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9화
439. 미소야 1
이태연이 남편과 내부거래를 했다는 걸 알아차린 손형태 대표는 결국 3억에 영화화 권리를 손에 넣었다.
“알겠어요. 3억. 저희 남편한테는 그렇게 이야기 전하고 CK 엔터에 들어가서 계약하라고 전할게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리고 방금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길 바랍니다. 일하다 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거 아닙니까?
로열패밀리의 힘을 제대로 느낀 까닭에 이태연은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럼 전······ 딸 촬영이 있어서 가볼게요.”
-그리고 딸이 이지라고 했죠? 우리 이지한테도 앞으로 연기에 기대 많이 한다고 안부 전해주세요.
“······네.”
이태연이 마지못해 대답한 뒤 날 뚫어지게 쏘아본다.
자신의 계획을 막은 내가 원망스럽다는 눈빛이다.
그러나 난 덤덤히 그녀의 눈빛을 받아넘겼다.
“안 가십니까?”
“갈 거예욧!”
이태연이 뾰족한 음성으로 외친 뒤 몸을 돌렸다.
이태연이 사라지자 숨을 죽이고 있던 안정해 감독이 스피커 폰에 대고 외친다.
“저 안정해 감독입니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야죠. 태연 씨랑 부딪히면서까지 권리를 가져왔는데 결과가 엉망이면 내 꼴이 우스워지지 않겠습니까?
“그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 안 합니다. 정 팀장님이 보증하는 데 제가 무슨 걱정을 합니까?
이태연과도 불편한 관계가 된 이상 아무리 내가 추천을 했다지만 내게도 그 책임을 져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하지만 550만 명의 관객이면 그 값은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아니 어쩌면 관객 수는 더 늘어날지도 몰랐다.
양이지가 주요 아역이던 것과는 달리 이번엔 미소가 그 역할을 맡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표님. 그리고 오늘 감사합니다.”
-됐어. 이번에는 신 대표가 아니라 나한테 연락해 준 게 어딘가?
“하하하. 약속은 지켜야죠.”
그런데 손형태 대표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의 조카인 조재경의 소식이 궁금했다.
미국으로 보내버린다고 했었는데 굳이 물어보긴 애매한 건이었기에 전화를 이대로 끊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참. 정 팀장. 재경이 소식 들었나?
알아서 먼저 이야기를 해주는 손형태 대표였다.
“아뇨. 못 들었습니다.”
-재경이 그놈. 자기 엄마랑 같이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하는 바람에 미국으로 보내진 못했네.
“그렇습니까?”
-그래. 그래서 방금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자네가 하자는 대로 한 거니까 그렇게 알게.
CK 엔터 손형태 대표의 아버지이자 조재경 감독의 외할아버지인 CK 그룹의 명예회장 손대인이 나선 이상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 그리고 며칠 뒤에 있는 황룡영화제 시상식에 올 건가?
“가야죠.”
-그래 그러면 그때 보자고.
“예. 대표님. 들어가십시오.”
달칵.
전화를 끊고 난 뒤 긴 숨을 내쉬었다.
이태연과 불편한 관계가 되긴 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미소가 연기로 양이지를 발라버린 이후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사이가 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투자자를 바꾼 탓에 기분만은 홀가분했다.
그런데 그때 안정해 감독과 박현수 제작실장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들 이러십니까? 이 좋은 날에······.”
그 순간 안정해 감독이 날 덥석 껴안는다.
“감사합니다! 정 팀장님!”
뒤를 이어 박현수 제작실장도 날 껴안았다.
두툼한 점퍼를 입은 두 남자 사이에 끼이다니.
“이 일단 이것 좀 놓으시고······.”
그 순간 촬영을 끝낸 미소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다 안정해 감독과 박현수 제작실장의 틈 사이로 삐지고 들어와 내 다리를 덥석 껴안았다.
“삼촌. 안기 놀이해요? 그럼 나도 유노 삼촌 안을래! 얍!”
내 다리를 껴안은 미소가 장난스레 웃으며 위를 올려다본다.
‘세상에 안기 놀이가 어디 있니 미소야?’
하지만 미소를 떼어 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때 미소의 뒤를 따라온 양소리 대리도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가왔다.
두 손을 뻗은 걸 보니 ‘저도 안아 드릴까요?’ 하는 표정이다.
이건 아니지.
난 손사래를 치고 세 사람을 진정시킨 뒤 대기 천막으로 향했다.
* * *
미소와 유진이가 사용하는 대기 천막 안.
난 미소에게 차기작에 대해 말했다.
“미소야. 안 감독님 차기작은 20년 전 실화를 다룬 작품인데······.”
난 안정해 감독이 쓴 <실종 – 잃어버린 자들>의 시나리오를 미소에게 들려줬다.
미소가 맡을 역은 이수연이라는 배역은 범인에게 납치를 당해 실종 되었던 아역 중 한 명으로 실종된 다른 피해자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살아남는 단 한 명의 아역이다.
그리고 그 아역으로 인해 실종자들이 사실은 납치 피해자라는 게 세상에 알리는 극에서 중요한 4명의 배역 중 하나였다.
작품 설명을 다 들은 미소는 들뜬 표정으로 답한다.
“응! 나 하고 싶어요. 근데 엄마한테도 말해야 하는데······.”
“엄마한테는 아까 말했어.”
아까 안정해 감독을 봤을 때 허락을 미리 얻어 놓았다.
“그러면 나 빨리 촬영하고 싶어요!”
아역이 유달리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다 보니 미소는 벌써 들뜬 표정이다.
어차피 오늘이 이 현장에서의 마지막 촬영.
미소는 당장이라도 다음 작품에 뛰어들 기세다.
안정해 감독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한다.
“최대한 빨리 크랭크인 할게!”
“아싸~!”
미소가 손뼉을 치며 웃자 양소리 대리가 웃으며 말한다.
“미소야. 이제 메이크업하게 바로 앉을래?”
미소가 행복한 표정으로 바르게 자세를 잡는다.
“넵!”
미소의 의사도 확인했으니 이젠 딱 한 가지가 남았다.
“감독님. 제작사 상황은 어떻습니까?”
안정해 감독이 어깨를 으쓱이며 옆을 보자 박현수 제작실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신 답한다.
“솔직히 좋은 사정은 아닙니다. 선 투자금으로 받은 오천만 원은 회사를 나가는 직원들에게 퇴직금으로 나눠 주셨거든요.”
초반 프로덕션을 진행하기에도 빠듯한 돈인데 그걸 제작사의 직원들 퇴직금으로 전부 나눠 주다니.
“그러면 그동안은 어떻게 시나리오 작업을 하셨습니까? 온갖 경비가 들어갔을 텐데······.”
박현수 제작실장이 감독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현재 회사는 안 감독님의 사모님께서 벌어오는 아르바이트비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혀 현수야. 그런 이야기는 왜 해?”
안정해 감독이 민망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솔직히 형편을 털어놓은 덕에 일이 편해졌다.
“그렇다면 제작사부터 바로 잡아야겠네요.”
투자를 통해 채무를 해결하고 안정적으로 제작사를 운영하자고 말했다.
일단 영화 제작사의 재무 상태가 안정적이어야지만 CK 엔터의 손형태 대표도 영화 제작비를 제작사에 넣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작사에도 투자해주신다고요?”
“예. 리버스 엔터의 계열사에서 투자할 겁니다.”
리버스 엔터 계열사 중에선 작은 투자회사 하나가 있었다.
과거 강한파가 사채업을 하던 법인인데 강은기의 지시로 대부분 채권을 정리하고서 영화나 드라마에 투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수찬은 괜찮은 회사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내게 부탁을 한 상황이다.
“리버스 엔터라면······ 혹시 전직 조폭이 운영하는······.”
“예. 맞습니다. 원래 강한파라는 폭력 조직이 세운 강한 엔터가 이름을 바꿨죠. 다만 이제는 완전히 손을 씻고 이 업계에서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가려는 친구들입니다. 그 점만은 제 모든 것을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리버스 엔터는 성공적인 투자로 이미지를 재고하고 안정해 감독은 바닥난 통장 잔고를 채울 수 있는 1석2조의 수다.
그러나 이수찬과 동생들이 전직 조폭이란 것 때문에 안정해 감독의 고민이 깊어진다.
“흐음······.”
“정 불편하시면 다른 쪽을 알아보겠습니다. 다만 조건이 가장 좋을 거라는 걸 약속드립니다.”
그때였다.
“아니 사채······야 이미 쓰고 있으니 그런 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다만?”
“돈세탁을 위해서 절 이용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솔직히 걱정됩니다.”
난 즉시 고개를 저었다.
“리버스 엔터 식구들은 저와 함께 보육원에서 자란 동생들입니다. 그러니 혹 일이 잘못될 경우에는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보증을 위해서 저도 안 감독님 회사에 투자하겠습니다.”
“정 팀장님까지요?”
“거기에 더해 제작사의 지분은 언제든지 감독님이 다시 회수할 수 있게 계약서에 명시하겠습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밀자 안정해 감독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좋은 작품을 만드는 제작사가 많아져야 저희 같은 엔터 회사도 먹고 사니까요.”
솔직한 심정을 말했지만 실은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
<실종 – 잃어버린 자들>의 성공 이후 안정해 감독은 곧장 후속작 작업을 들어간다.
그리고 그 후속작인 <실종2 – 그날의 이야기>는 전작에 비해 훨씬 큰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에브리데이 V12]
[날짜 : 2025년 12월 24일]
-PM 07:00 안정해 감독. <실종2 – 그날의 이야기> 박스오피스 1200만 명.
이번에 만들 <실종 – 잃어버린 자들>은 20년 전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그런데 차기작인 <실종2 – 그날의 이야기>는 내년 초 2021년 초부터 6개월간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과천 아동 연속 실종 사건’을 취재해서 만드는 작품이다.
내가 안정해 감독의 회사에 투자하려는 건 안정해 감독이 첫 번째 아이가 실종된 이후 다섯 번째 아이가 사라지는 동안 현장을 발로 뛰며 직접 취재와 조사를 해 가며 영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도 범인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제작사에 지분을 투자해 두고 안정해 감독과 친분을 쌓은 뒤 곧 다가올 연쇄 납치 사건에 개입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재로선 이 세상에서 나만이 그 일에 관한 단서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건 내가 투자한다고 하자 안정해 감독이 긍정적인 분위기를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결정을 내리진 못하고 있다.
그때 미소가 손을 번쩍 든다.
“감독님! 삼촌들 착해요!”
“응?”
미소가 자기 가방을 가리킨다.
“유노 삼촌! 내 가방 좀 주세요!”
“어. 여기······.”
분홍색 파워터프 걸 가방을 가져다줬더니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기 시작한다.
“이건 수찬 삼촌이 준 거······ 이건 호재 삼촌이 준 거······ 이거는 동훈이 삼촌이 준 거······.”
미소는 리버스 엔터에 있는 이수찬과 동생들의 이름을 하나둘 말하기 시작한다.
“미소야. 이 선물들은 언제 받았어? 삼촌들이 집에 놀러 온 적도 없잖아.”
미소가 도깨비 인형을 꺼내며 고개를 갸웃한다.
“삼촌들이 택배로 보내줘요! 착하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편지도 보내주고요. 그래서 나도 답장 써줘요.”
리버스 엔터를 설립한 이후.
동생들은 매니저를 하면서 ‘누군가를 처음으로 챙기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광주에 있는 천사 보육원의 아이들에게도 선물을 보내기까지 한다.
천사 보육원 출신이 아닌 동생들도 각자 자기가 있었던 보육원을 지원하고.
아마도 그 선물을 챙기는 김에 미소에게도 보낸 모양이다.
미소가 이수찬을 비롯한 동생들에 대해 보증(?)한 까닭일까 망설이기만 하던 안정해 감독이 결단을 내렸다.
“까짓것! 합시다! 지분 회수 조건을 달아두셨으니 아니다 싶으면 찢어지면 그만이죠!”
“감사합니다.”
들뜬 난 곧장 이수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들은 이수찬이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계약은 서울에 올라와서 이야기하시죠.
“그래. 너희 회사로 갈게.”
-아참. 그리고 혹시······ 뭐 영화 찍다가 조폭이나 잡부 같은 애들 필요하시면 이야기하십시오. 우리 애들이 까메오 넣으면 실감 나게 할 겁니다. 우리만큼 리얼한 애들 찾기 힘드실걸요?
안정해 감독이 웃으며 부탁한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예. 감독님.
투자사까지 문제가 해결된 이후 난 안정해 감독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사모님께 연락드리셔야죠.”
안정해 감독이 얼굴을 붉힌다.
그리고는 연신 헛기침하며 안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든다.
액정 한쪽 끝이 깨진 폰으로 안정해 감독이 손을 떨며 전화를 건다.
아내와 통화를 하던 그는 점점 목소리가 잠기기 시작한다.
“여 여보······ 나······ 영화 만들 수 있어. 제작사 빚도 해결됐어. 이 이제까지······고생시켜서······미안해 여보.”
안정해 감독이 눈물을 그렁대는 걸 보며 박현수 제작실장과 난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 * *
전화를 끝낸 안정해 감독은 흥분한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정 팀장님. 우리 미소 연기를 조금 더 보고 가겠습니다.”
“그러시죠.”
난 안정해 감독과 박현수 제작실장과 함께 먼저 대기 천막을 나간 미소를 따라 세트장으로 향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6시를 넘어가는 시각.
해는 지고 어둠이 세트장에 깔리고 있어 곳곳에 조명팀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제 시작하나 보다.”
먼저 와 있던 유진이가 긴장되는지 양손을 꼭 쥐고 있다.
“오빠. 근데 CG 씬을 미소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저도 해 봤지만 그린스크린 앞에서 연기하는 게 진짜 어색하던데······.”
이제부터 촬영할 4화 씬 50에선 2 왕후가 독버섯을 먹고 죽어가는 유화 공주를 구하기 위해 술법을 펼치는 씬이다.
극 중 2 왕후는 숨겨둔 신통력을 발휘해 자신의 수명과 딸의 수명을 바꾸는 금기의 술법을 펼친다.
그리고 2 왕후의 술법에 응한 도깨비 비형랑(鼻荊郞)은 자신이 부리는 반딧불이를 보낸다.
이후 그 반딧불이의 빛 속에서 2 왕후는 유화 공주에게 자기 수명의 대부분을 넘겨 버린다.
CG로 반딧불이가 잔뜩 등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에 현재 크로마키 촬영을 위해서 공주 방의 한쪽 면에는 그린스크린을 펼쳐 놓았다.
“걱정하지 마. 잘할 거야 우리 미소.”
성인 연기자들도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해 연기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미소가 그 연기를 해야 한다고 하자 유진이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오복희 PD가 있는 모니터링 장소에서 소란이 일어난다.
“가 감독님. 자 잠깐만요. 스 스톱······ 스톱이요!”
조금 전까지 모니터 앞에서 콘티를 보던 오복희 PD가 콘티북을 들고 세트장으로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금은동 AD가 서둘러 따라가고 있었다.
‘설마 그걸 하려는 건가?’
오복희 PD는 <화란전>의 촬영을 시작한 후 단 한 번도 하지 않던 일을 저지르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