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화
42. 명품 or 병맛 3
박불출 감독은 유진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신이 나서 오늘 촬영에 대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유진씨. 오늘 콘티 대로만 해주시면 진짜 대박입니다. 저 한번 믿어보세요. 저 이 판에서는 꽤 유명합니다?”
유진이가 생글대며 웃는다.
“안 그래도 저희 매니저 오빠가 감독님이 천재라고 칭찬이 자자하셨어요.”
거짓말이다.
애당초 나 역시 현장에 와서야 감독이 누군지를 알았으니까.
하지만 유진이는 ‘영업용 미소’를 띤 채 세상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덕분에 박불출 감독이 내게도 악수를 청했다.
“아이고 이런 감사할 때가. 저 한번 믿어보십시오. 아주 제대로(?) 결과물 뽑아내 드리겠습니다.”
박불출 감독이 눈빛을 번뜩인다.
순간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광고계 천재 박불출의 또 다른 별명은 광고계의 이단아. 광고계의 미치광이였으니까.
유명하다는 말만 들었지 촬영하는 걸 직접 본 적은 없었는데······.
그때 조감독 한 명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감독님. 현장 체크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박불출 감독은 신이 나서 콘티 설명을 하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하하하. 그래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금방 갈 테니까.”
“아뇨. 지금 기다릴 상황이 아닙니다.”
뒤를 돌아보자 스태프들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박불출 감독의 확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본 세팅은 마쳤지만 최종 점검만큼은 직접 하는 게 박불출 감독의 스타일인 탓이다.
“알았어.”
박불출 감독은 있다가 보자며 현장 체크를 위해 사라졌다.
박불출 감독이 세세하게 현장을 체크하는 동안 스태프들이 다가와 유진이의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눈화장을 짙게 한 다음 뿔을 달고 붉은 로브를 입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0분.
후다닥 여왕의 메이크업과 코스튬을 마친 유진이가 한 손에 지팡이를 잡고서 웃음을 지었다.
“나 어때요?”
“예뻐. 예뻐.”
“그쵸? 아 근데 여기 버거가 있네? 맛있겠다.”
다이어트를 계속 한 탓에 유진이는 촬영 소품으로 ‘트러플몬스터 버거’를 보고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모형 버거를 보고 정신을 잃다니.
배가 많이 고픈가 보다.
“촬영 중에 햄버거를 먹는 장면이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
유진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진짜죠? 아싸! 저 오늘 벨트 풀 거니까 말리지 마세요!”
오늘 촬영 현장에서만큼은 햄버거를 마음껏 먹어도 된다 약속했더니 유진이의 텐션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다.
촬영 준비가 모두 끝나자 스태프 한 명이 촬영 시작을 알렸다.
“유진 씨. 촬영 들어갈게요.”
“네.”
유진이가 버거 모양이 새겨진 왕관과 지팡이를 들고 세트장에 있는 붉은 옥좌로 향했다.
유진이가 왼손을 들어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주자 박불출 감독이 확성기를 잡고 외쳤다.
“자. 다들 스탠 바이들 하시고~.”
“예. 감독님.”
스태프들이 준비 완료되었다는 신호를 하자 박불출 감독이 촬영 시작을 알렸다.
“자. 촬영 갑니다. 레디~ 액션!”
큐 사인이 들어가자 세트장에 BGM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두두둥.
촬영장의 우퍼로 낮은 북소리가 울리자 바닥에선 드라이아이스의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괴한 소리의 향연.
끼오오오!
캬아아아!
촬영 시작부터 혼돈 그 자체다.
하지만 유진이는 한술 더 떠 양손을 치켜들고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박불출 감독은 유진이의 연기에 들뜬 표정을 지으며 감탄하다 오른손을 휘휘 돌렸다.
신호를 본 유진이는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동시에 배경음악으로 쓰이던 낮은 북소리가 멈춰 들었다.
그리고 유진이의 대사가 시작되었다.
『오호호홋. 나 버거퀸. 드디어 신이 내린 ‘트러플몬스터 버거’를 손에 넣었노라!』
검은 스타킹을 신고 다리를 꼰 유진이가 투명 아크릴 박스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때였다.
“카트~! 좋았어요. 자 바로 두 번째 씬 준비해 주세요.”
단 한 번.
슛에 들어가자마자 오케이 사인을 내리는 박불출이다.
“예? 바로요? 리테이크도 없이요?”
“그럼요. 두 번 찍을 필요 없으니까 바로 갈게요.”
“예 아 알겠습니다.”
유진이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박불출 감독의 싸인에 맞춰 다음 컷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광고 CF는 해외 로케가 아닌 경우 하루 만에 찍는 경우가 많다지만 이건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
“자. 지미집은 유진 씨 오른쪽 45도 위에서 하이앵글로 잡고! 3번 카메라는 바스트에 집중! 1번 카메라는 유진 씨 왼쪽 얼굴! 2번 카메라는 유진 씨 오른쪽 아래서 로우앵글로! 그리고 제작팀은 그린 스크린 울어서 명암 생기는지 확실히들 체크하세요. 소품팀 유진 씨 의상도 한번 체크하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신들린 박불출 감독의 지휘에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커트. 퍼펙트~. 두 번째 컷도 아주 좋아요! 바로 다음으로 갑니다. 레디~ 액션! 카트~! 좋았어요. 예 예. 유진씨 최곱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한 번 만에 오케이다.
박불출 감독은 유진이가 미처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다음 촬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한마디로 미친 속도였다.
* * *
여왕 씬을 모두 끝낸 유진이가 메이크업을 지우고 곁으로 왔다.
그런데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한가득이다.
“오빠. 광고는 원래 이렇게 찍어요?”
“아 아마도?”
몇 번이고 되묻기에 괜찮다고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나도 걱정이다.
이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 촬영은 회귀 전에도 본 적이 없으니까.
도대체 어떤 광고를 찍으려고 하는 거지?
“소품팀. 어서 유진 씨 복장 갈아 입히세요.”
박불출 감독의 지시에 최중구 AD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저기 유진 씨. 저희가 인형 탈을 최대한 많이 준비했거든요? 가능하면 CG 없이 해주셨으면 하는데······”
난색을 표하는 조연출의 말에 난 준비된 의상을 확인했다.
원래 하기로 한 것보다 두 배 정도 다양한 인형 탈을 구해 놓았다.
곰 인형.
사자 인형.
닭 인형.
꿈틀이 애벌레 인형.
이러면 CG로 할 작업이 줄어들게 된다.
빠듯한 제작비를 아끼려는 데 이 정도는 협조해 줘야겠지?
광고 제작 현장이 영세한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유진아. 수고스럽겠지만 그렇게 하자. 광고비 받은 값은 해야지.”
“흠. 알았어요.”
군말 없이 내 의견에 따른 유진이 덕에 큰 트러블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회귀 전 내가 담당했던 배우들에 비하면 유진이는 천사다.
축구화 광고를 찍기 위해 뛰는 장면을 요구하자 땀 흘리기 싫다며 CG로 달리는 장면을 만들어 넣으라는 억지를 쓰는 배우도 있었으니까.
유진이가 흔쾌히 승낙하자 최중구 AD의 얼굴이 환하게 변한다.
“유진 씨. 협조 고마워요. 파이팅!”
“네. 조 감독님. 파이팅!”
유진이는 최대한 힘차게 파이팅을 외쳤지만 불안한 기색이다.
이젠 인간이 아닌 동물 영역의 연기로 돌입해야 하니까.
“유진 씨. 촬영 순서가 바뀌어서 곰 퀸부터 찍을 거예요.”
버거퀸 광고다 보니 모든 캐릭터들의 이름 뒤에는 퀸이 붙는다.
“곰 퀸이요? 토끼 퀸이 아니라요?”
“예. 곰 퀸부터요. 지금 바로 가셔야 하는데.”
“아 네.”
잠시 후.
촬영장 한구석에 임시로 설치한 탈의실에서 인형 탈을 뒤집어쓴 유진이가 나타났다.
“풉.”
웃으면 안 되는데.
쳐다만 봐도 우스웠다.
두툼한 곰 인형은 얼굴만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곳으로 유진이의 새하얀 얼굴이 뎅그러니 나와 있다.
버커퀸의 부하 중 하나인 곰 퀸이 용사 퀸에게 맞았다는 설정이라 왼쪽 눈에 푸른 멍 분장이 되어 있었고.
커다란 곰 탈 옷을 입은 유진이는 뒤뚱대며 세트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박불출 감독이 환호하며 외쳤다.
“자. 유진 씨. 한 번에 갑시다. 인간이나 곰이나 거기서 거기예요. 자. 두 손 높이 들고 외쳐요! 고~옴!”
커다란 곰 탈 인형의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유진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쿠오오오! 곰!』
유진이가 육성으로 내뿜은 포효가 세트장을 울리는 순간.
스태프들은 웃음을 막기 위해 입을 가리고 숨죽여 웃느라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사람이 내는 곰 소리가 제대로 된 소리일 리 없었으니까.
그때부터 유진이는 혼이 담긴 곰 연기를 이어갔다.
날카로운 발톱을 크로스를 해대고 뒤뚱대면서도 세트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중간중간 파워터프걸의 포즈를 따라 했지만 곰탈 인형 때문에 전혀 다른 모습이 나왔다.
한 마디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병맛 광고는 병맛일수록 흥한다.
낙장불입이다.
“유진아. 힘······내.”
들릴 듯 말듯 조용한 목소리로 열연을 펼치는 유진이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박불출 감독은 광기 어린 지시를 이어갔다.
“이번에는 거지 퀸! 바닥에 누워서 버거 하나만 주세요. 최대한 불쌍하게!”
“토끼 퀸은 간신입니다! 밉살스럽게! 버거를 내놓지 않으면 경을 칠 것이야! 그렇지! 아주 좋습니다!”
박불출 감독은 미친 사람처럼 촬영을 이어갔다.
칭찬에 휘말려 인형 탈을 입고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보이던 유진이가 기진맥진한 표정을 지은 채 대기 의자로 돌아왔다.
의자에 축 늘어진 유진이가 쌕쌕거리기 시작했다.
“헉헉헉. 오 오빠. 물이요.”
조금 전까지 돈 버는 데 쉬운 일이 어디 있냐며 기특한 태도를 보이더니 지금은 혼이 육체를 이탈한 것 같다.
“오빠. 저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닐까요?”
“에이 설마. 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죽어.”
유진이가 살짝 노려본다.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오는 것 같다.
“오빠. 지금 오빠가 하는 거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 거죠? 그쵸?”
“그럴 리가 있어?”
조금 뜨끔 하긴 했지만 얼굴에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때였다.
“자.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햄버거를 먹는 씬으로 바로 갈 거니까 유진 씨. 파이팅!”
박불출 감독의 말에 처음으로 유진이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 진짜요? 감독님? 벌써 햄버거 먹는 씬이에요?”
너무도 빠른 촬영에 유진이는 현재 자신이 얼마큼 촬영을 마쳤는지 파악도 못 하고 있었다.
“물론이죠 이제 햄버거 맛있게 베어 먹으면 촬영 끝! 저기 보세요! 갓 데운 버거퀸이 있잖아요!”
“우와!”
유진이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입을 쫙 벌렸다.
버거퀸에서 만들어 온 세트장 한편의 테이블에 산처럼 쌓여 있었으니까.
‘트러플몬스터 버거’가 뿜어내는 향기에 축 늘어져 있던 유진이가 지친 몸을 일으켰다.
먹고 싶다.
먹고 말 거야.
다이어트 중인 건 잊고 정신 줄을 놓고 먹을 거야.
그런 눈빛이다.
용사 퀸으로 분장을 마친 유진이는 테이블에 앉아 보상으로 ‘트러플몬스터 버거’를 베어 먹는 씬을 찍었다.
냠!
두툼한 햄버거를 한입 가득!
“자 이번에는 버거는 먹지 말고 군침만 흘려주시고요.”
“자 그리고 작게 한입만이요.”
“커엇! 완벽합니다 유진씨. 연기자라 그런지 표현력이 끝내주시네요. 먹방 찍으셔도 되겠어요.”
당황한 유진이는 씹던 햄버거도 삼키지 않고 말했다.
“예? 예? 제 생각에는 좀 별로인 것 같은데요?”
“별로라뇨? 완벽했어요. 유진 씨. 퍼펙트!”
고작 세 번 만에 오케이 싸인이 떨어졌다.
테이블에 한가득 쌓인 햄버거를 보는 유진이의 동공이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럴 순 없다는 애타는 심정을 잔뜩 담아 유진이가 말했다.
“가 감독님! 한 번만 더 해보는 게 어떨까요? 저 진짜 제대로 맛있게 먹을 수 있거든요!”
“에이 여배우에게 칼로리 높은 음식을 많이 먹일 수야 있나. 나 그 정도로 막장 감독 아닙니다. 자자. 오늘 촬영 끝! 여기 정리하세요. 소품팀 여기 테이블 다 치워 주세요.”
지시를 내린 박불출 감독 날 돌아보며 살짝 윙크하고 있었다.
아까 몰래 찾아가 먹는 씬은 최소한도로 해달라고 부탁한 덕분이다.
스태프들이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유진이가 울상을 하고 햄버거 앞을 떠났다.
입가에 묻은 소스를 핥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더는 탐을 낼 수 없었다.
온종일 구른 탓에 기운이 빠져버린 유진이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대기 의자에 앉았다.
털썩.
“한 입씩 세 번. 햄버거······ 반 개도 못 먹었어요······.”
혼잣말이 끝난 유진이가 날 쳐다보며 슬픔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유진아. 있잖아······”
그런데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유진이가 힘없이 답했다.
“배가······ 고파요.”
“응. 그럴 줄 알고 샐러드 준비해 뒀는데 그거라도 먹을래?”
순간 유진이의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곤 유진이는 피식피식 웃더니 결국엔 정신이 나가 버렸다.
“크아아앙! 곰! 햄버거! 고기를 달라!”
“아악. 무 물지 마! 진짜 물었어? 야! 아아~악! 놔~ 놔!”
촬영은 성공리에 끝났지만 내 팔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다.
덕분에 유진이의 이빨 개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