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3화
443. 황룡 영화제 준비 2
방상영 이사의 방.
회의를 마치고 들어온 방상영과 주호성이 굳은 표정을 하고 소파에 앉았다.
방상영이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간 주호성은 굳은 표정으로 묻는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최만식 대표님께서 신신당부한 일이 실패했으니 그분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넌 가만히 있어! 생각 좀 하게!”
정윤호와 한정주 교수를 만나게 하기만 하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면 스포츠 조명 기자가 사진을 찍은 다음 뒤는 최만식 대표와 서예종 라인의 힘 있는 사람들이 처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간단하리라 생각했던 이 일이 정윤호의 변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거기다 한정주 교수의 사적인 인간관계까지 그리 자세히 알다니.
보면 볼수록 정윤호는 보통 놈이 아니었다.
‘제길. 왜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하지?’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나섰던 정윤호였기에 분명히 낚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쾅!
화가 난 방상영이 소파의 팔걸이를 내리친다.
“XX. 평소에는 나서지 말라는 것도 다 나서더니 오늘은 또 왜 저래?”
주호성이 한숨을 내쉬며 묻는다.
“일단 최만식 대표님께 연락부터 드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방상영은 한동안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냐. 그 전에 일단 이동구 감독부터 만나서 의논할 테니까 주 팀장은 이태풍 그놈이 어디 있는지나 알아봐.”
“태풍이는 지리산 현장에서 서울로 올라오고 있을 건데요?”
“그렇게 말고 구체적으로 좀 알아보라고!”
“대체 왜 그러십니까? 이유나 말씀해 주시죠.”
“여배우 하나를 태풍이한테 붙이려고.”
원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만에 하나를 위해 준비해 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태풍에게 붙이려는 여배우는 에이스 엔터의 신인인 최민희.
방송 프로를 하며 알게 된 최민희는 성공하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지 할 야심이 넘치는 아이였다.
순간 주호성은 대번에 방상영의 의도를 알아차린다.
“협박이 될 만한 사진 찍기가 쉽겠습니까?”
“선수끼리 왜 이래? 민희 정도 되는 미인이 반쯤 훌러덩 벗고 덤비면 남자라면 그냥 넘어가게 되어 있잖아? 그때 딱 한 장만 건지면 되는 거고.”
“하긴 뭐. 갑자기 들이밀면 정상적인 판단을 하긴 힘들죠. 근데 사진을 찍을 파파라치는 있습니까?”
“준비해뒀어.”
주호성이 제법이라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하여튼 그 사진을 이용해 정윤호 그놈을 약속 장소로 불러내면 그만이야. 한 위원장도 약속 장소로 부르고.”
“그때 스포츠 조명 기자가 사진 찍으면 끝이겠군요.”
“바로 그거지!”
위험했지만 지금은 수단 방법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하긴 뭐로 가도 서울로 가면 그만이긴 하죠. 알겠습니다. 태풍이가 어디 있는지 5분 내로 알아보겠습니다.”
주호성이 인사를 하고 다시 방 밖으로 나간다.
방상영은 심호흡을 하고 에이스 엔터 최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 이사님?
“어 난데. 오늘 밤 안에 태풍이랑 같이 있는 사진 한 장 찍어서 보내줘.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그러면 내가 팍팍 밀어줄게. 대신 최대한 노출 찐~ 한 걸로 부탁하고.”
-그 정도면 2천만 원에 프로그램 고정 하나는 잡아주셔야 하는 거 알죠?
“당연하지.”
-오케이. 콜! 그러면 기자는 어떻게 해요? 내 매니저는 얼빵해서 안 돼요.
“파파라치 한 명 붙일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있다가 태풍이 위치 알려줄게.”
-네.
방상영은 몇 가지 지시를 더 내린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스타 패치 한연홍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윤호 아니면 자기 자신.
둘 중 한 명밖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어 한 기자. 난 데. 작업 하나 해줄 수 있어? 돈 걱정은 말고. 그래. 바로 출발해줘 위치는 금방 알려줄게.”
기자에게도 전화를 마친 방상영은 사무실을 나서며 이번 일을 함께 추진하는 이동구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감독님. 오늘 저녁 8시. VIP 클럽 루시에서 뵙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급한 방상영의 목소리에 이동구 감독이 알겠다며 답한다.
* * *
방상영 이사의 뒤를 캐달라고 부탁한 난 곧장 이태풍의 위치부터 파악했다.
방상영 이사가 이대로 그냥 포기할 리는 없기 때문에 황룡 영화제의 시상식 때까지는 내가 직접 이태풍을 지킬 생각이다.
이태풍과 전화를 하자 현재 디자이너 제이슨 조의 스튜디오에서 황룡 영화제에서 입을 턱시도를 최종 피팅하는 중이라고 한다.
제이슨 조는 현재도 꽤 유망한 디자이너지만 앞으로 5년 뒤 뉴욕 패션쇼에서 큰 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디자이너로 거듭나는 인물이다.
다행히 우리 정 팀의 이미리 대리와 그녀의 남편 채상우가 뉴욕에 살던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 한창 바쁜데도 이태풍의 의상을 맡아줬다.
난 사무실에 있던 채상우를 부른 뒤 함께 청담동에 있는 JJ 스튜디오로 향했다.
JJ 스튜디오로 가는 동안 조수석에 앉은 채상우는 주의해야 할 점을 말해준다.
“제이슨 조의 본명은 조창식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한국 이름을 쓰는 걸 아주 싫어하니까 제이슨 혹은 JJ라고 부르셔야 합니다.”
회귀 전에 자주 만난 터라 알고는 있지만 일부러 모른 척 굴었다.
“그 이름을 싫어하는 이유라도 있답니까?”
“작고 왜소해서 어릴 때부터 왕따를 당했는데 본명으로 불릴 때마다 옛날 기억이 난다고 싫어합니다.”
올해 32살인 제이슨 조는 163cm 정도의 키로 인해 왕따와 괴롭힘을 당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첫사랑이었던 여자에게도 키 때문에 사귈 수 없다며 차이기도 했었고.
그래서 이를 악물고 뉴욕으로 가서 패션으로 성공을 이루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과거의 자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름을 외국식으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주의하겠습니다.”
그 사이 청담동 JJ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청담동 JJ 스튜디오는 7층짜리 소형 빌딩으로 주차장까지 완비하고 있는 곳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이태풍에게 전화를 걸자 이대호 매니저가 대신 받는다.
-팀장님. 저희는 지금 5층에서 피팅 중입니다.
“아 그래요?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차에서 내린 뒤 스튜디오로 올라가려던 순간이다.
주차장 한쪽 끝.
검은색 차량 운전석에 앉아서 스튜디오를 쳐다보는 여자 얼굴이 낯이 익다.
한연홍 스타 패치 기자.
올해 30살인 그녀는 2년 뒤 선배들을 모두 제치고 스타 패치의 3팀 팀장이 되는 인물이다.
돈만 되면 무슨 짓이든 하는 파파라치이기도 하고.
‘설마 태풍이를 노리는 건가?’
황룡 영화제의 남우 주연상으로 유력한 이태풍이었으니 따라붙는 게 이해가 간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모자를 눌러쓰며 급히 고개를 숙인다.
“상우 씨. 잠깐만 먼저 올라가 계십시오.”
“예?”
“별일 아닙니다. 잠깐 회사에 통화할 일이 있어서요.”
“아 알겠습니다.”
채상우에게 말을 했다간 이태풍에게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시상식 때문에 긴장해 있는 이태풍에게 이런 부담까지 줄 순 없다.
채상우를 먼저 올려보낸 난 주차장 한쪽 끝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 * *
똑똑.
차 창문을 두드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연홍 스타 패치 기자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단발머리에 갈색 안경을 쓴 그녀는 동글동글한 얼굴형을 하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한 기자님?”
끼이익.
성에가 낀 창문이 천천히 내려간다.
한연홍 기자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호호호. 정 팀장님이시죠? 선배님들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전 스타 패치에서 나온 한연홍이라고 해요.”
한연홍 기자가 친한 척을 하며 자기 명함을 건네준다.
“뭐 주니까 받긴 하는데 대체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긴요. 요즘 여기 JJ 스튜디오가 핫하잖아요. 남자 배우들이 너도나도 여기서 시상식 옷을 맞춘다는 소문이 돌길래 사진 찍으려고 왔어요.”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릴.
한연홍 기자는 딱 한 놈만 팬다는 게 어울릴 정도로 타깃을 정해서 따라다니는 기자다.
“거짓말 마시고요. 우리 태풍이 따라오셨죠?”
한연홍 기자가 어색하게 웃는다.
“어머? 태풍 씨가 여기 왔어요? 난 몰랐네? 난 다른 사람······.”
“다른 사람 누구요?”
“레이븐의 리더 오태혁 아시죠? 화란전에서 국선 역할을 맡은 그 친구요. 그 오태혁이 이번 황룡 영화제에 입고 나갈 의상을 여기서 맞춘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뻔뻔한 한연홍 기자의 거짓말에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오태혁은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어서 황룡 영화제에 초청을 못 받았습니다. 그리고 걘 여기가 아니라 PNP 스튜디오에서만 옷 맞추고요. 그러니 솔직하게 대답하세요. 후회할 일 생기기 전에.”
그 순간 한연홍 기자는 입을 꾹 다물고 팔짱을 낀다.
마치 네가 내 입을 열 수 있을 것 같냐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난 그녀의 입을 열 방법이 있었다.
“후회 안 하십니까?”
한연홍 기자가 피식 웃는다.
어쩔 수 없군.
“한 기자님. TNT 엔터의 박두수 배우 뒤를 캐던 거 5천만 원을 직접 받고 입 닦은 적 있죠?”
한연홍 기자의 얼굴이 하얘지더니 굳게 닫힌 입이 대번에 열린다.
“그 그걸 어떻게······?”
“그건 제 영업비밀이라 말씀 못 드립니다. 하여튼 회사에 안 넘기고 혼자 드셨죠?”
찌라시를 덮어주는 조건으로 돈을 먹고 기사를 덮는 건 흔한 일이다.
단 그 경우. 입막음 비용(?)을 회사와 나눠 먹어야 한다.
하지만 한연홍 기자는 혼자 먹어 버렸다.
이건 회귀 전 본인과의 술자리에서 직접 들은 거니까 확실한 정보다.
“이 이야기. 스타 패치 선배님들이랑 경영진들이 알면 참 좋아할 것 같지 않습니까? 회사랑 나누지도 않고 혼자 먹었다는 걸 말하면······ 어떻게들 하시려나? 고소는 기본일 테고 앞으로 이쪽 업계에서는 일 못 하실 텐데······.”
한연홍 기자가 다급히 말한다.
“자 잠깐만요! 그것만은 제발!”
“그러니까 누굴 찍으러 온 건지 말하세요.”
한연홍 기자가 실토한다.
“맞아요! 이태풍 씨 찍으러 왔어요!”
역시나.
“팀장 선에서 시킨 겁니까? 아니면 단독으로 움직이는 겁니까?”
위에서 내려온 지시냐 아니냐에 따라 이태풍에게 달라붙는 사람의 수가 달라진다.
그런데 그때 한연홍 기자가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단독이요. 근데 이번 일 그쪽 회사 방 이사님이 직접 의뢰한 거예요!”
방상영 이사가 그랬다고?
기껏 생각한 수가 이 정도라니.
“그게 답니까? 그냥 따라다니라고 했다고요?”
“그렇다니까요? 이태풍 씨를 따라다니고 있으면 나중에 지시를 내리겠다고 했어요. 아직까진 지시는 없고요.”
방상영 이사가 대충 뭘 할지 예상이 가지만 그건 쉽게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보다 난 한연홍 기자를 이용해 받은 대로 돌려줄 마음을 먹었다.
오늘 일을 보건대 방상영 이사는 서예종 출신 심사위원들과 손잡고 오지석을 밀고 있는 게 확실했다.
“제가 입을 다물어 드릴 테니까 지금부터 제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뭐든 말씀하세요. 제가 뭘 하면 돼요?”
역시 말이 제법 잘 통하는 타입이다.
난 히죽 웃으며 방상영 이사에게 치명타를 입힐 작전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오지석의 뒤를 따라다니십시오.”
한연홍 기자가 고개를 갸웃한다.
“오지석은 캘 것도 없이 깨끗하다던데요?”
“한 기자는 본인한테 그 말 한 사람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한연홍 기자가 미간을 찌푸린다.
“아오~ 박 팀장 그 새X. 또 나한테 구라친 거야?”
아마도 자기 회사의 상사에게 들은 거짓 정보인가 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오지석의 뒤를 따라다녀 보세요. 수틀리면 매니저들한테 주먹질이나 갑질을 하는 게 예사인 인간이니 캘 게 많을 겁니다.”
“그래요?”
“예. 그리고 아마 황룡 영화제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으니까······ 조만간 분명 사고 칠 겁니다.”
오지석은 이태풍과 함께 남우 주연상을 경쟁하는 에이스 엔터의 배우.
대외적인 이미지는 운동을 좋아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지만 그건 에이스 엔터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실제의 오지석은 상습적으로 매니저를 구타하는 인성 쓰레기였다.
때론 짜증이 난다는 이유로 때론 가지고 온 도시락이 맛이 없다는 이유로 매니저들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곤 했다.
어차피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게 연예계지만 이 인간은 도를 넘는 일이 잦다.
그중 하나만 캘 수 있다면 오지석에게 치명타를 안길 수가 있었다.
그리고 오지석을 밀고 있는 방상영 이사와 서예종 심사위원들에게도 말이다.
그때 한연홍 기자가 말한다.
“대신 저도 조건이 있어요.”
“뭡니까?”
“방 상영 이사의 눈을 속일 자료가 필요해요. 세 시간마다 이태풍 씨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기로 했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사진 찍어서 드릴게요.”
폰을 들고 까딱이며 흔들었더니 한연홍 기자가 피식 웃는다.
“오케이. 그러면 전 오지석 뒤부터 캘게요.”
“예. 가보십시오.”
한연홍 기자가 운전대에서 손을 놓고 팔짱을 낀다.
“가긴 어딜 가요? 오지석은 여기 있는데?”
“예?”
“정 팀장님 오기 전쯤? 10분 전 정도에 스튜디오로 들어갔어요. 저기 검은색 익스플로러 밴 보이죠? 저게 오지석이 타고 온 차예요.”
“그러면······ 저기 안에 태풍이랑 오지석이 같이 있다고요?”
“네.”
안 그래도 황룡 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노리는 경쟁자다.
수상에 목이 마른 오지석이 이태풍과 같이 있으면 무슨 사건이 벌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 나중에 연락하겠습니다.”
“네~”
난 한연홍 기자를 주차장에 두고 급히 JJ 스튜디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5층을 누르고 문을 닫았다.
빠르게 올라간 엘리베이터가 띵하고 5층에 멈췄다.
문이 열리자 눈앞에 흰색과 검은색으로 치장된 모던한 피팅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피팅 공간 한쪽은 의상실 나머지는 마치 휴게실처럼 꾸며져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선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이 새X가 건방지게 선배의 멱살을 잡아? 야 안 놔!”
“그 전에 사과부터 하세요.”
오지석과 이태풍이 서로 멱살을 잡고 있다.
그리고 왜소한 제이슨 조는 바닥에 앉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