.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는 등의 액션도 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한우역이 주춤거리며 답변한다.
“대본을 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이선창 PD가 나란히 앉은 리버 엔터테인먼트의 구일선 이사를 노려본다.
아직 대본도 주지 않았냐는 질책이 섞인 눈빛이다.
구일선 이사가 고개를 숙인다.
“죄송해요. PD님. 대본을 돌리다가 깜빡했어요.”
이선창 PD는 혀를 쯧쯧 차더니 다시 한우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혁이 네가 이렇게 주저주저하는 거 우리 와이프가 알면 진~짜 섭섭해할 거다. 전작에서 내가 하자면 무조건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명랑 서생>의 작가였던 가예은 작가는 이번 <정희왕후>를 쓴 작가이기도 했다.
이선창 PD와 동갑인 45살의 가예은 작가는 바로 이 이선창 PD의 아내이기도 했었다.
“그게 저······.”
한우혁은 배역을 고르는데 꽤 신중한 타입이다 보니 쉽게 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순간 리버 엔터테인먼트의 구일선 이사가 나서서 말을 더한다.
“우혁아. 우리 재계약할 때잖아. 3년 연장해 줄게. 계약금도 주고. 그러니까 이 작품 하자. 너 항암 치료도 다 끝났잖아. 병원비로 빚도 많이 졌는데 돈 필요 할 거 아냐?”
한우혁이 발병한 이후 리버 엔터테인먼트는 한우혁을 방치해 놓았다.
그런데 항암 치료를 마치고 이제 작품이 들어오니까 얌체처럼 계약 연장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화란전>의 비형랑 역에 추천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굴렁쇠 엔터로 영입도 힘든 상황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우혁이 마치 도와달라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떻게 한다?’
자칫하다가는 KBC PD와 척을 지고 리버 엔터테인먼트와도 전면전을 벌일 수가 있었다.
잠깐 고민해봤지만 역시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영입한다!’
이렇게까지 한우혁을 방치한 현 소속사에게 만큼은 절대로 그를 넘겨줄 순 없었다.
설령 방송국 PD와 사이가 벌어져도 말이다.
난 심호흡을 하고 먼저 이선창 PD에게 말했다.
“PD님. 항암 치료를 막 끝낸 사람에게 말 타고 칼도 휘두르는 역을 맡기는 건 조금 지나치신 게 아닙니까?”
이성찬 PD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드러났다.
“자네가 뭘 안다고 끼어들어? 대본이라도 봤어?”
이선창 PD는 굴렁쇠 엔터에는 <정희왕후>의 대본을 보내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회귀 전 이미 몇 번이나 봤던 드라마였다.
“예 봤습니다. 특히 초반부에 나오는 김종서의 아들은 액션과 말타기를 많이 소화해야 하지 않습니까? 만약 우혁 씨 촬영 중 쓰러지기라도 하면 PD님이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이선창 PD가 미간을 찌푸린다.
“어디서 대본을 보긴 본 모양인데······ 액션은 대역으로 돌리면 돼!”
“대역을 쓸 수 없는 씬도 반이나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우혁 씨 현재 몸 상태라면 액션은 절대로 소화하지 못할 겁니다.”
회귀 전 같은 위암을 겪었기에 위암 환자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항암 치료를 다 끝냈다지만 그 여파가 없을 리 없었다.
한우혁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은 격렬한 움직임을 해서는 안 된다며 말이다.
나로 인해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이선창 PD가 버럭 화를 낸다.
“정 팀장! 지금 나랑 한번 해 보자는 거야?”
“그게 아닙니다. PD님.”
“아니긴 뭐가 아냐! 내가 권하는 배역에서 빼내 화란전의 배역을 맡길 셈이잖아!”
솔직히 그건 맞다.
하지만 그 이유보다는 한우혁이 배역을 소화할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시다면 차라리 안평대군이나 집현전 학자 배역을 맡기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 배역들은 주인이 있는 배역들이야!”
“그렇다면 남는 건 단역들뿐인데······ 비중 없는 역은 우혁 씨가 하기에는 곤란하겠군요.”
이선창 PD의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PD들은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 있기에 이런 노골적인 거절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리버 터테인먼트의 구일선 이사가 나선다.
올해 38살인 구일선 이사는 7살에 아역 배우로 데뷔한 뒤 조연 생활을 하면서 엔터 회사의 이사가 된 사람이다.
분홍색 투피스를 입고 짙은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 그녀가 날 보며 경고하듯 말한다.
“정 팀장님. 꿈 깨세요. 우리 우혁이는 절대 그쪽 회사로 안 갈 거니까. 그러니까 PD님 성질 그만 건들고 가보세요.”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제껏 한우혁을 방치한 구일선 이사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구일선 이사님. 아픈 배우를 수년간 방치해 놓고서 배역이 들어오니까 신경 쓰는 척하시는 건······ 좀 부끄럽지 않습니까?”
“뭐라고요? 누가 방치했다고 그래요!”
“한우혁 씨 폰을 확인해 볼까요? 연락 내역에 구 이사님이 있는지!”
회귀 전 한우혁이 인터뷰에서 말한 것들이 속속들이 떠오른다.
항암 치료보다 소속사와 주변 인물들의 외면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이다.
나도 잘 안다.
죽어가는 동안 병원 침대에 누워서 느꼈던 그 끔찍한 절망감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까.
나야 죽기 전 한 달이었지만 한우혁은 그걸 무려 3년이나 겪었을 거다.
그런 기억은 쉽사리 잊혀지는 게 아니다.
“아니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그때였다.
한우혁이 각오를 한 듯 말한다.
“PD님.”
날 보며 씩씩거리던 이선창 PD가 시선을 돌린다.
“어 왜. 우혁아?”
“액션씬이 많은 배역이라면 이번은 힘들 것 같습니다. 보다시피 팔에 힘이 없어서 목검 들기도 힘듭니다. 저.”
이선창 PD가 와락 인상을 찌푸린다.
“그래서 진짜 안 한다고?”
“죄송합니다. 제 몸이 좀 회복되고 다른 작품으로 불러주시면 그땐 꼭 달려갈게요. 그땐 설령 출연료를 안 주셔도 아무 말 없이 출연하겠습니다.”
이어서 한우혁이 구일선 이사를 쳐다본다.
“구 이사님. 우리 이제 여기까지 하죠.”
“우혁아!”
“그동안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우혁이 속 좋게 고개를 숙인다.
화가 난 이선창 PD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괜한 걸음을 했군!”
이선창 PD의 말에는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동시에 날 향해서는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쳐다본다.
“죄송합니다 PD님.”
공손히 사과했지만 이선창 PD는 대꾸도 없이 몸을 돌려 버렸다.
이선창 PD는 그렇게 찬 바람을 휘날리며 사라져 버렸다.
원한 건 아니었지만 이선창 PD와는 척을 저버렸다.
아무래도 <정희왕후>와는 피 터지는 대결을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안 그래도 경쟁 상대라서 날이 서 있는데 한우혁을 빼돌려버린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뒤이어 구일선 이사가 일어나며 뾰족한 말투로 말한다.
“두 사람. 어디 잘 되나 두고 봐요!”
구일선 이사는 먼저 나간 이선창 PD를 따라 급하게 달려나간다.
“PD니~이~임!”
두 사람이 사라지자 한우혁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기댄다.
그리고는 날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정 팀장님. 진짜 저 영입하러 오신 거 맞으시죠?”
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때부터 난 계약 조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계약금은 5천만 원.
병원비는 총 2억까지 회사에서 미리 대출해주고 나중에 분할로 갚을 수 있게 해주겠다 말했다.
더군다나 앞으로도 병원비 20%는 회사에서 부담하겠다는 말도 함께 말이다.
조건을 다 들은 한우혁이 놀란 눈으로 되묻는다.
“너무 감사하긴 한데······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암 환자였던 그는 내가 내민 조건이 납득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언제든 병이 재발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고 있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미래를 함께 만들어 보자는 사람일 테니 말이다.
난 잠시 태블릿을 내려놓고 한우혁과 시선을 맞췄다.
항암 치료는 끝났다지만 파리한 안색과 가녀린 몸.
아직 병색이 완연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난 짧게 심호흡을 한 뒤 흔들림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우혁 씨를 믿으니까요.”
한우혁이 가볍게 떨기 시작한다.
“저를······요?”
“예. 그 힘든 항암 치료를 이겨내고 이렇게 재기를 위해 노력하고 계시잖습니까? 전 우혁 씨가 예전보다 훨씬 나은 배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를 스카우트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회귀하기 전까지 그의 병이 재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그의 연기가 깊어진 것도 이유가 있었다.
죽다 살아난 이후.
한우혁의 연기에는 또래의 배우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우혁이 혹시나 하고 묻는다.
“제 병이 다시 발병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난 그런 한우혁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말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설령 그런 일이 있어도 저희 굴렁쇠는 배우님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암 환자의 미래는 본인도 의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회귀한 난 누구보다 분명히 말할 수가 있었다.
한우혁에게는 앞으로 문제가 없다고.
내 말을 들은 한우혁이 가볍게 떨기 시작한다.
난 그런 한우혁을 보며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화면에 떠 있는 가계약서의 계약 기간에 5년이라는 숫자를 기입 했다.
5년이라는 장기 계약을 한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돌봐주겠다는 뜻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기간을 10년쯤으로 늘리고 싶지만 배우님께서 싫어하실 수도 있으니 일단 5년 이후 재계약을······.”
그때였다.
가만히 숫자를 바라보던 한우혁이 내게 터치펜을 달라고 손을 내민다.
“펜 좀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한우혁에게 터치펜을 건네자 그는 펜을 받은 뒤 지우개 기능을 이용해 5라는 숫자를 지운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10이라는 숫자를 쓴다.
“황룡영화제에서 태풍 씨의 소감을 들었습니다. 태풍 씨를 구해주셨듯 저도 좀 구해주십시오.”
난 한우혁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우혁 씨. 제가 온 힘을 다해 우혁 씨의 재기를 돕겠습니다.”
그제야 한우혁이 환하게 웃는다.
“그렇다면 전 굴렁쇠가 아니라 정 팀장님을 믿고 가겠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카우트 성공이다.
* * *
한우혁과의 가계약을 마친 나는 곧바로 <화란전>에 출연할 것을 제안했다.
한우혁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예? 아까 ‘정희왕후’는 출연을 말리셨잖습니까?”
사극에서는 승마와 검술은 거의 필수나 다름없다.
하지만 <화란전>에서의 비형랑은 도깨비다 보니 그 둘 모두를 거의 하지 않는다.
“비형랑이란 캐릭터는 도깨비가 둔갑한 인간이란 설정입니다. 승마는 거의 하지 않고 극 중에서 검술보다는 특별한 능력을 사용합니다. 능력을 사용하는 장면은 보통 CG를 사용할 거고요.”
한우혁은 태블릿으로 대본을 곰곰이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다 좋은데 4화부터 바로 나오는 캐릭터인데요?”
“예. 비형랑은 늙지 않는다는 설정이 있어서 유진이의 아역 때도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당장 촬영을 시작해야 할 텐데 제가 촬영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은 탓에 한우혁은 <화란전>에 출연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겐 방법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우혁 배우님.”
그리고 난 활짝 웃으며 그 방법을 말해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