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0화
420. 세리를 돕다 2
이동민 실장과 난 엘리베이터도 없는 오래된 건물로 들어갔다.
계단에 발을 딛자 우리보다 앞서 들어간 박형구가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고 있다.
그 순간 3층에 있는 예음 기획의 사무실에서 여자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한 명은 예음 기획의 가수 고유안이고 다른 한 명은 안예음 대표였다.
-그만 좀 하세요! 대표님. 이런다고 내 마음 안 바뀌어요.
-유안아 딱 한 달만. 응? 딱 한 달만 더 하면 내가 어떻게든 무릎 꿇고 빌어서라도 방송 따낼게. 곡도 얻어 오고. 응?
-됐어요. 대표님 요즘 사채도 빌리고 다니면서요? 어제 홍대에서 놀다가 TK 엔터 쪽에서 제안받았어요. 거기로 옮길 거니까 발목이나 잡지 말아요.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회사에 남은 가수라고는 너 하난데 네가 나가면 우린 어떻게 하라고? 그리고 아직 계약 기간도 남았잖니!
관리하는 가수가 두 명 정도 있는 줄 알았는데 그사이 한 명이 사라졌나 보다.
-그러면 뭐 소송이라도 하시던지! 하지만 그래봐야 대표님만 손핼 걸요? 그리고 그동안 제가 번 거 오늘 내로 정산해주세요.
그때 또 한 명의 젊은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올해 28살인 김애란 프로듀서의 목소리다.
-정산? 야! 너 1년간 나간 무대가 몇인데 정산을 해줘? 1년 동안 네 의상비 로드매니저 월급 부식비까지 하면 적자가 얼마인 줄 알아? 3천만 원이야! 3천!
-난 그런 거 모르니까 오늘 안까지 천만 원 넣어줘요. 그러면 소송까지는 안 갈게요.
-천만 원? 그게 누구 집 애 이름이야? 그리고 회사에 들어올 땐 뭐든 한다고 대표님 치맛자락 붙들고 애원하던 X이······ 뭐가 어쩌고 어째? 요즘 우리 회사 사정이 조금 힘들어졌다고 협박을 해?
사무실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난 후 비명이 울리고 있었다.
그때 앞서가던 박형구가 씩씩대며 말한다.
“XX. 이래서 내가 같이 들어가자니까. 카~악~ 퉤!”
박형구가 가래침을 옆으로 내뱉느라 고개를 돌린다.
그러다 이동민 실장과 내가 따라온다는 걸 확인했다.
“뭐여~? 니들은?”
난 박형구를 보며 답했다.
“예음 기획에 볼일이 있어서 온 길입니다.”
박형구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인상을 쓴다.
“오늘 여기 문 닫는 날이니까 그냥들 돌아가쇼. 안 그러면 험한 꼴 보게 될 텡께!”
우릴 위협한 박형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올라가 버렸다.
이동민 실장이 날 끌어당긴다.
“윤호야. 바로 경찰에 신고하자.”
“아뇨. 괜찮습니다.”
박형구 같은 타입은 말로 해서 안 통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경찰에다가 신고했다가는 풀려나기라도 하면 다음번에는 굴렁쇠 엔터에 찾아와서 깽판을 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끝을 봐야 했다.
* * *
“야! 고유안! XX 뭐 하느라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여?”
사무실에 박형구가 외치자 고유안이 고개를 돌린다.
“아 그래도 그동안 정이 있는데 이야기는 해봐야지.”
박형구가 코웃음을 치며 고유안의 앞으로 나선다.
그리고는 안예음 대표와 김애란 프로듀서에게 손가락질하며 고성을 내질렀다.
“XX. 당장 우리 유안이 정산서 내놔! 없으면 니들은 다 사기죄로 콩밥 먹을 줄 알어~!”
박형구는 매니저 경험이 있다 보니 소규모 기획사에는 정산표가 제대로 비치되지 않은 허점을 알고 있었다.
박형구의 고성을 들은 난 지체 없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어이~ 떡대.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이대로 돌아가지?”
액면가는 30대 중반이지만 실제로는 나보다 한 살 어린 26살의 박형구가 고개를 돌린다.
“이거 미치고 환장하겄네. 지금 나한테 뭐라고 X부린 거여?”
“들었잖아. 이대로 돌아가라고.”
그때였다.
“기생오래비 같은 새X가 뭐가 어쩌고 저쪄? 아까부터 넌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 됐다. 넌 오늘 ‘강한파의 불도저’ 맛을 좀 봐야 쓰겄다.”
박형구가 씩씩거리며 웃통을 벗어 던진다.
목덜미에는 금줄이 보이고 팔에는 마치 도화지가 된 것처럼 온갖 문신이 가득했다.
다만 내 기억 속 박형구는 족보도 없는 조폭 생활을 한 놈이었다.
그렇기에 경기도에서 유명했었던 강한파를 댄다는 건 일종의 허세였다.
더군다나 강한파는 강은기가 원래 몸을 담았다가 스스로 해체했던 곳의 조직 이름이었고.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웃는 모습을 본 박형구가 더욱 열을 내며 외친다.
“XX 놈이. 웃어? 웃겨? 넌 오늘 제삿날이여~ 이 새X야!”
난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어이~ 제삿밥 먹기 전에 전화 한 통만 하자.”
“XX 놈이. 어디서 수작질이야?”
“경찰한테 전화하는 거 아니니까 잠깐 기다려 봐.”
폰을 들어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를 보여주자 박형구가 주먹을 꼭 쥔다.
“아~ 그려. 그 통화가 이 세상 하직하기 전 마지막 통화라고 생각혀.”
누가 할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수신음 두 번이 울리자 상대가 전화를 받는다.
-예. 형님.
“어 수찬아. 한 가지만 묻자.”
-예. 말씀하십시오.
“너 혹시 박형구라고 아냐? 지가 강한파의 불도저라는데?”
-으흠~ 모르겠는데요?
이수찬도 모를 정도면 강한파를 사칭하는 게 맞았다.
그때 내 앞에선 박형구가 외친다.
“X벌~ 전화하는 놈은 또 누구여?”
그때 이수찬이 말한다.
-나? 지금은 없어졌지만······ 강한파 칼날이다. 그러는 넌 누군데?
그때였다.
박형구가 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떠듬떠듬 조심스레 묻는다.
“지 진짜 수찬······ 형님입니까?”
그때 이수찬의 싸늘한 목소리가 나온다.
-누구냐 너? 누군데 내 이름을 알아?
그 순간 박형구가 커다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한다.
“저 저······ 오산에 광칠이 형님 밑에 있던 박형구라고 합니다. 그 그때 별명은 벌구였습니다. 강한파는 아니었고······ 밑의 형제오산파에 몸담고 있었습니다.”
불도저는커녕 벌구라니.
별명대로 뻥쟁이가 따로 없다.
-광칠이 밑에 벌구라······ 오산 99관광 나이트 앞에 기도하던 놈이었던가. 기억나네. 그래. 무슨 일이야?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우리 형님이 이런 일로 전화하는 게 이번이 처음인데 똑바로 말해. 너 우리 형님한테 무슨 짓 한 거야?
박형구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한다.
“아 그 그게 저······.”
그때 이수찬이 박형구에게 말한다.
-어이~ 벌구. 너 죽으려고 날 받았냐? 그분이 누군지 알고 건드려?
“혹시 수찬 형님이 아시는 분입니까?”
-잘~ 알지. 은기 형님이랑 형제고 나한테는 하늘 같으신 형님이야 이 X새X야!
그때였다.
얼굴이 하얗게 탈색된 박형구가 눈치를 보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는다.
쿵.
“사 살려 주십시요! 형님!”
-웃기는 인간이네~ 야 너 지금 나한테 빌어서 어쩌려고? 천하의 은기 형님도 윤호 형님한테는 한 수 접는데 어쩌자고 그런 양반을 건드렸냐? 어?
박형구의 이마에선 땀이 뚝뚝 흘러내린다.
전화로 귀찮은 일을 피해 가려고 했는데 일이 더 이상하게 꼬이는 거 같다.
“얀마. 적당히 해. 얘 지금 육수를 줄줄 흘리고 있다.”
박형구의 온몸에선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린다.
-알겠습니다. 형님. 아 참. 그리고 그놈 실은 강한파도 아니고 그 밑에 지들끼리 형제오산파라고 부르는 양아칩니다. 불쌍하니까 죽이진 마십쇼.
“안 죽여! 내가 왜 죽여?”
이수찬이 키득거리며 답한다.
-형님 손에 걸리면······.
달칵.
“도와달라고 연락했더니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있어.”
전화를 끊고 나자 박형구가 손을 맞대고 싹싹 빌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형님.”
커다란 덩치의 박형구가 설설 기자 고유안이 빽하고 소리친다.
“오 오빠. 지금 뭐해? 대체 이 남자가 뭔데?”
박형구가 버럭 화를 낸다.
“XX. 눈치가 없으면 입이라도 닥쳐!”
“왜 왜 소리를 질러?”
이수찬 덕에 일이 편하게 되었다.
난 박형구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일어서.”
“예? 괘 괜찮습니다. 이게 편합니다.”
“닥치고 일어서지?”
박형구가 벌떡 일어난다.
“예!”
“정산 내역서가 필요하면 조금 기다려. 우리가 이 회사 인수하고 나면 정리하는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
주먹을 살포시 쥐며 말하자 박형구가 딱 잘라 말한다.
“제 여자친구 아닙니다.”
“응?”
“안 그래도 질렸던 참입니다. 헤어질 때 됐죠. 전 모르는 사람입니다.”
고유안이 입을 쩍하고 벌린다.
“오 오빠······ 지 지금 무슨······.”
박형구는 고유안을 무시해버리고 두 손으로 배를 문질러댄다.
“형님. 그러면 전 가봐도 될까요? 갑자기 화장실이 너무 급합니다.”
너무 야비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때릴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하아~ 그래. 얼른 꺼져.”
“감사합니다. 형님!”
박형구는 꾸벅 인사를 한 뒤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쿵쿵쿵.
커다란 덩치가 계단을 두세 걸음씩 뛰어서 내려가는 바람에 건물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홀로 남은 고유안의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자신의 편이 사라지자 고유안은 마음 약한 안예음 대표를 쳐다본다.
하지만 김애란 프로듀서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뭘 쳐다봐? 그리고 너. 고소장 받을 준비나 하고 있어!”
그 순간 고유안은 내 눈치를 힐끔힐끔보다 문 쪽으로 도망가 버렸다.
순간 긴장이 풀린 안예음 대표와 김애란 프로듀서가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 * *
예음 기획의 대표실.
이동민 실장이 사정을 잘 설명해준 덕에 내가 폭력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며 겨우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올해 50살의 나이로 단발머리를 한 안예음 대표가 한숨을 내쉰다.
“난 또~ 우리 정 팀장님이 그쪽 세계 사람인 줄 알았어요.”
분홍 머리카락으로 염색하고 목이 약간 늘어진 티셔츠에 검은 뿔테 안경 일주일은 밤샌 듯한 퀭한 눈의 김애란 프로듀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요.”
안예음 대표가 피식 웃으며 대꾸한다.
“근데 생각해 보면 이렇게 잘생긴 조폭은 본 적이 없긴 했어. 그지?”
순간 이동민 실장이 웃으며 말한다.
“선배. 우리 정 팀장 그만 놀리고 회사 인수 이야기나 하죠.”
안예음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너도 봤다시피 조금 전 마지막 가수 한 명이 나가서 남은 게 없어. 회사를 인수하기보다는 폐업하고 우리 둘을 직원으로 영입하는 게 굴렁쇠한테는 낫지 않아?”
이동민 실장이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 회사 빚. 선배가 다 갚아야 하잖아요. 강 대표님이 예우 갖춰서 모시라고 했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강감찬 대표가 여러 번 당부한 내용이다.
안예음 대표의 작곡과 프로듀싱 실력은 정평이 난데다 글로벌 아이돌 프로젝트도 진행할 소중한 사람이니 잘 모셔오라고.
안예음 대표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하아~ 그렇게까지 배려해주진 않으셔도 되는데······.”
“그러니까 그냥 모른 척 받아들여요. 회사 빚. 선배 혼자 갚으면 답 없어요.”
“그치만······ 사람이 염치가 있지.”
“선배. 잠깐만요.”
이동민 실장이 그럴 줄 알았다며 강감찬 대표에게 전화를 건다.
스피커폰으로 낮은 강감찬 대표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안 대표님. 우리 이 실장 혼자서는 글로벌 아이돌 프로젝트가 부담입니다. 먼저 경험을 해 보신 안 대표님이 좀 도와주십시오.
“감사하긴 한데······ 저도 실패해 본 경험뿐이잖아요.”
-저희는 그것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때 경리직원이 사기만 안 쳤어도 안 대표님의 ‘트로이카’는 더 컸을 겁니다.
걸그룹 ‘트로이카’는 10년 전 한국의 아리 중국의 시리 일본의 유리 세 사람으로 이뤄진 그룹으로서 1년 동안 나름 괜찮은 반응을 받으며 활동했었다.
그런데 안예음 대표가 믿고 맡겼던 경리직원이 회삿돈을 횡령해 버리는 바람에 다음 앨범 제작비와 홍보비가 없어 활동을 접어버린 비운의 걸그룹이다.
그 시절을 떠올린 안예음 대표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하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잘 좀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그 순간 안예음 대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뚝뚝.
20년의 세월.
온 힘을 쏟은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것에 관한 아쉬움과 강감찬 대표의 진심 어린 위로 덕분이었다.
* * *
안예음 대표는 이사급 대우를 받는 프로듀서 겸 작곡가로 영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애란 프로듀서는 정 팀 소속으로 팀장급 직책을 맡게 되었고.
그래서 난 숨기지 않고 세리의 사정부터 털어놓았다.
“세리에게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공황장애요?”
김애란 프로듀서는 대번에 눈빛이 바뀐다.
가수에게 공황장애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녀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예. 오늘 처음 솔로곡을 부르다가 생겼습니다. 여기 영상 자료입니다.”
김애란 프로듀서에게 폰으로 녹화한 영상을 내밀었다.
김애란 프로듀서는 세리가 연습하는 영상을 집중해서 돌려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고작 30초짜리 영상이었지만 그녀는 수도 없이 살펴본 다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세리를 도울 방법을 찾았다.
역시 이곳에 온 게 정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