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2화
452. Happy Birthday
‘아직 이름이 안 정해졌다고?’
분명히 회귀 전 이맘때는 제품의 이름이 정해져 있었다.
급한 마음에 제안서를 펼쳐봤지만 브랜드명 칸에는 ‘THE 베스트’라는 문구가 없었다.
대신에 ‘즉석커피(RTD)’라는 내용만 적혀 있었다.
실수다.
회귀한 이후 많은 것들이 달라진 영향인지 아직 제품명을 확정 짓지 않은 상태였다.
‘어떻게 한다?’
그런데 그때.
조금 전 진성준 전무의 입으로 ‘THE 베스트’인 걸 어떻게 알았냐고 반문했다는 것이 머리를 스쳤다.
즉 내부적으로 제품명은 이미 정해졌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또 하나 더.
회귀 전 ‘THE 베스트’란 브랜드 네이밍을 진성준 전무가 골랐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난 조금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실은 전무님께서 차기 커피 사업을 준비한다는 걸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최고를 지향하시는 진성준 전무님이라서 여러 이름 후보 중에서 ‘THE 베스트’로 브랜드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더군요. 그 이름이 워낙 인상적이라 기억에 남았나 봅니다.”
진성준 전무가 잠깐 멈칫한다.
하지만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러시군요.”
자기가 직접 지은 제품명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다행히 잘 넘어간 모양이다.
하지만 진성준 전무는 아쉽다는 듯 또 다른 광고를 제안한다.
“그러면 라면이나 과자 광고 쪽은 어떻습니까? 저희 광고 모델을 교체할 시기가 됐는데 같이 하시죠?”
“태풍이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오케이입니다.”
“시원시원하셔서 좋군요. 그러면 광고 제안서를 팩스로 보내드릴 테니 조만간에 자리 한번 하시죠.”
“예. 전무님.”
“아 그리고 만난 김에 정 팀장님이 정유진 씨도 관리한다던데. 혹시 유진 씨는 생수 광고를 할 생각이 있습니까?”
진성 식품의 생수 브랜드는 ‘THE 순수’.
이 제품 역시도 진성준 전무가 직접 기획한 제품이다.
하지만 커피인 ‘THE 베스트’와는 달리 상품 패키지 디자인부터 물맛까지 좋아 크게 흥행하는 히트 제품이다.
이건 무조건 받아야지.
“유진이가 코카리 스웨트 광고를 하고 있지만 그건 이온 음료고 생수 광고를 맡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THE 순수’는 유진 씨가 하는 거로 하시죠.”
그때였다.
곁에 있던 TNT 엔터의 장삼덕 실장이 대화에 끼어든다.
“저 전무님.”
“왜 그러십니까? 장 실장님?”
“‘THE 순수’는 지난주에 저희 소이영에게 광고 제안이 들어온 상품입니다.”
순간 진성준 전무가 곁에 있는 여진수 비서를 쳐다본다.
“진짜야?”
“예. 홍보담당이신 최 이사님께서 소이영 씨와 미팅을 가지셨습니다.”
“그래?”
진성문 전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묻는다.
“장 실장님. 아쉽게 됐지만 전 유진 씨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최 이사님께서는 분명······.”
장삼덕 실장이 살짝 언성을 높여 항의하자 진성준 전무는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자꾸 최 이사님 최 이사님 하시는데 제가 최 이사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위치입니까?”
진성 그룹 회장의 셋째이자 진성 식품의 전무가 홍보 이사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처음부터 최 이사의 이름을 판 게 진성준 전무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장삼덕 실장이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전무님.”
“실망하신 건 알겠는데 소이영 씨는 다른 광고로 함께 하시죠.”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장삼덕 실장은 날 한번 째려보고 그대로 리셉션 현장을 떠나 버렸다.
그리고 이찬동 실장도 마찬가지로 날 한번 힐끗 째려보고 그 뒤를 따라나섰다.
내 배우들이 성공할수록 시기와 질투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 또한 스타의 매니저가 되면 자연스레 흘려야 할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성준 전무가 피식 웃는다.
“저 인간들 내가 나이가 어리다고 만만하게 생각하나 봅니다.”
그렇게 장삼덕 실장을 쫓아버린 진성준 전무는 여진수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여 비서는 최 이사님과 라운딩 약속 잡아봐. 그리고 기분 상하지 않게 미리 약 좀 치고.”
“예. 전무님.”
이어서 진성준 전무가 날 쳐다보며 손을 내민다.
“그러면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정 팀장님.”
“예. 전무님.”
그때였다.
리셉션 파티를 하던 CK 엔터의 손형태 대표가 다가온다.
그런데 경계 어린 눈빛을 한 채 대뜸 진성준 전무에게 언성을 높인다.
“진 전무. 자네 지금 무슨 꿍꿍인가?”
손형태 대표가 도끼눈을 하자 진성준 전무가 내 손을 놓으며 웃는다.
“아 손 대표님. 정 팀장이랑 광고 계약 이야기 중이었습니다.”
“광고? 어허 젊은 친구가 새치기하면 쓰나? 이태풍은 우리 CK에서 콕 하고 점찍은 배운데!”
“하하. 그렇습니까?”
뒤이어 LT 엔터의 신종기 대표도 달려온다.
그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손 대표. 밥 잘 먹고 무슨 신소리야? 태풍이는 우리 LT가 먼저 점 찍었어!”
세 사람 모두 흔히 말하는 로열패밀리들.
이런 거물들이 내 배우를 탐내 언성을 높이다니.
그 덕에 매니저인 내 어깨도 으쓱인다.
이런 게 바로 배우를 키우는 보람 중 하나다.
진성준 전무는 두 대표가 이태풍을 언급하자 마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하하하.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요.”
“뭐야? 벌써 계약했어?”
“예. 식품 쪽에서 태풍 씨와 계약 하나 맺었습니다.”
두 대표들이 실망한 표정을 짓자 진성문 전무의 표정은 더욱 밝아진다.
그때 진행자 쪽에서 메인스폰서를 찾기 시작한다.
-전무님~ 한 말씀 해주십시오.
진성준 전무가 이만 가봐야겠다며 내게 한 가지를 더 말한다.
“아 참 그리고 정 팀장님. 1004호에 묶으시는 손님들은 모두 펜트하우스로 올라가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예? 그게 무슨······.”
“제 성의입니다. 참고로 이벤트도 다 펜트하우스 룸에 준비해 뒀습니다.”
황룡영화제가 열린 인천 피라미드 호텔은 진성그룹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진성준 전무는 무료로 룸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해줬다고 한다.
그것도 최상층에 있는 펜트하우스로 말이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정 팀장님.”
진성준 전무가 내게 인사한 뒤 사라진다.
순간 손형태 대표가 입을 연다.
“신 대표님. 요즘에 젊은 친구들 참 당돌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게나 말이야.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말일세. 어디 어른이 침을 바른 배우를 넘보는지······.”
두 대표들은 앞으로 진성준 전무와 어울리지 말라며(?) 나름의 조언을 해준다.
하지만 광고주로서는 엔터 쪽보다 진성 식품이 월등히 낫기에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 * *
리셉션 파티에서 축하 연설을 마친 진성준은 먼저 파티장을 나왔다.
주차장으로 가던 진성준이 비서인 여진수를 쳐다본다.
“여 비서.”
“예. 전무님.”
“‘THE 베스트’. 그 브랜드명을 여 비서 말고 누가 알고 있지?”
조금 전 정윤호가 말한 ‘THE 베스트’란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이 놀랐다.
하지만 진성준은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놀란 기색을 감췄었다.
그리고 그건 비서인 여진수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마케팅 팀에서 나온 브랜드 네임은 프리미어 프리머스 두 개로 압축된 상황입니다.”
“그렇지? 아는 사람 없지?”
“예. THE 베스트는 전무님이 오늘 아침에 직접 지으신 거잖습니까?”
진성준 전무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 매니저가 그 브랜드명을 알고 있었지? 한글로 더도 아니고 영어로 T H E가 분명했어.”
여진수가 말을 할까 말까 주춤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
“실은 저 정 팀장이라는 사람. 박수무당 정 스타라고 신기(神氣)가 있다는 소문이 돕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작품의 흥행을 기가 막히게 맞춘다고 하더군요.”
“그래? 진짜 무당 비슷한 뭐 그런 건가? 미래를 보고 그러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업계에서는 진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이제껏 실패를 몰랐다고도 하더군요.”
순간 진성준의 얼굴에 짙은 욕심이 어린다.
“실패를 모른다. 그건 귀가 솔깃하군.”
“전무님. 따로 자리를 마련할까요?”
“아니. 일단 뒷조사부터 먼저 해봐. 사실인지 아닌지. 그런 다음에······ 접근해보지. 진짜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는 좋은 카드가 될 것 아냐?”
차기 그룹의 경영권을 노리는 진성준에게는 띠동갑 이상 차이가 나는 이복 남매들과 맞설 무기가 절실히 필요했다.
현재 그룹 곳곳에는 형님과 누님의 사람들이 잔뜩 박혀 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정윤호에 관한 조사를 끝내고 나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그래. 아 참 그리고 호텔 카운터에 이야기해서 국빈급 VIP 대접을 하라고 해. 좋은 인상을 남겨줘야지 다음번 만남도 잘 풀릴 거 아냐?”
“예. 그리 지시하겠습니다.”
진성훈은 지시를 마친 뒤 웃음을 머금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실패를 모른다고? 거참.”
진성훈은 모처럼 기분 좋은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 * *
리셉션 파티가 끝나고 이태풍과 함께 인천 피라미드 호텔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띠잉.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복도에 대기하고 있는 직원 두 명이 우릴 반긴다.
단정하게 옷을 입은 두 명의 호텔리어는 자신들을 버틀러라 소개하며 일종의 집사라고 말한다.
“24시간 문 앞에 대기하고 있으니 인터폰으로 연락주시면 언제든지 달려가겠습니다. 그리고 방음이 잘 되어 있으니까 프라이버시에 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호텔 최상층은 펜트하우스로 사용되는 3001호 하나 밖에 없다.
설명을 들은 나와 이태풍은 호텔리어를 따라 3001호로 향했다.
뒤를 따라가던 이태풍이 놀란 눈으로 묻는다.
“형이 여기 빌렸어요?”
“아니. 진성 식품 전무가 업그레이드를 해주던데? 여기 진성 그룹 거잖아.”
“헐~ 대박. 장난 아닌데요?”
“다 네 덕이지.”
“형 수완이 좋아서 그런 건데요 뭘.”
조금 전 수상 소감 때문에 서로가 민망해 딴소리만 해대는 중이다.
펜트하우스의 입구에 도착하자 밤 11시 59분이다.
다행히 12시가 넘기 직전에 도착했다.
그때 문고리를 잡은 호텔리어가 말한다.
“주문해 두신 선물은 제일 안쪽 방에 넣어뒀습니다.”
난 미소의 생일 특별 선물을 호텔에다 미리 옮겨놓았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좋은 시간 되십시오.”
커다란 흰색 문이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다.
문이 열리는 순간 펜트하우스 벽에 붙은 거대한 시계가 12시를가리킨다.
미소의 생일이다.
순간 펜트하우스에 모인 그 어떤 누구보다 먼저 미소에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생일 축하해! 미소야!”
펜트하우스의 넓은 거실에 있던 미소가 날 발견하고선 환하게 웃으며 달려온다.
“유노 삼촌~~!!”
회귀 전 미소 생일 때는 지방 출장을 가느라 함께 하지 못했었다.
다음 해에는 꼭 챙겨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회귀까지 하고서야 겨우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있었다.
덥석.
달려온 미소를 품에 안는 순간 다시 한번 회귀했다는 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 * *
미소를 안은 채 거실로 들어섰다.
넓은 펜트하우스 거실 테이블 위로 거대한 3단 케이크가 보였다.
케이크 옆으로는 각종 파티 음식들이 가득했고 그 주위로 정 팀 소속의 연예인들과 매니저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리고 펜트하우스 곳곳에는 이벤트 풍선으로 가득했는데 내가 주문한 것보다 몇 배는 더 많은 풍선이 있었다.
‘진 전무한테 빚을 졌네.’
그때 세리가 붉은색 가스 점화기를 꺼낸다.
“오빠. 이제 불 붙일게요. 그래도 되죠?”
“그래. 붙여.”
“넵.”
3단 케이크에는 20cm 정도 크기의 파워터프걸 캐릭터 양초가 일곱 개 꽂혀 있다.
그런데 세리가 불을 붙이는 순간 미소가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파워터프걸 캐릭터 초의 모자 윗부분이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삼촌! 빨리! 노래! 노래요!”
난 케이크 앞에 미소를 내려놓고 생일 축하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해피~ 버~어~쓰데이~ 투유~”
그 순간 정 팀의 연예인들은 다 같이 소리 높여 미소의 생일을 축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래가 마지막 소절이 되었다.
“사랑하는 우리 미소~~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가 끝난 순간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폭죽을 터트린다.
펑펑~
“생일 축하해 미소야~”
미소가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린다.
“감사합니다~아~”
축하 인사가 끝나자 세리가 말한다.
“미소야! 파워터프걸 머리 다 녹았어! 빨리 불 꺼!”
파워터프걸 양초 모자가 반쯤 녹아내리고 있다.
미소가 깜짝 놀라 힘차게 입바람을 분다.
“후우~~”
힘차게 불었지만 워낙 초가 크다 보니 불이 안 꺼진다.
미소가 다급히 유진이를 찾는다.
“엄마! 엄마! 블로우 모자 다 녹아! 도와줘! 엄마! 응?”
“그럼 같이 끌까?”
“응!”
유진이가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오빠. 같이 해요.”
“그래.”
유진이의 신호에 맞춰 모두가 입을 모아 후하고 공기를 불었다.
다행히 촛불은 파워터프걸의 리더인 블로우 모자를 다 녹이기 전에 꺼졌다.
다행히 모자를 제외하고는 캐릭터들의 모습이 온전한 탓에 미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된 이후 미소에게 말했다.
“우리 미소. 생일 선물도 받아야지?”
미소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괜찮아요! 오늘 언니랑 오빠랑 삼촌이랑 다들 와 준 게 제일~ 큰 선물이에요!”
“삼촌이 애써서 준비한 선물이 있는데 안 궁금해?”
그제야 미소가 눈치를 보다 배시시 웃는다.
“사실은 궁금해요. 헤헤.”
난 미리 옮겨놓은 선물을 가지러 가기 위해 지원자를 요구했다.
“저기 네 명만 저 좀 따라와 주시겠어요?”
순간 세리가 제일 먼저 손을 든다.
“저요! 저요!”
“팀장님 저도 갈게요.”
이윽고 이영진과 도란희 그리고 정상봉이 손을 든다.
난 네 사람을 데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포장된 내 선물을 보고 네 사람이 어이없단 표정을 짓는다.
“헐~ 대박! 유노 오빠. 이게 미소 선물이라고요?”
“팀장님. 이건 좀······ 과한 거 같지 않아요?”
미소의 7번째 생일 선물을 미리 본 네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