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1화
451. 무대 뒤
“윤호 형. 형이 난독증은 글을 읽지 못하는 대신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축복이라 말해줬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또 세상의 질타가 저를 단련시켜주는 채찍이라 말해준 덕분에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덤덤한 고백으로 시작된 이태풍의 수상 소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를 일으키기 위해 했던 그 모든 말들을 가슴 속에 꾹꾹 담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대본이 수정될 때마다 단 한 번도 싫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녹음을 해준 것 정말 감사드립니다. 형의 그 노력이 아니었다면 전 절대 이 상을 받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제가 여기 이 자리에서 설 수 있게 된 건 모두 형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윤호 형.”
이태풍이 날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다.
회귀한 이후 이태풍의 성공을 위해 노력했던 모든 시간이 한꺼번에 보상을 받는 기분이 몰려왔다.
난 벅차오르는 감격을 가까스로 억누른 채 이태풍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태풍아.’
이태풍은 그렇게 나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고서 마지막으로 팬들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올 한해 성원해주신 팬 여러분. 앞으로 더 나은 배우 이태풍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 앞에 당당히 서게 된 배우 이태풍은 그렇게 수상 소감을 마무리 지었다.
순간 배우들과 팬들이 힘찬 손뼉을 치며 축하를 보내기 시작했다.
난독증을 이겨낸 이태풍의 인간 승리에 칭찬과 격려를 담아서.
“태풍아 축하한다!”
“태풍아 고생했다!”
“인간 승리다 이태풍!!”
과거 이태풍의 심장을 잔인하게 헤집던 비난의 화살은 이제는 환호의 연가로 바뀌었다.
가진 건 얼굴뿐이라는 차가운 경멸의 눈길은 올해는 따뜻한 격려의 눈길로 변하고 있었고.
그렇게 무대 위에선 과거의 아픔을 모두 털어낸 내 배우가 당당한 표정으로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런 이태풍이 트로피를 들고 무대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며 손바닥이 터져나가라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정실모 중 한 명이 모두에게 인정받는 탑스타가 되었기 때문이다.
* * *
황룡영화제의 마지막 순서에서 최우수 작품상은 <경계 너머로>가 획득했다.
<경계 너머로>의 팀들이 무대 위로 올라가 수상 소감을 마친 이후 MC 김연수와 유한석이 마이크를 잡고 황룡영화제의 끝맺음 말을 하기 시작한다.
“늦은 시간 시청해주신 시청자 여러분과 관객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한국 영화의 발전을 지켜봐 주십시오. 저흰 내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MC들의 공손한 인사와 함께 제41회 황룡영화제가 끝이 났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황룡영화제에 참석한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난 그 틈에 유진이와 미소 그리고 하루를 비롯한 일행들에게 이곳 호텔로 올라가라고 말했다.
미소의 생일 파티를 하기 위해 이곳 피라미드 호텔에 파티룸을 잡아뒀기 때문이다.
“유진아 넌 미소와 하루를 데리고 먼저 1004호에 올라가 있을래?”
“알았어요. 근데 오빠는요?”
“난 잠깐 태풍이 리셉션 파티에 참석해야 해서. 최대한 빨리 올라갈게.”
시상식이 끝나면 수상자들과 배우들은 리셉션 파티를 연다.
리셉션 파티에서는 배우들끼리 친분을 나누기도 하지만 차기작에 대한 캐스팅부터 광고 계약들도 이뤄지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오빠.”
유진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 유진이는 미소와 정 팀의 배우들과 함께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배우들이 드나드는 앞쪽 통로로 나갔다.
이태풍은 수상한 다른 배우들과 사진을 찍으면서 인사를 하는 사이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를 체크했다.
그런데 얼토당토않게도 내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다.
[실시간 검색어]
1위 이태풍 수상 소감
2위 이태풍 얼짱 매니저
3위 황룡영화제 남우 주연상
7위 이태풍 난독증
10위 정윤호
······
‘뭐야. 이건?’
얼짱 매니저니 하는 낯부끄러운 검색어가 무려 2위에 올라와 있다.
조금 전 이태풍의 수상 소감을 TV로 본 시청자들이 올려준 순위인가 싶었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내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온 건 장문기 기자가 쓴 기사 때문이었다.
[은퇴를 고민하던 배우 이태풍. 그리고 그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매니저 정윤호. 두 남자의 스토리.]
-연예계 미다스의 손이라 불리는 정윤호 팀장은 난독증에 빠져 연기를 포기하려던 미남 배우 이태풍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했다.
-업계에서는 손대는 작품마다 대박을 터트리는 그를 박수무당 정스타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가 관리하는 스타는 정유진 정미소 하루 등이 있다. 연말 TV 연기 대상에서 이들이 어떤 상을 받게 될지 벌써부터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
(댓글)
-v고교래퍼v : 하긴 이 얼짱 매니저 없었으면 이태풍 성공하긴 힘들었을 듯. 1년 전까지 이태풍 완전 망삘이었음.
-초코맛요플레 : 그런데 매니저들은 돈 잘 범? 내 친구도 매니저 하겠다며 설치던데.
-될놈될 : 케바케임. 잘 버는 놈은 해외에 별장을 사고 못 버는 놈은 새벽부터 출근해 하루 종일 운전만 함. 저 매니저는 얼짱이라서 가산점 있는 듯.
-초코맛요플레 : ㅇㅋ 내일 입사원서 돌리고 결과 나오면 다시 오겠음. 나 얼짱임.
-딸기젤리 : 근데 저 매니저. 이태풍이랑 투 컷이 잡혔는데도 멀쩡해 보이네. 보통은 완전 오징어 될 텐데.
-GoGo 엔터 : 정윤호 씨. 저희 회사로 연락 한 번 주십시오! 저희가 스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email protected]
장문기 기자는 다른 기자들과 달리 이태풍의 기사가 아니라 나에 관한 기사를 써놓았다.
“하여튼 고수는 고수네. 남들 다 직구 던질 때 혼자 변화구 던져서 맞추네.”
혼잣말을 하며 웃던 순간 장문기 기자의 까톡이 도착한다.
[장문기 기자 : 정 팀장! 내 기사 봤어? ㅋㅋㅋ]
까톡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오늘은 봐 드리죠 장 기자님.”
이태풍이 상을 받은 덕에 그가 조회 수를 빨기 위해 나를 팔았다고 해도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잠시 후.
관객들이 다 나가자 그제야 배우들이 소란스레 떠들며 앞쪽 통로로 나간다.
나 역시 그 뒤를 따라 지하 1층 리셉션 파티장으로 향했다.
* * *
리셉션이 열리는 지하 1층 파티장으로 들어서자 한쪽에는 백 패널과 붉은 천이 바닥에 깔린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었다.
포토존의 앞에는 5단 케이크가 있는데 그 위에 41회 황룡영화제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백 패널에는 황룡영화제의 후원자이자 이곳 피라미드 호텔 소유주인 진성 그룹의 이름이 적혀 있다.
진성 그룹은 재계 25위 정도의 위치로서 식음료 사업과 호텔 리조트 사업을 주로 하는 회사.
특히 식음료 비즈니스에서는 CK 그룹에 버금갈 정도였다.
“자자. 이쪽으로 서세요. 최 감독님이 가운데 오시고······.”
리셉션 파티 진행을 맡은 개그맨 이태규가 오늘 수상한 배우들을 케이크 앞으로 불러낸다.
최성문 감독과 이태풍이 가장 가운데 서고 오늘 상을 받은 배우들이 곁으로 선다.
그 모습을 본 기자들이 연신 손을 흔들어 댄다.
“이태풍 씨 여기 좀 보세요! 웃으시고! 찍습니다!”
“예~ 좋습니다!”
이태풍이 케이크 커팅을 하려고 칼을 들어 올린다.
번쩍번쩍.
여기저기서 플래시들이 터지며 오늘 수상한 배우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리고 난 조금 전 오면서 받은 엔터테인먼트 대표들의 명함 세 장을 만지작대며 이태풍을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그때였다.
소이영과 민규리를 담당하는 TNT 엔터의 장삼덕 실장이 다가왔다.
지난번 주간 스타의 인터뷰 때 TNT의 유강석 대표와 충돌하다 보니 그와도 자연스레 사이가 서먹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곁으로 온 그는 오자마자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었다.
“정 팀장. 너 이번에 오지석 건 터진 것도 네가 셋업한 거라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너 맞잖아? 이찬동 실장이 가만히 안 있겠다면서 단단히 벼르던데?”
가해자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고?
이번 일은 철저히 서예종과 방상영 이사 그리고 에이스 엔터의 합작이었다.
아무래도 굴렁쇠 엔터 내부의 문제가 정리되고 나면 에이스 엔터도 한번 손을 봐줘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우선 그보다 이 일에 대한 해명이 우선이다.
가만히 있으면 찌라시가 되어서 연예계 전체로 퍼져나갈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말은 증거부터 가지고 와서 하라고 하십쇼. 그리고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 입 조심하라고 전해주시고요.”
강경한 어조로 말하자 장삼덕 실장이 슬쩍 발을 뺀다.
“뭘 또 그렇게까지 날을 세워? 아니면 아닌 거지.”
장삼덕 실장 역시도 부러움과 시기심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런데 그 순간 이찬동 실장도 리셉션 파티에 나타났다.
<안개 무리>로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박예선이 에이스 엔터 소속이기 때문이다.
날 발견한 이찬동 실장이 얼굴을 찡그리며 다가왔다.
난 곁에 온 그를 보자마자 작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 실장님. 함부로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시면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이찬동 실장이 씩씩거리며 대뜸 욕을 내뱉기 시작한다.
“XX. 헛소문? 웃기고 있네. 너 같은 새X는······.”
적반하장도 유분수였지만 그가 날 보자마자 이러는 건 이유가 빤했다.
아마도 기자들과 관계자들이 있는 이 파티에서 날 흥분하게 해서 사고라도 치게 하려는 수작이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그대로 되돌려 줘야겠다고 마음먹은 찰나.
이찬동의 뒤에서 꾸짖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같이 좋은 날. 왜 이리 날이 서 있습니까? 이 실장님?”
몸을 돌린 이찬동 실장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인다.
“아······ 그게 저······ 오셨습니까? 전무님.”
이찬동 실장을 얼어붙게 한 사람은 오늘 이 황룡영화제 메인 스폰서인 진성 식품의 진성준 전무.
올해 32살의 그는 위로 이복형과 이복 누나가 한 명씩 있고 아래로 동복 여동생이 있는데 차후 진성 식품 모회사인 진성 그룹의 후계를 놓고 이복 남매들과 왕좌의 전쟁을 벌이게 될 인물이다.
키도 크고 연예인에 버금갈 외모에다가 하버드 대학까지 나오다 보니 재계의 사모님들에게 사윗감 1위인 진짜 엄친아였다.
그런 진성준 전무가 이찬동 실장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린다.
“이상하군요. 내가 알기로는 오늘 오지석 씨가 불참한 건 본인이 큰 사고를 쳤기 때문인 걸로 아는데······ 그걸 왜 여기 정 팀장한테 따지십니까? 이 실장님?”
대형 광고주이자 황룡영화제 메인 스폰서의 힐난에 이찬동 실장이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제가 좀 흥분해서 실수한 것 같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매니저들끼리의 일이니 그냥 듣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지만 진성준 전무는 내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뭐 실수를 할 수도 있지만 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조심은 좀 하셔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찬동 실장을 가볍게 입막음 한 광고주님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정 팀장님. 저랑 이야기 좀 하실까요?”
“아 예. 말씀하십시오.”
“다름이 아니라 태풍 씨한테 커피 광고를 맡겼으면 합니다.”
그 순간 하마터면 기함을 터트릴 뻔했다.
이 시기 진성 식품이 야심차게 출시한 커피는 역대급 폭망을 하기 때문이다.
* * *
‘THE 베스트’였지?
회귀 전 진성준 전무는 자신이 직접 블렌딩한 커피로 야심차게 RTD(Ready To Drink) 커피 시장에 뛰어든다.
RTD 커피란 편의점 같은 곳에 비치된 캔 커피 컵 커피 병 커피 등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그 RTD 커피 브랜드로 진성준 전무가 만든 브랜드명이 바로 ‘THE 베스트’였다.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면 당시 배우 3실의 배우인 차태훈이 그 제품의 광고를 맡았기 때문이다.
회귀 전 <경계 너머로>의 주연 배우는 이태풍이 아닌 차태훈.
진성준 전무는 황룡영화제에서 수상한 차태훈 배우를 ‘더 베스트’의 커피 모델로 삼고 야심차게 브랜드를 런칭한다.
하지만 어설픈 고급화 전략으로 ‘THE 베스트’는 값은 비싸고 맛은 맹물 같은 요상한 커피가 되어 시장에 나왔었다.
문제는 그 제품 광고 때문에 당시 차태훈의 이미지가 상당히 나빠졌다는 거다.
차태훈은 돈만 되면 광고를 다 받는다는 둥 커피 맛도 모르는 미맹이라는 둥.
단지 광고 모델을 맡았을 뿐인데도 욕이란 욕은 다 먹었다.
그런데 그 광고가 이태풍에게 넘어오려 하고 있다니.
탑스타가 되자마자 이미지가 깎일 걸 걱정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어떻게든 이 광고는 거절해야만 했다.
‘어떻게 한다?’
그런데 그때 새까맣게 타는 내 속도 모르고 진성준 전무가 호의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원래는 이태풍 씨에게 직접 제의할까 했는데 조금 전 수상 소감을 들어보니 정 팀장님한테 말하는 게 빠를 것 같더군요. 여기 커피 광고 제안서입니다.”
진성준 전무와 함께 온 여진수 비서가 검은 파일철을 건넨다.
파일철을 받고 열어보려던 순간 진성준 전무가 말을 꺼낸다.
“제가 커피 블렌딩에 관심이 많아 직접 만든 제품입니다. 어떻습니까 정 팀장님. 이번 기회에 저희 진성과도 관계를 터 보시면 서로 좋을 것 같은데······.”
상대는 단지 광고주일 뿐 아니라 황룡영화제의 메인 스폰서로 문화계에도 영향력을 끼치는 거물.
특히나 식품 회사들은 광고하는 제품의 수가 워낙 많기에 광고주로서는 어지간한 대형 전자 회사와도 맞먹을 정도였다.
잘못 기분을 거슬렀다가는 진성 식품들 전체의 광고가 날아갈 수 있다.
하지만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난 파일철도 열어보지 않고서 매우 조심스레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좋은 제안을 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태풍이는 다른 회사의 커피 광고를 먼저 받았습니다. 죄송하지만 ‘THE 베스트’의 모델은 다른 분께 맡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였다.
진성준 대표가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묻는다.
“이상하네요? 저희 제품명이 ‘THE 베스트’라는 걸 어떻게 안 겁니까? 기획서에는 제품명이 안 적혀 있는데요?”
등골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