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2화
442. 황룡 영화제 준비 1
[에브리데이 V12]
[날짜 : 2020년 11월 30일]
-AM 11:00 [NEW. 이태풍] <연예가 방방곡곡> 배우 이태풍의 측근. 황룡 영화제 한정주 심사위원장과 사전접촉 발각. (회의 내용 : 이태풍 후보 자진 사퇴 대책. 방상영 이사의 덫.)
‘태풍이가 남우 주연상을 타지 못한다고?’
일정을 읽자마자 방상영 이사에 대한 분노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이태풍이 스스로 후보에서 사퇴하게 되면 남우 주연상 수상이 물 건너가게 되기 때문이다.
난 화를 겨우 억누르고 일정의 내용을 하나씩 곱씹기 시작했다.
내용을 정확히 파악해야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태풍의 측근이라는 건 아마도 나일 터.
아무래도 방상영 이사는 나와 한정주 심사위원장을 만나게 할 모양이다.
그리고 단둘이서 만나는 사진을 찍은 다음 부정한 청탁을 하는 것처럼 대서특필할 거고.
그렇게 되면 이태풍은 비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진 사퇴를 할 수밖에 없다.
머릿속에 그림이 훤히 그려지자 해결책은 간단히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위원장은 안 만나야겠군.’
그렇게 해결책을 세우고 나자 이젠 방상영 이사가 어떻게 날 덫으로 끌어들일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난 짧게 심호흡을 한 뒤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일단 구성철 실장부터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방 이사가 아무리 설치고 다녀도 황룡 영화제의 남우 주연상은 태풍이 겁니다.”
“그 그렇겠지?”
“예. 이번에 ‘경계 너머로’의 성적이 얼마나 좋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하긴 그렇지. 관객 수에서 좀 차이가 나?”
올해 황룡 영화제에서 관객 수가 가장 많은 작품은 최성문 감독이 만든 1470만 명의 <경계 너머로>였다.
그리고 경쟁작으로는 관객 수 1020만을 달성한 김석필 감독의 블록버스터 영화 <안개 무리>가 있었다.
두 작품은 워낙 흥행에서 차이가 난 터라 현재 이태풍이 남우 주연상에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다만 관객 수를 제외하면 <안개 무리>의 오지석도 만만치가 않았다.
오지석은 수년간 남우 주연상 후보에 단골로 올라올 정도의 연기파 배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안심하시고 일단 팀장 회의부터 가시죠.”
“후우. 알았다.”
마음을 다잡은 구성철 실장과 난 황룡 영화제를 대비하는 팀장급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올랐다.
* * *
회의실로 들어가자 배우 파트 팀장급 이상이 거의 다 모여 있다.
뒤늦게 들어온 강감찬 대표는 자리에 앉자마자 내 칭찬을 늘어놓는다.
“요즘 경주 현장에서 굉장하다며? 어제 MBS 국장님과 술자리가 있었는데 오 PD가 연일 좋아 죽는다고 난리야.”
“예. 유진이도 유진인데 미소가 제법 연기를 잘합니다.”
“하하하. 그래?”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리면 안정해 감독님의 신작에 미소를 출연시켜 볼 생각입니다. CK 엔터 손형태 대표님이 작품에 투자랑 배급을 확정하셨고요.”
“오~ 그래? 이거 내년에는 황룡 영화제에서 미소도 보겠군?”
“예.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회의실이 떠나가라 웃는다.
그때 보다 못한 방상영 이사가 나서서 주제를 돌린다.
“대표님. 이제 슬슬 황룡 영화제 상황부터 점검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크흠. 그래야지.”
강감찬 대표가 헛기침하며 배우들의 진행 상황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현재 배우 1실 조민성 배우도 890만 명 관객이 들어온 <정의로운 검사 고진태>의 주연을 맡아 남우 주연상 후보로 올라있었다.
배우 3실에서는 차태현이 <한명대군>의 작품으로 최우수상 후보에 올라와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의상부터 샵에 관한 것 그리고 당일 이동 상황까지 구체적인 체크를 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세세한 일정 체크를 한 다음 강감찬 대표가 방상영 이사에게 묻는다.
“아 그리고 심사위원 명단은?”
“여기 있습니다.”
올해 심사위원장은 서울예술종합대학교의 한정주 교수.
그는 각종 영화제의 위원장을 맡은 경험도 있는 데다 한국 영화사에 대해서 상당히 권위가 있는 사람이다.
권위 있는 자리에 반해 상당히 담백한 성격으로 회귀 전에는 나름 친하게 지낸 바 있다.
물론 회귀 후에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명단을 보던 강감찬 대표가 팔짱을 낀다.
“대부분이 서예종 출신이로군?”
그때였다.
방상영 이사가 슬그머니 운을 떼기 시작한다.
“저기 대표님.”
“응? 왜?”
“그래서 말인데 실은 이번 황룡영화제에서 서예종 심사위원들이 뭉쳐 남우 주연상을 오지석에게 밀어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시작인가 보군.’
방상영 이사는 이렇게 불안감을 조성한 다음 내게 한정주 위원장을 만나게 할 생각이었나 보다.
서예종 출신 심사위원들이 오지석을 민다는 순간 회의실에 싸늘한 분위기가 흘렀다.
강감찬 대표가 팔짱을 끼고 노려본다.
“그걸 어디서 들었나?”
잠시 곤란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방상영 이사가 대답한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이동구 감독에게 들었습니다.”
이동구 감독은 서예종 출신의 영화감독으로 현재 모교의 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강감찬 대표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태풍이가 아니라 오지석을 미는 이유가 뭐라던가?”
“명단에서 보시다시피 이번 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이 대부분 서예종 출신입니다.”
“그래서?”
방상영 이사가 날 힐끗 쳐다보다 답한다.
“서예종의 자랑인 공학범 감독을 구속시킨 게 저 친구 아닙니까? 그 보복인 듯합니다.”
강감찬 대표가 테이블을 쾅 하고 두드린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나! 공 감독이 감옥에 간 건 기자의 제보 때문이지 않나?”
“저도 그렇게 설명은 했는데 저쪽에서는 언론과 검사한테 정보를 넘긴 게 정 팀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 그런 말도 안 되는······.”
강감찬 대표가 헛기침을 내뱉자 방상영 이사가 이때다 하고 말한다.
“거기다 한정주 위원장은 공학범 감독의 제자였고 아내 쪽은 아예 친척 관계라고 하더군요. 이번에 이 일도 심사위원장인 한정주 위원장이 주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강감찬 대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 그 꼬장꼬장한 한 위원장이?”
순간 방상영 이사가 뜻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회귀 전 난 한정주 교수와 사적으로 만나 식사를 할 만큼 친밀한 사이였었다.
그런데 방상영 이사의 말과는 달리 서예종 출신의 한정주 위원장은 공학범 감독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심지어 한정주 교수의 아내는 오만한 공학범 감독을 끔찍이도 싫어했었다.
집안 동생뻘 되는 자기 엄마를 늘 무시하면서도 돈을 빌려놓고 갚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 두 집안의 관계는 말만 친척이지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다만 한정주 교수는 입이 무거웠기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래서인지 방상영 이사는 뻔뻔하게 말을 지어내고 있었다.
‘한정주 위원장을 이렇게 이용한단 말이지?’
그 순간 방상영 이사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래서 말인데 정 팀장. 어떤가? 자네라면 한 위원장 정도는 구워삶을 수 있잖아? 내가 자리를 주선해 볼 테니까 만나서 오해만 좀 풀어봐. 자네가 한 게 아니라고.”
방상영 이사가 은근슬쩍 날 띄워준다.
‘제법인데 방 이사?’
만약 에브리데이의 경고가 없었다면 위험을 각오하고서라도 한 번 정도는 만나봤을 거다.
방상영 이사를 믿지는 않는다고 해도 소문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니까.
순간 강감찬 대표가 같은 말을 한다.
“정 팀장 생각은 어때? 내 듣기로는 방 이사의 의견도 타당한 면이 있는 것 같은데?”
잠깐 고민하던 난 폰을 손에 쥔 채 강감찬 대표에게 딱 잘라 답했다.
“아니요. 안 만나는 게 좋겠습니다.”
“응? 왜?”
“제가 아는 한정주 교수님은 편파적인 판정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다들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반응들이 나온다.
특히나 방상영 이사의 경우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저 정 팀장. 평소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이번은 아니라니까? 한 위원장님이 공 감독의 친척인데······ ”
난 방상영 이사의 말을 무시한 채 강감찬 대표에게 회귀 전 내가 알던 정보를 전했다.
“대표님. 한 위원장님이랑 공 감독님은 평소에 왕래도 없을 정도로 사이가 안 좋다는 거 아십니까?”
“뭐?”
“심지어 한 위원장님의 부인은 공 감독님이랑 명절에도 안 볼 정도로 사이가 안 좋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게 정말인가?”
“예.”
미래에서 직접 경험하고 온 생생한 정보다.
틀릴 리가 없지.
방상영 이사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설마 자기도 모르는 정보를 내가 알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다급해진 방상영 이사가 언성을 높인다.
“정 팀장! 그러면 자넨 그러면 지금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건가?”
난 강감찬 대표와의 대화를 끊고 방상영 이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방 이사님. 한 위원장님이랑 통화해 보신 거 아니죠?”
“그 그래. 하지만 이동구 감독을 통해서 확실히 들었다니까!”
“그러면 이동구 감독님이 거짓말을 하는 거겠죠.”
증거도 없이 방상영 이사를 거짓말쟁이로 몰순 없다.
일단은 이렇게 넘기고 방상영 이사가 얽힌 증거를 찾을 생각이다.
그리고 증거를 손에 쥐면 그의 가면을 낱낱이 벗길 생각이었다.
방상영 이사를 굴렁쇠 엔터에서 쫓아내려면 그 정도 공은 들여야 했다.
당황한 방상영 이사가 이번에는 다급히 강감찬 대표를 쳐다본다.
“대표님. 정 팀장의 말이 맞다면 다행이지만 이동구 감독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이번은 진짜······.”
그 순간 강감찬 대표가 손을 들어 올린다.
“거기까지. 방 이사는 지난번 일 이후로 정 팀장이 하는 일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던 것 같은데. 설마 벌써 잊었나?”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건 끼어드는 게 아니라 돕기 위해서······.”
“정 팀장이 됐다고 하지 않나!”
방상영 이사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진다.
“태풍이를 걱정하는 마음만 받겠네. 하지만 정 팀장이 이제까지 잘해 왔으니 정 팀장한테 맡겨.”
“대 대표님! 그러다가 이태풍 배우가 수상을 못 하게 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거 말 이상하게 하는군? 가만히 들어보면 자넨 태풍이가 상을 못 받을 거라고 단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방상영 이사가 급히 고개를 젓는다.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러면 됐어. 지금부터 다들 나가서 방 이사가 말한 것들부터 확인해봐!”
난 다급히 말을 더했다.
“대표님. 심사위원들을 만나서는 절대 안 됩니다.”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 정 팀장 말대로 괜히 심사위원들을 만나서 구설에 시달리지는 말고 전화로만 사정을 알아봐봐. 그리고 다들 나한테 직통으로 보고해. 알았나?”
회의실에 있는 팀장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그러면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정 팀장과 정수혁 이사만 남고. 다들 나가서 확인해봐.”
“예. 대표님.”
드르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방상영 이사는 뭔가 말을 더하려다 마지 못 해 일어났다.
그때 강감찬 대표가 말한다.
“방 이사.”
“예. 대표님.”
“자넨 이동구 감독한테 이야기 잘 전해줘. 서예종 라인에서 그렇게 나오면 심히 섭섭하다고. 공정해야 할 연말 축제를 사감으로 흐리면 쓰나?”
“노력······ 해보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방상영 이사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회의실을 나선다.
난 그 틈을 타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2]
[날짜 : 2020년 11월 30일]
-AM 11: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NEW. 이태풍] <연예가 방방곡곡> 배우 이태풍의 측근. 황룡 영화제 한정주 심사위원장과 사전접촉 발각. (회의 내용 : 이태풍 후보 자진 사퇴 대책. 방상영 이사의 덫.))
역시나 내 선택이 옳았다.
방상영 이사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반격할 시간이다.
* * *
회의실에 남은 건 강감찬 대표와 정수혁 이사 그리고 나뿐이다.
강감찬 대표가 조금 전 상황을 재차 묻는다.
“윤호야. 한 위원장이랑 혹시 통화라도 한 거냐?”
“아닙니다. 원래 알고 있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나도 모르는 것을······.”
강감찬 대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난 급히 다른 말을 꺼냈다.
“그것보다 조금 전 방 이사가 한 거짓말이 걸립니다.”
“거짓말이라니? 이동구 감독이 거짓말을 했다면서?”
“증거가 없어서 일단 말을 그렇게 돌렸습니다.”
“설마 그러면 방 이사가 그놈들이랑 같은 편이라 이거냐?”
“예. 아마도 절 한 위원장이랑 만나게 한 다음 사진이라도 찍어서 터트렸을 겁니다.”
“그런······.”
“그렇게 되면 저도 문제지만 공정성 시비에 걸린 태풍이까지도 수상이 날아가잖습니까?”
강감찬 대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내가 말한 내용들은 모두가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기 때문이다.
“방 이사. 그 자식이 감히······.”
곁에 있는 정수혁 재무이사도 같은 소리를 한다.
“정 팀장 말이 일리가 있군. 그렇게 셋업을 했다면 태풍이의 수상도 불가능했을 걸세.”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난 그 틈을 타 정보팀을 운영하는 정수혁 이사에게 부탁했다.
“이사님. 혹시 지금부터 방 이사의 뒤를 캐주실 수 있습니까?”
“그게 내 전공 아닌가? 지금부터 바로 꼬리를 붙일 수 있네.”
난 이어서 강감찬 대표에게 물었다.
“그리고 대표님. 이번 일······ 끝까지 파도 되겠습니까?”
끝까지라는 건 방상영 이사를 회사에서 솎아낼 때까지라는 뜻이었다.
강감찬 대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지. 네가 그리 말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거다. 바로 진행해.”
난독증으로 인해 고생한 이태풍은 평생 제대로 된 상 하나 받아본 적이 없다.
시상식에 초청을 받았을 때도 그저 꽃 병풍 역할을 했을 뿐이었고.
그런 이태풍이 난독증을 극복하고 드디어 큰 상을 받게 되었다.
난 그걸 방해하려는 방상영 이사를 절대 굴렁쇠 엔터에 더는 남겨둘 생각 따윈 없었다.
“이번엔 끝장을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