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7화
447. 황룡 영화제 1
“······시킨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제가······다 혼자서 계획한 일입니다.”
방상영 이사가 결국 혼자 총대를 멘다.
만족스럽지 못한 답을 들은 까닭에 최은태 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자네가 어떻게 혼자서 이런 짓을 했다고?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쩌렁쩌렁한 최은태 회장의 목소리에 방상영 이사가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때 이동구 감독이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들고 외친다.
“회장님! 아니 선배님! 선배님도 서예종 출신이시잖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선배로서 후배들을 이렇게 괄시하십니까!”
최은태 회장이 싸늘한 표정으로 이동구 감독을 노려본다.
“내가 괄시를 한다고?”
“예! 그간 저희 동문들이 정윤호 저놈 때문에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지 모르십니까? 오죽하면 저희 후배들이 뭉쳐서 이런 짓을 꾸몄겠습니까?”
그때였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최영호 은행장이 이동구 감독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엄지로 이동구 감독 어깨의 옴폭한 부위를 꾹하고 누른다.
“끄으으윽······.”
이동구 감독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최영호 은행장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한다.
“어디 함부로 회장님한테 언성을 높이십니까 이 감독님.”
이동구 감독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외친다.
“최 행장. 그 그만······ 그만······ 아악.”
최영호 은행장이 누르던 엄지에서 손을 뗀다.
그 순간 최은태 회장이 말한다.
“영호야. 녹음해 온 걸 이놈에게도 들려줘라! 그걸 듣고도 이 입에서 선배님이라는 소리가 나오나 어디 두고 보자꾸나.”
최영호 품에서 꺼낸 녹음기를 꾹하고 누른다.
-방 이사. 이번 일만 성공하면 자네도 우리 라인의 신뢰를 확실히 얻을 수 있으니까 각별히 신경 써! 알았어?
-이를 말씀입니까. 저기······ 그런데 최은태 회장님 쪽은 괜찮으시겠습니까? 회장님께서 요즘 굴렁쇠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시지 않습니까?
-그 영감탱이가 살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눈치를 봐? 에잉! 돈놀이나 하면서 동문들 욕 먹이는 그 인간은 언제 죽나 몰라.
녹음 파일에선 이동구 감독이 최은태 회장을 ‘그 영감탱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내가 들었던 녹음 파일의 뒷부분이다.
이동구 감독은 마신 술이 깨는지 딸꾹질을 시작한다.
“히끅. 회 회장님. 저 저건 그냥 술에 취해서 나온 헛소리······입니다. 히끅.”
이동구 감독이 차가운 흙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그러나 최은태 회장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 감독. 이 영감탱이가 하나 묻지. 내가 서예종에게 그토록 많은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은 이유를 아나?”
“아 압니다. 서예종의 교수님이시던 은사님께서 회장님을 아들처럼 거두셨었다고. 그래서 회장님이 서예종을 아들처럼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수십 년 전 은사께서 밥을 먹여주고 재워주신 덕에 팔자에도 없는 그림쟁이 짓을 하려 했었지. 비록 내 운명은 달라졌지만 난 은사님에 대한 존경과 은혜는 잊지 않고 서예종에 대해서 무한한 후원을 해왔었네.”
최은태 회장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영호야. 은사님께는 내가 직접 찾아뵙고 사과할 것이다. 그러니 이 시각 부로. 서예종에 관한 모든 지원은 끊거라.”
“예. 회장님.”
최은태 회장이 서예종의 뒤에서 지원해주는 금액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금이라 들었다.
그런데 이동구 감독이 저지른 일 때문에 그 지원이 모조리 날아가게 생겼다.
이대로라면 이동구 감독은 선후배들의 얼굴을 쳐다도 볼 수 없게 된다.
당연히 서예종 교수의 직책에서도 잘릴 것이고 후배들과 선배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가야 했다.
이동구 감독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최은태 회장이 다시 묻는다.
“이 감독. 마지막 기횔세. 자네의 배후만 솔직하게 말하면 모든 걸 용서하지. 모든 동문 선후배님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싶지 않다면 말하게.”
“회 회장님 그게 사실은······.”
그때 최만식 대표가 다급히 끼어든다.
“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최은태 회장이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열릴 듯 말 듯 하던 이동구 감독이 입을 꾹 닫은 까닭이다.
“무슨 말?”
최만식 대표를 노려보는 최은태 회장의 눈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이 감독이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서예종의 지원을 거두시는 건 좀 무리수이신 듯합니다.”
“무리수라고?”
“예.”
최만식 대표가 떨리는 목소리로 최은태 회장을 막아선다.
만약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배후인 자기 이름을 불게 된다면 그 여파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간 굴렁쇠 엔터의 주주 중 한 명인 이상필 회장도 거든다.
“맞습니다 회장님. 이동구 감독의 잘못으로 서예종 전체를 팽하시면 이제껏 쌓아온 인맥들이 한순간에 날아갑니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최은태 회장이 화를 참느라 얼굴이 파르르 떨린다.
한때는 쳐다도 못 보던 굴렁쇠 엔터의 주주들이 덤비는 걸 참기 힘든 모양이다.
더군다나 이 세 사람이 이번 일의 배후라고 의심되는 상황이기도 한 데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최은태 회장을 말려야 할 것 같다.
최만식 대표 하나라면 모를까 그의 뒤에는 여당의 실세 박상곤 의원이 버티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최만식 대표를 치기로 한 계획이 뒤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했다.
난 심호흡을 한번 하고 대답했다.
“회장님.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한다.
날 보는 최은태 회장의 눈에 의아함이 깃든다.
“정 팀장. 자네가 왜······.”
“회장님께서 서예종에 지원을 해주시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살고 있습니다. 여기 이 감독 같은 사람도 있지만 죄 없이 묵묵히 일하는 스태프나 감독들도 많지 않습니까? 종기가 생기면 종기만 도려내면 되지 환자의 목숨까지 앗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곁에 있던 강감찬 대표도 내 뜻에 동의한다.
“회장님. 정 팀장 말대로 하시죠. 방 이사나 이 감독이 혼자서 했다는데 그 이상을 징계할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자네도 같은 의견인가?”
“예. 회장님.”
최은태 회장이 말없이 날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화를 삭인 최은태 회장이 뒤늦게 천천히 입을 연다.
“영호야. 이 감독에게 가던 지원은 끊어라. 나머지는 원래 하던 대로 지원하고.”
“예. 회장님.”
그제야 이동구 감독이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최은태 회장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이 감독.”
“예 예. 회장님.”
“내일 아침 황룡 영화제 심사위원에서 사퇴하게.”
이동구 감독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방 이사는 오늘로써 해임일세.”
방상영 이사 또한 고개를 숙인다.
최은태 회장이 주위를 둘러본다.
“이의 있는 사람 있나?”
모든 주주들이 침묵을 지킨다.
“그러면 다들 나가 봐. 난 여기 정 팀장이랑 강 대표랑 할 말이 있으니까!”
축객령이 떨어지자 다들 각양각색의 표정을 하고 최영호의 안내를 받아 고택을 나갔다.
* * *
최은태 회장의 방.
최은태 회장은 앉자마자 내게 묻는다.
“정 팀장. 왜 말렸나? 두 놈 중 한 놈이라도 만식이의 이름을 불었을 텐데!”
난 흥분한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되물었다.
“그보다 박상곤 의원을 꺾을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여당에서 놈의 자리를 노리는 차기 경쟁자 그리고 야당에서 저격수를 후원하고 있네. 그들이 도와줄 걸세.”
“정치인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최은태 회장이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며 신음 소리를 낸다.
“끄응······.”
한국 최고의 문화 산실이라 불리는 서울예술종합대학교.
서예종의 가장 큰 후원자 역할을 해 온 최은태 회장은 곧 한국 문화 산업의 거물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를 버리면?
그냥 돈 많은 사채업자일 뿐이다.
사회적 영향력은 돈으로도 사기 힘든 무형의 자산이었기에 그걸 버리는 건 자충수였다.
“그러면 이번에는 방상영 이사까지 자르자는 말인가?”
“예. 하나씩 쳐내면 됩니다. 방 이사 다음은 정직당한 김동수를 완전히 도려낼 생각이니까요.”
최은태 회장의 눈이 번뜩인다.
“동수를? 그놈은 만식이가 특별히 챙기는 터라 쉽지 않을 텐데?”
“아닙니다. 놈을 쳐 낼 카드는 이미 손에 넣었습니다.”
현재 내가 김동수에게서 빼돌린 X-FILE에는 오주현이 스폰서를 구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난 김동수가 오주현을 누군가와 연결한다면 그때를 노려 파일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허허. 이것 참. 내가 어영부영하는 시간을 보낸 동안 정 팀장은 훌쩍 일을 진행 시켜놓았군.”
“그거야 뭐 회장님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다들 거물들 아닙니까? 철저히 준비하시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최은태 회장이 기특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알겠네. 그럼 이번은 방 이사까지만 하지.”
“예. 지금처럼 전 밑에 고인 돌들을 차곡차곡 빼낼 테니 회장님께서는 위에서 콱 막힌 큰 걸림돌을 제거해주십시오.”
최은태 회장이 날 빤히 쳐다본다.
“내가 오늘 정 팀장에게 많이 배워.”
“아닙니다. 제가 회장님 입장이라도 배후를 불라고 한 번 정도는 찔러 봤을 겁니다.”
“허허. 그런가?”
최은태 회장이 웃음을 그친 뒤 한숨을 짧게 내쉰다.
“알겠네. 난 박상곤 그놈을 상대할 차기 후보군을 빨리 키워 보도록 하지. 다음엔 이렇게 실수하진 않겠네.”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려던 난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아 그리고 병원에서 은기가 피습당하던 그 날 기억나십니까?”
“기억나고말고. 어떻게 그 일을 잊겠나?”
최은태 회장이 주먹을 꽉 쥐고 얼굴을 부들부들 떤다.
그날만 생각하면 여전히 화가 난다는 표정이다.
“그날 자리를 비켜주고 달아났던 경찰 중 한 명을 잡았다고 합니다.”
최은태 회장의 눈이 번뜩인다.
자신의 친아들을 노린 놈들과 결탁한 경찰은 원수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정말인가?”
“예. 서 검사님이 수사 중입니다. 그러니까 그쪽을 따라서 배후를 함께 파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이 뒤는 이제 맡겨두면 될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최은태 회장이 덕담을 건넨다.
“그간 이태풍 군이 고생 많이 했다고 들었네. 꼭 이번 황룡 영화제에서 수상하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고택을 나왔다.
차가운 겨울 밤공기는 그 어떤 때보다 맑게 느껴졌다.
* * *
다음 날.
굴렁쇠 엔터의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댄 나는 새벽같이 올라온 기사를 확인했다.
[이동구 영화감독. 황룡 영화제 공정성을 위해 심사위원 자진 사퇴. 안채석 서예종 심사위원도 동반 사퇴. 비 서예종 출신의 심사위원으로 교체.]
어제 고택에서의 일 이후 즉시 사퇴 의사를 밝힌 이동구 감독이다.
“빠르네 빨라.”
이렇게 되면 이태풍의 황룡 영화제 남우 주연상 수상에는 걸림돌이 사라져버렸다.
난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차에서 보온병을 들고 내렸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자 LCD 화면에는 방상영 이사에 관한 공지도 떠 있었다.
[공지 : 2020년 11월 29일. 방상영 이사 직무 정지. (해임 사유 발생)]
공지를 본 배우 1실 출신의 매니저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방 이사님이 해임되면 이젠 우리는 어떻게 하지?”
“최은석 실장님이 배우 1실을 맡기엔 아직 짬이 부족한데. 하······ 미치겠다. 이러면 이제 배우 2실이 회사의 실세가 되는 거 아냐?”
“아무리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고 해도 이건 너무 하잖아?”
“그나저나 우리도 배우 2실로 옮기는 건 어때? 우리 이준석 배우님도 관리부서를 바꿔 보는 게 어떠냐며 묻던데.”
“관우 엔터와 합병이 있잖아. 어차피 그때도 지각변동이 있을 거야. 그때 분위기 봐 가며 옮기자고.”
회사의 힘이 급격히 강감찬 대표 라인으로 기울게 되자 다들 강감찬 대표 라인으로 알려진 배우 2실로 옮기려 하고 있었다.
김동수가 정직 상태인 지금이 우리 세력을 더욱 늘릴 절호의 기회였다.
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하다 뒤늦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 * *
난 내 책상에 가방과 보온병을 둔 뒤 즉시 정 팀의 회의를 소집했다.
직원들이 모이자 역시나 방상영 이사의 해임에 관한 질문이 가장 먼저 나온다.
하지만 난 잘 모르는 사항이라 둘러대고 업무 지시를 시작했다.
“자자. 우린 일단 내일 있을 황룡 영화제나 집중하죠.”
그제야 소란이 가라앉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란희야. 내일 체리블라썸이랑 하나 축하 무대 리허설 일정은 어떻게 돼?”
“내일은 생방송이라 리허설 힘들대요. 그래서 오늘 오후 1시까지 가서 리허설 할 거예요.”
내일 공연하는 황룡 영화제는 1부와 2부에 나눠 특별 축하 무대를 한다.
1부에선 배우 오지석과 주영인이 특별 무대 삼아 강하나의 <새로운 시작>을 부르게 된다.
그리고 2부에선 체리블라썸이 오프닝 축하 무대로 과 를 부르고 강하나와 김종훈이 중간 특별공연으로 <혼불>을 부르게 된다.
즉 황룡 영화제 특별 무대는 사실상 굴렁쇠 엔터 가수들의 독차지나 다름없었다.
그때 도란희가 묻는다.
“그런데 팀장님. 오지석은 1부 특별 무대 할 수 있대요? 기사 난 거 보니까 펑크낼 거 같던데요?”
“아직 버티고 있어 그 인간. 자기는 죄지은 게 없다면서.”
“헐~ 진짜요? 미친 거 아닌가?”
도란희가 눈을 부릅뜨자 홍보 담당 김미혜 대리가 회의실에 기사 들을 띄운다.
“오늘 아침 기사예요.”
[에이스 엔터. “오지석 폭행은 모 기자의 무고! 친형제처럼 친한 사이에 치는 장난이었을 뿐.”]
[오지석. “술에 취해 발을 기대려다가 손이 닿은 것일 뿐. 폭행은 아니다! 로드 매니저가 도와주던 장면을 악의적 편집!”]
[에이스 엔터의 로드 매니저. 폭행이 없었다고 증언.]
[오지석. 황룡 영화제 참석 강행!]
소속 배우들이 사고를 치면 모든 엔터 회사들은 일단 부정부터 한다.
폭행이든 열애든 마약이든.
입막음을 시키고 돈으로 처리하기 위해 어떻게든 시간을 버는 거다.
그때였다.
[발신자 : 한연홍 기자]
무슨 일인가 하고 받았더니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 팀장님!
“아. 예. 한 기자님.”
-저 좀 도와줘요! 방금 에이스 엔터 변호사가 연락해 왔는데 절 명예훼손으로 건대요!
오지석은 잘못을 사과하기는커녕 어린 로드매니저를 협박해 자신이 저지른 짓을 은폐하려 하고 있었다.
이미 이태풍의 남우 주연상 수상은 확정된 거나 다름없지만 오지석의 행패를 보고 있을 순 없었다.
“한 기자님. 지금부터 제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난 오지석을 완전히 묻어버릴 방법을 말해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