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5화
445. 황룡 영화제 준비 4
VIP 클럽 루시의 입구.
언제나 그렇듯 경비원 두 사람이 날 막아선다.
“오늘은 룸이 가득 찼습니다.”
클럽 루시는 오로지 룸만 있는 곳이다.
“예약하고 왔습니다.”
“명단에 있는 이름이······.”
명단을 확인하려는 순간 난 미리 뽑아둔 현금을 꺼내 들었다.
현금 100만 원.
두 명의 경비원이 반씩 나누면 50만 원씩이다.
“예약된 거 맞죠?”
경비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7번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역시나 이곳은 돈이 신분증이자 통행증이다.
7번 방은 꽤 큰 방이지만 내가 원하는 곳은 그곳이 아니다.
“아뇨. 11번 방으로 주십시오.”
“11번 방은 제일 작아서 노시기에는 불편하실 텐데······.”
“혼자 왔는데 큰방 필요 없습니다. 조용히 놀다 갈 거니까 11번 방 주십시오.”
11번 방은 클럽 루시에서 가장 작은 방이다.
그리고 여종업원들 휴게소와 화장실과도 가깝다.
그 말인즉슨 고안나를 불러내기 딱 좋은 곳이란 소리였다.
“알겠습니다.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혹시 안나는. 출근했습니까?”
경비원이 씨익 웃는다.
“아까 막 출근했습니다. 불러드릴까요?”
“예.”
경비원들이 인터콤에다 대고 바로 말한다.
“VIP 손님 한 분 입장합니다. 안나 씨 지명. 11번 방으로.”
경비원 두 명이 열어준 문을 지나 지하로 향했다.
방상영 이사의 비밀을 캐고 오랜 친구를 보기 위해서.
* * *
익숙한 복도를 따라 11번 방에 도착했다.
화장실과 여종업원 휴게실은 바로 옆방인 곳이다.
난 마시지도 않을 100만 원짜리 코스를 시켜놓고선 고안나가 오길 기다렸다.
어차피 일하는 동안에는 전화도 안 받기 때문이다.
달칵.
문이 열리더니 은색 쟁반에 술과 안줏거리를 고안나가 직접 가져온다.
룸살롱이 아닌 VIP용 사교 클럽이다 보니 복장은 투피스가 기본 옷차림이었다.
연예인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고안나가 분홍색 투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고안나의 키는 171cm인데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를 하고 있으며 피부가 투명하다 싶을 정도로 맑았다.
특히나 눈동자가 옅은 갈색이라서 보는 사람마다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 고안나가 내 얼굴을 보며 깜짝 놀란다.
“뭐야? 윤호 너였어?”
난 손을 들어 올려 고안나를 반겼다.
“여어~ 잘 지냈어?”
고안나는 술과 안주를 놓고 날 보자마자 투덜대기 시작한다.
“잘 지냈을 거 같냐? 친구라고 하나 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도 안 하는데.”
“미안······하다.”
그녀 역시도 나처럼 친구가 없었다.
더군다나 본인이 하는 일이 부끄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육원 친구들과도 연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고안나의 일이 사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보육원 출신들은 그 흔한 아르바이트도 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기에 막노동이나 술집에서 일하는 일이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건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척을 했지만 고안나는 잔소리를 그치지 않는다.
“미안하면 밖에서 만나서 돼지국밥에 소주나 한잔 사면서 사과하면 되지. 뭐 한다고 이런 데와? 돈 아깝게.”
“1년 만에 만나서 잔소리냐? 너도 참 사람이 안 변한다.”
“객쩍은 소리 말고 대답해. 왜 왔어?”
“실은 오늘 손님 중에서 우리 회사 방상영 이사랑 이동구 감독의 뒤를 좀 캐야 해서. 도와달라고.”
고안나에게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좋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와 내가 친해졌던 건 서로 숨기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고안나가 소파에 기대며 투덜댄다.
“하긴 그런 게 아니면 네가 여길 올 리 없지. 알았어. 도와줄게.”
역시나 흔쾌히 대답한다.
“그러면 돼지국밥에 소주 한 병 빚진 거다? 언제 살래?”
“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좋아. 올해 가기 전에는 부른다. 전화번호는 그대로지?”
“당근.”
그런데 그때였다.
고안나가 가져온 술과 안주를 가져 나가려고 한다.
“뭐해?”
“네 부탁이라면 그냥도 들어줄 수 있어. 이건 비싸니까 돌려보내려고.”
난 고안나가 든 쟁반을 잡았다.
“그러지 마.”
고안나가 피식 웃는다.
“우리 윤호. 요즘 잘 나간다던데 돈 많이 벌었나 봐?”
난 어깨를 으쓱였다.
“내 소식이 여기까지 나냐?”
“당연하지. 여기 오는 연예계 쪽 사람들은 다 너 이야기하는데 내가 어떻게 몰라? 우리 윤호 완전 거물 다 됐던데?”
“거물은 무슨. 아직 피라미야.”
“하여간 겸손한 건 여전하네. 그리고 너나 나나 기댈 사람 없는 신세인데 악착같이 돈 모아도 부족할 판에 웬 낭비야? 돈 아껴.”
고안나는 자기가 곤란해질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냥 내 돈은 받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난 그럴 생각이 없다.
“됐어. 오늘 돈 넉넉하게 뿌리고 갈 거야. 그리고 네가 이러면 내가 불편해서 다시는 너 못 봐. 나 빚지고 못 사는 거 알지?”
다시 못 본단 말 때문이었을까 고안나가 한숨을 푹 쉬며 쟁반을 놓는다.
“알았어. 그러면 내가 뭘 해줄까?”
난 미리 준비한 두 가지 물품을 품에서 꺼냈다.
하나는 소형 녹음기고 또 다른 하나는 숙취해소제와 간 해독제 알약이다.
“이동구 감독이랑 방상영 이사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해서 좀 전해줘. 뒤는 탈 없이 보호해 줄게.”
고안나가 내가 내려놓은 물품들을 보며 피식 웃는다.
“재벌이나 정치인이면 또 몰라도 방 이사나 이 감독 정도는 우리 가게 식구들 터치 못 해.”
“그래도 만반의 대비는 해 둬야지. 그리고 너희 마담. 돈 주면 다 커버해주잖아.”
“하여간 준비성 하나는 여전하네 정윤호.”
고안나는 숙취해소제를 먼저 한잔 벌컥 들이켠 뒤 소형 녹음기를 주머니에 넣는다.
“한번 누르면 녹음. 두 번 누르면 녹음 끝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걱정하지 말고 앉아서 기다려.”
고안나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섰다.
난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다시 한번 벨을 눌러 마시지도 않는 술들을 더 주문했다.
“V3 코스로 넣어줘요.”
V3 코스는 천만 원에 맞춰 세팅되는 코스를 말한다.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터가 허리를 반으로 굽힌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리고 마담한테 직접 오라고 해주세요.”
난 그 말을 하며 다시 한번 팁을 건넸다.
50만 원.
일반 웨이터에게는 과할 정도의 팁이지만 돈이 곧 권력인 이곳에서는 최대한 돈을 뿌려두는 게 좋다.
“가 감사합니다. 대표님.”
단번에 형님에서 대표님으로 격이 상승한다.
한 푼 한 푼이 아쉬웠지만 지금은 써야 할 때다.
고안나의 안전을 위해선 최대한 돈을 뿌려두는 게 좋기 때문이었다.
* * *
클럽 루시 3번 방.
이동구 감독과 방상영 이사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다.
테이블에는 고급술들이 가득하고 곁에는 여종업원들이 앉아 있었다.
새로 여자 한 명이 또 들어왔지만 이동구 감독은 신경도 쓰지 않고 소리를 질러댄다.
“방 이사!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내일 삼청각으로 한 교수를 불러낸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정 팀장이 안 나오다니?”
“죄송합니다. 정 팀장 그놈이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도무지 넘어오질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자고?”
“일단 태풍이한테 파파라치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신인 여배우를 태풍이에게 접근시킬 생각입니다.”
술에 취한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이동구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설마 협박이라도 하려고?”
“예. 이따가 같이 있는 사진만 찍으면 무조건 내일 점심땐 정윤호를 불러낼 수 있습니다.”
그제야 이동구가 웃는다.
“제법인데 방 이사?”
“그러니까 감독님은 내일 한정주 위원장님을 삼청각 12번 방으로 불러내 주십시오. 유리 창문 있는 방이요.”
“그건 내가 특.별.히. 신경 쓰지. 정 팀장이나 그 방에 오게 해.”
“예.”
방상영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다른 심사위원들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동구 감독은 여종업원이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말한다.
“이태풍이 여섯 명 오지석이 네 명이야.”
“서예종 쪽이 힘을 뭉쳤는데도 고작 그 정도입니까?”
“고작이라니? 까고 말해서 올해 이태풍의 인기가 어디 보통이었나? 6대 4만 해도 기적이지!”
방상영이 아차 하고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방상영이 고개를 숙이자 이동구가 헛기침하며 답한다.
“크흠. 하여간 한정주와 측근들을 자진 사퇴시키고 내가 위원장이 되어서 우리 측 사람을 박아 넣어야 해. 그러면 심사위원들 표는 6대 4로 역전할 수 있어.”
“네티즌들이 뽑은 남우 주연상의 표는 1등 2표 2등 1표니까 심사위원들의 표에 더하면 총득표수는 7대 6으로 오지석이 이기겠네요?”
“그래. 아슬아슬하게 이길 거야. 그럴싸하게.”
그때 이동구 감독 곁에 있던 고안나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미 원하는 건 다 녹음했기 때문이다.
순간 이동구가 고안나의 손목을 덥석 잡는다.
“어딜 가려고?”
고안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녹음하는 걸 들켰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안나는 재치를 발휘해 대답했다.
“제가 감독님을 두고 가긴 어딜 가요? 그냥 화장실 좀 다녀오려는 거니까 안심하세요.”
이동구가 가만히 노려보다 말한다.
“설마 너······.”
고안나는 뜨끔했지만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짓는다.
순간 이동구가 뱁새눈을 하고 묻는다.
“다른 방에 가서 안 오려는 거 아냐?”
고안나는 안도하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두 분이 제일 앞 타임에 오셔서 지금 손님도 없어요. 뭐 정~ 의심이 가면 같이 가시든가요?”
그제야 이동구가 의심을 풀고 고안나의 손을 놓아준다.
“2분 안에 와.”
고안나가 입을 삐죽인다.
“큰 거예요!”
그 순간 이동구가 껄껄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5분.”
“오빠 나 변비야!”
“술 마시는데 헛소리는. 알았어. 10분 안에 와!”
고안나는 그렇게 툴툴대며 문밖으로 나와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 옆에 있는 11번 방으로 향했다.
* * *
방으로 들어온 고안나가 녹음기를 건네준다.
“여기 있어.”
녹음기를 받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방상영 이사와 이동구 감독의 대화가 녹음되어 있다.
드디어 방상영 이사를 잘라낼 수 있는 증거를 확보했다.
“고맙다 안나야.”
“고맙거나 말거나 나 당장 돌아가 봐야 하니까 어서 나가 봐. 그리고······ 이태풍 씨한테 신인 여배우가 덤벼든다니까 꼭 막고.”
“오케이.”
고안나가 다시 일어나다 테이블에 깔린 술병을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내 테이블에 깔린 술값만 천만 원이 되기 때문이다.
“뭐야? 너 미쳤어? V3 코스를 시켜?”
“천만 원은 채워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욕을 안 먹지. 그리고 이 술들 보고 병뚜껑을 안 따겠다고 하니까 마담이 엄청나게 좋아하던데?”
고안나가 가만히 날 쳐다본다.
“윤호 너······ 많이 변했네?”
그래.
10년을 지나 회귀한 뒤에 다시 돌아왔으니까.
“그래서. 보기 안 좋아?”
고안나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당당해 보여서 좋아.”
그 순간 고안나의 얼굴에서 어두운 빛이 잠깐 깃들었다 사라진다.
자신의 처지와 달라진 내가 멀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난 그 즉시 고안나에게 말했다.
“안나야. 너 이 업계 뜬다고 했잖아. 내가 도와줄 테니까 이제는 이 일을 그만두는 게 어때?”
고안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안 돼. 아직 우리 유나 학비도 다 못 모았어. 집도 좀 더 좋은 데 옮기고 유나 공부시킬 돈도 모으려면 더 일해야 해.”
난 그러다가는 절대 이곳을 못 벗어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대안을 세우지 않고서 말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녀의 가슴만 아프게 할 뿐이었지.
일단 오늘은 급한 일들이 가득하니 아무래도 조만간 돼지국밥을 먹을 때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다.
“알았어.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그래. 이제 나 가봐야 해.”
고안나가 은은한 수국향을 풍기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고안나.”
“왜?”
“근데 너 뭐라고 하고 방에서 나왔는데?”
고안나가 킥킥대며 말한다.
“똥 싸러 간다고.”
“어······ 수고······.”
고안나의 표정을 보니 진짜처럼 보인다.
달칵.
문이 닫히고 난 후 난 다시 마담을 불렀다.
클럽 루시의 마담이 하트 눈을 하고 들어온다.
“어머~ 대표님. 이번엔 또 무슨 일이세요?”
조금 전 천만 원짜리 V3 코스를 시킨 덕에 마담이 상당히 친근한 척을 하고 있었다.
“안나 앞으로 팁을 남기고 싶은데 가능합니까?”
“어머~ 우리 대표님. 통 크시다.”
“딴소리 마시고 팁 남기는 거 됩니까?”
“당연하죠. 가게에서 30%만 먹고 나머지는 안나 앞으로 팁 보낼 수 있어요.”
난 카드를 내밀며 대답했다.
“대신에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안나에겐 피해가 없어야 합니다.”
카드를 받아든 클럽 루시의 마담이 방실방실 웃는다.
“대통령의 비밀을 팔았다고 해도 안 따질게요.”
“쿨해서 좋네요. 그러면 앞에 시킨 것들이랑 합쳐서 총 2천 긁어주세요. 술값을 제외한 금액이 안나의 팁입니다.”
마담의 얼굴이 환히 밝아진다.
술 한잔 안 마시고 매상을 올려주기 때문이다.
“알았어용~ 총 2천에 맞춰서 긁을게요.”
마담이 인터폰을 누른다.
웨이터가 카드 결제기를 가져온다.
마담은 앉은 자리에서 2천만 원을 입력한 뒤 카드를 긁는다.
순간 결제 승인 메시지와 함께 영수증이 또로록 말려 나온다.
그제야 마담의 얼굴이 환해진다.
“고객님. 집까지 태워다 드릴까요?”
“아뇨. 전 걷는 게 좋습니다.”
마담이 웨이터 따봉을 향해 외친다.
“따봉. VIP 고객님. 입구까지 친절하게 모셔드려.”
“예! 마담.”
내게서 50만 원을 받은 웨이터가 휴대폰으로 손전등을 만들어 내 앞길을 밝힌다.
“따라오시죠 고객님.”
난 고안나의 안전을 재차 약속받은 뒤 아무 탈 없이 클럽 루시를 나왔다.
입구에서 날 기다리던 정수혁 이사가 얼른 옆으로 달려왔다.
“일은?”
“잘 됐습니다. 대신 2천 풀로 땡겨쓰고 왔습니다.”
“돈이 문제냐? 결과는 어때?”
“충분히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녹음된 버튼을 틀자 이동구 감독과 방상영 이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순간 정수혁 이사가 한껏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드디어 방 이사를 날릴 수 있겠구나.”
“예. 제 생각도 같습니다.”
증거를 잡은 정수혁 이사는 급히 강감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밤 당장이라도 방상영 이사를 잘라버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