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1화
421. 세리를 돕다 3
들뜬 표정으로 김애란 프로듀서를 쳐다보자 빙긋이 웃는다.
“자세한 건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도 해 봐야 알겠지만 이 정도면 얼마든지 병원에 안 가고도 나을 수 있어요.”
솔루션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혹시 원인도 아시겠습니까?”
“아마도 ‘솔로’가 되었다는 부담감 때문에 증상이 생긴 것 같아요. 홀로서기가 쉬운 게 아니니까요.”
나 역시 대충 예상한 것과 일치하는 진단이다.
순간 김애란 프로듀서가 날 쳐다보며 말한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자책하지 마세요. 지금 오나 나중에 오나 언젠가는 왔을 테니까.”
김애란 프로듀서는 내가 자책한다는 걸 대번에 알아차렸다.
“감사합니다. 김 프로님.”
“그보다 이런 증상이 나타난 지 얼마 안 됐죠?”
“예. 오늘 처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침에는 ‘뚜비 공주’ 노래도 잘 따라 했는데 말입니다.”
“공황장애라는 게 그렇게 갑자기 오기도 해요. 근데 이거 최대한 빨리 잡아야 하는데······ 지금 바로 세리를 볼 수 있을까요?”
난 곧장 이동민 실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실장님. 다른 일이 없으면 전 김애란 프로듀서님이랑 함께 먼저 세리에게 가보겠습니다.”
“어서 가 봐. 어차피 난 지금부터 선배랑 회사 인수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으니까.”
“복잡한 일만 맡겨드려 죄송합니다.”
“당치도 않은 소리. 대신 세리는 확실하게 책임지고.”
안예음 대표와도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정 팀장. 나중에 봐요~”
“예. 대표님.”
“대표는 무슨. 오늘부로 사업 접을 건데. 다음부터는 안 프로라고 불러줘요. 이사 직책이라지만 뭐 프로듀서가 주 역할일 테니까.”
“예. 안 프로님.”
그러자 김애란 프로듀서가 말한다.
“전 그냥 김 프로라고 해주시면 되고요.”
“예. 김 프로님.”
그때 김애란 프로듀서가 아차 하고 말한다.
“잠깐만요. 그래도 첫 만남인데 간단히 옷만 좀 갈아입고 나올게요.”
김애란 프로듀서는 급히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축 늘어진 티셔츠 대신 깔끔한 검은 정장을 입고 검은색 뿔테 안경 대신 컬러 뿔테 안경을 쓰고 나왔다.
그리고 산발한 분홍색 단발머리를 고데기로 말았는지 꽤 정돈되어 있었다.
“갈까요? 정 팀장님?”
* * *
체리블라썸의 숙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매콤한 고춧가루의 향과 고소한 기름 냄새 그리고 구수한 고기 냄새가 동시에 코끝을 자극한다.
아마도 세리의 최애 메뉴인 떡볶이와 튀김 그리고 순대인 것 같다.
저녁을 굶어서 그런지 냄새를 맡자마자 배에선 꾸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거실에 앉아서 막 음식을 먹으려던 세리가 날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댄다.
“어? 유노 오빠~ 어서 와서 같이 먹어요!”
테이블 위엔 막 도착했는지 분식들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체리블라썸도 어서 앉으라며 손짓했지만 난 자리에 앉지 않고 내 뒤를 따라 들어온 김애란 프로듀서를 소개했다.
“얘들아. 먹는 건 잠깐 뒤로 하고 인사부터 하자.”
분홍색 머리카락을 한 김애란 프로듀서가 나타나자 다들 놀란 눈치다.
“오빠. 이분은 누구세요?”
우연희가 대표로 묻기에 친절히 소개했다.
“김애란 프로듀서님. 새로이 우리 정 팀에 합류하게 된 프로듀서셔. 인사들 해.”
우연희가 젓가락을 놓고 일어나자 나머지 멤버들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안녕하세요! 영원히 피고 싶어! 체리블라썸이에요!”
네 사람이 각을 잡고 시그니처 인사를 건네자 김애란 프로듀서 역시 두 손을 꽃 모양으로 활짝 피며 흔들어댄다.
“영원히 피어나라! 사랑 팍팍! 응원 팍팍!”
김애란 프로듀서는 장난스레 손을 뻗어대며 장난스러운 구호를 외쳤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멤버들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풉.”
“큭.”
김애란 프로듀서는 친근하게 체리블라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앞으로 너희들을 케어할 김애란이라고 해. 잘 부탁해?”
“예~ 프로듀서님.”
“그냥 김 프로라 불러. 그게 편하잖아.”
“예. 김 프로님!”
인사를 마친 우리는 테이블을 중심으로 모여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분식을 먹으며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쳤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도중 김애란 프로듀서가 자기 과거를 별일 아닌 듯 털어놓기 시작했다.
“실은······ 나도 프로듀서 되기 전에는 너희들처럼 아이돌로 데뷔를 준비했었어.”
우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진짜요?”
“왜? 난 안 예뻐서 아닌 거 같았어?”
“아 아뇨. 아이돌 출신 작곡가가 별로 없어서 놀라서 그랬어요. 그리고 김 프로님. 진짜 미인이세요!”
본인은 안 예쁘다고 하지만 김애란 프로듀서는 우연희와 양은비를 반반 섞어 놓은 꽤 스타일 좋은 미인이다.
김애란 프로듀서가 장난이었다며 씨익 웃는다.
“풋. 알았어. 장난이야 장난. 하여간 데뷔하려던 그룹 이름은 핑크래빗이었고 난 거기서 리더였었고.”
“핑크래빗이요?”
양은비가 가볍게 웃음을 짓자 김애란 프로듀서가 장난스레 투덜댄다.
“웃기지?”
양은비가 다급히 손을 내젓는다.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 실은 나도 웃겼으니까. 하아~ 그런데 아이돌 보고 핑크래빗이라니. 너무하지 않아? 그린이나 블루면 또 몰라도. 참고로 난 블루래빗을 밀었었어. 그게 더 튀고 좋아 보여서. 니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이들은 그게 더 이상하다며 웃음을 터트려댔다.
10년 전 이야기였지만 김애란 프로듀서의 입담이 좋아 다들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애란 프로듀서가 세리를 쳐다보며 슬그머니 본론을 꺼낸다.
“그랬는데······ 데뷔 한 달 전에 덜컥하고 공황장애가 오더라고. 그래서 뭐······ 망했지.”
‘제법이네.’
김애란 프로듀서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체리블라썸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착한 체리블라썸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자신과는 달리 김애란 프로듀서는 아이돌의 꿈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리가 눈물을 그렁이며 닦으며 묻는다.
“김 프로님. 그러면 지금은 괜찮으세요? 예?”
김애란 프로듀서가 두 손을 활짝 펼친다.
“당연하지. 완전히 다 나았어. 다만 아이돌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서 못할 뿐이지.”
“다행이다~”
세리를 비롯해 나머지 세 사람도 나아서 다행이라며 손뼉을 쳐댄다.
그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지금까지 이야기의 결말을 말하는 김애란 프로듀서였다.
“그러니까 세리 너도. 괜찮아질 거야.”
“예? 저도요?”
“응. 미안한데 지금의 너도 공황장애인 거 같아. 하지만 극도로 초기니까 사실 그냥 불안증? 그래. 그 정도라고 보면 될 거 같아. 그러니까 내가 이제부터 도와줄게. 우리 대표님이 그랬던 것처럼.”
다정한 김애란 프로듀서의 말이 나온 순간 세리가 눈에서는 폭포수 같은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 어? 나 왜 이러지······ 흐흑.”
자칭 큐티섹시 세리였지만 오늘만큼은 울보 세리가 되는 하루였다.
* * *
김애란 프로듀서는 세리를 진정시키며 자기 치료 경험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정신과 의사와 상담도 했었고 약도 먹어 봤다고.
하지만 결국 최종 효과를 본 건 운동과 인지행동치료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세리에게 몇 가지를 권유하기 시작했다.
“세리야. 너 요가 할 줄 아니?”
그사이 눈물을 그친 세리가 고개를 젓는다.
“아뇨.”
“그러면 좋아하는 운동은?”
세리가 흠칫하며 시선을 돌린다.
그러자 우연희가 세리를 토닥이며 대신 답해준다.
“우리 세리. 운동 싫어해요.”
세리가 입술을 삐죽인다.
“그래도 레슨은 열심히 하잖아.”
김애란 프로듀서가 웃으며 세리를 가리킨다.
“그러면 내가 간단한 요가 동작 가르쳐 줄 테니까 일단은 그것부터 매일 하자. 그러면 정신 건강에도 좋고 무엇보다 다이어트에 짱 좋아!”
세리가 조금 관심을 보인다.
아이돌에게서 가장 힘든 건 역시나 먹는 것을 참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요?”
“응. 그러니까. 오늘부터 바로 하자.”
순간 나머지 체리블라썸 멤버들도 세리를 위해 함께 하겠다며 대답했다.
그때였다.
세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저기 김 프로님······.”
“응? 왜?”
“그래도 오늘은 떡볶이랑 순대 먹으면 안 돼요? 유노 오빠가 먹어도 된댔는데······.”
다이어트란 말이 나온 순간 테이블에 남겨 놓은 분식이 눈에 아른거리는 모양이다.
김애란 프로듀서가 피식하고 웃는다.
“오케이~ 뭐 다이어트는 언제나 내일부터지. 대신 내일은 아침부터 요가 할 거야. 알았지?”
“아싸!”
세리가 흥이 난 채 순대를 쌈장에 푹하고 찍는다.
김애란 프로듀서가 고개를 갸웃한다.
“웬 쌈장? 소금에 안 찍고?”
“헐~ 김 프로님. 서울 사람이죠?”
“어.”
“그래서 그렇구나. 쌈장에 찍어 드셔보세요. 짱 맛있어요!”
“그래?”
세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애란 프로듀서가 조심스레 순대를 쌈장에 찍은 뒤 눈을 질끈 감고 한입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 그 순간 김애란 프로듀서의 얼굴이 펼쳐진다.
“어? 맛있네?”
“그쵸? 그쵸? 역시 순대는 쌈장이라니까요?”
“그러게. 나도 다음부터는 이렇게 먹어야겠다.”
김애란 프로듀서는 그 뒤로도 너무도 자연스레 공황장애 치료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떡볶이를 한입 베어 먹으면서 말이다.
“음음······ 근데 세리야 아까 왜 목소리가 떨렸는지 기억해? 냠냠.”
순대를 쌈장에 듬뿍 찍은 세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아뇨. 그냥 이게 내 솔로곡이다 싶으니까 갑자기 심장이 막 쿵쾅쿵쾅 뛰던데요? 세상에 나 혼자가 된 것 같고요.”
“근데 실제로는 혼자가 아니잖아. 옆에 언니들도 있고 정 팀장님도 있고 매니저들도 있고.”
세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긴 한데 그땐 그랬어요. 막 땅으로 푹 꺼지는 거 같고요.”
“음~ 그러면 있다가 이거 다 먹고 나랑 같이 하나씩 세리가 걱정되는 걸 적어보자.”
“적어요? 왜요?”
“종이에 다 적어놓고선 진짜로 걱정거리인지 알아보는 거지. 사람은 실제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걱정하는 게 대부분이거든.”
“으음. 알았어요~.”
“그리고 커피나 콜라 같은 거 먹지 말고.”
세리가 손을 번쩍 든다.
“그건 목에 안 좋아서 안 먹어요.”
“착하다 우리 세리.”
세리가 혀를 빼꼼 내밀고 웃는다.
김애란 프로듀서는 다른 체리블라썸 멤버들에게 세리를 도와달라고 말한 뒤 내게도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정 팀장님이 제일 중요한 걸 해주셔야 해요.”
“제가요?”
내게도 미션이 있었다.
* * *
김애란 프로듀서는 조용히 날 주방으로 이끌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 세리의 공황장애는 홀로서기 때문이에요. 본인은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준비가 안 된 거죠. 그러니까 절대 세리를 혼자 두지 마세요.”
“그러면 숙소 옮기는 것도 보류해야겠군요.”
“예. 지금처럼 당분간은 2인 1실을 쓰는 게 나아요.”
체리블라썸은 연속된 성공으로 근처 최고급 빌라로 이사할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단대로라면 지금처럼 작은 숙소가 좋았다.
“아 그리고 정 팀장님은 가능한 매일 세리한테 연락해주세요. 쓸데없는 이야기라도 계속 관심 보여주시고요 잘한다 잘할 거다란 이야기는 반복해주세요. 아까 보니까 말하는 데 세리가 계속 정 팀장님을 쳐다보더라고요. 팀장님을 많이 의지하나 봐요.”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리의 모든 계획에 불확실성을 제거해주세요.”
“불확실성요?”
“네. 당분간 계획표대로 움직일 수 있게 스케줄을 잡아주세요. 갑자기 들어온 일정은 절대 받지 마시고요. 공황장애는 불안과 깊은 관련이 있거든요. 그러니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계획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아시겠죠?”
연예인에게 돌발 일정은 일상이나 다름없다.
점심을 먹던 도중 라디오 게스트가 펑크가 났다며 출연해 달라는 연락이 오기도 하고 출연 장소와 시간이 바뀌었다며 연락이 멋대로 오기도 한다.
그러나 세리가 공황장애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 있다면 일정 관리쯤이야.
“걱정하지 말고 맡겨 주십시오.”
지시를 끝낸 김애란이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한다.
“저도 정 팀장님 같은 분만 있으셨으면 예전에 좀 더 빨리 나았을 텐데요. 왜 그때 저한테 안 오셨어요. 네?”
난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번에는 꼭 일찍 찾아가겠습니다.”
다음번 회귀는 없겠지만 그래도 기분 좋으라고 대답했다.
“풉. 회귀라도 하시게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것 같다.
김애란 프로듀서가 키득거리며 웃는다.
“농담이에요 농담. 실제로 그때 아이돌로 데뷔했으면 폭망했을 걸요? 지나 보니 알겠더라고요.”
“대신 이번 생에서는 최고의 프로듀서가 될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김애란 프로듀서가 손을 내민다.
“잘 부탁드릴게요.”
난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활짝 웃음을 지었다.
* * *
다음 날.
김애란 프로듀서가 짐을 싸 들고 와서는 본격적으로 세리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수 2실은 체리블라썸의 스케줄도 본격적으로 조정에 들어갔다.
몇 개는 손해를 감수하고 통으로 날렸다.
꼭 나가야 하는 방송은 세리가 발목을 심하게 삐었다는 핑계를 대고 나머지 멤버들만 나가는 걸로 방송국 측과 합의를 보기도 했고.
그렇게 세리의 스케줄을 최대한 줄인 우린 마음을 졸이며 세리의 상태가 호전되기만 기다렸다.
그 사이 유진이와 미소는 <화란전>의 촬영 때문에 경주로 내려갔고 미소가 데려온 강아지 백설기와 고양이 인절미는 따듯한 집에서 잘 먹고 잘 놀며 살이 포동포동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덕배는 무연고자 신세에서 벗어나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한울이의 후견인은 당분간 내가 하기로 한 뒤 덕배가 자리를 잡는 대로 넘겨주기로 되었고.
그런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 이틀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다.
그런데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김애란 프로듀서에게서 까톡이 도착했다.
[김애란 프로듀서 : 정 팀장님. 지금 세리 녹음 테스트 들어갈 거예요. 바로 지하 녹음실로 와주세요.]
세리가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난 지 고작 3일.
그런데 벌써 세리가 나았는지 테스트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