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7화
437. 안정해 2
주차장에서 담배 한 개비를 서로 피우라며 내미는 두 사람을 보며 말보로 레드 한 갑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감독님.”
안정해 감독이 놀란 눈을 하고 날 쳐다본다.
“어······ 굴렁쇠 엔터의 정 팀장님?”
“절 아시는군요?”
“예. 요즘 잘 나가는 주연급을 몇이나 데리고 계신 분이니까요.”
“하하.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전작 영화 ‘뺑소니’ 잘 봤습니다. 피해자의 시점에서 잘 찍으셨더라고요.”
안정해 감독이 한숨을 푹 내쉰다.
“그 망한 영화를 어떻게 아시고는······.”
“현실 고증이 너무 잘 된데다 긴장감도 끝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홍보가 부족해서 흥행이 어려운 거였지 그 연출력은 근래 보기 드물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안정해 감독이 헛웃음을 짓는다.
“쩝. 좋게 봐주신 건 고마운데 아무리 그래도 망한 영화는 망한 영화지요.”
안정해 감독이 또 한 번 한숨을 내 쉰다.
난 그 틈을 타 말보로 레드의 은박을 까서 담배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담배를 보던 안정해 감독이 한숨을 푹 쉰다.
“염치없지만 지금은 한 대 안 피우고는 못 견디겠네요.”
안정해 감독이 담배 한 개를 받아 든 순간 난 가지고 온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안정해 감독이 내게도 권하려고 하기에 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전 담배를 태우지 않습니다.”
“예? 그런데 왜 담배를 가지고 다니십니까?”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비록 난 담배를 태우진 않지만 감독이나 스태프 중에는 애연가들이 많다.
수십억 혹은 수백억 투자받은 작품을 망치면 안 된다는 중압감때문이다.
난 그런 감독이나 스태프들을 위해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종류별로 한 보루씩 구비 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안정해 감독에게 내민 건 그가 자주 피우는 말보로 레드였다.
“대단하십니다. 제가 즐겨 피우는 담배도 알고 계시고······.”
난 씨익 웃으며 남은 담배 한 갑을 박현수 제작 실장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찔러 넣었다.
고작 담배 한 갑 때문에 자존심이 무너지지 않게 말이다.
올해 나이 30살인 박현수 실장은 3년 전 입사한 이후 쭉 같이 안정해 감독의 곁을 지키고 있다.
제작 실장이란 타이틀도 사실은 윗 선배들이 다 회사를 그만둬 자연스레 가지게 된 거였고.
“감사합니다. 정 팀장님.”
이태연에게 갑질을 당한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담배를 쭈욱 피우기 시작했다.
담배 한 모금이 무너진 자존심을 채우진 못해도 쓰린 속을 달래는 주니까.
애연가인 두 사람이 담배를 태운 뒤 근처 쓰레기통에 꽁초를 버린다.
“휴우~ 고맙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로 은혜라뇨. 당치도 않으십니다.”
안정해 감독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안정해 감독이 힘없이 뒤돌아서는 순간 난 그를 붙잡았다.
“안 감독님. 혹시 지금 투자처를 찾고 계신 겁니까?”
안정해 감독이 멈칫한다.
“예······.”
“그러면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설마······ 제 작품에 투자처를 소개해주시려고요?”
“예. 차기작 시나리오를 보고 관심 있어 하는 분들이 몇 있습니다. 그분들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안정해 감독이 반색하며 곁에 있는 박현수 제작실장을 쳐다본다.
박현수 제작실장도 흥분한 기색이다.
“감독님.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끄응. 그래도 시간이······. 이지 연기를 봐야 하는데······.”
난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고민하던 안정해 감독이 결단을 내린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깐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일단 제 차로 가시죠.”
우린 보는 눈을 피해 바로 곁에 있는 벤츠 스프린터로 향했다.
* * *
벤츠 스프린터 안.
유진이는 이미 미소에게 가고 없는 상태였다.
뒷좌석에 앉자마자 안정해 감독이 묻는다.
“정말 제 작품에 투자하실 분을 알고 계십니까?”
“예. 그런데 그 전에 현재 투자를 하신 분이 얼마나 있는지부터 들을 수 있을까요?”
영화는 여러 투자자가 끼이면 수익 분배와 지분 문제로 인해 복잡한 상황이 생긴다.
그렇기에 영화 투자를 주선하기 전 정확한 상황부터 알아야 했다.
안정해 감독이 한숨을 쉬며 말한다.
“현재까지 투자자는 한 명입니다.”
“누굽니까?”
“배우 이태연 씨에게서 받았습니다.”
“설마 개인 투자를 받은 겁니까?”
안정해 감독은 투자를 받기 위해 온갖 제작사와 투자사에 시나리오를 돌렸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중 제일 먼저 연락이 온 게 이태연이었다고 한다.
“태연 씨가 시나리오를 보고서 선뜩 5천만 원을 투자해주시더군요.”
당장 회사 운영비도 없었던 안정해 감독은 냉큼 오케이를 외쳤다고 한다.
그 결과 현재 <실종 – 잃어버린 자들>의 시나리오에 대한 영화화 권리는 이태연이 가지고 있다.
“예? 권리를······ 넘기셨습니까?”
“운영비가 필요했습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실종 – 잃어버린 자들>의 총제작비는 30억 정도.
매출만 따지면 470억 정도.
고작 5천만 원으로 470억 매출로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의 목줄을 쥐는 데 성공한 이태연이다.
게다가 지금은 자기 딸 양이지을 주요 아역인 이수연 역에 출연시키는 대가로 YH 창업 투자에게 후속 투자을 받게 해주겠다고 하고 있단다.
정작 안정해 감독은 양이지를 이수연 역에 쓰고 싶지 않은데도 말이다.
사정을 듣자 안정해 감독이 회귀 전 돈을 못 번 이유를 알 것 같다.
시나리오 권리를 뺏긴 상황이니 YH 창업 투자와의 계약이 온전했을 리가 없었을 거고 그 결과 안정해 감독은 최소한의 돈만 손에 쥐었을 거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해결책은 위약금을 내고 계약을 해지하는 방법이다.
통상 위약금은 계약금의 3배였기에 1억 5천만 원 정도를 내면 되는데 이번 경우에는 달랐다.
“위약금이 10배라고요?”
“예. 제가 워낙 급해서요.”
무려 10배의 위약금.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런 계약을 맺다니 너무하다 싶었다.
“위약금이랑 이태연 씨가 계약에 얽혀 있으면 투자자들이 접근했다가도 도망갔겠는데요?”
“예. 시나리오를 보고 몇 군데에서 연락을 해왔는데 사정을 알고는 질색하더군요. 위약금까지 내면서 가져가기도 싫고 태연 씨랑 척지기도 싫다고요.”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아는 투자자들은 이태연조차 어찌할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다.
가령 최은태 회장이 갖고 있는 대흥 저축은행이라거나 이수찬이 가지고 있는 리버스 캐피탈 그것도 아니면 CK 엔터나 LT 엔터의 대표들이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태연 씨 정도는 두려워하지 않을 든든한 투자자와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일단 제가 연락을 해봐야 하니까 잠시 후에 다시 이야기하시죠.”
오히려 내겐 어떤 투자자를 소개해줘야 할지가 문제였다.
“알겠습니다!”
이리저리 휘둘리며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 희망찬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그러면 온 김에 미소 연기나 보러 가시겠습니까?”
순간 안정해 감독이 경계심을 가진 채 묻는다.
“혹시. 정 팀장님도 미소를 출연시키라는 조건을 다시는 겁니까?”
“아니요. 미소 연기가 별로거나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배우를 고르셔도 투자에는 일절 영향이 없을 겁니다.”
이태연처럼 배역을 인질로 투자를 좌지우지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난 자신했다.
미소의 연기를 보게 되면 다른 배우를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이지 연기도 봐야 하니까······ 겸사겸사 보면 되겠네요.”
우린 곧장 차에서 내린 뒤 세트장으로 향했다.
* * *
4화 씬 44.
정화 공주가 엄마인 1왕후에게 받은 독버섯을 유화 공주에게 먹이는 장면이다.
오복희 PD는 진지한 표정으로 세트장을 주시하고 있다.
“자! 다들 자리하고 호위 무사랑 시종 배우들은 동산 밑에 있다가 콜 싸인 나오면 바로 뛰어 올라가세요! 왔다 갔다 힘 빼지 마시고 한 번에 바로 갑시다!”
세트장 한쪽에 마련된 동산.
커다란 소나무 아래 그늘에 세 명의 아역 배우 양이지와 진공주 그리고 미소가 예쁜 한복을 입고 촬영 대기 중이다.
반면 조연배우들은 동산 아래서 언제든 뛰어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다.
스태프들의 상태를 확인한 뒤 오복희 PD가 양이지에게 묻는다.
“이지야. 오늘은 몸 좀 어때?”
“괜찮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복희 PD도 조금은 안심한 표정이다.
“그러면 바로 갈게.”
“네~”
오복희 PD가 외친다.
“자~ 그러면 준비하고 4화. 씬44. 레디~ 액션!”
그 순간 아역들이 연기를 시작한다.
정화 공주역의 양이지가 뒤로 새하얀 독버섯을 숨긴 채 쪼그리고 앉아 꽃구경 중인 미소에게 다가간다.
『유화. 네가 버섯을 좋아한다 하여 오다가 캤단다. 자 여기. 좋은 것으로 골라왔느니라.』
양이지가 뒤에 숨겼던 새하얀 독버섯을 건넨다.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면서.
순간 미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양이지를 쳐다본다.
『정화 언니. 이런 귀한 버섯을 어디서 캐신 것이어요?』
『산 아래서 캤단다. 그간 너와 다툰 게 미안해서 특별히 가져왔단다.』
미소는 티 없는 얼굴을 한 채 버섯을 받아든다.
극 중에서는 사이가 약간 벌어진 두 사람이지만 설마 독버섯을 건넸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표정으로.
『신선할 때 먹어야 좋은 것이라 들었다. 혹 먹기 힘들까 봐 여기 기름장을 조금 얻어 왔느니라.』
양이지가 참기름이 찰랑이는 작은 종지를 내민다.
『어서 먹거라. 버섯 채취하는 이들의 말을 들으니 이 흰 버섯은 신선할 때 참기름과 먹어야 좋은 것이라고 하더구나.』
『귀한 참기름까지······』
신라 시대에 참기름은 쉽게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이다.
신선한 버섯에 참기름까지 받아든 미소가 군침을 흘린다.
그러나 혼자 먹기 아쉬운지 곁에 있는 진공주를 바라본다.
『도화야. 이 버섯은 하나뿐이지만 꽤 큼직하구나. 함께 먹자꾸나.』
순간 진공주가 황급히 고개를 젓는다.
『아니에요! 언니나 많이 드세요. 전 올라오기 전에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르답니다.』
막내 도화 공주는 장녀인 정화 공주가 건넨 버섯이 독버섯인 줄 한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남의 손을 빌려 경쟁자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며 입을 다문 것이다.
『그러냐? 그러면 나 혼자 먹어야겠구나.』
미소가 군침을 다시며 독버섯을 참기름에 듬뿍 찍었다.
그리고는 한입 덥석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미소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향이 아주 독특한 버섯이에요. 정화 언니.』
양이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래? 모처럼 만의 귀한 버섯이니 조금만 더······ 먹으렴?』
양이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미소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독버섯을 더 먹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미소의 움직임이 느려지며 터무니없는 연기를 펼치기 시작한다.
『컥! 컥!』
두 손으로 목을 감싸 쥔 미소가 먹은 것을 게워내려 한다.
하지만 쉽지가 않은지 몸을 파르르 떤다.
얼굴은 빨갛게 달아 오르고 눈에선 눈물이 입가로는 침을 흘리기 시작한다.
정말로 중독된 사람처럼 몸을 벅벅 긁는 미소의 모습은 감탄을 넘어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로 리얼했다.
그때 내 곁에 있던 유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오 오빠. 우리 미소 먹은 거 혹시 독버섯 아니겠죠?”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아까 소품팀장님이 먹어보고 건네줬잖아.”
“아~ 맞다.”
안전을 위해 소품팀장이 직접 먹고 건네준 버섯이다.
다만 미소의 연기를 보자 유진이도 나도 확신을 하지 못할 정도다.
그 순간 미소가 오른손을 파르르 떨며 앞으로 내민다.
『컥컥. 정화······ 언니······ 나한테 무슨······ 짓을······』
너무도 실감 나는 미소의 연기에 질렸는지 양이지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그 그러게······ 왜 내 내 자리를 넘봐? 너만 너만 없으면 여왕은 내 자리인데!』
순간 미소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왕은 하늘이······ 정하는 것······ 이런다고······ 컥······ 언니가······ 여왕이 될 것······같아······요?』
미소가 힘들게 발걸음을 앞으로 한 걸음씩 옮긴다.
놀란 양이지가 빠르게 뒷걸음질 치다 동산에 있는 나무에 등이 닿았다.
턱.
미소가 부들부들 떨며 다가오자 양이지가 피하지를 못한다.
미소는 한발 두발 발을 뗀 뒤 다가가 양이지의 옷고름을 겨우 붙잡았다.
순간 양이지가 비명을 지르듯 외친다.
『이 손 치우지 못할까! 계림의 여왕은 바로 이 정화의 것이니라!』
양이지가 힘껏 미소를 밀치자 힘이 다한 미소는 옆으로 털썩 쓰러진다.
바닥에 쓰러진 미소가 바르르 떨며 경련을 일으키더니 손과 등을 오므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양이지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게 서 있었는데 다행히 진공주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요! 정화 언니. 독버섯을 건네놓고선 왜 이제야 약한 모습이에요?』
『도 독버섯? 너 설마······ 알고 있었니?』
『정화 언니와 나만 아는 비밀이 생겼네요.』
약점을 잡힌 양이지는 몸을 부르르 떨다 진공주를 노려본다.
『너! 만약 그 입을 함부로 놀리면 절대로 가만 안 둬!』
『그러는 정화 언니나 입조심 하세요.』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충돌하며 불꽃을 튀긴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바닥에 누운 미소를 쳐다본다.
미소가 아무런 미동을 하지 않자 그제야 두 사람은 동산 아래를 향해 외친다.
『꺄아아악~ 유화야!』
『유화 언니!!』
어린 악녀 두 명은 목청이 떠나가라 외친다.
순간 대기하던 단역 배우들이 벌떡 일어나 언덕 위로 뛰어 올라간다.
『유화 공주님!』
『세상에! 아이고~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조연들이 소리치며 그렇게 씬 44가 마무리되었다.
“커어~~~엇!! 오케이!”
미소의 실감 난 연기에 스태프들이 당황해 외친다.
“미소야 괜찮아?”
오복희 PD도 당황해 119를 부르라며 난리를 피운다.
그런데 그때.
미소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괜찮아요!”
미소가 씩씩하게 손을 흔들어댄다.
스태프들이 멍하니 있다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로 잘못된 줄 알았잖아!”
“무슨 애가 연기를······.”
역시나 미소의 연기는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난 뿌듯한 표정을 지은 채 옆을 슬쩍 쳐다봤다.
미소의 연기에 나름 익숙한 스태프들과 달리 안정해 감독은 아예 넋이 나간 표정이다.
“감독님?”
말을 걸자 안정해 감독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내 손을 덥석 붙잡는다.
“정 팀장님. 조금 전 제안 아직 유효합니까? 투자랑 미소를 배역에 넣어달라는 거요.”
“물론이죠.”
됐다.
미소의 연기가 안정해 감독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런데 그 순간.
이태연이 눈을 부라리며 빠르게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