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화
43. 체리블라썸에게도 봄날이 1
오늘은 유진이의 스케줄이 없는 날이라 체리블라썸의 매니저 역할을 해야 했다.
가수 2실로 가지 않는다고 하자 이동민 실장은 본부장실까지 찾아가 애원하고 협박까지 했었다.
그 성화를 못 이긴 강지영 본부장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 탓에 난 유진이의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공식적으로 체리블라썸을 담당하게 된 상황이다.
덕분에 몸이 두 개가 아닌 게 아쉬울 정도로 바빠졌지만.
지하주차장에 차를 댄 나는 늘 하듯 다이어리부터 확인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오늘도 난리겠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1월 12일]
-PM 06:20 강원도 용평 H 리조트 KBC 생방송 뮤직스테이지 야외무대. (보고 사항) 골든로드 리허설 펑크
-PM 06:40 (보고 사항) KBC 생방송 뮤직스테이지 중 골든로드와 쁘띠모 충돌.
-PM 07:00 KBC 생방송 뮤직스테이지 공개 라이브
-PM 09: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강원도 횡성 한우 맛소멋소 대축제 무대 체리블라썸)
회귀 전 이날.
엄청나게 고생했던 게 떠올랐다.
골든로드의 승합차를 운전해 용평으로 가던 중 갑자기 내린 폭설로 인해 5시 30분까지 도착해야 하는 일정에 늦어버렸다.
리허설도 못하고 AD의 호통까지 듣다 보니 골든로드는 상당히 히스테릭해졌었다.
그 탓에 골든로드의 장은영은 쁘띠모의 박은빈과 한바탕 다투기까지 했었고.
겨우 라이브 무대를 끝내고 돌아왔지만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그런데 다이어리를 보던 중.
맨 밑으로 삭제된 일정하나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체리블라썸도 많이 컸구나.”
회귀 전 장터 한복판에서 열렸던 한우 맛소멋소 축제가 아니라 KBC 뮤직스테이지에 서다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피리릭.
승합차의 시동을 끄고 가수 2실로 향했다.
이동민 실장이 까치집이 된 머리를 벅벅 긁고 있다가 날 반겼다.
“정 스타. 오늘도 우리 애들 잘 좀 부탁하자. 아 그리고 신곡 준비 작업 들어갔다.”
“벌써요?”
“왜? 물 들어오는 데 노가 시원찮다며?”
이동민 실장이 내가 했던 말을 꺼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오늘 그 문제 때문에 난 좀 늦어질 것 같으니까 넌 한 팀장이랑 먼저 출발해야겠다.”
“예. 실장님.”
신곡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10년의 기억을 되살리며 뜰 곡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체리블라썸에게 추천할 생각으로.
그때 체리블라썸을 담당하는 한명호 팀장이 2실로 들어왔다.
한명호 팀장은 어제도 회사 숙직실에 잤는지 몰골이 영 아니었다.
역시나 아이돌 전담은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어? 벌써 왔어?”
“예. 한 팀장님.”
한명호 팀장이 찌뿌둥한 얼굴을 지은 채 말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까 뜨끈한 국밥이나 한 그릇씩 먹고 출발하자. 몸이 영 뻐근해서 안 되겠다.”
느긋하게 출발하자는 말에 난 고개를 저었다.
“팀장님. 오늘 대설주의보 내렸다던데요? 아무래도 빨리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명호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예보가 있었나 생각하는 눈치다.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가는 길에 먹게 김밥이나 사서 가지 뭐.”
“예. 팀장님.”
사무실을 나온 우리 일행은 오늘의 전장인 용평으로 달렸다.
* * *
끼이익.
용평 H 리조트 주차장에 차를 대었을 땐 이미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린 지 20분이 지나 있었다.
엄지손톱만 한 눈이 쉬지 않고 내린 탓에 사방이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폭설이네요.”
“후우. 느긋하게 출발했다가는 펑크낼 뻔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이주영 매니저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펑크 났으면 진짜 까였을 거예요. 안 그래도 페이스 미팅 때 급수도 안 되는데 끼었다며 타사 매니저들이 어찌나 눈치를 주든지······”
페이스 미팅은 PD와 가수들의 소속사가 모여 음방의 출연 순서를 결정하는 회의를 말한다.
하지만 연말 아이돌 대전으로 인지도를 얻은 체리블라썸은 최은혁 PD의 든든한 지원사격을 받는 중이었다.
그 덕분에 35위라는 낮은 순위에도 용평 특별 스테이지에 설 수 있었고.
그때였다.
드르륵.
뒷좌석의 차 문이 열리더니 세리가 튀어 나갔다.
“눈이다! 내가 처음 밟아야지!”
세리가 발목까지 쌓인 주차장 화단으로 다가갔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이 뭐가 그리 좋은지.
폭설에 대비해 미리 준비해 온 장화 덕에 젖을 일은 없었다.
“세리야! 옷 젖어! 거길 왜 들어가!”
우연희가 외치자 세리는 옷이 젖을까 걱정은 되었는지 치마와 코트를 살짝 들어 올렸다.
“이제 됐지?”
“되긴 뭘 돼!”
“아냐 됐어!”
우연희가 그 모습을 보고 안 되겠다며 잡으러 달려나갔다.
“에휴. 쟤는 언제 어른이 될지.”
새해가 들어 16살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 같다며 양은비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지막으로 내린 은아는 양은비의 팔을 잡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사주경계를 하는 미어캣 같다고나 할까.
스키장이 있는 리조트다 보니 사람들이 많은 탓이다.
저러고도 무대 위에서 공황장애가 안 오는 게 천만다행이다.
“은비······ 언니. 나 오늘······”
은아의 불안한 표정을 본 양은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하지 말고 내 곁에만 딱 붙어 있어.”
“으응. 언니.”
차에서 필요한 옷가지들을 챙기던 이주영 매니저가 날 불렀다.
“윤호야. 이것 좀 도와줄래?”
“예. 이 대리님.”
비닐에 싼 무대의상을 한 아름 품에 안았다.
“잠깐 그런데 왜 무대의상이 두 벌씩이지?”
“아. 오늘 날씨가 이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비용으로 넉넉하게 챙겨 왔습니다.”
“이야~. 우리 윤호 장난 아닌데?”
이주영 대리가 준비성이 철저하다며 웃는다.
하지만 내가 이 의상을 챙겨 온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이리 줘. 나도 도울게.”
한명호 팀장까지 나서서 짐을 챙긴 뒤 공개 세트장으로 향했다.
스키복을 입고 스키와 보드를 짊어진 리조트 이용객들이 우릴 보고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체리블라썸 아냐?”
“아! 야외무대 있다고 하더니 오늘이구나.”
“근데 다들 머리 진짜 작다. 내 주먹보다 작은 듯?”
“그치. 나랑은 완전 반대네. 엄마. 날 왜 이렇게 낳았어요?”
“얘는. 엄마 탓하지 마. 넌 아빠 닮았으니까.”
“다들 비주얼이 쩌네. 근데 쟤들 요즘 자주 보이는 것 같더라.”
“연말 방송빨이지 뭐. 곡만 좋았으면 이번에 제대로 떴을 텐데.”
찰칵찰칵.
스키장에 온 사람들이 연신 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댔다.
우연희는 부끄러워하고 양은비는 당황하지 않은 척 가슴을 폈다.
세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대며 인사를 해댔고.
“안녕하세요! 체리블라썸입니다. 전 애기롱 김세리고요 아 애기롱이요? 제 이름으로 말하긴 좀 쪽팔리는데. 키는 작아도 다리가 길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저 미친 친화력 좀 보소.
체리블라썸 넷 중에서 제일 연예인에 어울린다고나 해야 할까?
저 친화력 좀 반 뚝 떼서 은아한테 줬으면 좋겠다.
반면 은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내 곁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양은비가 잠시 신경을 못 쓴 사이에 내게 달라붙은 거다.
“은아야. 내 뒤에 착 붙어 있어. 걱정하지 말고.”
“네······ 오빠.”
난 은아를 몸으로 가리고서 임시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 도착하자 스태프들이 부산을 떨고 있었다.
한명호 팀장부터 나까지 인사를 하자 차태희 AD가 큐시트를 든 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한 팀이라도 먼저 도착해서 다행이네요. 한 팀장님. 지금 영동 고속도로에 차 많이 막히나요?”
“저희가 올 때까지는 괜찮았습니다만 IC 빠져나올 때 확인해 보니 눈 때문에 조금씩 밀리는 거 같더라고요.”
“이걸 어쩐다. 이거 아무래도 오늘 몇 팀 펑크날 거 같은데?”
혼잣말하던 차태희 AD는 무선 인터컴에 대고 우리의 도착을 알렸다.
“예. PD님. 체리블라썸 도착했습니다. 예. 예.”
현장 체크를 끝낸 차태희 AD가 한명호 팀장과 상의에 들어갔다.
“리허설은 순서 상관없이 가장 먼저 오신 체리블라썸부터 할게요.”
“예. 차 AD님.”
차태희 AD는 얼마나 긴장했는지 큐시트를 꽉 쥐어 우그러뜨렸다.
음방 방송 경력 5년 차인 그녀도 이런 악재가 겹치는 건 처음이라며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인터컴으로 뭔가를 지시받은 차태희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예. 예. 그렇게 할게요. 예~.”
대화를 끝낸 차태희 AD가 대기실로 향하는 한명호 팀장을 불렀다.
“한 팀장님. 급하게 이런 부탁을 드려서 죄송한데. 우리 체리블라썸. 본방 첫 번째 무대도 맡아줄 수 있을까요?”
“첫 번째 무대요? 그건 핑크다이아 애들 순서 아닙니까?”
“아직 안 왔어요. 그래서 말인데 최 PD님이 일단 급한 대로 첫 번째 두 번째 무대 다 맡아달라고 하시네요. 곧 리허설 들어갈 건데 어떻게 두 곡 가능해요?”
회귀 전에도 폭설로 여러 팀이 지각하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다.
결국 생방 시간이 끝날 때까지 가수가 도착하지 않아 먼저 도착한 가수가 몇 곡씩 부르며 땜빵을 하기도 했고.
일찍 오자고 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빠지는 팀이 생기면 누군가는 무대를 채워야 하니까.
아이돌 대전에 이어 연이어 최은혁 PD에게 포인트를 쌓을 좋을 기회였다.
한명호 팀장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합니다! 무조건 두 무대가 아니라 세 무대 네 무대라도 채우라면 채우겠습니다.”
차태희 AD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인터컴에 대고 상황을 전했다.
“예. 예. 알겠습니다. PD님.”
최은혁 PD에게 인터컴으로 회신을 받은 차태희가 곧장 지시를 내렸다.
“지금 바로 리허설 스탠바이 들어가 주세요. 그리고 생방 때는 3분 텀을 드릴 테니까 중간에 의상을 갈아입고······ 아 맞다. 무대의상을 안 챙겨 오셨을 테니 의상은 이대로 가죠.”
“아뇨. 갈아입을 옷은 충분히 준비해 왔습니다.”
차태희 AD가 환하게 웃으며 한명호 팀장의 팔을 한번 툭 친다.
“뭐야? 한 팀장님. 오늘 나 감동 먹이려고 작정이라도 하신 거예요?”
“하하하. 감동하셨습니까?”
“완전요. 내가 진짜 남친만 없었어도 뽀뽀 한 번 해드리는 건데.”
한명호 팀장이 히죽 웃었다.
“전 유부남이라 안 되고 여기 윤호한테나 해주시죠. 윤호가 의상을 더 챙겨 오자고 했거든요.”
“어머 그럼 우리 윤호 씨. 뽀뽀 한 번 킵!”
차태희 AD의 윙크에 빠르게 답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의 칼 같은 거절에 차태희 AD가 킥킥대며 웃었다.
“칫. 거절하는 남자 별로 매력 없는데······. 어쨌건! 체리블라썸이 절 살려줬으니 이 은혜 안 잊을게요. 고마워요.”
“은혜라고 할 건 없고 곧 신곡 나오니까 그때 잘 부탁드립니다.”
신곡이란 말에 곁에 있는 체리블라썸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음 곡이 준비되고 있는 사정을 모르고 있었나 보다.
차태희 AD가 사라지고 난 뒤 한명호 팀장이 몸을 돌리곤 날 덥석 껴안았다.
“윤호야! 하여튼 너만 오면 일이 왜 이리 술술 풀리는지 모르겠다! 자식 어제는 무슨 꿈 꿨냐?”
‘꿈은 아니고 기억이요.’
어찌나 과격하게 껴안는지 몸이 으스러질 것 같다.
“하여간 우리 윤호. 이뻐 죽겠다!”
마치 일곱 살짜리 아이를 안고 턱수염을 비비는 아빠 같다.
까칠거리는 수염이 피부에 닿으니 소름이 오싹 돋는다.
“티 팀장님. 빨리 준비해야죠.”
“아 그 그렇지. 얘들아. 어서 준비하자!”
“네~.”
체리블라썸도 다 같이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5분 뒤 리허설 시작입니다.”
뮤직스테이지 스태프 정은아가 헐레벌떡 대기실로 뛰어와 리허설 시작을 알렸다.
한명호 팀장은 그 틈을 타 현장 상황을 물었다.
“저기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최악이에요. 곧 시작하는데 지금까지 20%도 안 왔어요. 현장에서도 큐시트 순서가 완전히 꼬여서 난리예요.”
정은아는 힘들어 죽을 거 같다고 투덜거린다.
아마도 엄청 까이고 있겠지.
심지어 우리 굴렁쇠 엔터 1실 소속의 골든로드도 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이어리 일정이 안 바뀌는 걸 보니 촬영 전에는 도착하기는 할 모양이다.
“자 가시죠. 네~. 체리블라썸 이동합니다.”
인터컴에 대고 보고한 정은아가 우리를 리허설 무대로 인도했다.
오프닝 무대에 이어 연속해서 공연을 맡게 된 체리블라썸 멤버들도 잔뜩 기대에 부푼 기색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심해야 했다.
잠시 후 본격적으로 난장판이 벌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