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0화
440. 미소야 2
지금 오복희 PD가 하려고 하는 건 바로 연기지도.
연기지도란 PD가 자신이 구상한 대로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해 배우들에게 연기를 지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오복희 PD는 그 어떤 누구보다 깐깐하게 연기지도를 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곳 <화란전>의 경주 현장으로 내려온 이후.
오복희 PD는 단 한 번도 배우들에게 제대로 연기지도를 한 적이 없다.
전작 <요술 램프>에서 주연 배우 최태웅에게 연기지도를 하다가 서로 멱살잡이한 탓에 하마터면 드라마가 엎어질 뻔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기만 믿고 대본 연습을 게을리했었던 최태웅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비난의 화살은 오복희 PD에게만 쏟아졌었다.
그래서 오복희 PD는 이번 <화란전>을 맡을 때 최상병 대표에게 연기지도를 최대한 자제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깐깐한 오복희 PD의 연기지도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피디님! 자 잠깐만요!”
급히 달려온 금은동 AD가 오복희 PD를 붙잡는다.
오복희 PD가 고개를 갸웃한다.
“왜 그래? 은동아. 문제 있어?”
“문제 있죠! 아역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S급 여배우들을 긁었다가 어쩌시려고요? 그리고 만약 이번에 연기지도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국장님이랑 대표님이 바로 현장으로 달려와서 징계 때릴걸요?”
오복희 PD가 태연하게 대답한다.
“징계? 할 테면 하라고 그래. 배 째!”
“PD님!”
오복희 PD가 귀를 막으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걱정하지 마. 나도 S급 여배우들 건들 생각 없어. 알아서 잘하고 있잖아. 다만 아역들은 그린 스크린 앞에서 연기하는 게 처음이잖아? 쟤들 가이드만 할 거야.”
금은동 AD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진짜죠?”
“왜? 못 믿겠어? 그러면 소원대로 여배우들 연기지도 해 줘?”
“무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세요?”
오복희 PD가 피식 웃는다.
“농담이야 농담. 아역들 CG 씬만 지도해 주고 올 테니까 안심해.”
“하아~ 알았어요. 스태프들한테도 그렇게 말해 둘게요.”
오복희 PD는 금은동 AD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세트장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오빠. PD님이 연기지도를 하는 게 뭐가 문제예요?”
“오 PD님 연기지도가 깐깐해서 그래. PD님이 대본을 완벽히 숙지하고서 지도하는 건데도 별걸 다 지적한다면서 덤벼드는 배우들이 꽤 있거든.”
보통 배우들은 감독에게 연기를 지도받는 걸 싫어한다.
연기를 업으로 하는 배우들에게 연기지도란 나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진이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그거 좋은 거 아니에요? 배우한테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도 있잖아요. 우리 미소도 그린 스크린 앞에서 연기한 적 없으니까 알려주시면 더 좋을 거 같은데······.”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면 싸울 일도 없게? 연기는 배우의 몫이라 자존심 강한 배우들은 지도받는 걸 엄청나게 싫어해. 뭐 어쨌건 아역들만 하신다니까 다행이긴 한데······.”
난 말꼬리를 늘이며 세트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양이지의 엄마 이태연은 결코 남이 자기 딸에게 연기지도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분위기였다.
* * *
그린 스크린이 한쪽 면을 가득 채운 세트장 중심에 비단 금침이 깔려있고 미소는 그 위에 누워 대본을 보고 있다.
2 왕후인 최지영은 미소와 함께 대본을 확인하는 중이고.
그리고 두 사람으로부터 약 2m 정도 떨어진 곳에 왕실 식구들이 앉아 있다.
오복희 PD는 준비에 여념이 없는 배우들에게 인사를 마친 뒤 가장 먼저 미소 옆에 앉아 연기지도를 시작했다.
“미소야. 이번 씬에서는 반딧불이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나중에 합성하는 거 알고 있지?”
이불에 누워있던 미소가 벌떡 일어난다.
“네! 대본에는 비형랑이 보낸 반딧불이가 저기 창문으로 들어와 내 몸을 감싼다고 쓰여 있어요!”
미소가 한쪽 창문을 가리키며 반딧불이가 날아오는 동선을 입으로 설명한다.
초롱초롱한 미소의 눈을 보며 오복희 PD가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 맞아. 그러니까 우리 미소는 그때까지 진짜 죽은 척하고 있다가 신호를 받고서 눈을 뜨면 돼.”
“눈을 감고 있으니까 신호는 못 보잖아요. 음~ 그냥 2 왕후님이 제 앞으로 털썩 쓰러지면 그때 눈뜨면 안 돼요?”
미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오복희 PD가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 미소. 대본을 꼼꼼하게 읽었네?”
“네! 엄마가 작가 선생님이 엄청 열심히 대본 썼으니까 꼼꼼히 봐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 10번 아니다 20번 넘게 봤어요!”
미소가 대본 책을 놓고 두 손을 활짝 펼친다.
오복희 PD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랬어? 이야~ 우리 미소. 잘했어요.”
미소가 앉은 채로 배꼽 인사를 한다.
“힛. 감사합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 미소는 그때부터 손짓 연기에 신경을 써줘. 반딧불이 한 마리가 미소의 손안에 있다고 생각하며 손을 모아서 하는 건데······.”
오복희 PD가 손짓하기 전 미소가 두 손을 모은 뒤 손 사이의 공간을 따뜻한 눈으로 쳐다본다.
“이렇게요?”
미소가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다정한 표정을 짓는다.
미소가 일순간 유화 공주로 변해서 연기하자 오복희 PD가 감탄을 내뱉는다.
“이야~ 좋은데? 근데 조금만 더 애틋하게 표현해 볼까? 음~ 그러니까 미소가 좋아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오복희 PD가 욕심을 내고 조금 더 구체적인 연기를 주문한다.
미소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묻는다.
“그럼 손안에 엄마 반딧불이랑 삼촌 반딧불이가 있다고 생각해도 돼요?”
“엄마랑 삼촌?”
“네! 전 엄마랑 삼촌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미소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남들이 다 듣도록 큰 목소리로 솔직한 감정을 이야기했다.
이럴 때마다 고맙고도 부끄러워진다.
올 한 해 동안 정 팀의 배우들이 많이 늘어났기에 미소를 챙길 시간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오복희 PD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있다가 그렇게 해줘.”
그 순간 오복희 PD가 연기지도를 마쳐버렸다.
‘왜 이렇게 일찍 마치지?’
내가 아는 오복희 PD는 연기지도를 할 땐 한 사람을 잡고 10분도 넘게 몰아세우곤 한다.
그런데 미소에게는 그저 인심 좋은 떡볶이 가게 이모처럼 굴 뿐이었다.
순간 미소가 어느덧 대한민국 PD 중에서 가장 까다롭다고 소문난 오복희 PD도 인정할 만큼 성장해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오빠. 전혀 안 깐깐하신데요?”
“그건 미소가 너무 준비가 잘 되어 있으니까 그래. 저렇게 넘어가는 배우는 미소가 처음일걸?”
유진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못 믿겠다는 눈빛이다.
조금 억울해지려는 순간 오복희 PD는 양이지에게로 이동했다.
“이지야. 이제부터 찍을 장면은 꽤 신경 써야 하는 거. 알지?”
“네. 알고 있어요.”
“그래. 정화 공주는 들킬지 말지 겁을 먹고 눈동자를 굴려야 해. 틈틈이 이부자리에 누운 미소가 죽어줬으면 하는 눈빛도 보내고. 좀 복잡하긴 한데 너무 긴장하지는 말고.”
오복희 PD가 씬과 세트장을 가리키며 지시를 내린다.
가만히 듣고 있던 양이지가 고개를 갸웃한다.
“근데 엄마가 제가 연기할 부분이 아니라서 쉬고 있어도 된다고 그랬는데요?”
“아냐. 와이드 앵글로 찍을 때 네 모습도 함께 나올 거야. 그때 네가 넋을 놓고 있으면 안 되지. 짧은 순간이라도 확실히 극에 몰입해 줘야 해.”
오복희 PD는 지나가는 한 씬에도 양이지가 해야 할 감정의 흐름 시선 처리 대사의 템포 지문까지 알려주기 시작한다.
그제야 유진이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헐~ 장난 아니시다.”
“거봐 내가 뭐랬어.”
“인정!”
그때였다.
오복희 PD의 연기지도가 길어지자 보고 있던 이태연이 결국 대화에 끼어든다.
“감독님. 우리 애 연기는 제가 봐주고 있으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돼요.”
그 순간 오복희 PD가 이태연을 빤히 쳐다본다.
“이것 봐요. 이태연 씨.”
언제나 깍듯하게 이태연 배우님이라고 부르던 오복희 PD다.
그런데 갑자기 딱딱한 어투로 거리를 두자 천하의 이태연도 당황스러워 말문이 막혔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요? 감독님?”
“여기 엄마로서 와 계신 거예요? 아니면 배우 이태연으로 와 계신 거예요?”
“그건 왜 물어요?”
“엄마로 와 계신 거라면 이 세트장에서 내보낼 거니까요.”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불꽃을 튀긴다.
오복희 PD와 엄마가 다투자 연기지도를 받던 양이지가 움찔하며 고개를 숙인다.
그 순간 오복희 PD가 양이지를 향해 말한다.
“고개 들어 양이지! 지금 넌 여기 이태연의 딸이 아니라 한 사람의 배우로 와 있는 거야!”
오복희 PD는 이태연과 충돌하면서도 양이지를 이태연의 딸이 아닌 자신의 배우로서 대하고 있었다.
“이지에게는 충분한 포텐이 있어요. 그런데 어머님이 이렇게 계속 간섭하시면 이지는 절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거예요.”
오복희 PD는 이제 이태연을 마치 연기 따위를 잘 알지도 못하는 일반인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요?”
이태연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오복희 PD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장면에서라도 손 떼세요 이지 어머님. 전 지금. 이지가 가진 모든 포텐을 끌어내야 하니까요!”
오복희 PD가 언성을 높이자 이태연이 오복희 PD를 째려본다.
하지만 오복희 PD는 눈도 끔뻑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통보한다.
“이제 결정하세요. 이번 씬에서 배우 이태연으로 남아서 촬영을 할지 아니면 세트장 밖으로 나간 다음에 이지 어머님으로 저랑 한바탕하실지?”
자존심 강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힌다.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잡고 싸울 듯한 분위기가 감돌자 지켜보던 스태프들이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태연이 한 걸음 물러난다.
“알았어요! 원하는 대로 해요!”
이태연이 씩씩거리며 대본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순간 오복희 PD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어서 양이지에게 디테일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지야. 그리고 그린 스크린 앞에서 연기할 때 주의할 게 몇 가지 있는데······.”
양이지는 잠시 멍하니 있었지만 이내 오복희 PD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역시 <화란전>의 PD로 오복희를 선택한 것이 현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복희 PD는 S급 여배우와 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더 좋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유진이가 주연을 맡은 이 <화란전>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 *
오복희 PD는 진공주까지 세세한 연기지도를 마치고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확성기를 잡은 오복희 PD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외친다.
“자 그러면 바로 갈게요. 소품팀이랑 연출팀. 제작팀. 내 수신호에 맞춰서 바로 움직이세요. 갑니다. 4화 씬 50. 레디~~액션!”
오복희 PD의 외침과 동시에 <화란전>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독버섯을 먹고 누워있는 미소를 보며 어의 역의 조연배우가 고개를 젓는다.
『유화 공주님의 혼은······ 이미 반쯤······ 삼도천을 건넜나이다.』
그 순간 2 왕후 역의 최지영이 믿을 수 없다고 외치며 미소를 품에 끌어안았다.
의식을 잃은 연기를 하는 미소가 힘없이 최지영의 품에 안긴다.
최지영은 미소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애절한 심정으로 말한다.
『유화야 제발 좀 깨어나다오. 이 어미가 무엇이든 다 줄 터이니 깨어나기만 해 다오.』
미소의 가슴팍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순간 최지영이 구슬피 외치기 시작한다.
『유화야. 이 어미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널 주려 꽃 떡을 한 소쿠리나 해놓았고 널 주려 비단옷도 한 벌 지어 놓았다. 그러니 제발······ 제발······ 눈을 떠만 다오. 네가 하고픈 건 다 해줄 터이니······ 제발······』
단장을 끊는듯한 목소리가 세트장을 울리자 스태프들 모두 숙연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였다.
미소의 몸이 축하고 늘어진다.
가녀린 팔은 손바닥을 하늘로 한 채 이불 위로 툭 하고 떨어졌고 힘겹게 버티던 목이 힘없이 뒤로 넘어가 버렸다.
그 순간 스태프들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문다.
곁에 있는 유진이도 얼마나 놀랐는지 내 팔을 꽈악 붙든다.
고작 일곱 살의 나이로 죽음을 몸짓으로 표현하다니.
매번 보지만 한 동작 한 동작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미소였다.
그 순간 미소를 품에 안은 최지영이 하이톤으로 외친다.
『아가! 아가! 아니 된다! 이 어미를 두고 어딜 가는 것이냐!』
최지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목울대에는 핏대가 서기 시작했고 가슴 속 저 깊은 속에서 끌어올린 포효가 세트장을 울린다.
애절한 외침엔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아픔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분위기가 고조되며 모두 긴장하는 그때.
최지영이 하늘을 쳐다보며 곡을 하듯 울부짖는다.
『천신이여······ 천신이여······ 서라벌을 내려 보는 천신이여······ 천신께 남은 제 명(命)을 다 바칠 터이니 부디 유화의 명(命)을 이어주시옵소서!』
최지영은 애가 끓는 목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외친 뒤 새끼손가락을 콱하고 깨문다.
특수 장치를 설치한 새끼손가락에서 가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왕후! 아니 되오!』
음갈문왕 역의 송지환이 외친다.
그러나 최지영은 결국 자신의 이마와 미소의 이마에 기묘한 형상을 그렸다.
극 중 도깨비의 힘으로 수명을 넘겨주는 술법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최지영이 뚝뚝 떨어지는 피로 형상을 그리고 있을 때 즈음 스태프들은 모두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최지영이 보이는 광기에 깃든 이 연기를 어린 미소가 그대로 이어받아 펼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들 한편으로는 미소가 어떤 연기를 펼칠지 기대하며 손에 땀을 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